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호

정신과전문의 최명기의 남녀본색

너무 벗어도 탈 너무 입어도 병

노출의 사회심리학

  • 최명기 | 청담하버드심리센터 연구소장, ‘작은 상처가 더 아프다’ 저자 artppper@hanmail.net

    입력2016-08-18 17: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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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성은 노출이 심하고 매혹적인 여성에게 끌린다. 그렇다고 여자가 아무 남자나 받아들이면 유전자의 질을 보장할 수 없다. 여자는 좋은 유전자를 지닌 남자를 만나기 위해 노출을 피하고 혼전관계를 삼갔다. 산업화 이후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면서 그런 프레임은 깨졌다.
    노출의 계절이다. 길거리엔 민소매, 탱크톱, 란제리룩, 핫팬츠 차림의 여성이 넘쳐난다. 2000년대 초부터 ‘몸짱’ 붐이 일면서 가슴과 다리 노출은 더 과감해졌다. 여성들도 복근 식스팩을 자랑하고 ‘등근육 미인’이라는 말도 생겼다.

    피트니스센터에는 해수욕장에서 멋진 몸매를 보이고 싶은 남성들로 붐빈다. 영화나 드라마에선 남자 배우들이 샤워하거나 수영하는 장면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과거엔 여배우의 노출 수위가 높으면 시청률이 올라갔지만 지금은 남자 배우의 노출에 달렸다고 한다.  



    ‘헤픈 여자’와 혼전순결

    노출이 과감해지고 일반화한 데는 성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바뀐 것도 영향을 줬다. 일부 이슬람 국가에서는 지금도 여성의 신체 노출을 금지한다. 여성 신체 노출을 막는 사회는 신랑 측이 신부 측에 돈을 지불하는 관습이 있던 경우가 많다. 여성의 정조가 중요했고, 남녀의 만남을 어떻게든 차단하려 했다. 여성들은 얼굴과 몸매를 가리고 다녀야 했고, 여성의 가사노동 가치는 평가절하됐다.

    여성이 일할 곳이 없고 가사노동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나라에선 여성이 나이가 들면 어떻게든 결혼시켜 집에서 내보내려고 한다. 여성을 부양하는 게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혼(早婚) 관습이 생겨났다. 여성을 사고파는 ‘상품’으로 여긴 탓에 남자들의 관심을 차단하려고 옷으로 몸을 가렸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 우리도 가부장적 사회였다. 여성의 신체 노출을 최대한 억제하려 했고, 여성 대다수는 이러한 사회적 압력에 굴복해야 했다. 노출하면 본인은 물론 가족들도 비난받았고 때로는 처벌을 받기도 했다.



    여성들도 좋은 남편을 만나려면 노출을 자제하는 게 나았다. 심한 노출로 많은 남성을 유혹하는 여성이 있다고 하자. 성관계를 많이 가질수록 더 자주 임신해 더 많은 자녀를 낳을 것이라는 본능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헤픈 여자’라는 소문이 퍼지면 조건 좋은 남자와 맺어지기 어렵다. 남성은 노출이 심하고 매혹적인 여성에게 끌리게 마련이지만, 여성이 아무 남자나 받아들이면 유전자의 질을 보장할 수 없다. 여성은 좋은 유전자를 가진 좋은 조건의 남성과 관계를 갖기 위해 가능하면 노출을 피하고 혼전관계를 삼갔다.

    또한 가문과 조건이 좋은 여성은 노출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이슬람 사회나 영국 빅토리아 시대, 과거 한국 사회 등에선 여성의 노출이 금기시됐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그러한 프레임은 깨졌다. 우리나라도 한때 혼전순결이 당연시되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나이가 들어도 이성교제 경험이 없으면 놀림을 받는다. 노출이 늘어나는 게 당연하다.



    옷보다 브랜드

    옷의 필요성이 줄어든 것도 노출의 원인 중 하나다. 과거엔 옷이 부와 신분의 상징이었다. 산업혁명 이전 시대를 다룬 영화에는 옷과 관련된 다양한 직업이 등장한다. 동물 가죽을 파는 사냥꾼, 비단 장수, 목화 따는 흑인 노예 등을 보면 그 시대에 옷의 가치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가난하면 벗고 다닐 수밖에 없었고, 부와 신분을 과시하려면 옷을 입어야 했다. 날씨가 아무리 더워도 임금, 귀족, 정경부인은 옷을 입고 또 입었다. 무더운 아프리카 식민지에서도 백인 남자들은 상하의 정장에 조끼와 셔츠를 입었다. 여자는 긴 소매 정장과 롱 드레스를 입었다.

    지금은 세상이 변해 브랜드가 부를 상징한다. 옷을 얼마나 많이 걸치느냐가 아니라 어떤 상표의 옷을 입었느냐가 중요하다. 자동차, 보석, 핸드백 등 옷을 대신해 신분을 상징할 수 있는 물건도 많이 생겼다.

    지구 온난화로 점점 더워지는 날씨도 노출을 부른다. 여름이 계속 길어지다 보니 얇은 옷을 입는 기간도 길어진다. 반바지 근무를 허용하는 회사가 늘고, 더 시원한 옷차림을 선호하고 노출이 일상화한다.

    몸 자체를 과시하는 효과도 있다. 성형수술은 얼굴만 바꾸는 게 아니다. 가슴을 부풀리는 건 물론 엉덩이에도 보형물을 넣어 ‘애플힙’을 만드는 세상이다. 지방흡입술로 뱃살을 빼고,  국소 지방흡입술로 팔뚝 살을 없앤다. 다리를 날씬하게 보이려고 다리 근육을 뜯어내기도 한다. 이렇게 갈고닦은 몸매를 과시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하다. 굳이 비싼 돈 들여 의학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자신의 몸을 잘 만들어 뽐내는 건 가난하고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게도 가능한 일이다.   



    수치 혹은 과시

    옛날에는 벌거벗음을 수치스러워했다. 벌거벗겨진다는 건 내 자신이 적나라하게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을 의식하지 못할 때는 벌거벗는 것이 별로 부끄럽지 않다. 남녀 구분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아기는 벗고 다닌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아이는 벗고 다니는 걸 부끄럽게 여긴다. 벗으면 안 된다고 학습된 것이다. 아동학대 방법 중에서 아이에게 가장 상처가 되는 게 발가벗겨 내쫓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방송, 미디어, 광고 등을 통해서 벌거벗음에 대한 본능적인 부끄러움을 무장해제 한다. 남성에겐 늘 여성의 몸을 보려는 욕망이 있다. 포르노를 보는 심리를 생각해보라. 사진이나 영상 속 여성과 관계를 가질 수가 없는데도.



    그런데 과거에 인류가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을 때는 눈앞에 벌거벗은 여성이 어른거린다면 섹스 가능성이 높아짐을 의미했다. 여성의 노출이 심할수록 남자는 더 큰 성적 욕망을 느낀다. 사람의 시선을 추적하는 특수 안경(eye tracker)을 쓰면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주시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데, 이 안경을 썼을 때 남자는 여성의 벗은 몸에 본능적으로 반응한다고 한다.

    성적 욕망은 다른 욕망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주로 남자가 소비자인 상품 광고에는 노출이 심한 여성이 등장한다. 맥주 광고에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맥주에 젖은 여성과 침을 꼴딱거리는 남성의 모습을 연출한다. 자동차 광고에는 항상 아름답고 몸매 좋은 여성이 등장한다. 자동차 전시회를 가도 늘씬한 레이싱 모델이 마치 남자의 몸을 만지듯 자동차를 어루만진다.

    연극성 인격장애(히스테리성 인격장애) 여성들은 타인의 이목을 끌기 위해 말하고 행동한다. 이들은 마치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리액션’을 하듯 과장된 감정표현을 하고, 짙은 화장, 파격적인 색상과 디자인의 옷차림을 즐긴다. 과감한 노출을 통해 이성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

    반대로 노출에 전혀 관심이 없는 여성도 있다. 화장도 하지 않고 치마도 입지 않는다. 여자답게 말하거나 행동하라는 말을 들으면 화가 솟구친다. 가끔 가슴골이 드러나는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나타나지만 이는 노출을 하려는 게 아니라 편하기 때문이다.  



    과다 노출의 경계

    자신의 몸이 자랑스러워 노출하는 사람도 있다. 남성은 여성의 몸을 보면 무조건적으로 흥분하고 성적인 연상을 한다. 그러나 여성의 생각은 다르다. 내 몸이 자랑스러워 나를 노출하는 것이다. 이들은 이성을 유혹하기보다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노출한다고 말한다. 누군가가 지나친 노출을 지적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남자들이 문제”라고 쏘아붙인다. 내가 호감을 느끼는 이가 내 몸을 바라볼 때는 흥분되고 좋지만,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나를 느끼하게 쳐다보는 것은 정말 싫다.

    일반인이 생각하는 노출증과 정신과 질환에서 말하는 노출증은 개념이 다르다. 일반인이 생각하는 노출증은 과도한 노출이다. 반면 정신과에서 정의하는 노출증은 성장애 중 성도착증의 일종이다. 그저 노출이 심한 옷을 입는다고 해서 노출증이라고 할 수는 없다.

    노출 자체보다 노출이 얼마나 적절한지가 중요하다. 해수욕장에서 비키니 수영복을 입는 것은 문제 될 게 없지만,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고 서울 강남역을 걸어 다니면 문제가 된다. 노출을 피하기 위해 긴 팔, 긴 바지 트레이닝복을 입고 수영장에 들어가는 것도 비정상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성관계를 갖는데, 부끄러운 나머지 옷을 입고 관계를 한다면 그 역시 정상이 아니다.

    사회적인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옛날에는 무릎 위로 올라오는 치마는 금기시됐지만, 요즘은 미니스커트와 민소매 블라우스가 그다지 심한 노출이 아니다. 그러나 아랍권에서는 결코 허용될 수 없는 노출이다. 모피 의류를 반대하는 여성들은 집단으로 누드 시위를 한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에는 심한 노출을 하고 길거리 응원을 하는 여성들이 눈에 띄었다. 이처럼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경우 평소보다 수치심을 덜 느낀다. 남들도 다 하니까 나도 해도 된다. 평소 노출 복장을 즐기던 이는 이렇게 집단적으로 노출을 용인하는 분위기가 펼쳐지면 남보다 파격적인 노출을 한다. 과도한 노출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본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위를 조절하지 못한다면 그건 부적절한 노출이다.

    공공장소에서 노출을 일삼는 ‘노출증 환자’는 법으로 처벌받는다. 노출이 처벌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남자들이 팬티만 입고 출퇴근한다면? 여성들은 상당한 공포감을 갖게 될 것이다. 노출하는 남자의 심리에는 성적인 갈망이 숨어 있다. 노출을 극도로 피하는 여성의 심리에는 성적으로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깔렸다. 나를 노출하는 만큼 위험해진다고 가정한다. 남성의 지나친 노출을 막는 것은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과도한 노출을 즐기는 여성도 사람들이 자신의 신체를 부러워한다고 생각하면 우월감을 갖겠지만, 남자들의 시선을 일종의 공격으로 인지하면 두려워진다. 자신의 노출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남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하면 불쾌해진다. 그럼에도 노출하지 않으면 자신감이 떨어지고 불안해 계속 노출한다.



    부러운가, 불쾌한가

    21세기에 가장 중요한 상품은 어쩌면 우리의 몸이 아닐까. 모델이 입었을 때 아름다워 보이던 옷도 막상 내가 사서 입으면 멋이 없다. 내가 진정 사고 싶은 것은 옷이 아니라 모델의 육체적 아름다움이다. 나 자신이 아름다운 몸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자랑하고 싶다. 아름다운 몸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투자했으면 그 결과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섹시함과 지나친 노출은 별 차이가 없다. 1960년대 영화 속 여배우의 파격적인 노출 의상도 지금은 흔히 입고 다니는 옷보다 노출이 덜하다. 지금은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치마를 사고 싶어도 옷이 없다고 한다. 치마가 짧아지다 보니까 몸에 달라붙으면서 골반이 드러나는 바지도 나왔다. 이런 세상에 무조건적인 경건함을 강요하는 것이 가능할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부적절하지 않은 한도 내에서 자신 있게 노출을 즐기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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