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호

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잦은 사면의 폐단

원칙 없는 용서는 처벌보다 못하다

  • 최두헌 |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입력2016-08-30 15: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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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절 특사’라는 영화가 있다. 감옥에 갇혀 있던 두 죄수가 자신들이 광복절 특별 사면 대상임을 모르고 사면 전날 탈옥한다는 내용의 코미디 영화다. 기발한 설정이기는 하지만,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까 하는 의문도 든다. 반대의 경우, 그러니까 사면될 것을 예상하고 죄를 저지르는 경우는 어떨까. 요즘은 모르겠지만 조선시대에는 있었다. 다음은 중종 3년(1508) 1월 30일의 기사다.

    “사섬시(司贍寺, 조선시대 저화의 주조 및 외거노비의 공포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던 관서. 저화는 닥나무로 만든 지폐)의 노비 중 탐욕스럽고 교활하며 글을 아는 자가 있었다. 그는 궁궐에 들어간 조카딸을 통해 얼마 후에 사면령이 내려질 것이라는 헛소문을 듣고는 취한 척하며 누이동생을 때려죽이고 그녀의 재물을 독차지하려다 붙잡혀 옥에 갇혔다. 잡혀가면서 아내를 돌아보며 ‘금방 집으로 돌아올 것이니, 술을 빚어두고 기다리게’라고 했는데, 재판이 끝났는데도 사면령이 내리지 않았다.

    아내가 울면서 어떤 사람에게 ‘장차 대사면이 실시돼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는 처벌을 면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남편이 나에게 술을빚어 두고 옥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라 했습니다. 그런데 사면령이 내려오지 않으니 어떻게 합니까. 남편이 죽게 생겼습니다’라고 했다. 그 사람이 ‘장차 사면이 있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안 것이오’ 하고 묻자 ‘남편의 친척 중에 나인이 있는데 그가 주상께서 얼마 전 병을 앓다 나으시자 가벼운 죄를 지은 죄수들을 풀어 주셨으나, 마음에 차지 않아 얼마 후에 대사면을 실시하신다고 전해서 알았습니다’라고 했다. 그 사람이 ‘그렇다면 당신 남편이 사람을 죽인 것은 실수가 아닌 게 분명하군’이라고 하니, 누이동생을 죽인 자의 아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중종실록 3년 1월 30일)



    사면 예상하고 살인

    조선에서는 국가나 왕실에 경사가 있을 때, 왕이나 왕비의 병이 위독하거나 병이 나았을 때, 홍수·가뭄 등의 재해가 일어났을 때, 반역을 제압했을 때처럼 특별한 일이 있으면 그것을 기념하고 어지러운 민심을 달래기 위해 사면령을 내렸다. 사면은 임금이 백성에게 직접 은혜를 베풀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고 유용한 통치 수단이었다.



    사면이라고는 해도 모든 범죄를 용서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시대마다 기준이 조금씩 달라지기는 했지만, 사형이 선고될 만큼 무거운 범죄는 대개 사면 대상에서 제외됐다. 반역을 시도한 대역죄인, 조부모나 부모를 죽인 경우, 처나 첩이 남편을 죽인 경우, 노비가 주인을 죽인 경우, 독약을 사용하거나 저주를 내린 경우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의도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경우도 사면 대상에서 제외됐다. 뒤집어서 말하면, 고의적인 범행이 아닌 경우는 사람을 죽였어도 사면받을 수 있었다. 사섬시의 노비가 실수를 가장해 누이동생을 죽인 것은 바로 이 점을 노린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계산과는 달리 사면령이 내리지 않았다. 실록에 이렇게 전말이 기록됐을 정도니, 그는 아마도 사형을 당했을 것이다. 아내에게 “술을 빚어놓고 기다리라”던 호기가 무색하게도.

    이 사건에 대해 사관은 짤막하게 논평했다.



    이를 통해 풍습의 경박함과 잦은 사면의 폐단을 볼 수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고민해봐야 할 일이다.

    -중종실록 3년 1월 30일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 등 최고지도자가 사면령을 반포하는 것은 불완전한 법 제도를 보완하고 국민 통합을 도모하기 위해 시도하는 초법적인 통치행위다. 조선시대의 사면 역시 비슷한 취지로 시행됐다 한편으로는 민심 안정을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감옥의 죄인 수용 범위와 담당 관사의 사건처리 능력이 범죄자의 수를 감당하지 못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사면은 유용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그 폐단도 만만치 않았다.

    명종 2년(1547) 9월 17일, 명종은 선왕인 인종의 부묘(祔廟)를 계기로 사면령을 반포하겠다는 명을 내린다. 부묘란 삼년상을 치른 후에 그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것으로, 왕실의 경사 중 하나였다. 부묘를 하고 나서 사면령을 반포하는 것이 관례였기에 명종도 사면령을 내리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사헌부 대사헌 안현과 사간원 대사간 이명이 반대하고 나섰다.



    1년에 3회… ‘ 사면대왕’명종

    “삼년상을 치르고 부묘의 예를 마쳤습니다. 이는 더없이 큰 경사이니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관례이지만, 올해는 이미 두 번이나 대사면령을 내렸습니다. 지금 또다시 사면령을 내린다면 1년에 세 번이나 사면을 실시하는 것으로 옛날에는 없던 일입니다.

    사면은 하늘이 내린 벌을 무시하고 국법을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에, 옛 사람들은 너무 자주 실시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3년에 한 번 사면하는 것도 잘못이라는 비판을 받는데, 1년에 세 번이나 사면하면 어떻게 민심을 진정시키고 후세에 모범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근래에 해마다 사면을 자주 내리다 보니, 백성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간사함이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면을 명하는 교서를 내리자마자 감옥이 가득 차고, 심지어는 사면령이 내릴 것을 예측하고 의도적으로 죄를 짓기도 합니다. 간사함이 이렇게 자라나고 풍습이 날로 타락하니, 자연재해가 발생하는 것도 이것 때문이 아니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사면령을 내리지 마소서.” (명종실록 2년 9월 17일)

    부묘를 한 뒤 사면령을 내리는 것 자체는 관례이기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사면령을 너무 자주 내린다는 것이었다. 이미 같은 해 1월 중종의 부묘를 마친 후 첫 번째 사면령을 내렸고, 5월에는 가뭄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다. 이렇게 자주 사면령을 내리면 죄를 짓고도 처벌받지 않는 사람이 많아지고, 범죄율이 증가하며, 치안에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심지어 사섬시 노비처럼 사면령이 내릴 것을 예측하고 의도적으로 죄를 저지르는 일도 생긴다. 이 정도면 법은 있으나 마나 한 게 된다. 사관을 비롯한 신하들이 걱정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명종은 사면을 강행했다. 사면을 예상하고 죄를 지은 사람들도 아마 대부분 풀려났을 것이다. 이런저런 폐단에도 불구하고 사면은 조선에서 지속적으로 시행됐다. 당시에 비하면 제도적인 보완도 이뤄졌고 횟수도 많이 줄었지만, 현대사회의 사면 역시 여전히 문제점을 안고 있다. 어차피 사면받을 것을 알고 거리낌 없이 죄를 짓는 사람들이 요즘에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있다면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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