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호

서울현충원 風水정치학

1평 채명신 묘가 80평 YS·DJ 묘보다 吉地?

  •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략기획팀 편집위원 | hoon@donga.com

    입력2016-01-26 10: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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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재기’의 동작(銅雀)이 ‘금계’ ‘공작’ 거쳐 봉황으로
    • 폭정에서 살아남은 창빈 안씨의 후덕(厚德)
    • ‘身後之地’ 버리고 창빈 안씨 묘에 붙은 DJ 묘
    • YS, 아들에게 자신이 묻힐 곳 돌아보게 했다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이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다. 지난해 11월 서거한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을 모신 데다, 그의 장지에서 둥근 돌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묏자리를 정한 지관(地官) 황영웅(70) 영남대 환경보건대학원 객원교수(풍수지리 전공)는 이를 ‘봉황의 알’로 풀이해 더 큰 화제를 낳았다.
    서울현충원은 지형이 일정한 높이의 산이 감싸 돌다 정문 쪽으로만 터진 ∩ 모양이라 아늑하다. 큰 새가 날개를 부풀렸다가 그 끝을 마주하면서 오므려 감싼 모양으로 볼 수도 있다. 새가 날개를 부풀려 감싼 자세로 알을 품을 리 없지만, 사람들은 이 지세(地勢)를 ‘포란형(抱卵形)’으로 보고자 했다. 품은 알에선 생명이 태어나니 그곳은 생지(生地)가 된다. 지관들은 사지(死地) 아닌 생지를 명당으로 본다.



    누구는 서울, 누구는 대전?

    ‘동작(銅雀)’을 직역하면 ‘구리 참새’다. 그런데 이곳이 명당으로 알려지자 참새는 금계(金鷄)가 됐다가 공작(孔雀)에서 봉황으로 커졌다. 금계포란형이 공작포란형을 거쳐 봉황포란형으로 불리게 된 것. 그렇다면 알을 상징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없었다. 그런 차에 거산의 묏자리에서 나온 둥근 돌을 ‘봉황의 알’이라 하자, 많은 이가 갸웃했다. 봉황은 대통령의 상징이니 거산은 혈(穴)자리에 묻힌 것인가.
    논란이 일었다. “거산이 명당에 들어갔다” “아니다, 진짜 혈은 다른 곳에 있는데, 그보다 못한 곳을 팠다”…. 풍수인들은 명당의 발복(發福) 기간을 4대 100년 남짓으로 본다. 따라서 향후 100여 년간 거산 집안의 변화를 본다면 명당 여부를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현충원은 선망받는 곳이다. 그런데 1985년 거의 만장(滿葬)됐기에, 이곳에 들어가려면 화장을 해 2006년 서울현충원 안에 개장한 ‘충혼당’에 납골해야 한다. 흙에 묻히는 안장(安葬)을 원한다면 1985년 개장한 국립대전현충원으로 가야 한다.
    1990년 윤보선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유족은 고향(충남 아산)을 장지로 택했다. 그 때문에 2004년 대전현충원에 국가원수 묘역을 만들어 2006년 서거한 최규하 전 대통령을 모셨다. 그러나 2009년 자살로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화장해 고향(경남 김해)에 안장됐고, 2009년 서거한 후광(後廣) 김대중 전 대통령과 거산은 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그러자 “어떤 대통령은 억지로 자리를 내 서울로 가고, 어떤 대통령은 대전으로 가느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노 전 대통령은 국민장을 했는데, DJ는 왜 국장을 치렀느냐”는 것과 같은 논쟁이 벌어진 것. 후광은 가톨릭, 거산은 개신교 신자인데 왜 풍수를 따랐느냐는 시비도 일었다.
    한국의 실력자들은 ‘남몰래’ 미신을 믿는다. 용하다는 무속인과 역술인을 취재해보면 운수를 물어온 실력자들이 확인된다. 그들은 풍수인도 자주 찾는데, 이는 한국을 움직이는 핵심 동력 중 하나가 풍수라는 의미가 된다.


    참새가 봉황 된 사연

    참새가 봉황이 되는 영예를 만든 ‘동작’은 어떻게 지어진 이름인가. ‘서울지명사전’은 동작동 유래에 대해 “구리처럼 검붉은 색깔을 띤 돌이 많아 ‘동재기’로 불렸다. 그곳의 나루를 ‘동재기 나루’라 했는데, 이를 한자로 ‘동작진(銅雀津)’으로 적었다”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참새 ‘작(雀)’은 ‘재기’를 표현한 음차(音借)이지, 새가 날개를 펴 감싼 지형을 표현한 게 아니다.
    조선 후기 화가인 정선(1676~1759)은 지금의 서울 용산구 이촌동 쪽에서 한강 건너 동재기 나루를 그리고 ‘동작진’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림엔 산으로 둘러싸인 안온한 마을이 있다. 동작진은 한양 권세가들이 ‘별서(別墅, 별장)’를 두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는 아름답게 보존돼야 하는 지역이었다는 뜻인데, 그렇게 된 이유로는 중종 후궁의 묘가 거론된다.
    죽은 뒤 창빈(昌嬪)으로 추존된 안씨(1499~1549)의 묘가 그것이다. 왜 권세가들은 그 묘소 부근을 별서 지대로 쓰며 손대지 못했을까. 보통 후궁의 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서울 금천구에 살던 안탄대의 딸로 태어난 안씨는 8세 때 궁에 들어갔다. 궁녀는 ‘임금의 여자’이기에 승은(承恩)을 입지 못하면 후사(後嗣)가 없다. 궁녀 세계에도 계급이 있다. 음식을 하거나 옷을 짓는 등 일도 해야 한다. 승은을 입으면 계급이 급상승하고 일에서 벗어난다. 그러지 못하면 천천히 진급하며 일만 하다 쓸쓸히 타계한다. 그래서 궁녀는 승은을 입으려 경쟁한다. 목숨을 걸고 정비인 왕비와 다투기도 한다.
    안씨는 슬기롭게 행동했다. 미인은 아니지만 정숙하게 처신하며 성종의 제3계비인 대비를 모셨다. 대비전엔 왕이 드나든다. 안씨는 스무 살 때 대비의 아들 중종의 승은을 입어 2남1녀를 낳고 숙용(淑容)까지 올라갔다.
    중종에겐 3명의 정비가 있었다. 첫 번째 왕후는 정치적 문제로 아들 없이 헤어졌다. 두 번째 정비(제1계비 장경왕후)는 훗날 인종이 되는 아들을 낳고 바로 사망했다. 그리고 사극에 자주 나오는 문정왕후가 들어왔는데, 그는 장경왕후와 파평 윤씨 같은 파였다. 촌수는 9촌이고 항렬은 장경왕후가 하나 높았다. 사람들은 제1계비였고 항렬이 높은 장경왕후 쪽 윤씨를 ‘대윤(大尹)’, 문정왕후의 친정을 ‘소윤(小尹)’으로 불렀다.
    중종은 안씨를 취할 무렵에 문정왕후를 맞았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출산했는데, 문정왕후는 내리 딸만 셋(1521, 1522, 1530)을 낳았으나, 안씨는 3남1녀를 낳아 아들 하나를 잃었다(1521, 차남은 출생 후 바로 숨짐, 1526엔 딸, 1530). 그러나 문정왕후의 시기를 받진 않았다. 안씨의 차분한 성격 덕분인 것으로 보인다. 1534년 문정왕후가 ‘드디어’ 아들(훗날 명종)을 낳은 것도 원인일 것이다.
    그리고 일어난 것이 문정왕후와 경빈 박씨 간 암투다. 1509년 아들 복성군을 낳은 경빈 박씨는 1515년 장경왕후가 타계했을 때 강력한 계비 후보로 올랐으나 문정왕후에게 패했다. 문정왕후는 1527년 일어난 정치 공작인 ‘작서(灼鼠)의 변(變)’을 계기로 경빈 박씨 모자를 처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만들진 못했다. 그러던 중 1544년 중종이 승하했다.
    임금이 죽으면 승은을 입은 후궁들은 중이 되는 게 관례인데, 안씨는 문정왕후의 배려로 궁궐에 머물렀다. 중종의 뒤는 장경왕후의 아들(인종, 당시 29세)이 이었는데, 그는 8개월여 만에 후사 없이 숨졌다. 인종이 숨진 것은 계모 문정왕후가 독이 든 떡을 먹였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확인되진 않았다. 이어 문정왕후의 열두 살짜리 아들이 새 임금(명종)이 됐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권력을 휘어잡았다. 친정과 손잡은 문정왕후는 인종을 후원했던 대윤을 쳐냈다. 왕의 외척인 파평 윤씨끼리 벌인 피비린내 나는 이 싸움을 역사는 을사사화(1545)로 기록한다.
    문정왕후는 승려 보우를 총애하고 병조판서로 제수해, 성리학을 숭상하는 대신들의 강한 불만을 샀다. 을사사화를 당한 세력엔 사림파가 많았는데, 재야를 장악한 그들은 문정왕후를 악녀로 낙인찍고 강하게 비판했다. 소윤 사이에서도 갈등이 일어났다. 2년 뒤 문정왕후는 그를 비판한 사림파와 등을 돌린 세력을 다시 척결하는 정미사화(1547)를 일으켰다. 안씨는 그러한 환란기에도 살아남았다. 문정왕후는 오히려 그를 배려했다. 1549년 안씨가 죽자 문정왕후가 그의 2남1녀를 보살폈다.





    손자를 왕으로 만든 자리

    안씨는 장흥에 묻혔다. 몇 해 뒤 그의 둘째아들 덕흥군이 풍수가의 말을 듣고 어머니의 묘를 동재기로 옮기고 1559년 서른 나이에 죽었다. 1565년엔 문정왕후가 타계하고, 1567년엔 명종이 서른넷의 나이로 병사했다.
    명종은 생전에 아들을 잃었기에 병석에 누웠을 때 후계 문제를 걱정하다, 타계한 이복형 덕흥군의 셋째아들 하성군(당시 15세)을 지목했다. 대신들은 문정왕후를 앞세운 외척(윤형원 일파)의 발호에 진절머리를 냈기에, 명종이 이렇다 할 외척이 없는 하성군을 후계자로 삼자 반대하지 않았다. 하성군이 바로 선조다. 하성군이 왕이 되자 사람들은 그의 할머니 무덤에 주목했다.
    임금이 된 하성군은 죽은 아버지를 조선 최초의 대원군(덕흥대원군)으로 추증했다. 조선에선 4명의 대원군이 나왔는데, 덕흥대원군 등 3인은 아들이 왕이 되기 전에 죽었기에 추증을 받았다. 흥선군만 살아서 대원군이 됐다. 흥선군은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명당이라는 곳으로 이장하고 7년 뒤 차남을 낳았다. 그 차남이 후사 없이 승하한 철종에 이어 왕(고종)이 되면서(1863) 그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조선은 그렇게 풍수에 젖어 있었다.
    선조는 할머니(안씨)를 정1품인 빈(嬪)으로 올려 ‘창빈’이라 칭하고 제사를 모셨다. 정1품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만 받는 최고의 품계, 빈은 후궁 중 가장 높다. 세자의 부인도 빈의 품계를 받는다. 의례를 정리한 ‘국조오례의’ 등에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陵)’, 세자와 빈의 무덤은 ‘원(園)’, 그 이하는 ‘묘(墓)’로 부르도록 했다. 이 원칙은 매우 엄격해서 임금 자리에서 쫓겨난 광해군과 연산군이 묻힌 곳은 묘로 불린다.
    선조는 ‘정통’이 아니었기에 자신의 뿌리를 높이려 안달했다.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묘를 ‘덕릉’으로 부르라고 요구했으나 중신들은 따르지 않았다. 창빈 안씨의 무덤도 원으로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곳은 손자를 왕으로 만든 자리로 알려져 ‘동작릉’으로도 불리게 됐다.
    조선의 풍수는 ‘종산(宗山, 백두산을 비롯해 큰 지역의 중심이 되는 산)’에서 흘러온 ‘용(龍, 산맥)’을 작은 지역의 중심이 되는 ‘주산(主山)’으로 하고, 주산 안을 감싸며 좌우로 흘러간 산등성이가 있으면 ‘좌청룡’과 ‘우백호’인 ‘사(砂)’로 본다. 그런 가운데 주산에서 중앙으로 내려온 낮은 용에 맺힌 곳이 있으면 ‘혈(穴)’, 좌청룡과 우백호 사이 터진 공간에 책상처럼 야트막한 산이 있으면 ‘안산(案山)’으로 본다. 혈처를 만드는 용과 좌청룡·우백호가 이룬 계곡에선 좋은 물(水)이 적당히 흘러나와 안산 옆으로 빠져나가야 한다.


    교과서적 명당

    이 ‘용혈사수’를 안정되게 갖춘 곳이 명당이다. 동작릉은 이 원칙에 딱 들어맞고, 혈처는 창빈 안씨의 묘다. 유일한 흠은 안산이 없는 것인데,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명당은 있을 수 없다. 조선의 실력자들은 창빈 안씨 묘가 교과서적 명당이라는 데 뒤늦게 주목했다.
    선조 이후 순종까지 조선의 모든 임금이 창빈 안씨의 자손으로 채워져 동작릉은 더욱 유명해졌다. 여기에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가 영광을 보탰다. 이 소설에 조조가 ‘동작대(銅雀臺)’라는 화려한 누각을 지어놓고 천하제패의 뜻을 드러내는 대목이 있다. 그래서 참새는 금계, 공작으로 올라가고, 금계포란형, 공작포란형이라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세상은 ‘단맥(單脈)’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때 가장 큰 상처를 입은 것은 창빈 안씨 후손 중 왕으로 내려간 맥이었다. 일제는 고종-순종으로 이어져온 왕맥을 끊으려 했다. 일찌감치 갈려나간 방계(傍系)는 살아남을 수 있어도, 왕계는 희미해질 수밖에 없었다. 재산 관리도 부실해졌다. 그런 상태로 대일 항쟁기를 보내고 광복을 맞자 이왕가(李王家)의 재산과 부동산은 국유화됐다. 동작릉과 그에 딸린 땅도 국가 소유가 됐다.
    봉건시대에도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숨진 군인을 추모했다. 1895년 명성황후가 피살되는 을미사변을 겪은 뒤 일단의 군인이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1882년 임오군란 때도 적잖은 군인이 일군과 싸우다 희생됐다. 1900년 고종황제는 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금의 동국대 옆 남산 기슭에 ‘장충단(奬忠壇)’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장충단, 장충사, 국군묘지

    1910년 대한제국을 찬탈한 일제는 이 사당을 가장 먼저 없앴다. 1919년엔 그 일대에 벚나무를 심어 공원으로 바꿔버렸다. 1932년 일제는 상해사변을 일으켜 중국 상하이를 무력 점거했다. 그리고 그때 희생된 일본군 3명을 ‘육탄 3용사’로 명명하고, 그곳에 그들의 동상을 세웠다. 안중근 의사가 사살한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절 박문사(博文寺)도 지었다(현 신라호텔 자리).
    1945년 광복을 맞자 우리는 이들의 동상과 박문사를 때려부쉈다. 그리고는 분단이 돼 싸움에 들어갔다. 국방경비대만 있던 시절 제주 4·3사건을 당하고, 국군을 만든 직후엔 여순사건을 겪었다. 38선상에선 북한이 침투시킨 공비 때문에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졌다. 그러한 전투에서 희생된 전사자들을 모시기 위해 그곳에 사당을 짓고 장충사(奬忠祠)라 했다.
    6·25전쟁 때 서울로 들어온 북한군은 장충사부터 파괴했다. 부산을 임시수도로 삼은 우리 군은 부산 금정사와 범어사에 ‘순국 전몰장병 영현안치소’를 운영했다. 1950년 9월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서울을 탈환했는데, 한강 도하 작전 때 많은 해병대 장병이 전사했다. 이들을 부산으로 운구하기 힘들어 동작릉 부근에 가매장했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전사자는 더욱 늘었다. 국군은 ‘군 묘지 설치위원회’를 만들어 여러 곳을 조사하다 정전협정 직후인 1953년 9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해병대 병사들을 가매장한 동작릉 일대를 국군묘지 부지로 확정했다. 일각에선 풍수인 고(故) 지창룡 씨가 국군묘지를 정하는 데 역할을 했다고 하나, 그가 선정위원이나 자문위원 등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것이 명당으로 소문난 동작릉이 국립묘지(1965)를 거쳐 서울현충원이 된 내력이다. 당시 동작릉에 딸린 땅이 함께 수용됐는데, 여기엔 또 다른 정치학이 숨어 있다. 조선엔 27명의 왕, 그보다 많은 비·빈(妃嬪), 그보다 훨씬 많은 왕의 형제가 있었다. 이들이 죽으면 능·원·묘를 짓고, 제사를 차려줄 재산도 마련해야 했다.
    조선 초기엔 토지 사유가 인정되지 않았다. 모든 땅은 왕이 갖고 필요할 때 나눠주는 식이었다. 왕실이 능원을 만들면 그 일대의 땅은 능원묘를 모시는 제사에 동원됐다. 재실(齋室)을 맡은 이들이 그 땅에서 나온 산물로 왕실 사람들이 올릴 큰 제사를 준비했다. 때문에 능원묘 주변의 농토는 능원묘 후손의 것이 됐다.
    ‘경국대전’ 등엔 능원 영역에 대한 규정이 있었으나, 이는 무시되고 능원묘와 연결된 토지는 다 수용됐다. 이것이 1912년 일제가 토지조사령을 시행할 때 ‘소유’로 인정돼, 그 농지는 능원묘를 지켜온 문중의 재산이 됐다. 이런 식으로 왕가 소유 농토가 늘어나면 후대엔 새로 만든 능원묘를 위해 나눠줄 봉토가 부족해진다. 이 문제를 조선은 ‘역모(逆謀) 사건’으로 풀어갔다.


    역모의 단골 소재

    왕실 남자들은 하성군(선조)이나 익성군(고종)처럼 어느 날 갑자기 왕이 될 수 있으니 왕은 그들을 감시한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발견되면 역모 사건을 만들어 제거하고, 그의 아내와 딸은 가장 천한 관비(官婢)로 삼았다. 재산은 몰수했다가 충성을 바칠 사람이 있으면 나눠줘 자기 세력을 강화했다. 조선시대에 이어진 사화는 반기를 든 세력의 재산을 빼앗아 충성을 바치겠다는 세력에게 나눠준 재분배 과정이었다. 그때마다 자주 동원된 소재가 풍수다. 김두규 우석대 교수(풍수학)는 “조선은 풍수를 이유로 역모 사건을 엮어 제한된 재산을 돌려썼다. 이는 조선의 치국 방법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대표적 사례가 문정왕후가 개입한 ‘희릉(喜陵) 천장(遷葬) 사건’이다. 천장은 무덤을 옮기는 이장(移葬)을 뜻한다. 희릉은 중종의 두 번째 부인으로 아들(인종)을 낳고 7일 만에 숨진 장경왕후를 모신 곳으로, 현재 국가정보원이 있는 헌인릉 부근(서울 내곡동)에 만들어졌다. 왕은 국상을 당해도 상복을 입지 않는데, 장경왕후가 죽자 중종은 상복을 입고 슬퍼했다. 장차 자신도 장경왕후 곁에 묻히겠다며 쌍릉으로 만들라고 명했다.
    그런 후 중종이 새로 맞은 이가 문정왕후다. 문정왕후가 아들을 낳으면 장경왕후의 아들이 위태로워진다. 그 때문에 장경왕후가 낳은 호혜공주를 며느리로 삼은 김안로가 장경왕후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 ‘장경왕후가 묻힌 희릉에 큰 돌이 있는데, 그대로 두고 능을 만들었다’며 능을 잡은 지관 등을 대역죄인으로 몰아 그 자손까지 죽인 것. 이는 문정왕후파의 득세를 막으면서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해 벌인 정변이었다.



    돌의 참극, 희릉 천장 사건

    광중(壙中)에서 돌이 나오면 좋지 않다는 게 풍수계의 정설이었다. 그래서 희릉은 장경왕후 사후 22년 뒤인 1537년(중종 32년) 원당에 있는 지금의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돌이 나오면 좋지 않다는 김안로의 주장은 훗날 장경왕후의 아들인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후사 없이 숨지자 “옳았다”는 평도 들었다. 희릉 천장 사건을 잘 아는 풍수인들은 거산의 묏자리에서 돌이 나오고 황영웅 씨가 이를 ‘봉황의 알’로 해석하자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황씨는 “결이 있는 선돌이 나오면 나쁘지만 둥글고 단단한 돌이 나오면 좋다. 그런 돌은 기운이 맺힌 곳에서만 나온다”고 반박했다. 지금도 풍수를 소재로 정치 싸움이 일어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1544년 중종이 승하하자 조정은 생전 중종의 바람대로 중종을, 서삼릉으로 옮긴 희릉에 모시려 했다. 그러자 명종을 세워놓고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가 들고일어났다. 문정왕후는 “자리가 좋지 않다”는 풍수인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중종의 아버지 성종이 묻힌 선릉(서울 삼성동) 곁에 중종의 능을 만들고, ‘정릉’으로 부르게 했다. 중종이 희릉에 들어갔으면 소윤을 비롯해 반대세력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고 봤는지, 자기가 믿는 풍수를 토대로 이를 막아버린 것. 조선에서 풍수는 정치 그 자체였다.
    그러나 풍수대로 세상은 돌아가지 않았다. 할머니의 산소 덕에 왕위에 올랐다는 선조가 무방비로 임진왜란을 당하는 무능을 드러낸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양으로 진격한 왜군은 선조가 북으로 몽진한 것을 알자 선릉과 정릉을 파 선조의 증조부(성종)와 조부(중종)의 시신을 꺼내 훼손했다. 이 사건은 너무나 능욕적이고 충격적이라 학교에선 가르치지도 않는다.
    이러한 치욕을 당하고도 선조는 복수하지 못했다. 유성룡과 이순신 같은 능력자를 멀리하며 자리 보존에만 급급했다. 문정왕후도 마찬가지다. 그가 고집을 부려 만든 정릉이 엄청난 치욕을 당했으니 그가 믿은 풍수도 엉터리였다고 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은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한 뒤 어린 아들이 왕이 돼 섭정을 하는 영예를 누렸지만, 며느리(명성황후)와의 권력싸움에서 패해 4년간 중국 천진에 잡혀가 있었다. 고종은 1895년 부인이 일본인들에게 살해되는 을미사변을 당했고, 이듬해엔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쳤다. 국왕의 체통을 벗어던지고 도생(圖生)을 한 것이다. 



    禍 당한 명당

    대전현충원에 국가원수 묘역을 만들어놨는데도 후광과 거산이 서울현충원에 안장되는 데는 황영웅 씨가 역할을 했다. 경기대는 1995년 국제관계대학원을 설립해 운영하다 2004년 국제문화대학원으로 바꾸며 풍수지리학과(석사학위과정)를 신설했다. 황씨는 그곳에서 객원교수를 했는데, 후광의 차남으로 17대 국회 때 보선으로 당선(2007~2008)된 김홍업 씨의 보좌관 박모 씨가 그곳에 입학했다.
    박씨는 황씨를 지도교수로 삼아 ‘○○릉의 풍수지리적 고찰’이란 논문으로 2008년 석사학위를 받았고, 건국대에서 풍수지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씨는 2009년 8월 18일 후광이 서거하자 황씨를 김홍업 씨에게 소개했다고 한다. 다음은 황씨의 설명이다.
    “동작릉은 명당이지만, 오래전부터 알이 없다는 속설이 돌았다. 새가 알을 품는 곳이 새집인데, 새집에 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작릉을 살펴보니 속설이 맞는 것으로 판단됐다. 창빈 안씨 묘가 새집인데, 알은 그곳에 없고 왼쪽 바로 뒤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학생들과 서울현충원을 답사할 때 나는 ‘창빈 안씨 묘 왼쪽 뒤가 알이 있는 곳’이라 하고 이를 발설하지 말라고 했다. 천기누설이 될 수 있다고도 강조했다. 그런데 박씨가 김홍업 씨에게 이야기한 듯, 후광이 돌아가시자 바로 김씨가 나를 보자고 했다.”
    후광은 풍수에 심취했던 인물이다. 생전에 풍수인 고(故) 손석우 씨의 안내로 양친 산소를 경기도 용인 묘봉리로 옮기고, 자신은 일산의 정발산 아래로 가서 살았는데, 이는 대통령이 되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때 묘봉리에 자신의 묏자리도 정해놓았다. 미리 정해놓은 묏자리를 ‘신후지지(身後之地)’라고 하는데, 신후지지를 해놓으면 근심이 적어진다고 한다.
    후광이 대통령이 되자 용인의 묘터를 보러가는 풍수인이 급증하고 손석우 씨가 유명해졌다. 손씨의 구술을 토대로 한 책 ‘터’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런데 그 후 “후광의 신후지지가 아니다”라는 소문이 돌았다. “후광이 대통령이 된 것은 용인의 이장지보다는 하의도에 있는 그의 증조모 묘 터 덕분”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이는 손씨를 시기한 의견일 수도 있다.



    김홍업 씨가 황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후광의 유족은 신후지지를 버리고 창빈 안씨 묘 바로 뒤를 장지로 선택했다. 황씨는 묘역조성위원장을 맡아 일을 총괄했다. 창빈 안씨 묘는 돌담에 둘러싸였는데, 돌담 바로 왼쪽 뒤를 파기로 한 것. 그곳은 참배 공간을 낼 수 없을 만큼 좁았다. 그는 묘소 터 앞에 석축을 쌓아 넓히는 공사도 했다.
    “알이 있는 혈처를 찍어 파고 들어가는 것을 점혈(點穴) 또는 재혈(裁穴)이라고 한다. 점혈을 잘못하면 알이 나오지 않을뿐더러 작업 도중에 깨지기도 한다. 나는 기감(氣感)을 살리려고 오랫동안 수련해왔는데, 그러한 감각과 내 이론으로 점혈을 했다. 그리고 파고 들어가니 ‘알 속’이 나왔다. 내가 점혈한 곳은 커다란 바위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혈처를 제대로 짚었다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했다.”
    황씨는 그 후 후광 가족을 만난 적이 없다. 그는 후광보다는 거산 쪽에 더 정감을 갖고 있었다. “장지는 후광의 것을 먼저 잡아줬지만, 인연으로 따지면 거산 쪽이 훨씬 오래됐고 또 인간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2011년 거산이 써준 ‘정자정야(政者正也,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란 휘호를 보여주기도 했다.
    황씨 덕에 경기대 풍수지리 과정은 유명해졌으나, 경기대는 한 달 뒤 이 과정을 없앴다. 황씨는 “학교 내 기독교인들의 반대 때문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영남대 환경보건대학원 환경설계학과에서 풍수를 가르치는 객원교수로 옮겨갔다.
    그 무렵 황씨는 거산을 모셔온 A(전 환경관리공단 이사장)씨의 소개로 상도동에 머물던 거산을 만났다. 황씨에 따르면 당시 거산의 측근들은 거산이 타계하면 어디로 모실까 하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황씨는 “거제도의 거산 고향 지역을 둘러봤지만 마땅한 장지가 없었다. 대전현충원의 국가원수 묘역도 봤지만 역시 좋지 않았다”고 했다.



    황영웅과 YS · DJ

    그는 과거 답사를 통해 서울현충원에 길지(吉地)가 남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얘기를 하자 거산 측근들은 관심을 기울였다. 보고를 받았는지 거산은 차남 김현철 씨로 하여금 황씨와 함께 그곳을 둘러보게 했다.
    거산 서거 직후 거산의 유족과 정부 간에 장지 논쟁이 일었다고 한다. 거산 측은 황씨가 잡아준 서울현충원으로 가길 원했으나 정부는 “자리가 없다. 대전현충원 외엔 안 된다”고 거부했다는 것. 이 다툼은 새누리당에 포진한 옛 상도동계 세력이 나서면서 거산 측이 승리했다. 황씨가 잡아준 곳의 땅을 파자 광중 자리 중간쯤에 2개를 시작으로 여러 개의 둥근 돌이 나왔다. 황씨는 이를 봉황의 알로 풀이하고 감읍했다.
    후광과 거산의 묘소는 알자리인지는 몰라도 제대로 된 좌청룡과 우백호가 둘러싼 모습은 아니다. 후광의 묘소는 창빈 안씨 묘 바로 옆이지만, 좌향(무덤의 방향)이 달라 우백호는 아예 없다. 창빈 안씨 묘가 있는 산이 좌청룡 노릇을 할 수 있지만 너무 작다. 이렇게 작은 날개를 ‘연익(燕翼, 제비날개)’ 또는 ‘선익(蟬翼, 매미날개)’이라 한다. 형국이 이러한데 알자리에 들어갔다고 명당이 될 수 있을까.



    창빈 안씨 묘 둘러싼 대통령 묘역

    서울현충원을 큰 눈으로 다시 살펴보면 혈처는 역시 창빈 안씨 묘라는 느낌이 든다. 역대 대통령 묘를 만든 이들도 이를 의식한 것이 분명하다. 거산을 제외한 세 전직 대통령의 묘역이 창빈 안씨 묘 근처에 몰려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우남(雩南) 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은 창빈 안씨 묘 앞의 작은 언덕에 들어섰는데, 이는 그 언덕을 또 다른 혈처로 보고 잡은 듯하다.
    중수(中樹)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은 창빈 안씨 묘로 용이 뻗어가는 주산 중턱에 있다. 그곳엔 장성들을 모셔 ‘장군봉’으로 불리는 야트막한 동산이 안산처럼 놓였다. 앞이 탁 트였고, 저 멀리 흘러오는 한강이 보여 문외한이 봐도 그럴듯하다.
    후광의 묘는 창빈 안씨 묘 뒤에 붙어 있는데, 묘역이 우남이나 중수의 그것과 달리 매우 협소하다. 묘소로 올라가는 길도 바로 낼 수 없어 옆으로 오르게 만들었다. 창빈 안씨 묘역을 침범한 ‘늑장(勒葬)’으로 볼 수도 있을 정도다. 거산의 묘역만 따로 떨어졌는데, 이는 창빈 안씨 묘 근처에 더는 자리를 낼 수 없기 때문인 듯하다.
    서울현충원은 좌청룡과 우백호, 창빈 안씨 묘로 이어지는 곳만 숲으로 돼 있고 나머지는 평지로 깎여 장병 묘역이 조성됐다. 그 때문에 네 전직 대통령의 묘역은 그 숲을 파고들어간 형국이다. 추후 다른 대통령의 묘가 또 들어온다면, 그의 묘역 역시 숲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서울현충원의 숲은 사라진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서울현충원을 다시 보면 창빈 안씨의 ‘후덕(厚德)’이 눈에 띈다. 그 후손에서 13명의 조선왕이 나왔기에, 그의 묘 주변 땅은 일찌감치 위토(位土)로 징발될 수 있었다. 이러한 땅이 광복 후 국유지가 되고, 국유지였기에 서울 수복 때 희생된 해병대원들을 가매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6·25전쟁 후 국군묘지로 지정됐다. 그는 대한민국이 수도 서울에 현충원을 가질 수 있게 해줬다.
    ‘넉넉한’ 창빈 안씨는 그곳에 오고 싶어 하는 대통령들도 포용했다. 관련법에 따라 80평의 땅을 내준 것. 그러면서도 자기 자리를 잃지 않았다. 대일항쟁기까지는 ‘동작릉’이었고, 이후론 서울시 유형문화재 54호로 지정돼 임금이나 대통령조차 침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창빈 안씨는 서울현충원을 지켜온 수호신이자 한없이 베풀어준 큰어머니가 된다. 그런 그가 묻힌 곳이 진짜 명당이다.
    1961년 하야한 우남은 하와이에 칩거하다 서거했다. 하와이 시절 그는 입버릇처럼 “고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의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와 가족장을 치르고 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중수는 대통령을 하던 1979년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을 받고 서거해 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우남과 중수는 ‘고종명(考終命)’을 하지 못했지만 큰 저항 없이 서울현충원에 들어갔다.



    죽음은 메시지다

    거산과 후광은 다르다. 그들은 고종명을 했으니 죽음 이후도 생각할 수 있었다. 고종명을 하기 전 그들과 그들의 가족은 우남·중수와 맞먹는 자리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풍수인 김성수 씨는 “권세가 높고 부가 많다고 명당에 가는 게 아니다. 자신이 한 행동에 따라 가는 땅이 결정된다. 조선의 왕 27명이 그렇게 센 권력으로 명당을 찾았지만, 진짜 명당에 들어간 이는 없다. 세종조차 진짜 길지에 못 갔다”고 말했다. 선업(善業)을 쌓았으면 아무 땅에 묻혀도 명당이 되고, 그 반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김두규 교수는 “죽음과 삶은 연결돼 있다. 의미 있는 삶을 산 사람이라면 의미 있는 종명 준비를 해야 한다. 죽음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과 명당을 취재하면서 내내 떠오른 이는 2013년 11월 25일 타계한 전 주월 사령관 채명신 예비역 육군 중장이다. 그는 “파월 장병이 있는 묘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국방부는 그 뜻을 받들어 그를 서울현충원의 파월장병 묘역에 안장했다. 현충원 역사상 처음으로 장군을 사병 묘역에 모신 것이다. 넓이는 딱 한 평. 김두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지도자 장례 매뉴얼

    “파월장병들은 곁에 온 사령관을 환영할 것이다. 그렇게 갈채를 받는 곳이 진짜 명당이다. 죽은 것을 억울해하며 탓하는 원혼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동고(同苦)와 동락(同樂)을 하는 종명이 아니겠나. 명당은 아무리 공부해도 잘 모르겠다. 교과서적으로는 잡을 수 있지만, 본인이 만든 업이 바르지 않으면 발복이 안 된다. 사람 마음을 잡아야 한다. 관상이 아무리 좋아도 마음을 바로 쓰는 것보다 못하다는 ‘관상불여심상(觀相不如心相)’이라는 말이 있다. 좋은 땅은 남에게 나눠주고, 거친 땅에 들어가 고생한 이들과 동고동락한다는 마음이 진짜 명당을 만들지 않을까.”
    후광과 거산은 민주화에 헌신했으니 그것을 상징하는 종명을 하면 좋았을 것이다. 우남과 중수가 있는 곳을 ‘파고 들어가기’보다는 국립묘지가 된 4·19민주묘지나 5·18민주묘지를 선택했다면,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족적이 보다 분명해졌을 것이다. 서울현충원엔 전몰군경과 애국지사가 많이 묻혀 있다. 이는 건국과 전쟁을 한 우남, 북한과 경쟁하며 산업화로 입국한 중수와 함께하는 공간이지, 민주화의 성역은 아니라는 의미다.
    좋은 땅이 아니어도 윤보선·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고향 사람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최규하 전 대통령처럼 국가가 정해준 묘역으로 가는 것도 좋다. 평생 국가를 위해 일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못마땅하더라도 국가가 정한 대로 가는 게 옳다. 그것이 국민에게 메시지를 주는 죽음이다.
    채명신은 더 낮췄다. 그러한 그에게 주어진 한 평이, 그리고 온갖 환란을 겪으면서도 좋은 땅을 지켰다가 후손에게 나눠주고 왜소해진 창빈 안씨의 묘역이, 거산과 후광에게 주어진 80평보다 몇 천 배 더 넓은 것 같다. 길지는 무명용사 같은 국민에게 돌려주고, 자신은 험지(險地)로 들어갈 수 있어야 진정한 리더다. 지금은 국민의 70%가 화장한다는 걸 직시해야 한다.
    장례 문화도 바로 세워야 한다. 거산 장례식에서 상주가 팔에 완장을 차지 않았고 운구병(運柩兵)들은 마스크를 벗었다. 근거도 없이 해오던 의식을 없애버렸다. 광복 후 70년을 지내고도 대한민국에 국가 장례에 대한 매뉴얼이 없다는 뜻이다. 조선엔 ‘국조오례의’ 등이 있었다. 국민이 보고 배울 수 있는 지도자의 장례의식을 만들어야 한다.
    풍수는 국토개발, 환경 등 여러 분야와 융합한다. 그렇다면 바른 풍수를 세워 바른 장례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암투를 벌이는 풍수정치학도 정비해야 한다. 그 시작이 채명신과 거산·후광을 비교해보는 것일 수 있다.

    DJ·YS 묏자리 잡은 황영웅 씨“박정희 묘소도 수리했다”


    후광과 거산의 묏자리를 잡은 황영웅 씨는 “1945년 경북 영주 출생으로 그곳에서 초·중학교를, 서울에서 수송전자공고를 마치고 한양공대에 들어갔다가 3년 만에 중퇴했다. 그리고 훗날 미국 LA불교대학에서 불교학 학사·석사학위를 받았다”고 밝혔다.
    황씨는 7대 장손인데, 집안 어른들이 단명했고 그 역시 허약해 ‘죽음 생각’을 달고 살았다고 한다. 그의 집안엔 풍수를 비롯해 도학을 공부한 이가 많았다. 당시 영남에선 7명의 풍수인이 유명해 ‘영남칠풍’이라고 했는데, 1풍으로 꼽히는 이가 부친의 친구였고, 7풍으로 불린 장용득 씨는 고모 쪽 집안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고향에선 일이 안되면 숙명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산내 아니면 이수네”라고 했는데, 그는 그 뜻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 ‘산의 내력 아니면 물의 이치네’라는 의미란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운명은 풍수로 결정된다는 것을 깨닫고 천태종 계열의 절에 들어가 풍수 공부에 매진했다.
    황씨는 한양대 재학 시절 전기기사 자격증을 땄고, 그 자격증으로 취직해 생업을 했다. 그러나 독학으로 공부한 풍수에서 더 재능을 발휘해 기업인 등으로부터 쓰임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 그를 후원한 이가 3공 시절 농림부 장관을 지낸 김모 씨다. 황씨는 장지 풍수에서부터 공장 터를 잡는 것까지 다양한 실전 풍수를 했다. 1975년엔 지금 살고 있는 경기 안양시 대림동의 절을 구입했다. 원효종 계통인 이 절은 그의 살림집이자 수련처다.
    전기공학을 했기에 그는 전기장, 자기장, 중력장, 인력장 등을 토대로 풍수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 이론을 ‘풍수원리강론’이란 책으로 편찬해 경기대 등에서 교재로 썼다. 그는 박모 씨 등 여러 재벌의 묘소를 잡아주다, 2012년엔 그전 해의 폭우로 묘소 뒤 산등성이가 무너진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을 수리했다.
    박 전 대통령 묘역엔 물이 찬다는 소문이 많았는데, 그는 실제로 물이 든 것을 확인하고 지하수맥을 막는 처리를 했다고 한다. 그해 말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박지만 씨는 2014년 차남을 얻고, 2015년엔 쌍둥이로 3, 4남을 낳았다. 황씨는 ‘환원’이 잘되는 곳이 좋은 땅이라고 했다.
    “몸을 이루는 원소 중에 황이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황은 육신에서 떨어져 나와 황으로 돌아가는 게 좋다. 그런데 묘소에 물이 들어오면 황은 물과 결합해 황산이 된다. 이렇게 되면 독한 가스가 나오고 시신은 분해되지 않고 썩는다. 이것이 산화다. 산화가 되는 자리를 피하고 환원이 잘되는 자리를 찾는 것이 음택 풍수다. 그러한 자리엔 인력장, 자기장 등 여러 기운이 응축돼 있다.”
    황씨는 묘소를 자꾸 만들면 땅이 줄어드니 명당을 돌려쓰자고 제안했다.
    “좋은 땅이라면 100여 년 뒤 시신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그곳을 다시 산소로 써야 한다. 그것이 좋은 땅의 기운을 후손들과 같이 쓰는 길 아니겠나. 생장소멸이 자연의 이치인데, 소멸이 잘되게 하는 땅을 찾아 다시 활용하는 것이 환경과 자연을, 개인과 가족, 국가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다. 대통령의 무덤도 고향에 만드는 게 제일 좋다. 그러나 거산의 고향 거제도엔 그럴 만한 땅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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