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김대업씨를 처음 만난 것은 제3차 병역비리 군·검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부)가 발족되기 직전인 2000년 1월 하순이었다. 시간은 밤 10시. 장소는 서울 이태원동에 있는 한 호텔 커피숍이었다.
인터뷰는 자못 긴장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그가 첫마디에 기무사에 쫓기고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가 들고 나온 길다란 가방은 야구방망이가 충분히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그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방어수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기무사의 통화감청을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 이름으로 등록한 휴대폰을 쓴다고 했다.
김대업이라는 민간인이 군검찰 수사팀에서 정보요원으로 활약한다는 사실은 일부 언론을 통해 어느 정도 알려진 상태였다. 1999년 5월에 시작된 2차 병역비리수사가 외압시비에 휘말리자 일요신문 내일신문 등이 수사 파행을 보도하면서 김씨의 존재를 익명으로 알렸다.
김대업씨는 자신이 2차 수사팀에서 배제된 데는 기무사 입김이 작용했다고 여겼다. 김씨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던 이명현 소령(1차 합수부 군검찰 수사팀장. 현 한미연합사 법무실장. 중령)도 비슷한 시각이었다. 두 사람은 당시 국방부 검찰부장 고석 중령(현 국방부 법무과장. 대령)이 기무사와 유착해 수사를 방해한다고 믿고 있던 터였다. 이에 대해 고부장은 “터무니없는 음해”라고 반박해왔다.
한편 병무비리수사 초기부터 군검찰과 갈등을 빚은 기무사는 김대업씨의 수사참여를 강력히 반대, 국방부장관에게 보고까지 했다. 명분은 “병역비리 전과자에게 병역비리수사를 맡길 수 없다”는 것.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병역비리수사 칼끝이 기무사 요원들에까지 미치자 수사에 핵심 역할을 하는 김씨를 ‘눈엣가시’로 여긴 것이다.
이명현 중령은 그해 7월 유학을 떠나기 전 조성태 국방부장관 앞으로 보고서 형태의 편지를 보내 병역비리수사가 외압으로 축소됐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한편 김대업씨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것이 계기가 돼 2차 수사가 끝난 후 기관(헌병·기관) 요원의 병역비리를 전담수사하는 특별수사팀이 탄생했다. 고부장은 물러났다. 반면 김씨는 기세 좋게 수사팀에 재합류했다.
그해 10월 SBS 시사교양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는 기무사의 수사방해의혹을 심층보도하면서 김대업씨의 인터뷰 내용을 내보냈다. 얼굴과 목소리는 가린 상태였다. 이 보도 후 2차 특별수사팀이 편성돼 기관(헌병·기관) 요원의 병역비리를 재수사했는데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 무렵 참여연대는 김씨의 제보를 바탕으로 고석 대령을 명예훼손과 공무상비밀누설 혐의로 고발했다.
“기무사로부터 쫓기고 있다”는 김씨의 주장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것일까. 몇몇 기무사 직원은 김씨가 관련된 병무비리를 추적했고, 군검찰 조사를 받은 군의관들을 찾아다니며 김씨의 비위사실을 캐내려 했다. 1999년 8월엔 기무사 참모장 조아무개 소장이 청와대 박주선 법무비서관을 찾아가 김씨의 구속을 건의하기까지 했다.
사정이 그랬던 만큼 김씨가 기무사에 적대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기자와의 첫 인터뷰에서 그는 병역비리수사의 파행을 기무사와 고석 대령 탓으로 돌렸다. 그것은 일종의 신념으로 보였다. 그는 기무사가 병역비리수사의 몸통이고 군검찰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 든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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