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호

졸업 20년, 경북고 68회 최영철 기자의 ‘同門견문록’

“보수·진보 아우르며 인재 배출, 획일의 잣대로 재단하지 말라!”

  • 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07-05-04 13: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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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준화 10년, 구교사 마지막 세대 ‘꼴통 68회’의 4전5기

    시험보다 ‘뺑뺑이’로 경북고 들어가기가 더 힘들다?

    ‘경고 중의 경고’ 58회 파워…정부 고위직만 13명

    ‘모교를 빛낸 동문’, 이효상, 노태우, 신현확, 이승엽 順

    동문 기념식수 50여 그루 중 ‘노태우 나무’만 죽은 사연



    80년대 중반 학번, ‘경북고 출신’ 이유만으로 린치

    1987년 노태우 후보 지지 모임 뒤엎은 간 큰 후배들

    2·28, 4·19, 6·3, 인혁당, 서울의 봄 운동권 주역

    YS, DJ 정부 공직자들, “모이면 다 죽는다”


    졸업 20년, 경북고 68회 최영철 기자의 ‘同門견문록’
    어김없이 찾아온 또 한 번의 봄. 유난히 고교 동기들로부터 연락이 잦고 모임도 많다. 동기회 총무로부터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문자 메시지가 날아온다.

    ‘5월12일 졸업 20주년 홈커밍데이, 20만원 납부 희망’

    메시지를 본 순간 절로 장탄식이 흘러나온다.

    “아! 벌써 졸업 20년이라니….”

    정말 오랜만에 나간 동기회 자리. 화제는 홈커밍데이로 모아진다. 총무가 기자의 무심함을 탓하며 쏘아붙인다.

    “넌 동문회도 잘 안 나오고 직업 멀쩡하니까 50만원은 내야지. 동기와 선생님 모두 특급 호텔로 모신다. 가족도 전부.”

    졸업 20주년 모교 방문과 사은회 행사 예산이 6000만원에 가깝단다. 좀더 따지려드니 총무가 한마디로 뭉개버린다.

    “잔소리 말고 빨리 좀 내라~잉? 무조건 50만원으로 잡아놓는다.”

    동기회측은 이참에 1억원을 모아 행사를 하고, 남는 돈으로 동기 기금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20년 만의 모교 방문을 앞둔 동기들의 애교심은 하늘을 찌를 듯하다. 새삼 ‘내가 참 대단한 학교를 나왔구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모교가 지난해 개교 90주년을 맞았다는 사실을 신문을 통해서야 알게 된 ‘몰염치한 동문’은 갑자기 자신이 왜 이토록 모교와 은사를 외면하고 살았는지 의문이 든다.

    지난 4월9일 이른 새벽, 고교 졸업 후 20년 1개월여 만에 모교로 향하는 취재 길에 올랐다. 기자는 1984년 3월2일 대구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해 1987년 2월24일 졸업했다. 졸업횟수, 즉 기수는 68회. 이 학교는 태어난 해와 졸업횟수가 같다. 가령 1948년에 태어난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위원은 48회 졸업생이다. 우리 나이로 8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 중·고등학교 6년을 이상 없이 마쳤다면 생년과 졸업횟수는 정확하게 일치한다. 기자는 1968년생이다.

    졸업 20년, 경북고 68회 최영철 기자의 ‘同門견문록’

    경북고 68회인 기자(오른쪽 원)의 3학년4반 동기 졸업 사진. 원 왼쪽이 반장이었던 권재한군.

    경북고는 서울의 강남처럼 ‘대구의 8학군’으로 불리는 대구 수성구 황금동에 자리잡고 있다. 서울 사대문 안에 있던 경기고와 서울고가 강남권으로 옮겼듯, 경북고도 1985년 대구 한복판인 중구 대봉동에서 지금의 황금동 교사로 이전했다. 기자가 속한 68회는 경북고의 역사로 보면 1974년 고교 입시 평준화(속칭 ‘뺑뺑이’) 이후 10년차이자 75년 역사의 대봉동 교정을 경험한 마지막 기수이다. ‘비 새고, 쥐 노는’ 교사(校舍)에서 3년을 보낸 비평준화 선배들과 교정에 관한 한 같은 기억을 공유한 마지막 기수인 셈이다.

    ‘황금고 2회 졸업생’

    68회 졸업생들은 1학년을 마친 1985년 1월 대봉동 교사에서 황금동 교사로 이삿짐을 직접 싸고, 새로운 학교를 가꾼 주인공이다. 그래서인지 신교사에 대한 동기들의 애정은 각별하다. 동기 중 일부는 자신을 ‘황금고 2회 졸업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대구역에 내려 택시를 타고 20분쯤 달리자 눈에 익은 길이 시야에 들어온다. 시원하게 펼쳐진 왕복 8~10차선 도로, 분명 경북고로 가는 길이다. 20여 년 전,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인근 대구여고 여학생들과 즐거움(?)을 나누던 추억의 길. 그 길을 따라 기자의 기억도 현재와 과거를 넘나든다.

    이 길은 신작로가 생긴 1985년 당시 경북고 학생 외에는 통행 인구가 거의 없어 많은 지역 고교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사실 그 길은 경북고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5년 대봉동 교사에서 황금동 현재의 교사로 이전할 때 이 길도 완공됐는데, 1983년 경북고 출신의 5공 권력실세였던 노태우 당시 내무부 장관(32회)의 지시로 당초 계획보다 2배 이상 넓어졌다고 전해진다. 사실관계가 어떻든 이 길 덕분에 경북고를 둘러싼 황금동 인근 지역은 이후 대구시내 최고가의 아파트촌이 들어설 발판을 마련했다.

    1984년 1월. 고입 연합고사가 끝나고 배치 결과가 알려지자 부모님은 크게 실망하신 듯 위로의 말을 건넸다.

    “너 어쩔래? 공부 안 시키는 공립학교에 들어가서….”

    그 무렵 경북고는 화려한 명성과 달리 서울대 진학 실적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경북고의 진학 성적이 하락한 게 아니라 덕원고, 경신고와 같은 신흥 사립고교의 성적이 일취월장하고 있었다는 게 옳다. 더욱이 경북고에 대한 일부 학부모의 실망감은 비평준화 시대의 경북고와 비교했기에 빚어진 것이기도 하다. 빛이 크면 그늘도 큰 법. 영남권 수재들이 모두 모여들었던 선발집단과 대구·경북 지역의 온갖 장삼이사(張三李四)를 모아둔 평준화 세대의 진학성적을 어떻게 수평 비교할 수 있겠는가.

    ‘경북고 80년사’(1996년 발행)에 나온 1970년대 경북고 출신 학생의 서울대 진학 기록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비평준화 마지막 세대인 53~58회(71~76학번)의 서울대 진학자 평균은 연 135명. 평준화 직전 기수인 57회, 58회(75, 76학번)에서는 각각 152명과 153명이 서울대에 진학했다. 특히 호남지역을 제외하면 전국 유일의 비평준화 선발집단이었던 58회는 동문 체육행사 때도 ‘경고 중의 경고’라는 현수막을 내걸 만큼 자부심이 대단하다. 자신들은 대구·경북이 아니라 전국에서 모인 수재라는 뜻에서다. 이 기수는 현재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 각 부처에 서기관급 이상(대부분이 청장, 국장급)만 13명이 포진해 있다.

    경북고 입학은 로또?

    이에 반해 1980년대의 ‘평준화 경북고’는 오히려 옛 명성 때문에 손해를 봤다. 대구지역 고교 중 경북고만은 특정 학군 없이 대구뿐 아니라 경북 전 지역에서 학생들을 모집했기 때문이다. 경북고의 평준화 효과를 대구·경북 전역의 학생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주자는 취지였다. 따라서 한 반 학생의 절반은 대구 출신이고 나머지는 경북 출신이었다. 대구지역 출신 학생들은 경북지역 출신들을 ‘촌놈’이라 불렀다.

    대구·경북지역 전체 중학교에서 학생을 모집하다보니 같은 중학교 출신이 2명 이상 경북고에 배정되면 운이 좋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만큼 경북고는 평준화 이후에도 학부모들 사이에 인기가 좋았다. 그래서 평준화 세대 사이에선 “뺑뺑이(추첨)로 경고 들어가기가 시험 봐서 들어가기보다 확률적으로 더 힘들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재경 68회 경북고 동기회장인 권석후(삼성생명 근무, 재학 당시 총학생회장)의 회고담이다.

    비록 호남 편중 인사가 있었다고 하지만 YS정권의 설움에서 벗어난 경북고 출신들은 DJ정권 들어 조금씩 기지개를 켠다. DJ정권은 지역안배 차원에서 경북고 출신들을 요소요소에 기용했다. 사실 ‘지역안배’라는 말보다는 ‘TK 민심 달래기와 구색 맞추기 인사’라고 하는 게 옳다. 경북고 출신은 아니지만 당시 농림부 차관이던 김동태(64·성주농고 출신)씨는 2000년 16대 국회의원선거에 고향인 경북 성주에서 민주당 후보로 ‘방탄 출마’를 했다 참패한 후 1년8개월 만에 농림부 장관으로 돌아와 ‘국민의 정부’와 행보를 같이했다.

    당시 경북고 출신은 검찰총장을 2명이나 배출했다. 박순용(44회)·이명재(42회)씨가 그들. 지청장급 이상 간부들도 경기고(58명)에 이어 경북고가 28명으로 많았고 중앙부처 1~3급 고위직 공무원 중에서도 경북고는 경기고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1급 이상은 경기고 출신이 21명이고 이어 18명이 경북고 출신.

    기자는 동아일보에 입사하기 전인 2000년 초 연합뉴스의 경력기자 면접을 치렀다. 당시 연합뉴스 사장은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출신의 김종철(63)씨였다. 김 사장은 면접 시간의 절반을 기자의 출신 고교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이상한 면접이었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경북고 출신이면 ○○○ 기자 잘 알겠네. 그럼 술도 많이 먹겠고. 그래서야 취재를 제대로 할 수 있겠나….”

    DJ 정권 아래 경북고 출신들의 고초를 뼈아프게 대리체험한 면접이었다.

    너섬, 인사동, 광화문포럼

    대구시청에 도착해 현재 실·국장급 중에 경북고 출신이 몇 명인지 알아봤다. 취재 결과는 놀라웠다. 김범일 시장과 권영세 행정 부시장(52회)을 제외하고 경북고 출신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격세지감이 일었다. ‘동아일보’ 대구시청 출입기자인 정용균 차장은 “대구지역 기자생활 20여 년에 이런 일은 처음 봤다”고 했다. 대구지역에서도 이제 경북고 외의 인재 풀(pool)이 다양화된다는 방증이다.

    그런가 하면 노무현 정부는 5, 6공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청와대와 검찰에서 경북고 출신을 중용했다. 이 지역의 민심이 반(反)노무현 정서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아마도 노무현 정권의 정치적 기반 일부가 예전부터 이 지역에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노 대통령의 사시 17회 동기인 정상명(48회)씨가 검찰총장이 됐고, 대구고검장(권재진·53회)과 부산지검장(김태현·55회), 제주지검장(정진영·58회)이 경북고 출신이다. 전체 검사숫자는 2006년 4월 현재 1992년의 73명보다 절반 이상이 줄어든 31명이다. 1위인 경기고 출신 검사 숫자도 38명에 불과하다. 1990년 이후 외국어고와 사립 명문고의 부상으로 사시 합격자 출신고교가 다양화 됐기 때문이다.

    행정부 3급 이상(검사, 군인, 국가정보원 제외) 공직자도 경기고(69명)에 이어 경북고 출신(48명)이 2위를 다린다. 경북고 동문들에 따르면 현재 중앙부처 서기관급 이상 공무원 중에는 80여 명의 동문이 재직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쥐 죽은 듯 보내야 했던 YS 정권과 DJ 정권 시절, 경북고 출신 공직자들은 동문회조차 꺼려야 했다. 한 고위직 동문은 “누구도 모이자는 말을 한 적이 없고, 또 모일 분위기도 아니었다. 모이면 모두 죽는다는 식이었다”고 털어놨다.

    이런 분위기는 DJ 정권 말기부터 사라져간다. 서울 여의도 정가와 금융권을 중심으로 한 동문모임인 ‘너섬 포럼’이 만들어지고,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사대문안 관가와 언론 정계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인사동 포럼’ ‘광화문 포럼’ 등의 동문 모임이 만들어졌기 때문. 이들 모임의 특징은 정치적 성향에 구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도 말은 하지 않지만 굴곡의 세월을 보내온 만큼 ‘정치가 끼어들면 모임 자체가 없어질 것’임을 동문 모두가 알기 때문일 터이다.

    同門과 同窓

    뜬금없는 인사 불만이나 로비성 발언을 하는 동문이 간혹 있지만, 그럴 경우 바로 제지당하거나 외면받는다. 2005년 8월 서울 인사동에 있었던 인사동 포럼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중앙부처의 고위직 선배 한 사람이 취기가 올라 동석한 이재용 당시 환경부 장관 앞에서 인사 불이익에 대해 눈물로 호소했지만 선배들은 하나같이 외면하는 분위기였다.

    기자는 최근 동문회에 갈 때마다 잔잔한 감동을 받는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정치권 선후배가 어우러져, 또 재야단체 출신과 이들을 억누르던 경찰 고위관료 선후배들이 웃으며 옛날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이명박계와 박근혜계로 나뉘어 으르렁거리는 한나라당 의원(13명)과 그 보좌관들도 사석에서 만나면 허물없는 동문일 뿐이다. 그들에겐 서로 손가락질하던 과거도, 현재의 다툼도 “미안하이”라는 한마디로 모두 풀린다. 3년 동안 한솥밥을 먹었다는 공통된 경험이 정치적 견해차와 상반된 이해관계를 화해의 분위기로 녹여버린다. 이것이 같은 문(門)을 드나들며 배우고, 같은 창(窓)을 통해 세상을 바라봤던 동문과 동창의 의미다.

    경북고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최재원 변호사(68회)의 날카로운 분석으로 이 글을 맺는다.

    “5·16군사정변 이후 30년 동안 정권의 중심이 대구·경북에 있었고, 경북고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고급 인재풀의 임무를 다했다. 거기에 속했든 거기에 항거했든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였다. 잘못이 있다면 시대에 있다. 동문 집단도 하나의 사회다. 사회는 좌파, 우파, 중도, 정치적 무견해자 등 온갖 구성원이 섞인 ‘잡곡밥’이다. 경북고도 그렇다. 경북고 동문회는 사적 경험을 같이 한 모임일 따름이다. 그 다양한 구성원을 단지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매도하고 하나의 이미지로 규정하려 한다면 그 또한 획일주의고 독재다. 동문은 안 보면 보고 싶은 애인 같은 집단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졸업 20년, 경북고 68회 최영철 기자의 ‘同門견문록’

    경북고의 옛 대봉동 교사와 그곳으로부터 옮겨온 느티나무.

    “연합고사 성적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학교에서 전화를 받은 어머니가 펄쩍 뛰며 기뻐해 내가 혹 연합고사 수석이라도 했는가 하고 생각했다. 알고보니 어머니는 내가 경북고에 배정된 사실을 통보받고 좋아하신 것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내로라하는 선배들을 둔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을 나보다 더 기뻐했다.”

    동기 중 수석입학의 영광을 누린 권재한은 부모님의 반응을 이렇게 기억한다.

    “아이고 잘됐다, 니는 복을 타고 난기라. 거가 얼마나 좋은 학굔지 니 아나. 경고가 대구, 아니 전국에서 최고 학굔기라. 선배들이 이 나라 기둥이제.”

    그는 1993년 행정고시 재경직에 합격한 후 농림부 협동조합과장을 거쳐 미국 연수 길에 올라있다. 그는 “부모님은 내가 행시에 합격했을 때보다 경고에 수석 입학한 것을 더 기뻐한 것 같다”고 했다.

    택시가 아파트촌을 헤치고 황금동으로 들어가자 멀리 경북고의 붉은색 본관 건물과 그 꼭대기에 자리잡은 ‘백(白) 삼선’의 학교 상징물이 눈에 들어왔다. 백색 삼선…. 비평준화 선배들이 그것 때문에 한없는 자부심을 느꼈다면, 평준화 세대들은 그것 때문에 학창시절 내내 주눅이 든 채 살아야 했다. ‘경고’라 하면 서울·경기지역에서는 경기고, 부산·경남권에서는 경남고를 의미하지만 대구·경북지역에서는 경북고가 ‘경고’다.

    경북고는 1900년에 설립된 제1고보 경기고와 1909년에 설립된 제2고보 평양고에 이어 1916년에 설립된 제3고보로 옛 교복과 교모에 새겨진 ‘백 삼선’은 바로 이 순서를 상징한다. 경기고는 백색 선이 하나였다. 백 삼선은 아직도 본관 건물 위에 학교의 상징물로 선명하게 남아 있으며, 현재의 재학생 교복 소매에도 그려져 있다. 당시 교모의 백 삼선은 수재의 상징이자 출세를 보장하는 징표였다. 지금은 대구 경신고(지방 고교 중 2005, 2006년 서울대 최다 진학) 동문들이 자신들이 ‘경고’라고 우기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져 경북고 동문들을 분노케 하고 있지만.

    택시가 경북고 정문 앞에 다다르자 가슴이 콩닥거렸다. 담장 너머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수령이 족히 70년은 넘어 보이는 느티나무들이 겨우내 감춰둔 연초록 이파리를 쏟아내며 교정을 물들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꽃망울을 터뜨릴 듯 물오른 목련의 꽃봉오리.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 벚꽃, 진달래….

    나무들이 품은 역사

    그런데 느티나무는 어디에선가 많이 본 듯하다. 그렇다. 그 느티나무들은 황금동으로 이사 올 때 대봉동 교사에서 우리와 함께 온 동지들이었다. 당시 이종률 교장(1978년 제6대 경북도교육감)은 이들 나무에 온갖 공을 들였다.

    “경북고의 역사는 곧 교정에 있는 나무가 말한다. 나무를 가꾸는 것은 곧 모교의 역사를 가꾸는 것이다.”

    우리는 열심히 물을 주고, 거름도 줬다. 대봉동 교사에서 황금동 교사로 이사하면서 당시에는 보기 드문 대형 기중기가 동원된 기억도 있다. 당시 돈으로 나무 이전에만 1억원이 들었다고 하니 경북고 동문의 나무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사하고 얼마 안돼 느티나무 몇 그루가 고사(枯死)하자 교장선생님은 학생들을 심하게 다그쳤다.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대봉동 교사에서도 그랬듯, 여름 땡볕 아래 교련 수업의 좋은 피난처가 되었다. 오랜 기간 경북도교육감을 지낸 이종률 선생님의 경북고 교장 부임은 당시 경북고의 위상과 총동문회의 위력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졸업 20년, 경북고 68회 최영철 기자의 ‘同門견문록’

    경북고 교정에 있는 노태우 전 대통령 기념식수.

    교문에 들어서니 본관으로 오르는 양쪽 편으로 수령 20여 년 안팎의 사철목 군락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국 사회를 들었다 놓았다 하던 대선배들이 학교 이전을 기념해 심은 나무들. 20년 세월 동안 나무들은 몰라보게 자라 있었다. 나무를 심은 선배의 기수와 이름이 둥치 앞 작은 돌에 조각되어 있다. 그 때 미리 연락을 받은 경북고 윤진보 교감이 반갑게 기자를 맞았다. 윤 교감은 51회 졸업생이다.

    교문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가장 왼쪽의 나무는 이효상(경북고 4회, 1989년 작고)씨가 심은 것. 한 시대를 풍미한 시인이자 작가, 교육자, 학자, 그리고 박정희 정권을 떠받치던 정치권력의 핵. 그의 삶은 한 마디로 ‘풍운’에 휩싸인 삶이었다. 6·7·9·10대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을 지내며 공화당을 이끈 핵심 정치세력이었던 그. 그의 둘째아들이 최근 추기경 물망에 올랐던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이문희(35회) 대주교이다. 이효상씨는 경북고 동창회지인 ‘경맥저널’이 2002년 11월 동문 43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모교를 빛낸 동문 1위(45.65%)에 올랐다. 다음이 노태우 전 대통령(32회), 3위는 신현확 전 국무총리(20회), 4위는 ‘국민타자’ 이승엽(78회)이었다.

    기념식수 동산은 길게 펼쳐져 있다. 기자가 이력을 대충 짐작할 수 있는 인사의 이름만 나열해도 20명이 훌쩍 넘어갔다. 정희택(19회, 전 감사원장, 11대 민정당 국회의원), 서상기(45회, 현 국회의원), 박철언(41회, 13·14·15대 국회의원), 서동권(33회, 전 검찰총장, 안기부장), 김동철(38회, 변호사, 전 대구지검장), 김용철(26회, 전 대법원장), 김복동(33회, 전 육군사관학교장, 14·15대 국회의원), 손제석(31회, 전 문교부 장관), 최재호(16회, 전 대법관), 김준성(20회, 전 경제기획원 장관, 현 이수그룹 명예회장), 신현확(20회, 전 총리), 박준규(25회, 전 국회의장, 9선 국회의원), 이영창(34회, 14대 국회의원, 전 치안본부장), 김성곤(15회, 4·6·7·8대 국회의원,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이 아버지를 추모해 기념식수), 문희갑(37회, 12·13대 국회의원, 전 대구시장), 홍희흠(34회, 전 대구은행장), 김연조(37회, 전 중앙종금 사장), 조근해(38회, 전 공군참모총장), 정해창(37회, 전 법무부 장관), 김만제(34회, 전 경제부총리, 16대 국회의원)…. 기념식수를 한 시점이 1984~92년이라 그런지 그 무렵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의 이름이 주로 눈에 띄었다.

    ‘TK 마피아’

    경북고의 명성은 주로 1960년 중반부터 1992년까지 형성됐다. 대통령(노태우)을 비롯해 국무총리, 국회의장(3명), 대법원장 등 3부 수장, 부총리 6명, 장관 37명, 국회의원은 157명을 배출했다. 그중에는 9선을 한 의원(박준규)도 있고 6선(김수한)의 의원도 있다. 5선은 강재섭, 4선은 이효상, 김성곤 등. 법조계는 판·검사 변호사를 통틀어 또는 각각을 분리해도 경기고에 이어 부동의 2위를 고수해왔다. 동문 법조인수 380명. 현직 판·검사 110명에 변호사만 200명이다. 검찰총장만 7명이 배출됐다.

    기념식수 동산 맨 위 본관 건물 맞은편 화단에는 3평 남짓한 공간에 노태우 전 대통령의 기념식수 화단이 따로 조성돼 있다. 학교 관계자에게 들으니 이전 당시 심은 나무가 죽어 다시 심었단다. 학교 안에서도 위치가 가장 좋은 곳인데, 토질이 별로 좋지 않아 나무가 잘 자라지 못한다고 했다. 기념식수 중 유일하게 노태우 전 대통령이 심은 나무만 죽었다. 경북고는 역사관에도 ‘학교를 빛낸 동문들’이란 코너에 노태우 전 대통령의 공간을 따로 만들어 그 치적을 써 놓았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 1987년 6·29선언을 통해 권위주의 시대를 청산한 것 등을 꼽았다.

    1961년 5·16군사정변에서 1990년대 초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졸업횟수(생년)로 따져 30회 후반부터 40회 후반까지의 경북고 졸업생들은 학교의 인맥과 이름 덕을 톡톡히 본 세대다. 이효상·신현확·박준규씨의 경북고 파워는 정계의 주류를 이뤘고, 법조·행정부·경찰 그 어느 곳에서나 경북고 출신은 출세가도를 달렸다. 노태우 대통령 재임 시절인 제13대 국회의원 중 경북고 출신은 12대 때보다 2배(16명)나 늘었고, 1990년에는 대검찰청 중앙수사1과장, 서울지검의 공안 1부장, 형사 1부장, 특수 1부장 등 핵심 요직이 모두 경북고 출신이었을 정도.

    이 때부터 경북고는 ‘TK 마피아’란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또 서울대 법대, 육사와 함께 ‘조국 망국화 3개교’로 경북고의 이름이 오르내린 것도 이 시기다. 하지만 경북고 역사를 제대로 살펴보면 이는 단면만 본 데서 비롯된 오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너희들은 아직 세상을 몰라”

    졸업 20년, 경북고 68회 최영철 기자의 ‘同門견문록’

    동문 설문조사 결과 ‘모교를 빛낸 동문’ 1위에 오른 이효상씨(왼쪽)와 박준규씨. 교정의 기념식수 동산에 있는 표지석들(왼쪽부터 이효상, 신현확, 박철언).

    1980년대 중반 학번 중 특히 1987년을 대학에서 보낸 많은 경북고 동문은 노태우 전 대통령 때문에 갖은 고초를 겪었다. 민주화 항쟁이 한창이던 1987년 고려대 1학년이었던 기자는 재(在)고려대 경북고 동문회를 알리는 전단지가 교내 곳곳에서 찢겨 나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붙이고 또 붙여도 역시 몇 시간이 안돼 찢어져 인편을 통해 알음알음으로 모여야 했다. 동기들끼리 모여 술을 마시다 경북고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우들에게 두들겨맞은 일도 있었다.

    그해 6·29선언이 있고 나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차기 대통령후보로 선정된 지 얼마 후였다. 고려대 행정학과 황대일 선배(65회, 현 연합뉴스 차장)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후보 캠프에 있던 경북고 선배들로부터 재경(在京) 경북고 출신 대학생을 모두 모으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했다. 모임 장소인 연세대 앞 고급 한우식당 ‘신촌가든’으로 가기 전, 황 선배와 우리는 “이는 불법선거운동이며 더구나 노태우 후보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인물이니 모임 자체를 뒤엎어버리자”고 결의하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행사장에는 경북고 출신 연세대생과 서울대생, 서강대생들이 나와 있었다. 서울대에서는 당초 모임 참석 자체를 거부하려다 대표단만 참여해 자신들의 뜻을 전달했다. ‘노태우 후보 지지나 운동원 참여는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행사가 무르익으면서 우리는 작전대로 노태우 후보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결국 모임은 파행으로 끝이 났다. 그 때 노태우 캠프에 있던 선배들이 던진 말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너희들이 아직 어려 세상을 모른다. 언젠가 기대고 의지해야 할 선배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오늘 뼈아픈 실수를 했다. 머지않아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선배들이 건넨 모임의 식대와 활동비(?)를 물리친 탓에 그해 재경 경북고 대학생 동문들은 하숙비와 자취방 월세를 못내 끙끙거린 기억을 갖고 있다. 이 사건이 있고 얼마 후 재경 대학생 동문회 차원에서 각 대학별로 ‘노태우 후보 경북고 제명운동’이 확산됐다. 자신의 고교 선배를 동문에서 제명하라며 피켓을 들고 학교 안을 도는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당시 일각에선 노 후보가 대구공고를 다니다 학교장 추천으로 경북고에 편입했기 때문에 정통 선배로 볼 수 없다는 주장도 일었다. 그러나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논리다. 전학을 와 졸업했다고 선배가 아니라면 동문에서 제명해야 할 사람이 수백명은 넘을 터. 노 후보에 대한 거부감은 광주민주화운동 탄압과 군부독재에 대한 당시 학생들의 반항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게 옳다.

    일명 ‘신촌가든’ 사건은 또 다른 분란을 가져왔다. 노태우 후보 캠프의 선배들이 서울대, 고대, 연대, 서강대 재학생만 후배로 인정해 다른 대학 재학생은 부르지도 않았기 때문. 그들의 논리는 그 ‘이하’의 대학에 다니는 학생은 비평준화 시기라면 경북고에 들어올 능력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반발은 불 보듯했다. 비평준화 세대와 평준화 세대를 나눠서 동문회를 따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였다.

    정치판은 치기어린 후배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돌아갔다. 5·6공 시절 경북고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기수별로 열거해야 할 정도로 요직이 경북고 출신들로 채워졌다. 시중에는 “경북고 출신은 전화 한 통으로 민원을 해결한다”는 말이 나돌았다. 5공 시절엔 김만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정해창 법무부 장관, 정호용 내무부 장관(32회, 13·14대 국회의원), 사공일 재무부 장관(39회, 고려대 석좌교수), 김윤환 대통령 비서실장(32회, 10·11·13·14대 국회의원, 신한국당 대표위원) 등이, 6공에서는 노태우 대통령을 기점으로 박철언 정무 제1장관, 서동권 안기부장, 이종구 국방부 장관(35회), 서영택 국세청장(38회, 전 건설부 장관), 김우현 치안본부장(34회, 전 경북도지사) 등이 실세를 이뤘다.

    고대 인촌묘소 ‘줄빠따’ 사건

    1987년은 정치적 민주화뿐 아니라 사회문화의 민주화에도 전환점이 된 해였다. 기자는 고등학교 시절에도 경험하지 못한 동문 구타를 대학에서 경험했다. 소위 ‘87년 고대 인촌묘소 줄빠따 사건’이 그것이다. 80학번 이전 선배들로부터 “동문회 참석율이 저조하다”며 전체 소집령이 떨어졌고, 가랑비가 오는 중에 경북고 출신 고대 재학생 전체가 박달나무 몽둥이로 매를 맞았다.

    졸업 20년, 경북고 68회 최영철 기자의 ‘同門견문록’

    사연 많은 경북고 대강당. 그 앞으로 선배들의 기념식수 동산이 펼쳐져 있다.

    ‘줄빠따’는 옛 군대에서 비롯된 것으로 제일 고참으로부터 기수별로 한 대씩 늘어나 막내는 ‘죽도록’ 맞는 구타 방식. 당시 1학년 막내였던 우리 동기들은 ‘줄초상’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날 사건은 중간 기수 선배들이 “우리들까지만 맞고 후배들은 때리지 않겠다”고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일단락됐다.

    그후 벌어진 회식 자리에서 경북고 출신 고대 동문회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줄빠따’를 영원히 없애기로 다짐했고, 그 약속은 현재까지 지켜지고 있다. 당시 선배의 지시로 박달나무 몽둥이를 구해왔던 김진우(고려대 시간강사)는 아직도 동기, 선배들로부터 욕을 먹고 있다. 너무 크고 튼튼한 몽둥이를 구해왔기 때문이다.

    경북고의 이름 덕을 보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세대는 386세대뿐만이 아니다. 이른바 ‘긴급조치 세대’라고 불리는 70년대 학번(50~59회)들도 “비록 386세대들만큼 고초를 겪지는 않았지만, 좋은 경험은 별로 못했다”고 주장한다. 긴급조치 세대가 사회생활을 왕성하게 하던 40대 때 YS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법조계와 행정부에서 이른바 ‘경북고 대학살’이 일어난 시기다. 경남고와 부산고 출신이 약진하고 경북고 출신은 인사에서 계속 밀려났다.

    “인사할 선배가 없다”

    ‘문민정부’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모교인 경남고 인맥의 독무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김 대통령은 1995년 9월 경남고 후배인 김기수씨를 검찰총장에 임명한 후 법무장관에 자신의 경남고 2년 선배인 안우만씨를 앉힌 것을 비롯해 경찰청장에 박일룡씨, 국세청장에 추경석씨, 사정비서관에 배재욱씨를 임명했다. 사정(司正)의 핵심라인이 모두 경남고 출신으로 교체된 것. ‘황태자’ 현철씨가 졸업한 경복고 출신도 약진했다. 경복고 출신으로는 이한동 국회부의장, 이원종 대통령정무수석, 김덕룡 정무 제1장관, 김기수 대통령수행실장 등이 있었다. YS 정권 때 행정고시에 합격한 선후배, 동기들의 얘기는 당시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원래 합격하고 배치를 받으면 고등학교 선배인 부처 국장, 과장에게 인사를 하는 게 관례였는데, 우리 때는 인사하러 갈 선배가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부처 당 5, 6명씩 있던 국·과장급 선배들이 전부 어디로 갔는지 한꺼번에 사라졌다.”

    1990년대 중반이면 50회대 기수가 40대 중반으로 접어들어 과장급, 진급이 빠른 사람은 국장급에 앉아 있어야 정상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경북고 사상 가장 치열한 입시를 치렀고 고시 합격률도 가장 높은 기수였다. 그러나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 선배들은 그들 앞에 없었다. 군에서도 하나회 퇴출로 경북고 출신이 몰락하면서 진급에서 줄줄이 소외됐다. 50회대 기수 중 한 선배는 술자리에서 후배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경고를 나와 육사를 졸업하면 초고속 진급이 보장됐다. 별 하나 따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는데, 50회 이후로는 하나회 때문에 거의 중령도 못 되고 옷을 벗는다.”

    그래도 국회는 YS 정권이 들어서기 전인 1992년 14대 총선이 치러져 화를 면했다. 경북고 출신 국회의원은 13대와 마찬가지로 16명이었다. 이른바 ‘TK 정서’로 일컫는 민심이 반영됐고, 대구·경북의 국회의원 출마자 대부분이 경북고 선후배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방어적 TK 민심은 15대(18명), 16대(16명), 17대(15명)까지 경북고 출신 국회의원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경북고 동문들 사이에선 “YS가 ‘우리가 남이가’ 하고 TK 민심을 회유해 대통령이 된 후 TK 정서를 대표하는 경북고 출신을 토사구팽했다”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꼴통 68회’, 용 되다

    유명 선배들의 기념식수 동산 옆에는 경북고의 자랑거리인 대강당이 있다. 스탠드와 홀을 합치면 전교생이 들어갈 수 있는 넓은 강당이다. 학교 이전 후 이곳을 처음으로 사용한 동기들은 강당과 관련해 저마다 사연을 안고 있다. 그곳은 전교생이 일주일에 1~2시간씩 검도를 배우던 장소이기도 하다. 검도가 교기(校技)라 전국체전 매스게임에서 검도 품세 시범을 보이던 경북고 학생들은 좀 과장해서 ‘우산 하나만 들면 무서울 게 없다’고 할 만큼 검도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졸업 20년, 경북고 68회 최영철 기자의 ‘同門견문록’

    경북고와 육사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과 정호용 전 의원.

    강당과 관련해서는 잊지 못할 기억이 또 있다. 매학기 이어진 선배들의 특강이 바로 그것. 제4대 총동창회장인 조창희(16회, 전 판사) 변호사와 당시 문희갑 경제기획원 차관의 연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공부해야 합니다. 선배들이 쌓아놓은 빛나는 전통을 후배들이 무너뜨리면 됩니까. 역사의 수레바퀴를 선배들은 앞에서 끌고 후배들은 뒤에서 밀어야 합니다. 우리 학교는 조국 근대화의 역군이자 엘리트 배출의 산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끄는 선배는 있는데 뒤에서 미는 후배가 없어서야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시 2학년이던 우리에게 학교측이 이렇게 ‘남다른’ 배려를 한 것은 우리 동기들의 학력이 워낙 뒤떨어져 뭔가 자극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학년 때 전국체전 매스게임 연습을 하느라 거의 8개월 동안 공부를 손에서 놓았던 우리는 동문 전체가 인정하는 ‘꼴통 기수’였다. 일사병으로 쓰러져가며 연습한 매스게임은 동기들에게는 더없는 친화의 장(場)이 됐지만 이를 계기로 많은 동기가 ‘반(反)전두환주의자’가 됐다. 꽃샘추위가 싸늘한 봄부터 시작해 여름 땡볕과 가을 찬 바람을 이기며 연습한 매스게임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단 5분간 보여주기 위한 ‘요식성 행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고등학교 1학년 어린 마음에도 분노가 일었다. 그 여파로 우리의 모의고사 성적은 대구시내 고교 중 밑바닥을 헤맸다.

    이런 일도 있었다. 모의고사 성적 평균이 2차 인문계고보다 낮게 나오자 교장선생님이 우리 학년 전체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강당에 모아놓고 “너희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공부를 하겠냐”며 학생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어 교감선생님, 교무부장, 2학년 담임선생님과 반장들이 차례로 꿇어앉았고 결국 2학년 전체 학생이 꿇어앉았다. 교장선생님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30분쯤 정적이 흐른 뒤 강당은 눈물바다가 됐다.

    이후 동기들은 변했다. 야간 자율학습 지원자도 늘었고, 도서관을 이용하는 학생도 늘었다. 3학년에 올라가면서 동기들의 학력은 대구 최고로 올라섰다. 인문계 수석은 늘 우리 차지였다. 그해 대학입시에서 서울대 15명 등 50여 명의 동기가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에 합격했다.

    그리고 이 꼴통 기수에서 학력고사(지금의 수능) 문과 수석도 나왔고 사법고시 수석합격자(황승화·법무법인 지평 변호사, 사시 38회)도 배출됐다. 회계사로는 삼일회계법인 최연소 이사 권세호(미국 연수 중)가 있고, 같은 기수 재경고시 합격자 중 최연소로 서기관을 달고 과장 진급을 한 권재한도 빠뜨릴 수 없다. 1987년 카이스트 최연소 합격과 1990년대 최연소 박사도 우리 동기 중에서 나왔다(김성원). 현재 증권가 10대 애널리스트로 활약하는 정승교도 동기동창이다. 동기 중 사법시험 합격자가 6명 나왔고, 재경 행시에 4명, 외무고시에 1명이 합격했다.

    꼴통 기수 출신이라 그런지 제34회 사법시험에서 수석 합격한 황승화는 신문 인터뷰에선 “권력에 흔들리지 않는 칼날 검사가 되겠다”고 하고는 운동권 출신 변호사가 많은 로펌인 지평에 들어갔다. 그가 펴낸 민법서, 판례집은 사시 준비생과 법학도들에게 읽히고 있다. 또 권두섭 동기는 민주노총 소속 변호사가 됐다. 현재는 한미 FTA 반대 진영에 이론적, 법적 논리를 제공하는 브레인으로 뛰고 있다.

    요즘도 동기들끼리 모이면 2학년 때 들은 대선배들의 특강을 화제로 삼곤 한다. 그럴 때면 웃으면서 이렇게들 얘기한다.

    “우리는 뒤에서 열심히 미는 것 같은데, 앞에서 끌어준다던 선배들은 다 어데 갔노? 이제 선배들 명성 먹고 사는 시대는 끝난 기라.”

    사연 많은 강당을 나와 2학년 때 기자가 공부했던 교실로 향했다. 2학년 1반 교실은 1학년 교실로 바뀌어 있었다. 지금 후배들은 교복 소매에 둘러진 백 삼선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22년 후배인 90회(2학년, 1990년생) 학생을 붙잡고 물었더니 대답이 걸작이다.

    90회 왈 “백색 삼선 폼 나잖아요”

    “1학년 땐 쪽 팔렸는데 요즘은 삼선 넣는 게 유행이에요. 폼 나잖아요.”

    아마 유명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의 삼선 패션이 유행한 것을 의미하는 듯했다. 그들에겐 백 삼선보다는 교복의 패션 스타일이 관심사다. 세상은 변했다. 교실을 둘러보다 2학년 때 담임인 황대근 선생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 기억났다.

    졸업 20년, 경북고 68회 최영철 기자의 ‘同門견문록’

    경북고 야구부가 각종 대회에서 받은 트로피들. 1967년 이후 우승만 35회.

    “넌 하는 짓이 삐딱한 게 기자질 하면 딱 맞겠다.”

    선생님은 가정통신문에도 그렇게 쓰셨다. ‘비판정신이 투철해 장래 기자가 어울림.’ 학창시절, 정말 만사가 뒤틀리고 삐딱했다. 졸업 20년이 넘어 고백하는 사실이지만 2학년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학교 전체를 정전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바로 기자다. 반강제적인 야간자율 학습이 얼마나 싫었던지…. 서무실 옆에 있던 콘센트 박스에서 퓨즈를 빼냄으로써 모든 동기의 귀가를 2시간 앞당겼지만 그 결과는 일파만파였다. 이 일로 무지막지하게 혼이 난 당시 2학년 반장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황 선생님은 학생의 특기를 잘 찾아주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문과반에 있던 김성원을 이과로 전과시킴으로써 후일 카이스트 최연소 합격과 최연소 박사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황 선생님의 말씀대로 ‘비판정신이 남달랐던’ 악동은 1992년 9월 ‘영남일보’ 기자가 됐다. 수습교육을 받을 때인 그해 12월, 기자는 14대 대통령선거 현장에 있었다. 투표 당일 민주당 대구시지부에서 개표상황을 스케치하던 기자는 경북고 출신이라는 이유로 김대중 후보 지지자들에게 시쳇말로 맞아 죽을 뻔했다. 김영삼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자 그들은 “이 모든 게 경북고 출신들이 퍼뜨린 TK 정서 때문이다. 특히 제도권 언론이 도와주지 않아 그렇다”며 집기들을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수습을 마치고 사회부로 배치됐는데, 부장이 고등학교 선배였다. 경쟁지의 사회부장도 선배, 편집국장도 선배였다. 지역신문과 방송의 국장 중 절반 가량이 경북고 출신이었다. 차장급도 3명중 1명은 고교 선배였다. 당시 대구시장은 이의익(40회, 15대 국회의원)씨. 그 후로 대구시장은 현재의 김범일 시장(50회, 전 산림청장)에 이르기까지 민선 시장 출범 직전인 1995년 3~6월 석 달을 제외하곤 경북고 출신이 아닌 적이 한번도 없었다.

    또 14대 국회의원(1992~96년)은 대구지역 지역구 의원 10명 전원이 경북고 출신이었다. 이후 15·16·17대 국회의원 중 대구지역 출신은 총 10~12개의 지역구 중 2개 지역만 제외하고 모두 경북고 졸업생이었다(박근혜 의원 제외). 대구시장선거에선 매번 고교 선후배간의 대결이 벌어졌고, 국회의원선거도 양상은 비슷했다. 지난해 대구시장선거에서 한나라당 김범일 후보와 겨룬 열린우리당 이재용(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전 환경부 장관) 후보도 경북고 출신(54회)이다.

    경북고 출신 기자의 애로

    또한 경북대 의대의 50대 중반 이상 교수 대부분이 경북고 출신이며 이런 현상은 윗대로 올라갈수록 더하다. 1960~70년대 중반까지 경북고를 나와 서울로 진학하지 않은 이과반 우수 학생 대부분이 경북대 의대에 들어가면서 생긴 현상이다. 그래서 1990년대 초반까지 경북대 의대는 ‘경북고 동창회’라는 말이 나왔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구에서의 기자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주로 비판기사를 쓰는 사회부 기자로서 그 대상이 경북고 선배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대구 서부권 경찰서를 출입하던 1994년 무렵에는 당시 대구시 서구 지역구의 정호용 의원(민자당)을 찾아갔다 된통 혼이 나기도 했다. ‘정호용 의원이 사조직을 만들어 불법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은 기자는 마침 지역구에 내려와 있던 정 의원을 만나러 사무실로 갔다. 정 의원은 1979년 12·12쿠데타의 주역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과 육사, 경북고 동기(32회)다. 김윤환 전 의원과 ‘TK 사단의 금고지기’로 불리던 이원조 전 의원(13·14대 국회의원. 지난 3월3일 별세)도 이들과 같은 기수의 친구들이다.

    워낙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라 정 의원과 기자 간에 오랜 시간 설전이 오갔다. 그때 보좌관이 들어와 귓속말로 정 의원에게 뭔가를 전했다. 듣고 난 정 의원은 대뜸 “최 기자 경고 나왔다매. 68회라꼬? 이거, 새까만 후배가 선배한테 버릇없이 이래도 되는 거야” 하고 쏘아붙였다. 순간 얼어붙는 듯했다.

    “의원님 왜 이러십니까. 저는 지금 신문사를 대표해 나왔지 고교 후배로서 찾아온 게 아닙니다.”

    정 의원은 다리를 꼬고 소파 뒤로 푹 눌러앉더니 이렇게 말했다. 영락없이 장군이 부관에게 꾸지람을 하는 모양새였다.

    “야 이, XX. 넌 임마, 선후배도 없고 부모형제도 없냐. 이거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야. 당장 꺼져.”

    이러저런 욕을 더 얻어먹고 취재를 포기한 채 신문사로 돌아와 선배들에게 씩씩거리며 그날 겪은 일을 들려줬더니 위로는커녕 “넌 힘센 학교 나와서 좋겠다. 왜 가만있는 선배를 건드리냐”며 이죽거렸다. 그런데 정 의원에 대한 제보는 거짓으로 드러났고, 기자는 정 의원측에 그날의 ‘무례’를 깍듯하게 사과했다. 좀 억울하긴 했지만 ‘경북고 천하’의 대구에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졸업 20년, 경북고 68회 최영철 기자의 ‘同門견문록’

    경북고 교정에 있는 2·28대구학생의거 기념조형물.

    대구시청 취재는 더 어려웠다. 1996년 말 건설 관련 비리를 취재할 때였다. 외환위기가 오기 직전이었다. 대구지역 건설회사들은 자금 회전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갖은 꼼수를 쓰고 있었다. 관련 증거를 모으고 확인 취재에 들어갔을 때 대구시의 담당 국장이 고교 선배임을 알게 됐다. 당시 대구시 부시장도 선배였고 국장급의 90%가 고교 선배들이었다. 시치미를 뚝 떼고 취재에 들어가는데, 담당국장은 “후배님 왜 이러십니까. 그 회사 사장도, 전무도 다 선후배 사이인데 선배 죽일 일 있어요? 자 다시 한번 생각하시지요”라고 했다. 상대편은 이미 기자에 대한 신상파악을 마친 상태였다. 그래도 취재를 계속하자 시간이 흐르면서 대화는 자연스럽게 존댓말에서 막말로 변했다. 그가 마지막에 한 말은 “너 계속 이러면 대구시내에 있는 공직 선배들 얼굴은 다 보는 줄 알아”였다.

    회사로 돌아오니 여러 고교 선배들을 통해 ‘로비’가 들어왔다. 결국 그 회사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전에 부도가 났다. 지금도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대구 굴지의 건설업체였다.

    위화감 조성한 ‘서울대 입시반’

    기자 생활을 하면서 동기들 때문에 놀랄 일이 많았는데, 1993년 서울대를 다니다 방위병으로 복무 중이던 이모씨의 정부 부처(국방부 포함) 해킹 사건은 큰 충격이었다. 당시 연합통신 기사를 받아 본 기자는 눈을 의심했다. 피의자의 이름과 나이가 당시 서울대를 다니다 입대한 고교 동기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취재를 시작했으나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철저히 이를 막고 나섰다. “국가기밀 사항이 누설된다”는 게 이유였다. 후일 그 동기는 전과를 말소하고 국가정보원에 들어갔다. 정부 사이트를 제집 드나들 듯하던 해커가 지금은 ‘사이버 전쟁’의 최일선에서 국가 기밀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변신한 것이다.

    1학년 건물을 두리번거리다 화장실에 들어가니 1학년 때의 기막힌 해프닝이 떠올랐다. 지금과 같은 수세식 화장실 문화에선 상상도 못할 사연이다. 채변검사가 있는 날 볼일을 못 봐 당일 아침에 친구 한 명이 여러 급우의 것을 책임지던 일은 많은 이가 경험한 추억의 한 장면.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엽기적이었다. 당시 부실장이던 권재한군은 급우들에게 채변봉투 나눠주는 것을 깜빡했다. 그러다 ‘납기일’을 맞자 그는 재래식 화장실에 가서 대변을 직접 퍼올린 후 60명 가까운 한 반 학생 전체의 채변봉투에 각각 조금씩 담아 제출했다. 덕분에 그 해 권군의 반 학생 중 많은 수가 영문도 모르고 구충제를 먹어야 했다.

    교실이 있는 건물을 나와 점심을 먹으려고 교내 식당으로 향했다. 원래는 학생들이 숙식할 생활수련관으로 만들어졌지만 우리 동기들에겐 아픈 상처가 있는 곳이다. 학교측은 3학년 때 동기 중 전교 30등까지를 이곳에 합숙시키며 방과후 따로 공부를 하게 했다. 일명 ‘서울대반’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상위권 학생들이다보니 갈수록 경쟁이 심해져 잠을 자지 않는 학생이 늘어갔던 것. 다음날 수업시간에 조는 학생의 대부분은 ‘서울대반’ 학생들이었다.

    또한 기숙사에 못 들어간 친구들과의 위화감은 교실 안팎에서 갖가지 불상사를 빚어냈다. 결국 기자를 비롯한 몇몇 학생은 기숙사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학교 관계자는 “기숙사 제도는 당시 많은 문제점이 생겨 1987년부터 폐지됐다”고 전했다. 현재 생활수련관은 교내식당과 양궁선수들의 합숙소로 쓰이고 있다. 경북고 양궁부는 최근 전국대회를 석권하고 있다.

    옛 기숙사 뒤편에는 ‘고청원’이라는 연못이 들어서 있다. 기자가 졸업하고 2년 후에 생겼다는데 아담하고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1학년 때 대봉동 교사에도 조그마한 연못이 있었는데 누군가 교장선생님이 기르던 관상용 잉어를 몰래 잡아 구워먹었다가 온 학교가 발칵 뒤집어진 일이 있다. 23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연못을 돌아 개나리, 진달래가 반기는 야구장으로 갔다. 학창시절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팀은 전용 훈련장이 없어 이곳에 와서 연습을 했다. 당시 이만수 선수가 최고의 스타였는데 연습으로 쳐도 종종 공이 학교 담장을 넘어갔다. 그래서 친구들은 삼성 라이온즈가 오면 담장 뒤에서 기다렸다 공을 주워 친구들에게 팔았다.

    이곳은 ‘국민타자’ 이승엽을 길러낸 곳이기도 하다. 이승엽은 기자의 꼭 10년 후배다. 1985년 당시만 해도 전국에서 대운동장 외에 전용 야구장을 따로 가진 학교는 경북고밖에 없었다. 황금동 경북고 신교사는 웬만한 전문대학보다 컸다.

    경북고에는 여러 가지 징크스가 있었는데 야구 성적이 좋으면 그해 입시 성적도 좋다는 게 그중 하나. 예를 들어 전국 4관왕(청룡, 봉황, 황금사자, 전국체전)을 달성했던 1981년엔 무려 60 여 명의 선배가 서울로 상경했다. 전국 고교 중 소위 명문대 진학률 1위였다. 성준(63회) SK 와이번스 코치, 류중일(64회) 삼성라이온즈 코치가 그 때 활약하던 선수들이다.

    경북고의 또 다른 본류는 ‘진보’

    대봉동 교사에서 옮겨온 느티나무를 따라 걷다보니 예전에 보지 못한 조형물이 하나 눈에 띈다. 2·28대구학생의거 기념탑으로, 1960년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의 시위를 기념하기 세운 것이다. 일반인은 경북고를, 보수 기득권층을 대표하고 기성 권력을 뒷받침하는 학교로만 보는 경향이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2·28학생운동의 전위 그룹은 경북고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후에 한일회담반대운동(6·3 항쟁)의 주역이 된다. 2·28학생의거 당시 전위의 인물은 조해녕(42회, 전 대구시장), 박영조(43회, 대구대 교수), 박삼옥(43회, 창원경륜공단 이사장), 김헌출(전 부산신항만 대표이사장), 안택수(43회, 현 한나라당 의원), 김영배(43회, 전 랜덤하우스중앙 대표이사), 홍승재(43회, 전 쌍용그룹 전무이사) 등이다. 1960년 4월 서울대 문리대에 다니던 윤식(39회, 전 국회의원), 이수정(39회, 전 문화부 장관)은 4·19의 횃불이 된 ‘서울대 4·19 선언문’ 작성을 주도했다.

    또한 1964년 3월 한일굴욕회담 반대투쟁으로 시작된 6·3항쟁의 선봉에는 김중태(40회, 환경단체 녹색물결 대표, 역사문제 집필가), 현승일(41회, 전 한나라당 국회의원, 전 국민대 총장), 서정복(38회, 전 4월혁명회 회장) 등이 있었고, 이원재(40회), 송진혁(42회)과 성유보 박삼옥 박용환 김헌출 박영조 안삼환 임종률 등 43회 기수도 선배들을 도와 맹렬하게 학생운동을 벌여나갔다.

    1960년대 학생운동과 혁신계는 사실 경북고 인맥이 주도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한 서울대 문리대에 경북고 출신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6·3 당시 서울대 비운동권 멤버들 중에도 동참한 인물이 있다. 박철언, 정정길(42회, 현 울산대 총장, 전 서울대 대학원장)이 그들이다. 박철언씨는 이후 고시에 합격해 검사가 됐다.

    이런 운동권의 역사는 1970년대로 이어져 김문수 경기지사(51회, 전 국회의원)는 기업에 위장취업을 감행해 노동운동권 최초로 노조를 설립하는 주인공이 됐다. 김문수 지사는 지사선거 때 경북중 동기이자 친구인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51회, 경기고 출신)과 맞붙었다. 당시 두 사람은 네거티브 선거운동을 일절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또 1974년 인혁당 사건에 연관돼 억울하게 사형된 여정남(43회, 전 경북대 총학생회장)씨도 경북고 출신이다.

    열린우리당 김부겸 의원(56회)은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 중 1978년 긴급조치 9호에 반대해 싸우다 실형을 살았고, 이후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로 활동하다 5·17 계엄령 위반으로 구속, 서울대에서 제적되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계엄 진압군의 지도부에는 김 의원의 고교 23~4년 선배인 노태우·정호용·김복동씨가 있었다. 동문이지만 서로 가는 길은 너무나 달랐다. 경북고 동문 중에선 흔한 일이었다. 1970~80년대 경북고 운동권은 선배들이 치안본부장이거나 안기부장일 때 이들 기관에 붙잡혀 들어가 고초를 겪은 경우가 허다했다.

    기자는 YS 정권 때인 1993~94년 대구에서 이런 광경을 자주 목격했는데, 당시 대구시장은 이의익(40회), 조해녕(42회)씨였다. 그런데 환경 문제로 대구시청 앞에서 시위를 하는 현장에는 정학 전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40회, 현 시민의 모임 참길회 대표)가 있었다. 정 대표는 대구 운동권의 대부로 불리는 인물로 그 밑에는 전 환경부 장관 이재용씨가 대구환경운동연합 집행위원장으로 있었고, 대구경실련 사무처장 민영창(56회,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조사2국장, 한국노동당 사건으로 구속)씨도 있었다.

    두 시장은 “시장 물러가라”는 구호가 도를 넘어가면 한번씩 시청 1층으로 내려와 정학 대표를 마주하며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한 명은 정 대표의 동기고 한 명은 후배였기에 서로를 너무 잘 알았다. 특히 조 시장은 2·28 학생의거의 ‘맹장’으로 운동권으로 쳐도 정 대표의 후배다. 이렇듯 대구의 지방 행정부 리더들도 대개 경북고 출신이지만 그 반대편에 선 시민단체의 수장도 경북고 동문인 경우가 많았다.

    DJ 정권의 경북고 출신 ‘방탄 인사’

    경북고 정문을 빠져나온 기자는 대구시청에 가기 위해 택시에 올랐다. 가는 길에 20층 ‘영남일보’ 건물이 오른쪽으로 시야에 들어왔다. 기자는 IMF 외환위기를 거쳐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6월 ‘영남일보’를 떠나 ‘동아일보’에 경력기자로 들어왔다. 고향인 대구를 떠나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당시엔 호남의 전통 명문고들이 약진하고 있었다. 광주고, 광주일고, 전주고, 목포고가 바로 그들로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 안정남 국세청장, 양성철 주미대사, 김태정 법무장관, 박주선 대통령법무비서관 등은 광주고, 이기호 청와대경제수석, 신광옥 전 청와대민정수석, 김대웅 대검 중수부장 등은 광주일고, 진념 재경부 장관과 오홍근 국정홍보처장, 한광옥 민주당 대표(전주고 전신 전주 북중) 등은 전주고 인맥이다. 또 신승남 검찰총장은 목포고, 권노갑 전 민주당 최고위원은 목포상고 출신. 전국 79개 주요 공기업체장 중 광주고(9명), 광주일고(8명), 전주고(5명), 목포고(2명)가 24명(30.4%)을 차지했다. 경북고 출신은 단 2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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