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잔하면서도 수려한 시칠리아의 전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지독한 사랑 이야기다.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 갈등이 거칠고 직설적인 언어로 표현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너무나도 아름답고 열정적인 음악은 관객의 마음을 더욱 시리게 만든다.
그러나 국가 경제가 도탄에 빠져 국민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표심은 실익 계산을 뒷전으로 미루고 현 정부 불신임으로 몰렸다. 선거를 앞둔 이탈리아 정치인들은 종종 어린아이들처럼 시민 앞에서 양 손가락을 펴서 V자로 만든다. 이는 동심을 자극하는 친근한 승리의 표시가 아니다. 바로 ‘투표(Vota)’와 ‘복수(Vendetta)’의 두 V를 의미한다. 그런데 지난해엔 선거 당일이 ‘V’로 시작하는 이탈리아 욕설과 ‘복수(Vendetta)’를 상징하는 ‘V데이’로 불렸다. 특히 청년 실업률이 56%에 달하는 시칠리아 섬은 유권자 72.2%가 개헌 반대표를 던졌다. 이렇듯 이탈리아 남부, 특히 시칠리아인은 렌치 총리 정부가 몰락하는 데 지대한 기여를 한 셈이다.
바로 이곳 시칠리아는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영화 ‘대부’의 배경으로 유명하다. 영화 속 시칠리아계 콜리오네 마피아들은 마음먹은 복수는 기필코 하고야 만다. 마리오 푸조의 소설이 영상으로 만들어져 개봉된 1972년, 미국의 시칠리아 이민자들은 자신들의 선조가 폭력적이고 잔악하게 묘사돼 명예가 훼손됐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어설픈 복수극
하지만 영화에 내재된 시칠리아 특유의 친근한 요소들이 그들의 분노를 잠재웠다. 더구나 영화 곳곳에는 아름답지만 비극적인 섬 시칠리아의 향수가 짙게 깔려 있다. 특히 3편에서 조직의 대부 마이클(알 파치노 분)의 외아들은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예술가의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가문의 뿌리인 시칠리아 섬 팔레르모 마시모 극장에서 오페라 가수로 데뷔한다. 그때 공연되는 오페라가 바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극 중 배경이 시칠리아인 이 오페라는 살인으로 마무리되는 어설픈 치정 복수극이다. 격한 감정으로 점철된 복수의 결투가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준다. 애잔하면서도 수려한 시칠리아의 전원 풍경을 배경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지독한 사랑이 그려진다. 우아하거나 고상하기보다는 사랑의 다양한 갈등이 거칠고 직설적인 언어로 표현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너무나도 아름답고 열정적인 음악은 관객의 가슴을 시리게 만든다.
시칠리아의 건축에는 그리스, 로마, 바이킹, 이슬람, 고딕, 바로크, 낭만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여러 양식이 종합적으로 서려 있다. 이유가 있다. 사실 시칠리아는 한순간도 자유를 누리지 못한 애처롭고 애달픈 땅이다. 열강의 침략으로 피폐된 땅의 약한 사람들을 그 누구도 보호해주지 않았다. 스스로 지켜야만 했다. 시칠리아에는 여성이나 아이들이 심각한 피해를 당했을 때, 피해자의 친족이 가해자를 살해해도 이를 묵인하는 사회 관습이 있었다. 그렇게 시칠리아 사람들에게는 국가의 규범보다 가족 삶의 윤리가 더 상위에 있었다.
패밀리를 위해서라면…
낭만주의가 저물던 19세기 중후반, 유럽에서는 실증주의 사상에 기반을 둔 사실주의(Realism)가 대두했다. 사실주의 작가들은 억지로 미화하거나 꾸미지 않은 진솔한 일상의 평범함을 소재로 담았다. 이후 여기에서 영향을 받아 자연주의(Naturalism)가 등장한다. 우리는 자연주의라면 자연의 싱그러움과 아름다움, 혹은 노장사상을 떠올리지만 예술사조는 정반대다. 대부분 어두운 사회 단면과 인간 본성의 부정적 측면을 극단적이고 처절하게 묘사한다. 다만 자연주의는 문학과 연극 장르에서 꽃피우지만 음악 특히 오페라에서는 전무하다 할 정도로 대표적인 예술작품이 나오지 않았다.
같은 시기 이탈리아 반도는 조각조각 나뉘어 열강의 지배에 신음하고 있었다. 물론 상류층과 열강의 조력자들은 오페라 극장에서 문화적 혜택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었지만 전쟁의 포화 속에 변변한 낭만 문학작품조차 제대로 배출되지 못하는 메마른 현실이었다.
그러던 1827년, 알렉산드로 만초니의 역사소설 ‘약혼자들’이라는 불후의 명작이 전 이탈리아 반도를 뒤흔든다.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사회의 모순에 저항하는 인간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만초니의 작품에 이탈리아 지성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한 언어를 사용하지만 1400년 동안 각기 다른 도시국가로 나뉘어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못했던 이탈리아 사람들은 비로소 독립이라는 희망의 불꽃을 마음속에 불태우기 시작했다. 1871년,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 반도는 북부 사보이왕가의 주도로 드디어 통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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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카니의 음악 마술
이 오페라의 작곡가 마스카니는 사실 베리즈모와는 거리가 멀다. 이탈리아 중북부 상공업 항구도시인 리보르노에서 자라고, 대도시 밀라노 음악원으로 유학을 가서 작곡가 푸치니와 동문수학했다. 그러나 이내 학교를 그만두고 민간오페라단 지휘자가 돼 전국을 떠돈다. 다소 고생스러웠겠지만 이는 그의 음악적 역량을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그는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과 접촉하며 독특한 지역 특색과 대중이 사랑하는 특성을 온몸으로 터득했다.그러던 1889년 그에게 운명의 여신이 다가왔다. 그는 손초뇨 출판사의 단막극 모집 공고를 보고 자신의 고향 친구인 토제티와 메나시에게 이미 희곡으로 개작돼 호평을 받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오페라 대본을 의뢰한다. 그는 73개 작품 중 위풍당당하게 1위를 차지하고 27세에 오페라계의 풍운아로 부상한다. 더구나 문단에서도 베리즈모 사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어서 마케팅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너무 빠르게 스타 반열에 오르며 화려한 명예를 누리다 보니 진정성이 퇴색돼서일까. 아무튼 이후 그가 내놓은 14편의 후속 작품은 하나같이 전작의 영광을 되풀이하지 못했다. 그의 후속 작품들은 이미 높을 대로 높아진 대중의 기대치를 만족시키지 못해 ‘속 빈 강정’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원색적인 비평도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가 있었고 여전히 그는 대중에게 사랑받는 몇 안 되는 생존 작곡가였고 훌륭한 지휘자였다.
부러질지라도 남에게 굽히지 않는 오만한 다혈질 성격에 돌출적인 그는 많은 이와 마찰을 빚었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작곡가는 파시즘 정치가들에게는 매우 좋은 선전효과였다. 실제로 그는 파시즘 정권에서 받는 독보적인 연금 덕분에 고고하게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가 파시즘 정권에 어느 정도 부역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공식 행사에 무솔리니 옆에서 얼굴을 내민 증거는 차고 넘친다.
인간에 대한 성찰
이는 후일 부메랑으로 돌아와 그의 목을 조른다. 그러나 이미 팔순이 넘은 작곡가는 세계적 인물이었다. 그의 음악을 흠모하는 연합군 장교들 덕분에 그는 로마 최고급 프라자호텔에서 패전국 국민임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쫓겨나지 않고 그대로 사는 특혜를 누린다. 몇 달 후, 그는 10년 넘게 살던 프라자호텔 같은 방에서 사망한다. 그를 기념해 그의 방 창문에 놓인 마스카니의 흉상은 고대 로마 시절부터 번화가였던 코르소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그의 동문인 작곡가 푸치니 이후, 이탈리아 작곡가들에게서는 베리즈모적인 성격을 찾아보기 어렵다. 산업이 발달하면서 문학작품을 읽고, 오페라를 보던 부르주아 계급이 없어지고 훨씬 세속화된 중산층이 생겨난다. 카루소, 탈리아비니, 칼라스, 파바로티 등 세상을 빛내는 오페라 스타들의 활약도 오페라의 입지가 축소되는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런 급격한 변화로 다른 장르가 오페라를 대체하는 현실 속에서 서민들이 사랑하던 베리즈모 예술은 몇몇 오페라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베리즈모 오페라는 대개 평범한 서민들이 비참한 갈등을 겪고 끔찍한 복수로 결말을 맺는다. 그러나 그들이 이 비극적 이야기로 관객에게 전달하고픈 것이 현실 고발이나 사회풍자만은 아닐 것이다. 오페라를 보는 관객은 극한 감정을 앞세우는 과정을 통해 다른 인간 군상의 내면을 이해하고 경험한다. 궁극적으로 그들이 원한 것은 예술을 통한 인간 성찰과 이해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