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호

‘선진국 만들자’ 도원결의 서울법대 82학번 드라마

“다음 세대에 선진국 물려줄지가 제군들 어깨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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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입력2023-01-1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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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법대 부임한 소장파 경제학자 박세일

    • 나라 발전시킬 정책 펼쳐 선진국 만들라

    • 젊은 교수 열정에 제자들 법경제학회 꾸려

    • 사법고시 대신 행정고시 봐 관료로 진출

    • 주말마다 테니스코트서 열린 ‘미니 국무회의’

    • 박세일이 남기고 간 ‘공동체 자유주의’

    아주 먼 얘기는 아니다. 반만년을 이어온 유구한 대한민국 역사에서 고작 70년이란 아주 짧은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이 끝난 1953년, 한국인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였다. 그 돈으로 365일을 살았다.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겨야 했던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이다. 광복은 천당, 전쟁은 지옥을 경험케 했다. 폐허 속에서 그들은 ‘잘살아 보겠다’며 이를 악물고 해외로 나가 외화벌이에 나섰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 베트남전쟁 참전용사, 그리고 열사(熱沙)의 나라 중동 건설 현장에서 피땀 흘려 일했다. 그들이 벌어들인 달러는 한국 산업화 종잣돈 구실을 했다. 1968년 한일협정 때 청구권 자금으로 포항에 제철소를 짓고, 울산에 석유화학 단지를 건설해 중화학공업을 일으킨 덕에 빠른 시간 안에 도약할 수 있었다. 앞 세대의 눈물 어린 노력 덕에 1인당 국민소득은 1953년 67달러에서 1982년 1991달러로 30년 만에 30배 가까이 늘었다.

    한국의 ‘가난’ 극복 비결은 ‘우수한 인적 자원’에 있다. 6·25전쟁 이후 1960년대 초까지 대학입학시험 고득점자 상당수가 건설·토목학과에 진학했다. 폐허에서 다시 한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입시에 투영된 결과다. 우수한 건설·토목 인재 덕에 한국은 많은 이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고,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기적같이 완수해 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1970년대 초까지는 화학과·화학공학과에 인재가 몰렸다. 그들은 한국의 석유화학공업을 일으키는 데 중추 구실을 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물리학·전자공학과에 인재가 몰렸다. 한국이 반도체 강국으로 우뚝 선 데는 그들의 노력이 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20년 넘게 의대에 뛰어난 인재가 몰리고 있다. 최근 바이오와 헬스케어 분야에서 한국 기업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인재들이 모여 치열하게 연구한 결과가 세계적 성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에 태어나 풍요 속에 성장한 이들 눈에 지금 눈앞에 펼쳐진 대한민국 발전상은 당연(當然)한 것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자원도, 자본도 부족한 한국이 전쟁의 폐허를 딛고 불과 두 세대 만에 세계 10위 경제대국으로 고속 성장한 이면에는 밤잠을 줄여 일하고 주말도 반납하고 치열하게 살아온 아버지 세대의 노고와 헌신이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광복 전후 세대가 산업화 주역이었다면, 1955년부터 1963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는 민주화와 선진화를 이끈 세대다. 그들이 대학을 다닌 1980년 전후 한국은 혼돈 그 자체였다. 18년간 장기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10·26과 전두환 일당이 정권을 찬탈한 12·12 쿠데타가 있었다. 사회 혼란상은 극에 달했다. 그 정점에 1980년 5·17 비상계엄 확대와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자리하고 있다. 1972년 유신 개헌 이후 분출되기 시작한 민주화 열기는 긴급조치 세대와 1980년 서울의 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거쳐 1987년 6·10민주항쟁 때 정점을 찍었다. 국민이 직접 최고 통치자를 뽑는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것은 1970∼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이들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등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양김(兩金)이 차례로 대통령에 당선함으로써 대한민국은 선거를 통해 수평적 정권교체가 가능한 명실상부한 민주국가가 됐다.

    젊고 패기 넘치던 교수

    ‘한반도 선진화’를 주창한 고 박세일 서울대 법대 교수. [동아DB]

    ‘한반도 선진화’를 주창한 고 박세일 서울대 법대 교수. [동아DB]

    베이비붐 세대 막내가 대학에 입학한 1982년은 산업화와 민주화가 교차하는 미묘한 시기다. 그해 대학에 입학한 이들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일부는 당시 눈앞에 펼쳐진 군사정권의 폭압에 맞서 민주화운동의 길을 걸었다. 다수 모범생은 묵묵히 입신양명을 꿈꾸며 책을 파고들었다. 로스쿨 도입 전까지 서울대 법대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최고 인재 집합소였다. ‘법’을 전공한 그들의 예상 진로는 단순했다. 사법시험을 패스해 검사, 판사가 되거나 변호사로 법조인의 길을 걷는 게 일반적 수순이었다.



    사법시험을 목표로 법대에 입학한 그들 앞에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젊고 패기 넘치는 한 교수가 등장했다. 미시경제, 거시경제, 법경제학 등 서울대 법대 82학번에게 해마다 경제 관련 과목을 강의한 그는 학생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여러분은 우리 사회로부터 엄청난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잘살게 되고, 교육 시스템이 잘 작동했기에 여러분이 편하게 공부할 수 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사회로부터 받은 혜택을 보답하며 살아라.”

    젊은 교수의 명쾌한 주문에 많은 법대생의 마음이 요동쳤다. 그 교수는 사법고시를 보려 법대에 진학한 법대생들에게 행정고시를 권했다. 당시 그에게 수업들은 제자들이 전하는 그 교수의 지론은 이랬다.

    “사시 패스한 사람은 어떤 사건이 벌어진 다음, 잘잘못을 따져 뒤처리하는 일을 주로 한다.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지금 한국에는 그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다. 후진국에서 이제 막 벗어난 대한민국을 어떻게 발전시켜 다음 세대에게 선진국을 물려줄 것이냐 하는 과제가 여러분 어깨에 달려 있다. 공직자가 돼 나라를 발전시키려면 무슨 정책을 펴야 하는지, 선진국이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남보다 앞장서 고민하기 바란다.”
    젊은 교수의 진정 어린 호소에 감동받은 법대 82학번들은 ‘법경제학회’라는 학회를 만들었다. 학회에 참여한 이들 대부분은 젊은 교수의 말씀을 좇아 ‘사시’에서 ‘행시’로 진로를 바꿨다.

    1982년 사시 정원은 100명에서 300명으로 크게 늘어 고시에 패스할 확률로만 보면 사시가 더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법대 82학번 중 상당수는 정원이 100명에 머문 행시에 도전했고, 시험을 통과해 공직자의 길로 들어섰다.

    최병환 전 국무조정실 차장은 “서울 법대 교수로 부임한 박세일 교수 수업을 함께 들은 동기들이 ‘법경제학회’를 만들어 함께 공부했다”며 “사회 진출을 고민하던 시기에 박 교수님 말씀에 공감하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공부 모임이 확대됐다”고 말했다.

    기획재정부 차관을 거쳐 윤석열 정부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으로 일하는 최상목 수석, 기획재정부 차관을 지내고 20대·21대 재선 의원이 된 송언석 국민의힘 의원, 경기도 행정부지사를 지내고 21대 국회의원이 된 박수영 의원 등이 ‘법경제학회’ 멤버다, 윤상수 주샌프란시스코 총영사, 이상래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 김학균 한국거래소 코스닥시장위원장,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차관을 지낸 김용수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이사장, 김재정 전 국토교통부 기획조정실장, 류순현 전 세종특별자치시 행정부시장, 정병원 전 주밴쿠버 총영사, 최병환 전 국무조정실 차장, 박순기 해외자원개발협회 부회장, 신창동 전 포스코에너지 부사장, 안완기 한국생산성본부 회장, 정경순 전 감사원 공직감찰본부장, 김영모·정규상 태평양 변호사 등도 ‘법경제학회’에서 동문수학하고 ‘공직’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서울대 법대 82학번이다.

    서울 법대 82학번 공직자들은 두 달에 한 번꼴로 스승에게 “공직자로서 사리사욕을 멀리하고 나라를 위해 일하라. 대한민국 선진화에 필요한 좋은 정책 발굴에 힘쓰라”는 정신교육(?)을 받았다.

    서울 법대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며 82학번 법대생을 ‘대한민국 선진화 주역’으로 길러낸 이는 김영삼 정부 청와대에서 정책기획수석비서관, 사회복지수석비서관을 역임한 고(故) 박세일 교수다. 대학 1학년 때 처음 만나 그가 세상을 떠난 2017년까지 서울 법대 82학번 상당수는 35년 가까이 박 교수와 꾸준히 교류해 왔다.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은 “박세일 선생님은 건국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의 길을 걸어온 대한민국은 앞으로 선진화로 가야 한다”며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경험한 우리 세대가 선진화의 주역이 돼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고 회고했다.

    주말마다 테니스코트에 모이다

    공직에 진출한 서울 법대 82학번들은 주6일 근무 때는 매주 일요일 아침, 주5일제 도입 이후에는 매주 토요일 아침에 모여 친목을 다졌다. 처음 1시간은 ‘경제’를 주제로 토론하고, 이후 2시간 동안 조를 나눠 테니스를 쳤다. 당시 토론 교재는 세계경제 흐름을 깊이 있게 다룬 영국 매거진 ‘이코노미스트’였다.

    “주말마다 테니스코트에서 법대 82 공직자 친목 모임이 열렸다. 운동으로 업무 스트레스도 풀고, 우의도 다질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때로 첨예한 현안이 있을 때는 각 부처 입장을 서로에게 설명해 줘 이해를 돕기도 했다.”

    서로 다른 부처에서 일하던 ‘법대 82 공직자’ 모임이 범정부 차원의 업무를 토론하고 부처 간 입장차를 조율하는 비공식 ‘미니 국무조정실’ 기능을 한 셈이다.
    박 의원은 “공직에 진출한 법대 82학번 사이에는 ‘공적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과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다”며 “박세일 교수님이 ‘대한민국 미래가 여러분 어깨에 걸려 있다’ ‘공직자가 일을 잘해야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다’고 끊임없이 사명감을 되새겨 주신 덕분”이라고 말했다. 공직에 진출한 서울 법대 82학번들은 대학 입학 40년이 지난 2023년 현재에도 요소에서 대한민국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들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려는 것일까. 박수영 의원은 서울 법대 82학번의 남은 사명을 이렇게 설명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제도를 도입한 이는 모두 보수 성향 정치인이었다. ‘자유’를 존중하는 보수는 그 밑바탕에 ‘공동체’를 지키겠다는 인식이 강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자유’에 방점을 찍고 있지만 취임식 전문 전체를 보면 자유와 공동체, 즉 자유와 연대를 강조하고 있다. 보수 우파의 근본 사상은 박세일 교수님 지론처럼 공동체 자유주의다. 진짜 진보는 ‘평등’과 함께 ‘공동체’를 중시한다. 그래서 진짜 보수, 진짜 진보가 만나면 공동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에 싸울 필요가 없다. 문제는 결과적 평등만 주장하는 가짜 진보가 득세해 포퓰리즘에 빠졌을 때다.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으면 극단적 갈등으로 흐르기 쉽다. 우리가 대학에 입학한 1982년 목표로 한 한국의 경제 선진화는 어느 정도 이뤄졌다. 남은 과제는 양극단으로 치닫는 정치를 바로잡는 것이다. 정당이 서로 달라도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서로 연대해야 한다. 우리가 앞장서 정치개혁의 물꼬를 터 다음 세대가 대화와 타협이 가능한 합리적 정치를 할 수 있는 정치 선진국 토대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겠다.”

    행시로 공직에 진출한 법대 82학번 외에도 사시를 통해 검사, 판사를 거쳐 정치권에 입문한 이도 많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나경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그들이다.

    대한민국은 2022년 현재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 경제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어떻게 정치적으로 선진화를 이룰 것이냐다. 대학 졸업 후 공직에 진출해 대한민국 경제 선진화에 기여한 서울 법대 82학번들이 정치 선진화에 어떻게 기여할지 지켜볼 일이다.



    구자홍 기자

    구자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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