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의 유신체제와 1980년대 초·중반의 신군부 통치는 한국의 대선 정치를 또 다시 왜곡·굴절시켰다. 그 이유는 1972년부터 1987년까지 15년 동안 한국정치에서 대통령 직선제 자체가 사라졌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한다.
현대 한국정치의 최대 암흑기라고 부를 만한 이 기간에 군부독재의 청산과 민주주의 쟁취가 시대적 과제로 부상했는데 그것의 최대 가시적 상징이 바로 대통령 직선제의 회복이었던 것이다. 되돌아보아 대통령 직선제가 곧 민주주의로 인식되던 당시의 분위기는 물론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대통령 직선제 자체는 민주주의의 작은 출발일 뿐 민주주의를 위한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저 그것이 모든 국민의 절대적 염원인 양 간주되는 동안 과연 무엇을 위한 대통령 직선제인지, 또한 누구를 위한 대통령 직선제인지에 대한 냉철한 성찰은 생략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른바 3김 혹은 양김(兩金) 정치의 양면성과 이중성을 발견하게 된다.
후세의 어떤 사가(史家)가 1970년대 이후 30여 년간의 한국정치를 ‘3김 시대’로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정사(正史)에는 유신독재와 신군부의 명멸, 그리고 민주적 전환이 있었지만, 그 막후와 배후, 그리고 이면에는 항상 ‘3김 정치’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바로 그들이야말로 한국정치 무대의 최장기 출연 배우였다고 말할 수 있다. 민주화 투쟁에 관련하여 3김, 특히 양김의 공헌은 역사적으로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한국의 민주주의에 남긴 부정적 유산 역시 은폐되거나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의인화(擬人化)함으로써 대선을 단순한 인물 콘테스트로 변질시켰다. 그들은 국민을 위한 민주화 투쟁에 시종일관 철저하기보다는 그것을 개인적 야망과 연계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1950년대 이래 쟁점 없는 선거, 정책 빠진 대선이라는 한국정치의 불미스러운 전통은 양김을 거치면서도 불식되지 못했다. 혹자는 그와 같은 인물중심 선거 판도가 민주·반민주 구도 하에서 불가피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김영삼·김대중 양김이 대권을 장악한 것은 1990년대의 일로 민주적 전환이 이미 이루어진 시점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통해 출범한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 둘 다 궁극적으로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 체제로 귀착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하등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양김은 국정운영 자질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각론적인 검증 절차 없이 민주화 투쟁의 주역이라는 상황적 프리미엄과 지역 패권주의에 입각한 전근대적 지지기반을 업고 대통령직에 올랐다. 심지어 그들에게는 인격윤리나 도덕성의 잣대조차 날카롭게 적용된 적이 거의 없다. 민주적 개방에 이은 민주적 전환, 그리고 민주주의의 공고화라는 일반 단계에 비춰볼 때 우리 나라의 경우 YS와 DJ의 집권은 시기적으로 훨씬 더 빨랐어야 한다. 아니면 민주주의의 공고화가 필요했던 시점에 하필 정치적 절정기를 구가한 3김 시대가 우리나라의 민주화나 정치발전에 반드시 유익했던 것인가 하는 의문도 있을 수 있다.
정당보다는 인물, 정책보다는 도덕성이 우선되는 묘한 풍토
오는 12월에 실시되는 대선의 역사적 의의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3김 시대 이후의 한국정치가 새롭게 선보인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선 정국에서 한국정치의 희망을 발견하기는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정당보다는 인물, 그리고 정책보다는 도덕성이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되어 있는 데다가 포지티브가 아닌 네거티브 캠페인, 그리고 적극적이 아닌 반사적 이익이 더욱 효과적인 선거전략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해 지역주의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고 지적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낮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역시 영남지역에서 안정적 강세를 보인다. JP의 몸값이 아직도 하락하지 않은 까닭도 그의 충청도 기반 때문이다. 국민경선과 함께 불었던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노풍 역시 그 진원지가 호남이라는 점에서 사실은 지역주의를 오히려 강화한 측면이 있다.
결국, 좋든 싫든 지난 수십년 동안 3김에 의해 나름대로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던 한국정치는 이번 대선을 앞두고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대선을 두 달 정도 앞둔 시점에도 창당이 여러 갈래로 분주히 논의되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 증거다. 이는 정당이 대선 후보를 내는 것이 아니라 대선 후보가 정당을 만들어온 한국정치의 후진성을 숨김없이 고백하는 일이다. 철새 정치인을 비난하기 전에 철새 정치인을 양산하는 정당정치의 전근대성을 먼저 비판해야 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 세상에 ‘창당 전문가’라는 직업이 있을까? 물론 우리 나라에는 있다. 한 개인의 정치역정에서 얼마나 많은 정당을 만들어 보았으면 ‘창당 전문가’라고 평가되는 정치인이 있겠는가.
게다가 차별화된 정책을 둘러싼 후보자간의 진지한 토론은 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역대 대선이 그랬듯이 이번에도 부는 것은 오직 각종 바람 풍(風) 뿐이다. 북풍, 총풍, 세풍, 병풍 등 과연 한국정치에는 바람 잘 날이 없나보다. 그런데 유권자인 국민을 우롱하는 것은 정치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책임 또한 묘연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이회창 후보를 둘러싼 병풍의 경우를 보자. 이후보 측 아니면 민주당 측 둘 가운데 한 곳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서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책임을 전가한다. 이는 유권자의 투표 의욕을 감퇴시키는 정치권 전체의 오만과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일은 병풍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에 부는 대부분의 바람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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