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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로 본 중국 | 지린성

고구려의 기상 청나라의 위력 만주국의 침탈 조선족의 혼돈

吉 | 韓中이 함께 키워낸 사과배

  • 글 · 사진 김용한|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고구려의 기상 청나라의 위력 만주국의 침탈 조선족의 혼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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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랴오닝의 대흥안령, 헤이룽장의 소흥안령, 지린의 장백산맥이 그리는 삼각형 안에 랴오허(遼河)와 쑹화(松花)강이 흐르고 만주 벌판이 펼쳐져 있다. 지린은 만주의 지리적 중심이다. 고대왕국 부여에서 근대 일제의 만주국에 이르기까지, 만주를 장악하려는 이들은 반드시 지린을 중심으로 삼았다. 발흥과 몰락이 공존하는 곳, 그러나 민초는 고단하다.

“동북삼성(東北三省)을 왜 여름에 가?”
중국인 친구는 내 여행 계획을 듣고 의아하게 여겼다.
“동북은 겨울에 눈과 얼음축제(冰雪節)를 보러 가는 곳이라고. 여름에 가면 재미없어(沒意思).”

나는 생각했다. ‘그래. 너희 한족들에게 동북은 눈 구경을 하러 가는 곳이겠지. 하지만 나는 고구려 사람들이 어떤 땅에서 살면서 말을 타고 질주했는지 보고 싶어. 너희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거야. 고구려가 우리 한민족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지린(吉林)성은 고구려 초기 근거지인 국내성이 있던 곳이다. 광개토대왕비가 있고, 민족의 성산(聖山) 백두산이 있다. 이런 곳을 돌아다니려면 추운 겨울보다는 북방의 바람이 상쾌한 여름이 제격 아닌가!

지린성의 약칭은 ‘길할 길(吉)’자. 지린성 한복판에 있는 지린시는 쑹화강이 흐르는 구릉지대다. 만주어로 ‘강가의 마을’을 ‘지린우라’라고 불렀고, 이 말을 한자로 음차한 ‘吉林乌拉’를 줄여 ‘지린’이 됐다. 현지어를 음차해서 중국식 지명을 지었다는 점에서 구이저우(貴州)성과 유사하다. 두 지역 모두 한족의 손이 미치지 못하고 원주민들이 세력을 떨치던 변경이었다.





‘강가의 마을’ 吉林乌拉

랴오닝의 대흥안령, 헤이룽장의 소흥안령, 지린의 장백산맥. 이 세 산맥이 그리는 삼각형 안에 랴오허와 쑹화강이 흐르고 만주 벌판이 펼쳐져 있다. 지린은 만주의 지리적 중심이다. 고대왕국 부여에서 근대 일제의 만주국에 이르기까지, 만주를 장악하려는 이들은 반드시 지린을 중심으로 삼았다.

지린 북쪽의 평야는 점점 높아져 중국과 한반도의 지리적 경계선을 이루는 장백산맥이 된다. 장백산맥의 최고봉 장백산, 즉 백두산은 2750m 높이에서 만주 벌판을 위풍당당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백두산 천지(天池)는 압록강, 두만강, 쑹화강이 발원하는 삼강지원(三江之源)이다. 하늘에 닿을 듯 위엄 있고, 생명 같은 물을 아낌없이 보내주는 백두산은 한민족뿐 아니라 동북아 여러 민족의 성산이요, 영산(靈山)이다.

부여는 지린 북부 평야지대의 첫 주인공이었다. 진수의 ‘삼국지 동이전(三國志 東夷傳)’이 말해주듯 부여는 “동이 지역에서는 가장 평평하고 앞이 탁 트여 있고, 오곡을 심기에 적당”한 2000리 땅에 8만 호(戶) 주민을 거느린 강국이었다. 부여는 기원전 2세기 초반에서 3세기 중반까지 500년 동안 동북의 왕자였으며, 494년 멸망할 때까지 700여 년을 존속했다.

부여의 전설적인 명성은 한반도까지 흘러들어 고구려와 백제 모두가 부여의 후손임을 자처했다. 특히 백제는 왕의 성씨도 부여씨였다. 예컨대 근초고왕의 이름은 부여구, 의자왕의 이름은 부여의자다. 백제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꾸고 사비성을 수도로 삼았다. 사비성은 오늘날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이 되었으니, 부여의 명성은 21세기에도 살아 있는 셈이다.

한편, 부여의 한 무리가 남쪽으로 내려와 현지 토착세력과 함께 세운 나라가 바로 고구려다. 고구려는 “산하의 형세가 험하고 견고”한 졸본(랴오닝성 환런현)을 첫 도읍으로 삼았다가, 압록강 유역의 국내성(지린성 지안)으로 수도를 옮겼다.



부여, 고구려, 백제

고구려의 터전은 부여와 크게 달랐다. 진수가 말했듯, 고구려는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평원과 호수는 없다. 산과 계곡을 따라 거주하고 계곡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으므로 비록 힘써 농사지어도 배불리 먹기에는 부족하다.”

진수는 부여인과 고구려인에 대해 크게 다른 평가를 내렸다. 부여인은 “키가 크고 성격이 강인하고 용맹하지만 조신하고 순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해 약탈하는 일이 없”는 반면, 고구려인은 “성격이 사납고 급하며 약탈과 침략을 좋아한다.” 이는 양국의 자연환경이 크게 달라 부여는 자체 생산력이 높아 자급자족하기 충분해 안으로 지킬 뿐 밖으로 원정을 나가지 않아도 됐던 반면, 고구려는 주변 지역을 정복해 물자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리라.

따라서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대외정복이 중요한 사업이었다. 도읍을 선정할 때는 “산과 물이 깊고 험”해 방어에 유리한 것이 최우선 고려사항이었고, 도성을 지을 때도 평지성 하나, 산성 하나로 두 개씩 지었다. 고구려인은 평소에는 평지성에서 살다가 전쟁 시에는 산성에서 농성했다. 이처럼 고구려는 철저하게 전쟁을 염두에 둔 국가였다.

그러나 정복전쟁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은 것은 위험성이 매우 컸다. 초창기에 주변의 만만한 소국을 칠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어느 정도 성장하자 강한 상대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가장 강력한 적은 중국이었다. 위나라의 관구검이 국내성을 함락해 불을 질렀고, 5호16국시대 전연(前燕)의 모용황이 또 한 번 국내성을 파괴했다. 전연에 참패한 고국원왕은 남부 정벌로 고구려를 중흥시키려다 역풍을 맞았다.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은 고구려군을 격퇴하고 평양성을 포위했으며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 즉위한 소수림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등 일대 개혁을 수행했다. 고구려는 삼국 중 가장 먼저 고대 국가 체제를 정비해 반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때맞춰 광개토대왕이 나타났다. 광개토대왕은 불과 18세에 즉위해서 20여 년간 남으로 백제, 북으로 거란·숙신, 서쪽으로 후연, 동쪽으로 동부여 등 동서남북을 종횡무진 정벌했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하며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전성기 다음은 쇠퇴의 내리막길이다. 고구려가 확장되자 귀족들은 자기들끼리 정벌의 성과를 두고 다툼을 벌였고, 왕권은 통제력을 잃고 약화됐다. 이때쯤 중국은 5호16국이 끝나고 남북조 시대가 되어 다소 안정을 찾았다. 또한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 역공을 펼쳐 고구려의 한강 유역을 빼앗았다.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낭만적인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에 주목하지만,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은 이야기 뒷부분이다. 온달 장군은 “한강 유역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비장하게 출전했지만 결국 한강을 되찾지 못하고 전사한다. 사람들이 온달의 시신을 관에 넣고 돌아가려 했으나, 여러 장정이 들려 해도 관은 꼼짝하지 않았다. 평강공주가 와서 관을 쓰다듬으며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됐으니 어서 돌아가도록 해요”라고 말하자 비로소 관이 움직였다. 이 설화는 고구려의 전성기가 끝났음을, 고구려인들이 한강도 지키지 못하게 된 처지를 원통해했음을 알려준다.



권력투쟁

외부의 도전은 더욱 거세졌다. 중국에서는 통일제국 수·당이 등장했고, 한반도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성장했다. 고구려의 권력다툼은 끝내 연개소문의 살육으로 이어졌다. 연개소문은 반대파 귀족 180여 명을 죽이고, 영류왕을 죽이고는 시체를 토막 내 도랑에 버렸다. 당시 고구려의 귀족 연립 체제는 3년마다 최고의 귀족이 ‘대대로’에 올라 나라를 다스렸지만, 연개소문은 ‘태대대로’에 취임해서 평생 철권통치로 반대파를 탄압하고 막강한 권세를 누리며 아들들에게 높은 자리를 주었다.

고구려는 초강대국 수·당의 침공을 막아냈지만,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방어전에 성공했을 뿐, 나라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백성의 살림은 거덜 났다. 연개소문이 죽자 억눌려왔던 모순이 폭발했다. 게다가 아들들끼리 권력 다툼을 벌이자 고구려는 안에서부터 무너졌다.



대조영의 대장정

그래도 700여 년 동북의 강자였던 고구려의 위명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고구려 부흥운동이 잇따라 일어나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을 요서 영주에 끌고 와 살게 했다. 이 지역은 오늘날 랴오닝(遼寧)성 차오양(朝陽)으로, 베이징과 랴오닝성의 성도 선양(瀋陽)의 중간에 있는 곳이다. 당나라가 만주를 장악하며 고구려인, 말갈족, 거란족 등 여러 북방민족을 이곳에 수용했다. 영주 관리가 무거운 세금을 거두는 것에 반발해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도 자신을 따르는 고구려인·말갈족과 함께 반란에 동참한다.

그러나 당나라의 정예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면 대결에서 패배한 대조영은 동쪽으로 도망쳤다. 중간에 천문령에서 당의 추격군을 격파한 후 다시 동쪽으로 피해 지린성 둔화(敦化)에서 발해를 건국했다. 영주에서 장장 2000리, 현대의 도로망으로도 800여 km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 터전을 되찾고 부여의 풍속을 소유”했다며 부여와 고구려의 후손임을 자처했다.

발해 이후 만주는 요·금·원이 돌아가며 차지하다 명나라 때는 여진족의 주무대가 됐다. 여진족의 성장에는 조선도 본의 아니게 한몫했다. 조선은 성종 때 전성기를 맞이하며 점점 사치에 빠졌다. 담비 모피를 입는 게 유행이 되자 여진족은 만주의 특산물인 담비를 팔고 대신 조선의 소, 말, 철, 농기구, 소금 등을 사들였다. 이 물품들은 생활필수품인 동시에 전략물자였다.

연산군 때 이미 “조선 양도의 소가 모두 담비 모피를 사들이는 데 사용됐고, 그 결과 조선민은 말에 멍에를 메어 경작하는 경우도 있게 됐다.” 중종 때에 이르면 소뿐만 아니라 말도 많이 유출돼 “예전에는 기병이 1000여 명이나 됐지만 지금은 겨우 사오십 명밖에 되지 않아, 변방에 사변이 생겨도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국방력이 약화되며 북방에서 여진족이, 남방에서 왜구가 기승을 부려 ‘변방의 일을 대비한다’는 비변사(備邊司)가 설치됐는데, 처음에는 비상 조직이었지만 외부의 침략이 많아지자 나중에는 아예 상설기구화했다.

조선이 약해지는 반면, 여진족은 강해졌다. 여진족은 조선의 소와 농기구로 농업생산력을 발전시켰고, 말과 철제 화살촉을 쓰며 군사력도 크게 강화했다. 임진왜란 때문에 명나라와 조선이 만주 지역의 감시·통제에 소홀해지자, 누르하치라는 영웅이 나와 만주를 석권했다. 이후 만주족의 청나라는 중국을 정복해 명나라의 뒤를 잇는 대제국이 됐다.

만주족은 만주를 신성시해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봉쇄했지만, 외부인들은 만주족이 만주의 보물인 인삼·모피·녹용 등을 독점하려는 수작이라고 여겼다. 엄격한 인구통제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족과 조선인이 만주로 들어갔다. 중원과 조선에 흉년이 한 번 들 때마다 만주의 인구가 부쩍 늘어났다.



대공황과 만주 침탈

만주족, 한족과 조선인들은 함께 만주를 일구며 만주의 주민이 됐다. 그러나 청나라가 망한 후 만주를 차지한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한발 빠른 근대화 덕분에 ‘아시아에서 벗어나 유럽이 되자(脫亞入歐)’던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했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아시아 최강이라고 뽐냈다. 1918년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면서 독일의 조계지였던 중국 산둥성 칭다오를 얻고 전쟁 특수로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전 세계를 덮쳤다. 선진국이던 미국·유럽도 큰 혼란에 빠졌으니, 기초체력이 훨씬 약한 일본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1931년 일본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가난한 농촌은 딸을 팔아 ‘딸지옥’이 됐고, 전국에 온 가족의 동반 자살이 잇달았다. 일본인들은 쌀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노동쟁의도 최고조에 이르렀다. 아시아 최고의 인재라고 자타가 공인하던 도쿄제국대 법학부 졸업생조차 겨우 26%만 취업할 수 있었으니 전체 실업률은 처참할 정도였다.

당시 일본 군부의 엘리트로서 ‘지략의 이시와라’로 불리던 이시와라 간지는 주장했다.

“(일본의) 국정은 거의 한계에 도달했고, 인구·식량 등 중요한 문제는 모두 해결책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광활한 영토와 자원이 있고, 중국대륙 침략의 근거지가 되는 만주·몽골 지역을 차지하는 것만이 일본이 살아날 유일한 길이다.”

1932년 일본은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국은 중국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립국’이지만 식민지 조선처럼 일본의 뜻대로 움직여야 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선통제)였던 푸이를 만주국 황제로 세웠다. 이미 중국은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중화민국 천하였다. 푸이는 아무런 힘이 없으면서도 만주에서 창업한 청나라 황실의 적통이므로, 일본이 찾던 ‘바지 사장’ 노릇에 적합했다. 힘이 없으니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청나라의 천자였으니 만주국을 대표하기에 완벽했다.


‘바지 사장’ 푸이

푸이는 청나라 황실을 중흥하고자 자충수를 뒀다. 푸이는 주장했다. “짐, 일본 천황폐하와 정신일체다.” 따라서 “만주국 황제에 불충한 자가 있으면 그것은 곧 일본 천황에 대한 불충이고, 일본 천황에 불충한 자가 있으면 바로 만주국 황제에 불충하는 것”이다. 푸이는 관동군의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이용해 관동군이 자신에게 충성하길 바랐다. 그러나 관동군이 푸이에게 충성할 리 없었다. 오히려 푸이는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긁으며 ‘매국노’가 됐다. 안팎의 지지를 모두 잃은 패착이었다.

만주국의 이상은 매우 화려했다. 만주에 사는 모든 민족이 협력하고 화합해(五族協和) ‘공존공영’하는 ‘왕도낙토’를 꿈꿨다. 만주국 홍보처는 자화자찬을 아끼지 않았다.

“만주국의 건국이상과 건국정신은 세계 역사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숭고한 것이어서…(중략)…세계의 정치학자는 만주국을 위해 새로운 정치학설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어이없는 자화자찬이지만, 비참한 현실에 염증을 느낀 많은 일본인이 환호했다. 많은 이상주의자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 꿈을 품고 만주 동토에 뼈를 묻었다. 오늘날 적지 않은 진보적 일본인조차 “그래도 만주국은 특별했다”며 만주국의 이상이 좌절됐음을 안타까워하는 이유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비참할 정도로 달랐다. 모든 일은 관동군에 의해 결정됐다. 한 프랑스 작가는 만추리아(만주)를 ‘마느캉추리아(마네킹 왕국)’로 불렀다. 프랑스어로 ‘마느킹(mannequin)’은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남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는 사람을 은유한다.

실권을 쥔 일본인들은 만주 현지의 사정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만주국은 후진국이므로 선진국 일본의 표준을 따라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한 만주인은 항변했다. “만계(만주계 인사)는 무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럽 정치학을 일본 학교에서 번역해 만주에 가지고 와서 조직의 망으로 덮어씌우는 것보다 만계 쪽이 만인에 대해서는 더 잘 알 것이다.”

민족차별은 일상까지 파고들었다. 전차를 탈 때 일본인만 특등칸에 탈 수 있었고, 중국인은 보통칸에만 탈 수 있었다. 만주국은 일본에서 온 이주민들에게 땅을 주기 위해 현지 중국인·조선인 농민들이 애써 일군 땅을 강제로 헐값에 매수했다. 농민들은 울부짖었다. “비적(匪賊)은 금품을 약탈하지만 땅까지 빼앗지는 않는다.”



비적보다 무서운 官匪

만주가 병참기지화하자 수탈은 더욱 더 가혹해졌다. 만주국은 생산비의 반값도 안 되는 가격으로 곡식을 사들였고, 온갖 물자를 징발했다. 많은 농민이 집뿐만 아니라 옷과 이불까지 빼앗긴 채 영하 40℃의 혹한을 맞아야 했다. “눈(雪)은 칼과 같이 벌거숭이 알몸을 난자했다. 온 천지에 원성이 가득했다. 토비(土匪, 도적)보다 더 무서운 것이 관비(官匪), 법비(法匪)다.”

일본과 타민족의 불화 앞에 한 관동군 막료가 토로했다. “만주는 일·만 제휴의 나라가 아니라 일·만 투쟁의 나라다.” “지금 만약 일·러 전쟁이 일어난다면 일본군 가운데 10개 사단 정도는 만주인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일본은 만주국의 자원에 의지해 제2차 세계대전을 수행했다. 1932년부터 1944년 사이에 일본은 2억2300여만t의 석탄, 1100여만t의 선철, 580여t의 철강을 동북에서 약탈했다. 그러나 끝내 일본은 패망했고, 1945년 8월 17일 만주국은 해체돼 13년의 짧은 역사를 마쳤다.

“낮에는 관동군 사령부가 만주국을 지배하고, 밤에는 아마카스가 지배한다”던 막후의 실력자 아마카스 마사히코는 유언과 같은 한마디를 남기고 청산가리를 마셨다.

“큰 도박, 원금도 이자도 없이 빈털터리.” 한판 도박에 모든 것을 잃은 만주국과 일본의 처지를 정확히 꼬집은 말이었다.
일제가 낳은 부산물 중 하나는 조선족이다. 일제강점기 전후로 많은 조선인이 만주로 갔다. 더러는 흉년의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더러는 출세하기 위해, 더러는 일제에 맞서 싸우러 갔다. 그리고 더러는 일제가 만주를 개발하기 위해 노예처럼 강제로 끌고 갔다.



조선족의 운명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가 ‘일송정 푸른솔’ 아래서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르는’ 풍경을 지켜보던 곳도 지린성이고, 독립운동사에서 길이 빛나는 청산리·봉오동 전투가 벌어진 곳도 지린성이다. 악에 받친 일제가 대학살(간도 참변)을 벌인 곳도 지린성이다.

조선족이 일제의 수탈에 시달리다 간신히 해방되자마자 6·25전쟁이 터졌다. 중국은 이 전쟁을 제2의 임진왜란으로 보았다. 해양세력이 한반도를 발판으로 대륙에 진출하려고 하고 있으니, 대륙이 아닌 한반도를 전장 삼아 해양세력을 축출하는 것이 중국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중국은 6·25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 즉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돕는 전쟁으로 규정하고, 조선족에게 “조국이 미제의 침략을 당하고 있으니 전쟁에 지원하라”고 호소했다. 많은 조선족 청년이 중국 인민지원군에 참전했다. 통역이 가능한 조선족은 비전투요원으로도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살아남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조선족이 고생 끝에 허허벌판 황무지를 간신히 푸른 논으로 만들었더니, 인민공사가 모든 땅을 접수했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참전했던 조선족은 ‘북한 간첩’이나 ‘남조선 특무’라는 누명을 쓰고 인민재판을 받았다. 조선족 대다수가 가난을 못 이겨 만주에 온 빈농 출신이었음에도 ‘조선에서 지주였던 반동분자’라는 모함을 받기도 했다.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조선족은 고유의 문화와 언어를 꿋꿋하게 지켰다. 언젠가는 ‘조국’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간직해서였을까. 조선족 작가 리혜선의 표현대로 “고국문이 처음 열렸을 때만 해도 사람들의 트렁크 속에는 그리움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점차 경제에 눈을 뜬 조선족은 청심환을 팔거나 일해서 돈을 벌려고 한국에 오기 시작했다. “1989년부터는 ‘뽕도 따고 님도 보고’ 식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그리움 외에도 비즈니스 계획이 더 들어 있었다.”



한국의 이중성

재회의 감동은 순식간에 끝나고, 어느새 미움과 갈등이 자라났다. 초창기에 일하러 온 조선족은 상당수가 불법체류자여서 기본적인 인권을 보호받지 못했다. 노동량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임금을 제때 받기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임금 체불은 다반사고 아예 떼어먹히는 일도 흔했다. 불법체류자 신분이어서 권리를 박탈당하고도 죄를 지은 듯 숨어살아야 했다.

“병들어 죽어도 묻힐 곳이 없고, 임금 체불을 당하고도 신고할 곳이 없고, 산재 피해를 당해도 법을 이용해 자신을 보호할 수 없고, 검문당하면 빚더미를 진 채 강제 출국을 당하고, 차별을 당해도 감내하기만 해야 한다.”

조선족은 빈부갈등, 노사갈등을 겪을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인권도 없고 숨도 편하게 쉬고 살 수 없었다. ‘고국이고 동포인데 너무하네’라는 원망이 자랐다. 조선족은 한국과의 첫 만남인 출입국심사대에서부터 차별을 느꼈다. 심사관이 미국 교포가 오면 반색을 하면서, 중국 조선족이 오면 인상을 찌푸린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중국 조선족이나 미국 조선족이나 다 똑같은 사람인데 차별하지 마세요!” “부잣집에 시집간 딸만 딸이고, 가난한 집에 시집간 딸은 딸도 아닌가요?”

그런데 실제로 대한민국은 조선족을 말로만 동포라고 했을 뿐 현실적으로 동포로 여기지 않았다. 한국의 재외동포법은 “1948년 대한민국 수립 후에 나간 사람”만을 동포로 인정했기에 일제강점기에 이주한 조선족은 법적으로 동포가 아니었다. ‘재외동포법이냐, 제외(除外)동포법이냐’라는 비판까지 나왔다.

2001년 ‘재외동포의출입국과법적지위에관한법률(재외동포법)’이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판결에 따라 2004년 법이 개정됐으나, 정작 법무부의 시행령은 ‘불법체류 다발 국가’ 동포들의 자유 왕래를 제한했기 때문에 이름뿐인 법 개정이었다. 2007년 방문취업제와 2008년 재외동포법 개정을 통해서야 조선족은 비로소 동포로 인정받은 셈이다.

2015년 현재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은 약 190만 명이고, 그중 절반인 95만 명이 중국인이다. 또 중국인 중 한국계 중국인은 63만 명으로 전체 외국인 중 33%를 차지한다. 즉, 한국에 사는 외국인 3명 중 1명은 한국계 중국인이다. 어느새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 되었다.


두 마리 도롱뇽

그러나 그 이웃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검색 엔진에서 ‘조선족’이라고 입력하자마자 화려한 자동검색어들이 튀어나왔다. 조선족 여자, 조선족 범죄, 조선족 도우미, 조선족 살인, 조선족 사건사고…. 조선족이 한국을 본격적으로 찾아오기 시작한 지도 어언 20년이 넘었지만, 조선족에 대한 시선이 여전히 곱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연관검색어들이었다.

조선족은 법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동포 취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조선족 작가 금희는 소설 ‘세상에 없는 나의 집’에서 조선족이 중국인·한국인에게 느끼는 이질감을 토로한다.

“(한국인과 조선족은) 아주 많이 닮아 있었지만, 같은 배경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은, 곧 분화의 위기에 놓인 두 마리의 도롱뇽 같아서 도무지 같은 시각으로 함께 현실을 해석할 수 없었다. 반면 (중국인과 조선족은) 애초부터 한 배경 속에서 살고 있는 오리와 닭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와 배경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개인적인 습관과 취향을 송두리째 공유할 수는 없었다.”

한국과 중국 중에서는 그래도 중국이 더 포용력이 있다. 한국인은 조선족더러 중국 사람 다 됐다, 중국 냄새가 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정작 중국 냄새의 진원지인 이곳(중국)에는 하나가 아니라 몇 십 개의 냄새가 뒤죽박죽 섞여 있어서 사람들은 누구의 냄새가 어떠한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냄새가 어딘가 자기의 것과 다르다고 여기면서도 어차피 ‘중국’ 냄새라는 것에서는 동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조선족은 법적으로 ‘중국 공민’이다.



옌볜, 227만 중 조선족 80만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 사회는 큰 전환기를 맞고 있다. 개혁개방 전에는 이동이 자유롭지 못해서 오히려 조선족 사회를 유지하기 쉬웠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이동이 자유로워지자 젊은 층은 더 나은 기회를 찾아 중국 대도시나 해외로 나가는 반면, 옌볜 등 조선족이 많이 살던 지역에 한족이 대거 이주해오며 조선족 입지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2015년 현재 옌볜 조선족자치주의 227만 인구 중 80만 명이 조선족이다. 자치주가 되려면 소수민족의 인구 비율이 30% 이상이라야 하는데, 옌볜은 조선족 비율이 35%에 불과해 아슬아슬하게 자치주 자리를 지키고 있다. 더욱이 이 비율은 계속 감소 중이다.

또한 중국 각지로 흩어진 조선족은 예전처럼 조선족끼리 뭉쳐 조선족 사회를 이루기보다는 중국인과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조선족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중국인으로서 산다.

중국이 약했을 때 동북은 외세 침략의 교두보였지만, 중국이 강해진 지금은 세계로 뻗어갈 수 있는 무대다. 그러나 지린성은 크나큰 취약점을 갖고 있다. 동해와 매우 가깝지만 항구가 없다. 부동항을 탐내던 러시아가 제2차 아편전쟁에서 승리하고 1860년 베이징조약을 체결해 연해주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동방을 정복하라’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세워 태평양 진출의 거점으로 삼았다. 반면 지린성은 항구가 없어 랴오닝의 다롄을 이용해야 했다. 만주 한복판에서 항구까지 가는 물류비가 만만치 않아 오늘날 지린은 동북3성 중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이 되었다.


항구 빌려 바다로…

중국은 이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항구를 빌려 바다로 나간다(借港出海)’는 전략을 수립했다. 북한의 나진·청진항을 빌려 동해로, 태평양으로 나가겠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중국은 지린성에서 북한으로 가는 교통로인 창춘-지린-두만강 지역을 개발하는 ‘창지투(長吉圖) 개방 선도구’ 사업을 진행 중이다.

우선 중국·북한·러시아 3자 교역이 기대된다. 2011년 두만강의 국경도시인 지린성 훈춘을 방문한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말했다.

“러시아는 광학이 발달해 있어 망원경이나 현미경 등이 싸고 질이 좋다. 우리 일행 모두 러시아제 군용 망원경을 하나씩 샀다. 북쪽 지역을 잘 관찰하려고 중국 땅에서 러시아제 망원경을 사니, 이곳이 세 나라가 얽혀 있는 국경도시라는 것이 실감났다.”

여기에 한국과 일본, 동남아까지 가세한다면 나진항은 동북아에서 손꼽히는 항구가 될 수 있고, 지린성 역시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2016년 이종석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북·중 국경지대를 답사한 후, 유엔의 대북 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북·중 교역은 활발하고, “특히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 이후 북·중 교역이 현저하게 늘어나는 추세라는 것이 현지 무역 관계자들의 공통된 평가였으며, 단순한 외부 관찰만으로도 북한 경제 상황의 호전 추세를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중국과 북한의 정치적·경제적·안보적 관계는 매우 끈끈하고, 지린성과 나진항은 그 관계의 중심축이다.

리혜선의 ‘사과배 아이들’은 조선족이 사과배를 키워내는 사연을 담은 동화다. 조선의 사과나무는 만주와 풍토가 맞지 않았다. 그러자 조선족은 중국의 배나무와 조선의 사과나무를 접지해 사과배를 탄생시켰다. 사과배는 “사과같이 예쁘고 달고, 배같이 물이 많고 시원”한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새 과일”이 됐다. 리혜선은 사과배에서 조선족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조선족은 중국의 풍토에서 조선의 문화를 품고 자란 독자적인 존재임에 긍지를 느낀다. 사실은 조선족의 고향인 지린성 자체가 중국과 한국이 함께 길러낸 사과배와 같은 땅이리라.




김용한
●  976년 서울 출생
●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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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사진 김용한|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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