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호

정신과전문의 최명기의 남녀본색

사랑에 빠진 사람들 사랑을 잃은 사람들

연말의 사랑학

  • 최명기 | 청담하버드심리센터 연구소장, ‘작은 상처가 더 아프다’ 저자 artppper@hanmail.net

    입력2016-11-23 13:3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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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곧 연말이다. 행복한 이들은 ‘시작’에, 불행한 이들은 ‘끝’에 방점을 찍는다.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에게 다시 한 해를 살아야 하는 건 고통이다. 연말이 우울하다면 자신을 바라보자. 내가 불행하다는 생각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밀어낸 건 아닐까.
    1년이라는 시간 단위는 묵은 것을 보내고 새로 시작한다는 느낌을 준다. 단지 시간을 기록하기 위한 단위가 아니라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담겼다. 1년이 지나간다는 것은 지난해의 나쁜 기억을 덮고 새로 시작한다는 의미를 전하는 반면, 1년간의 불행이 너무 크게 느껴지면 연말에는 모든 게 끝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는 새해가 오기 며칠 전에 있다. 크리스마스에 빼놓을 수 없는 게 크리스마스트리다. 고대인들은 우주가 무한대로 커다란 나무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 나무를 ‘우주나무’ ‘우주수(樹)’라고 일컬었다.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 역시 그런 우주나무를 상징한다. 그런 면에서 크리스마스는 자연스럽게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것을 상징하게 됐다.

    연말은 한 해의 마지막을 의미하지만, 사랑에 빠졌거나 삶이 행복한 사람들은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둔다. 하지만 사랑이 끝난 이들, 외로움 때문에 불행에 빠진 이들은 연말이 되면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남들이 들떠 있는 크리스마스와 연말에 우울한 사람이 더 많다.

    정신과 레지던트 때 응급실 당직을 서보면 제일 바쁜 날이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12월 31일 응급실 당직은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 계속 몰려와 정신이 없다. 한 해가 지났는데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는 데서 오는 슬픔도 크다. 내년에 더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으면 희망이 있겠지만, 내년이 올해보다 더 안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우울해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혼자라는 생각을 떠올리면서 지옥 같은 외로움에 자살을 시도한다. 실연하거나 이혼한 이들, 사랑하는 사람을 질병이나 사고로 잃은 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연말이 괴롭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지 않았다면 오늘 같은 날 혼자 있지는 않을 텐데 하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반면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연말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첫 사랑을 하고 만나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는 오래도록 잊을 수 없다. 상대를 위해 정성스럽게 선물을 고르고, 의미 있는 선물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확인한다.

    첫사랑을 하고 만나는 첫 번째 송구영신(送舊迎新) 역시 잊을 수 없다. 어지간하면 첫사랑과 함께 있으려 하고, 함께 있지 못하면 전화를 한다. 그래서 12월 31일 밤 11시 59분부터 1월 1일 0시 1분까지는 통신량이 가장 많은 시간대 중 하나다. 열애 중인 청춘 남녀 중에는 ‘올해가 지나기 전에 섹스를 해야지’ 하는 커플이 있다. 처음 연애를 하고 맞는 연말은 이래저래 잊을 수가 없다.



    “그땐 지금 같지 않았어”

    누군가는 연말에 연애를 끝내기도 한다. 연애를 하다 보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 이미 사이가 틀어져 망설이는 상황이라면 연말이 고비다. 헤어질까 말까 망설이는데 연말에 연락이 안 오면 그것으로 끝이다. 상대방이 연락을 기다리다 안 와서 끝인 경우도 있고, 연락을 했는데 상대방이 거부해서 끝인 경우도 있다.

    연락해도 상대방이 답을 하지 않으면 술에 취해서 미친 듯 전화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연락하면 할수록 상대방은 질릴 뿐이다. 불안하고 허전한 마음 때문에 누군가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결과는 대체로 좋지 않다.   

    짝이 없는 미혼 남녀는 평소엔 지낼 만한데 연말이 되면 서글프다. 굳이 스킨십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스킨십을 싫어하는 사람도 연말에는 누군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남들은 다 짝이 있는데 나만 짝이 없는 것 같다.

    결혼한다고 다 잘 사는 건 아니지만, 결혼해서 누군가 옆에 있으면 왠지 행복해질 것 같다. 부모나 친척들이 결혼을 재촉하면 짜증이 나고 불안해진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어도 배필이 없다고 생각하니 슬프다. 이러다 결혼도 못하고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비롯한 로맨틱 코미디물은 주인공이 그해 마지막 날에 외로움에 젖어 혼자 ‘병나발’을 부는 것으로 시작한다.

    부부의 연말은 그때껏 어떻게 지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신혼부부는 처음 맞는 연말이라 뜻깊다. 로맨틱한 이벤트를 연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연말의 의미는 희석된다. 공연히 옛날 얘기를 꺼내면서 “그때는 지금 같지 않았다”며 다투기도 한다. 그러면서 연말에 같이 보내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아이가 생기면 연말은 더 이상 부부 행사가 아니다. 특히 아내는 아이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남편과 보내는 시간보다 아이 친구의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 크리스마스 파티도 아이 위주다. 아이가 친구들과 어울려 파티를 하면 엄마들은 엄마들끼리 모여 수다를 떤다. 남편과 시댁 욕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남편은 회사 송년회나 이런저런 모임을 핑계 삼아 밖으로 돌다 보니 남편과 아내는 연말에 각자 시간을 보낸다. 늙어서 남자는 정년퇴직을 하고 여자는 아이를 다 키워서 그제야 부부는 둘만의 연말을 다시 보내지만, 한번 썰렁해진 분위기는 같이 있다고 좀체 되살아나지 않는다.



    사랑과 전쟁

    뭐니 뭐니 해도 이혼 후 처음 맞는 연말처럼 끔찍한 건 없다. 함께 살 때는 연말이면 ‘내년에는 꼭 이혼을 해야지’ 하며 이를 갈기도 했지만, 막상 이혼하면 첫 연말이 결코 홀가분하지 않다. 왠지 후회스럽기도 하다. 괴로운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처음 연말을 맞이하면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즐겁게 지내야 마땅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결혼생활 때 좋았던 순간만 기억난다. 전남편, 전처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 겨우 참는다.  

    이혼을 당한 쪽은 속이 더 상한다. 배우자가 바람을 피워서 이혼을 한 경우엔 배우자가 불륜 상대와 행복한 연말을 보낼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도록 괴롭다. 폭음하고 아내를 때리는 무책임한 남자들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평소에는 이혼한 전처가 경찰에 신고할까 무서워 참았지만 연말에는 도저히 참기 어렵다. 그래서 또 술을 마시고 전처를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당하면 화가 머리 끝까지 뻗친다. 물건을 집어 던지며 싸우기도 한다. 그러다 살인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불륜을 저지르는 이들에게 연말은 아슬아슬하다. 불륜남, 불륜녀는 아내나 남편이 눈치채지 못한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정작 배우자는 모른 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배우자는 ‘올해까진 참았지만 더는 참지 않겠다’며 이를 갈고 있다. 올해 크리스마스와 마지막 날에 남편(아내)이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가는지, 아니면 집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지 촉각을 곤두세운다. 아무 생각 없이 외박했다간 그것으로 끝이다. 바람 피우는 아내를 둔 남편은 더욱 민감하다. 밤 12시가 지나 새해가 돼 들어온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그래서 연말이면 가정폭력 신고가 폭증한다.

    아무리 애인에게 정신이 팔려도 연말엔 웬만하면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 마음은 딴 데 가 있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는 시늉이라도 한다. 그런데 연말에 불륜 상대가 자신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 내가 소외된 것 같다. 내가 저 사람과 정식으로 부부 사이라면 지금 이 시간은 내 차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배우자가 아니라는 게 서럽다.  

    세상에서 연말이 가장 서러운 이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이다. 지병으로 사랑하는 이를 잃었건, 사고로 사랑하는 이를 잃었건 연말이 되면 더욱 마음 아픈 부재감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특히 사별한 첫해가 힘들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상대방이 살아 있다손 치더라도 과연 얼마나 따뜻한 시간을 함께 보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연말이 되면 마음이 텅 빈 듯한 허전함이 밀려든다. 모든 것이 다 끝나가는 시기이기에 만남보다는 헤어짐에 얽힌 기억이 더 많이 떠오른다.

    연말이 다가와 외로워서 우울해졌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우울증이 와서 연말이 힘들게 느껴질 수도 있다. 우울증 환자 자신은 ‘올 한 해가 너무 힘들어서 우울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연말에 우울증이 온 탓에 올 한 해가 힘들고 내년은 더 힘들어져 버티기 힘들 거라고 생각한다. 우울증에 걸리면 사고방식도 바뀌게 돼 뭘 해도 안 될 것 같은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힌다.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이 한 해가 또 지나간다는 생각에 허탈해진다. 그렇다 보니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너무 힘든 한 해를 보낸 이들에겐 또다시 한 해를 살아야 한다는 것이 고통으로 다가올 수 있다.



    나를 바라보는 지혜

    그런데 주위를 보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족이든 동료든 누군가와 함께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즐겁게 보내는 것 같다. 자기만 외톨이인 것 같다. 계절성 우울증은 가을에 시작돼 날이 추워지는 연말에 증상이 가장 심해진다. 이런 상태에서 홀로 외로이 술을 마시다 보면 극단적인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평소에는 사랑하는 이가 옆에 있건 없건 신경 쓰지 않다가 우울증에 걸리면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그러다 보니 ‘보조 지지대’가 필요하다. 우울증에 걸리면 마음이 얼어버리고 누군가가 그립다. 사랑하는 이가 없어서, 옆에 있는 이가 관심을 주지 않아서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내가 불행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이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불행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이가 내게 관심을 줘도 밀어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옆을 보기에 앞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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