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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자연식 삶’ 연구가 김정덕

“오르가슴이 뭔 줄 알아? 머리와 마음이 하나 되는 게야”

  •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자연식 삶’ 연구가 김정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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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식 삶’ 연구가 김정덕

황톳물로 두 손자를 목욕시키는 김정덕 할머니. 더운 여름에도 세 손자를 꼭 안고 잘 만큼 그의 손자 사랑은 지극하다.

남편이 죽자 시집에선 재산과 함께 아이들을 데려가버린다. 그 무렵 친정에 들렀을 때 영화를 하나 봤다. 제목이 ‘야생녀’였다.

“수전 헤이워드와 타이론 파워가 나오는 영화였어. 수전이 나처럼 과부가 되어 묘지 앞에 섰는데 비가 내리고 어찌어찌해서 사랑이 싹트는 장면이 나와. 그걸 보고 결심했어. 3년상이 다 뭐냐? 그건 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일 뿐이다. 난 수전처럼 좋은 사람 만나 마음껏 연애도 하면서 살 거다!”

“인생도 실루엣이 중요한 거야!”

홀로 된 그를 일본 사는 큰언니가 불러들였다. 갓 서른이었다. 우선 문화복장학원이라는, 신부수업을 주로 하는 학원에 등록한다. 거기서 일본식 고급 교양을 마스터한다. 의상 디자인, 재봉뿐 아니라 조리법, 차, 꽃꽂이, 인테리어, 에티켓을 두루 배웠다. 문화학원에서 어린 아이들 틈에 끼여 ‘명실공히 과부가 된’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갈급하게 빨아들였다. 물론 길 가다 서울에 두고 온 아이들만한 또래를 만나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만큼 숨이 막혔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견뎠다.

그는 손재주도 조형감각도 빼어난 사람이다. 어느 날 우연히 신주쿠에서 종이접기 워크숍을 구경한다. 커피숍에 50여 명이 둘러앉아 화지(닥나무로 만든 일본 종이)로 그날의 테마인 대나무와 참새를 접는 행사였는데, 그날 모임을 주도한 이는 일본 오리가미의 대가 다카하마 도시에였다. 그 정교한 입체와 다채로운 상상력에 한눈에 반했다.



그날 이후 그는 책상 한켠에 항상 색종이를 비치하고 종이접기 광이 되었다. 종이접기에는 명장마다 고유한 법이 있고 위(位)가 있어 도용하면 법에 저촉되기도 했지만 그는 혼자 자신의 법을 만들어 나갔다. 종이를 접고 있으면 만사를 잊었다. 머릿속에 들어 있던 꽃과 새와 동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종이를 접노라면 “숨은 다듬어지고 꿈은 이루어졌다.” 정기신보 귀본원(精氣神寶歸本源)의 삼매경을 맛봤다.

문화학원을 다니던 중 한 미술잡지에서 ‘당신의 재주를 테스트해보지 않으시렵니까?’란 현상공모를 봤다. 종이를 접어 보냈다. 시니컬한 주제였다.

“인생을 비웃고 희롱하는 내용이었어요. 남녀 성기를 꽃처럼 접어 큰 판에다 여러 개 붙인 거였지. 난 과부니까 아름다운 섹스를 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고 떠들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그게 일등으로 당선 됐다. 부상은 주최측인 고단샤(講談社)에서 운영하는 디자인 스쿨(미국 패이머스 스쿨의 분교)에서 2년간 무료로 공부할 수 있는 특전이었다. 김정덕은 비로소 날개를 달았다. 디자인뿐 아니라 그래픽, 레터링, 일러스트 등 생활미술 전 분야를 배웠다.

“날마다 하네다 공항에 스케치하러 다녔어요. 국제공항이라 2분에 1대씩 외국 비행기가 도착하고 비행기 안에서 패셔너블한 국제 멋쟁이들이 와르르 내리거든. 거기 가서 사람들을 스케치해 와서 그걸 함께 평가하고 분석하는 게 공부였어요.

그때 우리 디자인 선생이 했던 말이 지금도 쟁쟁해요. 살다가 피곤이 몰려오거든 기차여행을 해라, 바느질을 꼼꼼하게 하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실루엣이다, 인생도 디테일이 아니라 실루엣이 중요한 거다!”

복장학원이 일본 체류의 구실이었다면 패이머스 스쿨은 그를 전방위 디자이너로 키웠다. 지금 병천에서 쓰다 남은 자투리천으로 그가 만드는 치마, 바지, 저고리, 블라우스, 모자, 보자기들…. 머리가 산란해지거나 조금의 틈만 생겨도 들어앉아 그것들을 만들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의 바느질 중독증세는 당시 몸에 밴 병통이다.

그가 만드는 이 세상 하나뿐인 치마나 저고리의 디자인과 배색과 비례감에 나는 아주 반했다. 다 그만두고 이런 천연염색, 손바느질 옷만 만들어도 김정덕은 그 방면 최고가 될 것이다, 진심으로 치켜세워도 그는 “돼서는 뭐하는데?” 시들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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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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