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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사랑하라, 오페라처럼

사랑을 계산하는 이들에게 바친다

안드레아 셰니에

  • 황승경 | 국제오페라단 단장, 공연예술학 박사

사랑을 계산하는 이들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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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은 피로 물든 진흙탕 같은 절박한 상황에 빠져야만 더 고귀해지는 걸까. 우리는 ‘천생연분’이라며 열렬하게 사랑을 고백하고서도 뒤돌아서면 더 주고 덜 받는 것을 계산하며 서운해한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이렇듯 세속적일까. 아니면 진정한 사랑은 따로 있을까. 오페라가 그 답을 알려준다.
사랑에 대해 의심하는 이들에게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를 추천한다. 주인공들은 헤어진 뒤 5년의 세월이 흘러도, 프랑스혁명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소용돌이에도, 눈앞에 다가온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사랑을 잊지 않았다.

영화 ‘필라델피아’(1993)가 이 이야기를 흥미롭게 소개했다. 잘나가는 변호사 앤드루 베켓(톰 행크스)은 동성연애자라는 이유로 필라델피아 최고의 로펌에서 해고당해 법정 싸움을 하는 중이다. 어느 날 재판 이야기를 하는 자신의 변호사 조 밀러(덴젤 워싱턴)에게 뜬금없이 오디오를 틀어 오페라 아리아를 들려준다. 마리아 칼라스가 부르는 ‘안드레아 셰니에’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La mamma morta)’. 에이즈로 병색이 완연한 그는 링거를 꽂은 채 힘겹게 오페라 줄거리를 설명한다. 점점 아리아에 몰입해가는 그의 대사는 전율을 일으키는 매혹적인 첼로 선율, 그리고 칼라스의 목소리와 함께 상승하고 하강하며 감동을 안긴다.

아리아의 주인공 만달레나(마달레나의 이탈리아식 발음, 마리아 칼라스)는 자신의 하인이던 혁명가 제라르와 5년 만에 해후한다. 그녀는 혁명 주동 세력이 된 제라르에게 자신의 연인 셰니에를 구해달라고 간청한다. 자신도 조국의 적으로 낙인찍혀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신세이지만, 체포된 셰니에의 풍전등화 같은 목숨을 구하려면 물불 가릴 여유가 없었다.

자신을 향한 욕정으로 가득 찬 제라르를 바라보며 그녀는 혁명 이후 자신이 겪은 고초를 아리아로 토로한다. 불타는 저택에서 자신을 살리기 위해 어머니가 얼마나 참혹하게 숨져갔는지, 자신을 돌보기 위해 유모 베르시가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 만달레나는 자신이 저주를 몰고 왔다고, 누가 이런 자신을 버리지 않겠냐고 절규한다.





질투냐, 사랑이냐

그런데 어디선가 사랑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는 아직 살아 있고, 혼자가 아니며, 내가 너의 눈물을 거둘 것이라는 천상의 소리다. 더 이상 떨어질 지옥이 없는 절박한 순간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는 딱 한 가지, 목소리의 주인공 셰니에를 만나야 한다는 한 줄기 희망이다. 그녀는 자신을 지탱해주는 셰니에와의 숭고하고 신성한 사랑을 이처럼 강렬하고 당당하게 노래한다. 아리아는 여기에서 끝나고, 만달레나가 제라르에게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니 육신을 원하면 가져가라”고 담담하게 노래하는 구절이 이어진다. 셰니에가 없는 하늘 아래에서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짝사랑한 이성이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을 구해달라고 부탁해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질투가 앞설까, 사랑이 앞설까. 상당히 어려운 일이지만 오페라에서 제라르는 욕정보다는 사랑을 택한다. 두 사람의 사랑에 감명받은 그는 만달레나의 행복을 위해 셰니에를 구명하는 데 적극 나선다.

우리가 흔히 아는 프랑스혁명은 ‘백성’이 ‘시민’이 되어가는 기록이고, 군림하는 귀족과 성직자들의 불합리한 특권을 민중의 손에 쥐여주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오페라는 구(舊) 제도의 모순으로 규정된 귀족들의 사랑을 미학적 관점에서 아름답게 그려냈다.

영화 속 베켓은 음악과 혼연일체가 돼 울먹이면서 아리아에 대해 설명한다. 베켓은 만달레나처럼 하루아침에 모든 게 변했다. 성공가도를 달리다가 직장에서 내쫓기고, 인정받던 동료들에게 배신당하고, 사회의 차가운 눈초리를 감내해야 했다. 더구나 에이즈와 싸우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베켓은 진정한 사랑을 노래하는 여주인공에게 완벽하게 감정이입이 돼 있다.

오페라를 잘 모른다며 강 건너 불구경하는 표정이던 밀러는 베켓의 열정적인 이야기에 서서히 빠져들면서 눈빛이 강렬해진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그는 가슴 벅찬 감동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필라델피아’는 ‘양들의 침묵’으로 일약 스타 감독이 된 조내선 드미 감독의 차기작이다. 톰 행크스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특히 행크스가 아리아를 설명하는 장면은 많은 이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를 연기파 배우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마리아 칼라스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가 들어간 앨범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실존 詩人 셰니에

이 오페라는 격변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시인 앙드레 셰니에(André Chénier·1762~1794)의 이야기다(오페라 제목 ‘안드레아 셰니에’는 이탈리아식 발음에서 따왔다). 시인은 프랑스 시(詩)의 시대를 대표하는 실존인물이지만, 당시 쿠와니 백작 집안의 이름에서 착안한 여주인공 만달레나는 가상의 인물이다. 작곡가 움베르토 조르다노(1867~1948)는 낡은 봉건 질서와 공포로 변한 혁명의 비이성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주옥같은 선율에 담았다. 회상적인 모티프와 다채로운 오케스트라 화성으로 심오한 인간 내면을 표현했다.

셰니에는 외교관, 사상가, 시인으로 활동한 당대의 지식인이다. 그는 열정적으로 시를 지었지만, 생전에 단 2편만 대중에게 발표했다. 특히 죽기 전 마지막 4개월 동안 성 라자로 감옥에서 왕성하게 시를 썼고, 그 작품들은 빨랫감 꾸러미 속에 담겨 아버지에게 전달됐다. 혁명 세력이었으나 폭력적 급진주의 사상에 반대하다 불과 32세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오페라가 다룬 휴머니스트 지식인의 사랑 이야기는 많은 이가 갈망하는 주제였다. 혁명 전(1막)과 후(2~4막)에 피어난 두 사람의 간절하고 애달픈 사랑은 죽음이 곧 또 하나의 시작임을 암시한다. 또한 혁명도, 시간도, 죽음도 사랑하는 두 사람을 갈라놓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894년, 출판사와의 계약 만료일은 다가오는데 마땅한 작품이 없어 고민하던 작곡가 조르다노가 셰니에의 이야기를 소재로 선택하자 당대 최고의 대본작가 일리카(Luigi Illica)는 선뜻 대본 작업을 수락했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마지막 4막의 극적인 2중창을 완성한 이후 작곡자는 악보 맨 첫 장에 자신의 아내 올라 스파츠에게 헌정하는 글귀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극적인 선율

행복한 결혼생활과 작곡 활동이 얼마나 밀접한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사랑스러운 아내와 남부러울 것 없이 다복하게 살았다는 조르다노의 작품은 ‘안드레아 셰니에’ 외에는 지금까지 공연되는 게 거의 없다. 반면 그와 동년배 작곡가이자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여성편력으로 유명한 자코모 푸치니는 수많은 작품을 남겼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그의 작품이 공연되고 있다.

‘안드레아 셰니에’는 격동의 시기를 살다 간 지식인의 올곧고 비극적인 삶에 사랑이라는 픽션을 엮어 재조명한다. 1896년 이탈리아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열린 초연은 비련의 여주인공이 판치던 당시 오페라 무대에 색다른 매력을 불어넣으며 대대적인 성공을 맛봤다. 요동치는 역사 속 고뇌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극적이고 긴박하게 그린 이 오페라는 때로는 격렬하게 몰아치다가도 서정적으로 감싸는 듯한 극적인 선율이 일품이다.

지휘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총 연주시간은 1시간 45분 정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지만 4막의 각기 다른 무대와 의상, 도구 때문에 제작비가 만만찮아선지 여러 무대에 오르진 않는다. 그러니 어디에선가 공연된다는 소식이 들리면 꼭 찾아가서 봐야 한다.

막이 오르면 혁명 직전 만달레나의 저택에서 화려한 파티가 펼쳐진다. 이 자리에서 즉흥시 낭송을 요청받은 셰니에는, 시상(詩想)은 사랑의 전율처럼 누군가의 명령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며 거절한다. 만달레나가 그의 시를 듣기 위해 ‘사랑’이라는 말에 코웃음을 치자 셰니에는 조국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답은 즉흥시 ‘언젠가는 푸른 하늘 아래서(Un di all’azzurro spazio)’로 답한다. 이 즉흥시는 실제로 셰니에의 시 ‘정의의 찬가(Hymne a la Justice)’에서 발췌했다.

이 곡의 음악적 구성은 마치 고요한 새벽에 찬란한 해가 뜨는 것처럼 웅장하게 상승한다. 독백 대사를 반주하듯 조용히 시작하는 오케스트라는, 사랑을 하찮게 여기는 만달레나에게 호소하려는 듯 그녀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고조되며 격정적으로 휘몰아친다. 그러다 이내 감미로운 멜로디로 변하는데, 마치 사랑의 진정성을 논하며 만달레나에게 ‘당신은 사랑의 의미를 모른다’고 감미롭게 질책하는 듯하다. 신이 준 사랑을 경멸하지 말라고, 사랑이야말로 온 세상을 움직이는 생명이라고 열정적인 고음으로 호소한다.



테르미도르 달의 사랑

그로부터 5년이 흐른 시점에 2막이 시작된다. 혁명이 일어났지만 국민의 비참한 현실은 나아진 것이 없고, 셰니에는 한때의 동지였던 혁명 세력에게 감시당하는 신세가 되지만 미지의 여인으로부터 매일 편지를 받는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그녀가 몇 살인지, 어떤 신분인지도 모르고서. 나중에 그녀가 만달레나였음을 알게 된 셰니에는 기뻐하며 그녀와 열정적으로 사랑의 이중창을 부른다.

3막의 배경은 혁명재판소다. 셰니에는 체포되고 만달레나는 행방이 묘연하다. 제라르는 셰니에에 대한 고발장을 작성해야 하는데 그는 주저한다. 이후 만달레나가 나타나 영화 ‘필라델피아’에 나오는 아리아를 부른다. 제라르는 법정에서 셰니에를 변호하지만, 군중과 재판장은 너무도 당연하게 셰니에를 조국의 적으로 지목해 사형을 언도한다.

4막에서 만달레나는 최후의 순간을 셰니에와 함께하기 위해 같은 날 사형이 집행되는 귀족 부인과 자신을 바꿔치기한다. 이를 알게 된 제라르는 공포정치의 화신 로베스피에르에게 다시 한 번 선처를 구하러 가고, 만달레나와 셰니에는 “우리의 죽음은 사랑의 승리”라는 신의에 찬 이중창을 부른다. 죽음도 두 사람의 사랑을 갈라놓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삶은 아이러니라고 했던가. 셰니에에게 사형을 선고한 로베스피에르는 셰니에가 죽은 뒤 불과 사흘 만에 실각하고 그 역시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셰니에는 프랑스 혁명력(革命曆)으로 ‘열월(熱月)’이라 불린 ‘테르미도르 달’(7월 19일~8월 17일)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처형됐다. 그 뜨거운 여름의 열기는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고혹적인 사랑 이야기로 승화했다. 222년 전 8월 프랑스의 애절한 오페라에서 피어난 사랑이 2016년 8월 지금 우리에게 참사랑의 의미를 담담하게 일깨우는 듯하다. 



나도 따라 부를 수 있는 아리아La mamma morta
Porto sventura a chi bene mi vuole!
Fu im quel dolore che a me venne l’amore!
Voce gentile piena d’armonia che mi susurra: “Spera!”
e dice: “Vivi ancora! Io son la vita!
Ne’ miei occh? ? il tuo cielo!
Tu non sei sola! Le lagrime tue io le raccologo!
Io sto sul tuo cammino e ti sorreggo il fianco affaticato e stanco!
Sorridi e spera ancora! Son l’amore!
Intorno ? sangue e fango? Io son divino!
Io sono il paradiso! Io son l’oblio!
Io sono il dio che sorva il mondo scende da l’empireo, muta gli umani im angioli,
fa della terra il ciel!
Io son l’amore!”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나는 내 주변에 불행을 가져다줬지요. 이런 나를 누가 원했겠어요.
비참한 내 상황에 사랑이 찾아왔어요.
달콤하고 아름다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어요.
그대는 살아야 해요. 나는 삶, 자신이오.
천국이 내 눈 속에 있소. 그대는 더 이상 외롭지 않소.
그대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겠소. 미소와 희망을 잊지 마시오.
피와 진흙에 둘러싸여 있어도 나는 신성하오.
모든 걸 잊게 해주겠소.
나는 저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신이오.
내 이름은 사랑이오. 사랑!

추천 음반

Andrea Chénier - EMI CLASSICS CMS 5 67913 2
Antonino Votto 지휘
Mario Del Monaco (Andrea Chénier), Maria Callas(Maddalena di Coigny), Aldo Protti (Carlo Gérard).

마리아 칼라스가 전속 계약한 EMI CLASSIC의 칼라스 시리즈 ‘안드레아 셰니에’는 테너 마리오 델 모나코와 콤비를 이룬 1955년 11월 스칼라 극장 시즌 공연 실황이다. 별들의 향연이라 할 꿈의 무대였다. 당시 칼라스는 상대적으로 작게 들리는 자신의 소리가 못마땅했다고 한다. ‘트럼펫’이라 불릴 정도로 엄청난 성량을 가진 델 모나코를 의식해선지 칼라스는 2막에서 고음을 3음이나 높여 노래하기 시작했고 팬들은 그런 칼라스에게 환호했다. 악보에도 없는 소리를 제멋대로 높여 부른 칼라스에게 화가 난 델 모나코는 4막의 비극적인 사랑의 이중창에서 자신도 소리를 올려버렸다고 한다. 커튼콜로 막이 열리면 비극의 연인처럼 비감하게 인사를 하고, 막이 닫히면 서로 왜 음을 올렸냐며 으르렁거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음반은 그 전날의 공연이라 문제의 ‘고음 향연’은 기록되지 않았다.

추천 영상(유튜브)

■ 오페라 전곡(메트로폴리탄 오페라, 1981)
https://www.youtube.com/watch?v=Jmv3fBb3oyo
Domingo, Benackova, Cappuccilli, 지휘 Santi
1980년대의 호화 멤버로 감상할 수 있다. 도밍고의 최고 전성기 모습을 볼 수 있고, 한국에서 여러 번 독창회 무대를 가진 카푸칠리의 제라르도 인상 깊다.

■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La mamma morta
https://www.youtube.com/watch?v=Z_PlUNE91S8
네트렙코는 만달레나를 소화하기에는 아직 소리가 가볍다. 그래서 먼저 콘서트로 그녀의 만달레나를 감상한다.

■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 Un di all’azzurro spazio
https://www.youtube.com/watch?v=Yj-t9--PCmE
현역 테너 중에 연극적으로 가장 훌륭하다는 카우프만의 열연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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