2016년 7월호

김충립 前 수경사 보안반장 육필수기 음모와 암투

전두환〈보안사령관〉, ‘보안사령관 교체’ 정보에 정승화〈계엄사령관〉 전격 체포

12·12쿠데타 전말

  • 김충립 | 前 수도경비사령부 보안반장 kimchoonglib@naver.com

    입력2016-07-12 1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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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안사 명예회복 나선 전두환, “정병주 감시 잘해”
    • ‘김재규 비호’ 정승화, 全과 일촉즉발
    • 정승화 “조기 수사종결” vs 이학봉 “정승화 연행”
    • 특전사령관실 수백 발 총격전, 김오랑만 허망하게…
    1979년 3월 제1사단장 전두환 소장이 보안사령관으로 전격 등용되자 군은 물론, 청와대와 정치권에도 충격적인 인사로 비쳤다.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정규 육사 출신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긴 하지만, 사단장 경력 1년 3개월 만에 중장이 지휘하는 군단장급 직위에 보직된 데다 보안사령관의 실질적 권력 서열이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이어 4위에 해당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보안사령부의 위상과 파워는 최악이었다. 전임 진종채 사령관은 ‘선비형 장군’으로 1975년부터 4년간 조용히 군 보안업무에 주력했고, 보안사령부의 파워나 권위, 명예를 높이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전두환의 5인방

    권력기관의 장이 대통령과 자주 만나 특별한 임무를 받곤 하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차지철은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에게 직접 하던 정보 보고를 자신에게 하도록 했다. 보안사령관에게 대통령 대면 기회를 주지 않으니 보안사 파워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977년 10월 20사단의 대대장이 월북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김재규는 보안사령관에게 일반 정보업무를 직접 맡지 못하게 압력을 넣으면서 중정의 통제를 받게 했다. 이 때문에 보안사령관은 경호실장과 중정부장 양쪽으로부터 견제를 받는 처지가 됐다. 결국 보안사는 일반 정보업무를 취급하던 정보처를 폐지하고 방산처로 이름을 바꿔 민간인 대상 정보 수집 활동을 전면 금지했다. 민간인은 방위산업 관련 인사만 접촉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악조건에서 등용된 전두환은 우선 보안부대에 우수 인재를 보강하면서 하나회 소속 육사 16~18기 중심으로 참모진을 꾸렸다. 보안사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허화평 대령(17기)을 비서실장에, 같은 기수 허삼수 대령을 인사처장에, 대공 수사업무에 정통한 이학봉 대령(18기)을 대공처장에 기용해 ‘3인방’을 형성하고, 여기에 오랜 심복인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 장세동 대령(16기)과 33대대장 김진영 대령(17기)을 합해 ‘5인방’을 핵심으로 자기 세력을 확고히 구축했다.

    전두환은 보안사령부의 권위와 파워 형성에 신경을 쓰면서 참모들에게는 계엄 선포 시 보안사가 어떻게 정국을 바로잡고 수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시국 수습방안 연구’를 시켰다. 그러면서 은밀하게 박 대통령을 대면할 준비를 하면서 대통령에게 김재규와 차지철을 그대로 두면 안 된다는 건의를 하려고 마음먹었다.

    1979년 4월 필자는 전두환을 직접 만나 지시를 받았다. 허삼수가 보안사 인사처장으로 부임 후 인사명령이 있었는데, 이때 필자는 ‘30사단 보안부대 운영과장을 마치고 503 대구 보안부대로 부임하라’는 인사명령지를 받았다. 기왕이면 고향과 가까운 경북 안동 36예비사단 보안부대장으로 가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고 사령부를 막 나오려는데 전 사령관이 찾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인사명령 보고를 했더니 그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김 소령, 이번에 대구로 가지 말고 특전사령부 보안반장으로 가면 좋겠어. 중령 진급 예정자 중 여러 명을 검토해봤는데 김 소령이 제일 적합한 것 같아 그러는 거야. 특전사 반장은 매우 중요한 자리야. 내가 그 부대 출신이니 내 체면을 봐서라도 특전사 반장 임무를 잘 해줘야 해. 그리고 중요한 임무가 있어.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잘 지켜봐야 해. 특전사령관은 요직이야. 그런데 매일 테니스나 치고, 부하들과 술이나 먹고, 훈시는 5분도 못할 만큼 소신도 철학도 없는 지휘관은 잘 살펴봐야 해.”

    전두환은 참모들에게 검토시킨 ‘계엄 시 보안사의 역할에 관한 연구’ 결과를 적절하게 활용했다. 1979년 10월 18일 부산에서 대규모 시위(부마항쟁)가 발생하자 부산 보안부대에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를 만들었고, 이어 10·26사건 직후에도 합수부를 설치했으며, 1980년 5월 27일 광주 도청 탈환 직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출범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전두환이 박 대통령을 면담해 차지철, 김재규에 대해 건의하려던 날짜는 10·26 직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확인되진 않은 사실이지만, 필자는 전두환이 충분히 그런 건의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고 본다.


    육군참모총장 vs 보안사령관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경 총격 현장에 있던 비서실장 김계원은 사건 발생 즉시 청와대 경호실에 비상을 걸고 경호실 병력을 현장에 출동시켜 대통령과 차지철의 신병을 확보해야 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을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옮긴 뒤 비서실에 도착한 김계원은 8시 40분 경호실 차장 이재전에게 “경거망동하지 말고 병력을 출동시키지 말라. 내가 관련돼 있으니 더 알려고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는 범인 김재규 체포를 방해한 죄목으로 사건 발생 3일 후인 10월 29일 구속됐다. 12월 20일 계엄 보통군법회의에서 김재규 등 7명과 함께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 중요임무 종사 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며칠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1982년 형집행 정지로 석방됐다.

    사건 당일 김재규의 요청으로 현장에 와 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사건 직후 김재규와 함께 육군본부 B-2 벙커로 향했다. 그는 김재규가 요청한 대로 계엄사령관직을 수행하면서 8시 5분 이재전 경호실 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병력 출동을 금지시키는 ‘불법 명령’을 내렸다. 8시 10분에는 수경사령관 전성각 소장에게 전화해 “앞으로는 참모총장의 명령만 받아라. 지금 즉시 출동 준비를 하라. 사령관은 즉시 B-2 벙커로 오라”고 했다. 또한 노재현 국방장관의 지시로 김재규를 체포한 전두환에겐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고 지시했다.

    정 총장은 전두환이 김재규를 체포해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구속할 무렵 최규하 국무총리가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계엄사령관에 임명됐고, 동시에 전두환은 정승화에 의해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전두환은 정승화를 체포해야 한다고 직감했지만, 정승화가 직속상관이 되면서 이를 실행하기 어렵게 됐다. 갈등의 씨앗은 그렇게 싹을 틔웠다.   

    합수부가 김계원을 구속한 10월 28일 정승화는 전두환 합수부장에게 “수사관을 총장실로 보내라”고 지시했고, 10월 29일 오후 8시부터 자정까지 총장실에서 이학봉 합수부 수사국장 등으로부터 조사를받았다. 이후 10월 31일과 11월 1일 등 모두 3차례 조사 받았다. 그는 조사를 받던 중 수시로 군 수뇌부 인사를 서울로 호출한 뒤 자신이 10·26에 연루되지 않았음을 강조했고, 전두환에게 “수사를 빨리 종결하라”며 채근했다.



    죽느냐, 죽이느냐

    그러나 이학봉은 11월 2일 전두환에게 정승화 연행 조사를 건의했고, 전두환은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이를 건의했으나 노 장관은 “시국이 불안해진다”는 이유로 수락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정승화가 노재현과 함께 과도정부 수립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행보를 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필자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11월 초 정승화는 최규하 총리를 과도정부 대통령으로 모시자고 노재현과 합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공화당에서 김종필 총재를 과도정부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공화당 사무총장 길전식과 정책의장 장경순에게 압력을 넣어 김종필의 대통령 출마를 막았다는 얘기도 있었다. 결국 최규하는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돼 12월 21일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따라서 전두환이 최 총리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일각의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과도정부 수립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진 정승화는 그 기세를 몰아 김재규의 사형판결을 면하게 하려고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신임 수경사령관과 자주 접촉하는 정황이 포착됐다. 김재춘 전 중정부장이 육사 5기 동기생인 정승화를 만나 전두환과 노태우 등이 1963년 쿠데타를 주도한 사건을 언급하면서 이들을 조심하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합동수사본부가 자신을 겨냥하고 있음을 눈치챈 정승화가 12월 9일 노재현과 골프를 치면서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서 다른 보직으로 전출시키기로 합의했다는 정보가 보안사령부에 포착됐다.

    죽느냐, 죽이느냐. 결전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이에 전두환은 이학봉에게 12월 12일에 정승화를 연행하라고 명령했고, 정승화 체포 시각에 맞춰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승낙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최 대통령은 국방장관(노재현)의 결재가 있어야 승낙하겠다며 버텼다. 한참 후 노재현이 나타난 뒤에야 장관과 대통령의 결재를 받았다. 정승화를 연행한지 8시간이 지나 대통령 사후 결재를 받은 것이다.

    12월 12일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서울 신촌 모처에 만찬 초대를 받았다. 필자는 정 사령관이 수경사령부 제5헌병 대대장 조홍 대령의 장군 진급 축하 만찬에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함께 초대받아 참석한다는 것을 보고하고 퇴근했다.

    그런데 8시경 비상령이 발동됐다. 특전사 보안반으로 달려가니 정승화 체포와 정병주의 반발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8시 30분경 하달된 지시는, 신촌에서 식사 중이던 정병주가 특전사로 갈 예정이니 도착하면 보안사로 모셔 오라는 것이었다.   

    9시경 특전사에 도착한 정병주는 약간의 취기가 있었고 매우 흥분돼 있었다. 도착 일성은 제1여단장 박희도 장군과 제3여단장 최세창 장군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그 무렵 두 여단장은 30대대장실에 가 있었기에 연결되지 않았다. 그러자 정병주는 부사령관 이순길 장군과 인사처장 강리건 대령, 헌병대장 등 3명에게 “1여단으로 가서 출동을 저지하라”고 지시했다. 1여단의 무장을 해제하고 출동을 저지할 것, 1여단에 배속된 병력 수송용 차량을 경기 부천의 9여단으로 보내라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9여단장 윤흥기 장군에게는 즉시 출동해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1여단의 임무를 9여단에 맡기고 1여단의 발을 묶어놓으라는 얘기였다.


    “정병주를 체포하라”

    필자는 특전사 상황을 보안사 상황실에 보고하는 한편, 작전참모 신우식 대령과 함께 정병주에게 “보안사령관과 대화를 나누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다. 그러자 정병주는 화를 내면서 “당신들, 나를 어떻게 하려고 하는 거지?”라며 몰아붙였다. 필자는 “아무 일도 하는 것 없습니다. 단지 보안사령관으로부터 모셔 오라는 지시를 받았을 뿐입니다”라고 답했다. 그 무렵 109 보안부대장 김정룡 대령이 정병주와 독대하고 보안사령관에게 가자는 제의를 했으나 정병주는 거절했다.   

    화가 치밀어 오른 정병주는 1여단 부여단장 김기룡 대령에게 5, 6차례 전화를 걸어 1여단 차량을 9여단으로 보내라고 했다. 김 대령은 정병주에게 “1여단은 수경사에 작전 배속된 부대라 특전사령관의 지시를 받을 수 없다. 더 이상 부당한 지시를 하지 말라”며 맞섰고, 정병주는 부하의 합법적인 항변에 아무 말 못하고 전화기를 던져버렸다.

    이 일화는 군에서 작전 배속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국회 5공 청문회 때 많은 국회의원이 작전 배속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고, 특히 5·18 당시 작전 배속에 따른 군 지휘체제를 이해하지 못해 여러 오해를 일으킨 바 있다.

    한편 윤흥기 9여단장은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하라는 정병주의 명령에 병력을 이끌고 부평을 출발해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필자는 이 상황을 사령부에 보고하는 한편 9여단 보안반장에게 전화를 걸어 “지프로 막든지 길에 드러눕든지 출동을 막아야 한다”는 통보를  전했다. 1여단과 9여단이 충돌할지 모른다고 우려하던 중 9여단 보안반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출동한 부대의 선두로 달려가 9여단장과 보안사령관의 통화를 연결했고, 이어 9여단이 원대 복귀했다고 전했다.  

    오후 11시가 되자 1여단과 3여단은 보안사령관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정병주를 따르는 예하 여단장은 없었다. 정병주는 자신과 자주 통화하던 참모총장(정승화)과 수경사령관(장태완)이 체포됐다는 소식에 사기가 떨어진 듯 보였다. 특전사령부에는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잠시 후 30대대에서 1여단으로 복귀한 박희도 여단장은 병력을 이끌고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하기 위해 출동했고, 3여단장 최세창은 오전 0시 5분경 특전사령관실에 도착했다. 최세창은 “정병주를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은 터였다. 최세창은 지금이라도 보안사령관을 만나러 가자며 마지막으로 권고했으나 정병주는 거절했다. 최세창이 사령관을 면담하고 나올 때 필자가 사령부 건물 현관에서 “설득이 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고개를 저으며 무거운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령관실 총격전

    0시 5분 정병주는 보안사에서 자신을 체포하러 온다며 사령부 5분 대기조 출동을 명했다. 0시 10분 필자가 특전사령관 비서실에 들어가니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권총 탄창에 실탄 7발을 장전하고 있었다. 내가 “김 소령, 오늘 같은 날엔 권총을 차고 있으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어요. 나 봐요, 오늘은 총을 안 찼잖아요. 그리고 실탄 7발로 어떻게 한다는 거요? 실탄 장전은 안 하는 게 좋겠소”라고 조언했다.

    그러자 김 소령은 “상황이 아주 급박합니다. 5분 대기 소대 출동 지시를 했고 보안사에서 곧 밀어닥칠 겁니다” 하고는 황급히 사령관 집무실로 들어간 뒤 안쪽에서 문을 잠갔다. 그것이 그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필자가 비서실을 나오는 순간, 제3공수여단 박종규 중령이 10여 명의 장병을 이끌고 들이닥쳤다. 비서실엔 아무도 없었다. 박 중령이 사령관실 문을 열려고 했으나 안에서 잠겨 있었다. 박 중령이 “출입문 손잡이에 사격하라”고 지시하자 3명의 장병이 M16 소총으로 출입문을 향해 수십 발을 발사했다.

    그때 앞쪽에 있던 3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김오랑 소령이 문 안에서 권총을 쏜 것이다. 필자는 뒤로 약간 물러나 있었는데, 필자의 무릎 근처를 스쳐간 탄알 한 발이 벽에 맞으면서 시멘트가 깨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순간,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특전사 5분 대기 소대가 현장에 도착하면 보안부대원인 필자와 부대원들이 오해를 받아 불상사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4명의 부대원을 데리고 2층 사무실을 빠져나왔고, 그들을 지프 주차장에 피신토록 했다. 필자는 2층을 훤히 볼 수 있는 나무에 올라 정병주의 연행 장면과 김오랑 및 부상을 당한 3여단 장병들이 현장을 벗어나는 상황을 지켜봤다.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

    그 후 2층 현장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보안반 전화기는 불이 났다. 나무에서 내려와 박기정 상사를 앞세우고 특전사 옆문에 다다르자 5분 대기조 소속 병사가 우리 일행에게 “손들어!”를 외쳤다. 다급해진 박 상사가 “나, 보안반 박 상사야!” 하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필자가 “작전참모 신우식 대령에게 보안반원들을 건물 안에 들여보내도 되는지 확인해보고  문을 열어달라”고 했더니 잠시 후 한 병사가 문을 열어줘 보안반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혈압이 높았던 박 상사는 자신의 주먹으로 얼굴을 때려 코피를 냈다. 상황은 그만큼 긴박했다. 보안사는 “사령관실 현장을 수습하고 특전사 병력 출입을 통제하라”고 지시했다.

    현장(사령관 집무실)을 확인해보니 정병주도 2발을 발사했다. 자신도 왼팔에 2발의 총탄을 맞았다. 사령관 내실 입구에 쓰러져 피를 쏟는 김오랑을 부둥켜안고 있다가 총에 맞았을 것으로 추정됐다. 현장에 들어서니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수백 발의 탄흔으로 사무실은 벌집이 돼 있었고, 총알 자국이 있는 M16 3정이 사무실 집기와 뒤엉켜 있었다.

    의무실에 전화해 정병주와 김오랑의 생사를 확인했다. 정병주는 생명에 지장은 없고 응급치료 후 국군병원으로 실려 갔다. 김오랑은 6발을 맞고 피를 많이 흘려 사망했다고 했다. 사령부에 이를 보고한 후 2발이 발사된 정병주의 권총과 7발이 모두 발사된 김오랑의 권총, 특전사 병사들이 사용한 M16 3정을 수거해 보안반에 보관하고 현장을 수습했다.

    1979년 12월 13일 아침 6시 뉴스는 “특전사에서 정병주 사령관의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진압군을 향해 먼저 발포하면서 저항해 진압군이 정당방위 끝에 희생됐고, 이 과정에서 3명의 장병이 부상을 입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김오랑은 최세창의 부하인 박종규의 지시에 의해 일방적인 사격으로 피살됐고, 이 과정에서 정병주도 왼팔에 총격을 받았다. 계엄군 측에선 장교 1명과 2명의 병사가 부상을 당했다.

    12월 13일 오전 7시, 신임 특전사령관으로 50사단장 정호용 장군이 부임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고 필자는 보안사령부 3층 수사과에 가서 정병주 사령관의 피 묻은 상의에서 지휘관 흉장과 견장을 떼어내 특전사로 가져왔다. 8시경 새로 부임한 정호용 사령관에게 이를 전달하면서 어젯밤 상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줬다. 그리고 ‘피살된 김오랑의 시신을 조용히 가족에게 인계하되, 부대장(葬)을 치르거나 국립묘지에 안장해선 안 된다’는 보안사의 지시 내용을 보고했다.

    이 보고를 받은 정호용은 “부대 내에서 부하가 상관을 체포하기 위해 총격전을 벌인 것은 잘못된 일이고, 김오랑은 목숨을 바쳐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훌륭한 군인이며 부당하게 피살당했기에 부대장을 치르고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보안사의 지시를 보고받고도 소신 있게 말하는 정호용을 보고 훌륭한 군인정신을 지닌 인물임을 알게 됐고, 동시에 보안사 지시도 거스를 만한 파워를 가진 인물임을 알게 됐다.

    보안사에서 요구한 김오랑의 부대 내 장례 및 국립묘지 안장 불가 지시는 결국 정호용의 확고한 의지로 묵살됐다. 당시 김오랑은 반란군의 부하로 인식됐다. 따라서 보안사 지침을 무시한 이 같은 조치는 여느 지휘관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정호용의 소신과 의지가 워낙 확고한 터라 보안사에서도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

    김오랑은 매사에 모범이 되는 장교였다. 최후의 순간에 보여준 것처럼 군인정신이 투철했을 뿐 아니라 아내 사랑도 지극했고, 부모에 대한 공경심 또한 남달랐다. 그는 필자와 거의 매일 점심식사를 같이했는데, 한번은 필자에게 아내에 대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했고 눈도 잘 안 보이지만 부모가 정해준 배필이기에 극진히 사랑합니다. 이렇게 하는 게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 김오랑…

    장례식장에서 김오랑의 부인과 흙 묻은 농부 옷차림 그대로 참석한 형들이 오열하는 광경을 보고는 문상 온 장병들 모두 흐느껴 울었다. 김오랑과 정이 많이 든 필자는 그와 마지막으로 대화할 때 좀 더 적극적으로 실탄 장전을 말리지 않아 목숨을 잃게 한 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많은 눈물을 흘렸다.

    2011년 12월 12일 ‘김오랑 중령 기념사업회’의 연락을 받고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열린 김오랑 중령 31주기 추도식에 참석했다(김오랑 소령의 부인 백영옥 씨의 끈질긴 민원 제기 끝에 그는 1990년 중령으로 추서됐다). 그 자리에서 그의 육사 25기 동기생들과 특전사 출신들이 뜻을 모아 특전사나 육사에 김오랑의 비석을 세우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 후 필자가 바라던 곳은 아니지만 그의 고향 마을에 흉상이 세워졌고, 2014년 1월 정부가 보국훈장 삼일장을 추서해 뒤늦게나마 명예가 회복된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필자는 12·12사건 당시 특전사 현장에 있다가 겪은 일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당했다. 무엇보다 12·12 다음 날인 12월 13일 부임한 정호용에게 전날 밤 상황을 사실 그대로 보고한 것이 문제가 됐다. 보안사에서 공식 발표한 것과 다른 ‘진실’을 보고했기 때문이다.



    정호용은 부임 후 처음 주재한 여단장 회의에서 최세창 3여단장에게 “보안사로부터 정병주 사령관을 모셔 오라는 지시를 받았으면 조용히 모셔 가야지, 부대 안에서 총격 사건을 일으키고 김오랑을 희생시킨 건 잘못된 조치”라고 주의를 줬다. 이 때문에 필자는 보안사 허삼수 대령으로부터 “보안사에서 언론에 발표한 대로 보고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보고해 최세창이 정호용으로부터 주의를 받게 되는 분란을 일으킨 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허삼수는 “(12·12사건에) 비협조적이기 때문에 앞으로 예의 주시하겠다”고 경고했다. 또한 김오랑을 국립묘지에 안장해선 안 된다는 지시가 이행되지 않아 또 한 번 그의 미움을 샀다. 이후에도 하나회 핵심 인사들과 충돌이 잦았다.

    이런 일들이 쌓이면서 필자는 1980년 10월 강제 전역지원서를 쓰고 군을 떠나야 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후 필자는 오랜 세월이 흐른 1993년 9월 16일 한 주간지에 김오랑 소령 피살 사건을 ‘특전사 군인들이 먼저 발포했다’는 제목으로 기고했다. 어떻게든 김오랑의 명예를 살려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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