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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무(無)데올로기’ 시대 한국만 ‘과(過)데올로기’ 사회”

‘갈등 한국’에서 ‘소통 한국’으로

  • 배수강 기자 | bsk@donga.com

“세계는 ‘무(無)데올로기’ 시대 한국만 ‘과(過)데올로기’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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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지대 없는 사회

이원복 한국은 지속가능성이 너무 부족하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녹색성장을 지금 말하면 정신 나간 사람 취급 받는다. 독일을 보자.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2003년 ‘어젠다 2010’(사회복지 혜택을 축소하고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를 골자로 한 개혁정책)을 내놓은 뒤 정권을 빼앗겼다. 그런데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슈뢰더의 정책을 이어받아 경제부흥을 이뤘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반대다. 전임자 흔적 지우기에 골몰하면 갈등만 커지고 나라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

안경환 공감한다. 여(與)든 야(野)든, 전 정부든 현 정부든, 정책의 90%는 같다. 같은 90%보다 다른 10%를 극대화해 흔적 지우기, 정치보복을 한다. 우리가 지난 몇 십 년 동안 이룬 성과는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 발전을 시차 없이 거의 동시에 이루다보니 무리가 생긴 면도 있다.

이원복 그러니 ‘국가 골다공증’이 생긴다. 구멍이 ‘쑹쑹’ 뚫렸다. 그래서 터진 게 성수대교 붕괴, 세월호 침몰사고 아닌가. 고속성장은 반드시 골다공증을 일으킨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전 정권의 흔적을 지우는 것도 상대를 공격해야 표를 얻으니 그런 것이다.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은 원래 한국어 ‘표(票)불리즘’에서 나왔을 거다(웃음).

강영진 분단이 우리 사회 갈등의 원죄라면, 분단 원죄 때문에 이념갈등, 진영논리, 그리고 최근 불거져 나온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의 ‘공산주의자’ 발언 등이 등장하는 것 같다(고 이사장은 10월 6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변형된 공산주의자이고 사법부에 김일성 장학생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원복 우리나라는 좀 독특하다. 동구권 몰락 이후 세계는 ‘무(無)데올로기’로 간다. 마르크스주의 좌파도, 극보수도 없어진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과(過)데올로기’ 사회로 흐른다. 왜냐.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중간지대’가 없다는 거다. ‘리버럴’ ‘중도’라고 하면 박쥐, 회색분자 취급한다. 그래서 한국은 진영논리에 빠지고, 접합이 어렵고, 갈등이 심각해진다. 서양은 토론을 충분히 하기 때문에 언제든 자기 색깔을 말할 수 있다.

강영진 직업적으로 그 말에 동의한다. 미국 버지니아 주 대법원에서 갈등해결 전문가로 일할 때는 접점을 찾을 수 있는 ‘중간자 문화’가 있어 갈등 해결을 유도할 수 있었는데, 한국에선 그런 문화가 없으니 갈등 해결이 힘들다. 중간지대와 토론이 정말 중요한데….

이원복 중간이 없으니 토론이 안 된다. 우리는 토론 중에 상대방 말은 잘 듣지 않고, 자기가 다음에 할 말을 준비한다. 우리가 가장 흔하게 쓰는 말이 ‘솔직히 말해서’ 아닌가. 본심을 말 못하는 문화 때문이다. 들을 줄을 모른다.

안경환 토론은 상대 얘기를 경청하면서 내가 몰랐던 부분을 알고는 어느 정도 합의를 이끌어내는 건데, 우리는 논리적으로 대화가 안 되면 인신공격을 한다. 그럴 바에야 집에서 책 읽는 게 낫지. 우리 한 세대 위 작가들은 기본적으로 지식인은 회색인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입으론 ‘다양성’ 외치면서…

강영진 그런데 최근 국정교과서 갈등을 보면 학자들은 회색인이 아닌 듯하다. 반발과 대립이 극명히 나뉘는 거 같은데. 정치권도 진영 싸움이다. 여당은 “검정교과서는 좌편향적”이라고, 야당은 “국정교과서로 독재와 친일을 미화하려 한다”며 싸운다.

이원복 매우 민감한 얘기인데…. 국정교과서는 옳지 않다고 본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신화, 언어, 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인데, 그렇다면 한국인은 단군(신화), 한국어(언어), 그리고 역사(문화)를 공유해야 한다. 문제는 현대사인데, 현대사는 분단 상황이기에 정답은 없다. 박근혜 정부에서 국정교과서를 만든다고 해도 좌파정권이 들어서면 또 바뀌지 않을까. 국정교과서 논란을 주도하는 역사학자들의 책임도 크다. 검정교과서를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은 역사교육의 다양성을 말하면서도 교학사 역사교과서는 우파 교과서라며 온몸으로 저지하지 않았나. 좌파 역사학자도 틀린 것 아닌가.

안경환 자유민주 사회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선택에 맡긴다. 다만 학부모들이 국정 역사교과서를 지지하는 것은 시험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자녀들이 시험을 치려면 정답이 있어야 하는데, (역사책을) 다양하고 복잡하게 만들어놓으면 안 된다는 마음에서….

이원복 역사교육은 당구공 같은 거다.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르다. 하얗게 보이는 공이 어두운 데서 보면 까맣게 보이고, 중간에서 보면 그늘져 보이고…. 모든 쪽에서 당구공을 다 볼 수 있어야 역사다. 그래야 실체를 알 수 있다. 좌파 학자든 정부든, 공이 하얗다고 말을 못하게 막는 건 문제다.

안경환 역사는 기록과 기억을 두고 돌리는 후세인들의 싸움이고, 승자의 기록이다. 고(故) 이병주 선생은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했다. 승자는 기록에 넣으려 하지만 그것이 진리는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사초(史草) 논쟁이 있었다. 사람들 선택에 달린 거다. 검·인정을 하면 좌파 학자가 설치게 된다는 건데, 그렇게 자신이 없나. 이원복 총장 같은 분을 모시면 되지(웃음). 역사를 편협하게 보지 않고 교류사 차원에서 폭넓게 보는 이 총장의 시각에 동의한다.

이원복 학자는 쉬운 걸 어렵게 만드는 사람이고, 만화가는 학자가 어렵게 만들어놓은 걸 쉽게 만드는 사람이다(웃음). 사실 역사학계를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이 1980년대 학번이고, 당시 민중사관이 유행한 건 맞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 이런 것은 다 지나간 얘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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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강 기자 | b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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