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호

동아시아 격전장을 가다

사무라이 핏줄 잇는 침략의 역사 ‘복잡계’ (複雜系)*

가고시마

  • 전계완 | 시사평론가, ‘일본, 다시 침략을 준비한다’ 저자 jkw68@daum.net

    입력2016-02-04 11: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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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고시마(鹿兒島)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까?”
    도쿄 사람에게 물으면 10명 중 8명은 “흑돼지”라고 답한다. 가고시마 흑돼지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지역 특산물이다. 한국 여행객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온천, 골프, 화산 폭발을 꼽는다.  
    도쿄의 시각에서 보면 가고시마현은 ‘깡촌’이다. 이곳은 일본 최남단 규슈(九州) 지방 끝자락에 있다.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비행시간 1시간 30분, 직선거리로 1000km에 이른다. 현청 소재지 가고시마의 인구는 충남 천안과 비슷한 60만 명, 19개 시(市)를 포함한 현 전체 인구는 충청북도보다 10만 명 정도 많은 167만여 명이다.
    지난 연말 가고시마를 방문했을 때 “무슨 역이 이렇게 크지?”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규슈 신칸센(新幹線)의 종착역인 가고시마 중앙역에는 아뮤플라자라는 대형 쇼핑센터가 있다. 서울의 신세계백화점 명동점과 규모가 비슷해 보인다. 역 맞은편에는 우리나라 대형 할인점 3~4개를 합쳐놓은 듯한 이온몰(Aeon mall)이 있다. 덴몬칸(天文館)이라는 중심가에 가면 200년이 넘었다는 야마가타야(山形屋) 백화점이 있다. 그 밖에도 10여 개의 판매시설이 도심 곳곳에 흩어져 있다. 인구 규모를 감안할 때 이렇게 많은 대규모 쇼핑 공간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의문스럽지만 우리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경제력이 있다고 한다. 



    거대한 흐름

    지난 한 해 동안 필자는 가고시마를 다섯 차례 드나들었지만, 방문할 때마다 늘 다른 느낌이었다. 가고시마에 남겨진 파편적 역사는 각기 동떨어져 있지만, 어느 순간 하나로 연결돼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낸다.
    열도 끝자락에 있는 이 작은 도시는 지난 500년 동안 일본 역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마다 빠짐없이 등장했다. 표류한 포르투갈 상인에게서 조총 제조 기술을 전수받았고, 서양 선교사가 처음 들어와 교회를 세운 곳도 가고시마다. 류큐(琉球) 왕국(현재의 오키나와)을 관할에 두고 식민지배 경험을 쌓았고,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영국으로 젊은이들을 유학시켜 산업혁명을 일으킨 곳도, 무력으로 체제 전복에 나선 곳도 가고시마다.  
    한반도와의 관계도 흥미롭다. 짧게는 2004년에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고, 길게는 1500년 전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에서 건너온 도래인(渡來人)이 일본 문화를 만들었고, 임진왜란기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아 전쟁을 벌였고,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들은 이곳에서 세계적 명성의 일본 자기를 생산했다. 막부체제를 무너뜨린 뒤 사무라이들이 조선 정벌을 결행하자고 주장한 곳, 조선인을 포함한 가미카제(神風) 자살특공대가 운영된 곳도 가고시마다.  
    한일 관계에서 보면 나쁜 기억이 많지만 오늘 이 순간에도 가고시마는 우리와 숙명처럼 만난다. 가고시마 출신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역사왜곡 바통을 아베 신조 현 총리가 이어받아 과거사 부정, 전쟁 가능 국가, 군사대국화 등의 우경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150여 년을 되돌아보면 두 나라 역사를 결정적으로 바꾼 시점은 1860년대다. 당시 조선의 한양(서울)과 일본의 에도(도쿄)는 지배자의 무능과 권력집단의 부패가 만연했다. 서양 세력이 밀려올 때 쇄국을 고집하며 천주교를 탄압했고 이대로 가면 나라가 망한다는 상소(上訴)가 빗발쳤지만, 이미 기울어진 조선 왕조와 일본 막부체제는 귀를 닫고 눈을 가렸다. 외척(外戚)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세도정치도 꼭 닮았다.
    그러던 중 일본에는 지배자인 막부를 무력으로 무너뜨리자는 혁명세력이, 조선에는 왕을 앞세워 뒤틀린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개화세력이 등장했다. 결과는 달랐다. 일본은 혁명에 성공했고, 조선은 개화에 실패했다. 결국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선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켰다. 1860년대 일본 혁명의 진원지도 바로 가고시마다. 일본 근대화가 곧 조선의 몰락으로 연결된 것을 보면 가고시마는 정말 역사적으로 우리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곳이다.



    젊은 사쓰마의 群像

    가고시마 돌핀포트에서 4km 떨어진 곳에 사쿠라지마(櫻島)라는 화산섬이 있다. 1863년 8월 이 섬 주변에서 사쓰마번(薩麻藩, 현 가고시마현)과 영국 함대 간 전투가 벌어졌다. 사무라이의 영국인 살해사건 때문에 중앙의 에도 막부가 거액을 배상했지만, 정작 사건 당사자인 사쓰마번이 들고 일어나면서 전투가 시작됐다. 영국은 막강한 군함으로 일개 지방의 반항을 잠재우려 했지만 사쓰마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것이 사쓰에이(薩英) 전쟁이다. 전쟁은 일진일퇴를 벌이다가 양쪽 모두 큰 피해를 본 끝에 3일 만에 막을 내렸다.
    당시 일본에는 서양을 배척해야 한다는 양이(攘夷)운동이 대세였지만, 사쓰마번은 영국과 맞서보고서 ‘서양의 실체’를 인정했다. 영국도 사쓰마번의 해군력에 놀라 중앙권력인 에도 막부를 멀리하고 사쓰마번과 ‘직거래’에 나섰다. 1865년 사쓰마번은 영국의 지원을 받아 19명의 엘리트 청년을 비밀리에 서양으로 보냈다. 해외유학이 국법으로 금지된 시기였다. 일찍이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지방 영주의 물적 지원, 진취적 기상으로 지역을 일으킨다는 고쥬(鄕中)정신에 투철한 젊은이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17~34세의 젊은이들은 산업혁명으로 꽃을 피우던 영국의 과학기술문명과 각종 제도를 체험한 뒤 일본으로 귀국했다. 가고시마 중앙역 광장에 있는 ‘젊은 사쓰마의 군상(群像)’은 혁명과 근대화의 출발점에 이 지역 젊은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있다. 가고시마 사람들이 메이지유신에 남다른 자부심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봉건 질서가 사회를 압도하고 쇄국만이 나라를 지킨다는 생각이 절대적이던 시절에 무력을 앞세운 서양 세력에 젊은이들을 맡긴다는 것은 ‘역사적 결단’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결국 쇄국정책→전쟁 발발→실체 인정→서양 유학→문물 도입 등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면서 일본은 최종적으로 근대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최근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혁명의 꿈’이라는 글에서 신미양요(1871년) 당시 광성보 전투에 대해 자세히 소개했다. 매클레인 틸턴(McClane Tilton)이라는 미국 해병대 대위가 당시 전투 상황을 기술한 내용이다. 미국의 최신식 무기 앞에 조선은 조준이 제대로 안 되는 대포, 재장전에 시간이 걸리는 화승총으로 맞섰다. 군인이 모자라 호랑이 잡는 포수까지 징발했다. 미군이 성벽 가까이 진격하자 조선군은 성벽 난간에서 돌을 던지고 흙을 뿌렸다. 총알을 막겠다고 솜옷을 8겹, 9겹 껴입었다고 한다. 매클레인 대위는 당시 미군 3명이 죽었고, 조선군 250명이 ‘돼지처럼 피를 흘린 채’ 전사했다고 전했다. 흰 옷 위에 무방비 상태로 총을 맞은 조선인들의 모습을 돼지에 비유한 것이다.
    조선군은 병자호란(1636년) 이후 전쟁이 무엇인지, 전투를 어떻게 치르는 것인지 200여 년 전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 이들을 전장으로 내몰고 구식 무기와 맨몸으로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라고 한 조선 정부의 무지와 무능에 기가 막힐 노릇이다.





    사쓰에이 전쟁과 신미양요

    고종실록은 어재연 장군이 전사한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 전사자를 50여 명이라고 기록했고, 어 장군이 군사를 지휘해 최전방에서 적을 무수히 죽였다고 썼다. 조선은 물러나는 미국 함대를 보고 전투에서 승리했다며 자축했다. 신미양요 직후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와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이는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라며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만대자손에게 이를 경계하라”고 했다.
    신미양요는 사쓰에이 전쟁과 마찬가지로 3일간 벌어졌지만, 전쟁 후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대응은 정반대였다. 일본은 근대화의 길로, 조선은 패망의 길로 들어선 것도 그렇다.
    지난해 7월 이후 가고시마는 축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쇼코 슈세이칸(尙古集成館)이라는 문화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기 때문이다. 도심 곳곳에 이를 기념하는 각종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
    1851년 사쓰마번 영주에 오른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쇄국으로 일관하던 에도 막부와 달리 서양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사쓰마의 부국강병을 꾀했다. 사쓰마번이 17세기 이후 류큐 왕국과 조공 관계를 유지하며 국제 정세를 읽고 상업과 무역을 중시한 것은 그의 세계관에 커다란 영향을 줬다. 서양 문물을 접한 그는 조선소와 용광로가 있는 공장지대 슈세이칸(集成館)을 만들고 조선, 군수, 유리공예, 인쇄, 의복 등 신산업을 키웠다. 1854년 서양식 군함 쇼헤이마루(昇平丸)를 건조해 에도 막부에 진상하면서 일장기를 처음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천대받던 하급 사무라이를 능력에 따라 등용하고, 젊은이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줬다. 메이지유신 3대 영웅 중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도시미치 등 2명이 사쓰마번 출신이고, 이들 셋은 모두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키운 인물이다. “사쓰마에 인재(人材)로 성(城)을 쌓겠다”고 한 그는 오늘의 가고시마를 있게 한 원동력이다.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젊은 사쓰마의 군상(群像)’이 비밀리에 영국 유학을 가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시마즈 가문의 장학생인 하급 무사 사이고 다카모리는 번 전체를 호령하는 군벌로 성장해 훗날 혁명의 주역으로 메이지유신을 이끌고 정한론(征韓論)을 폈다. 시마즈 가문은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받들어 대륙 침략기지를 만들고, 이후 상업의 번성과 산업의 발전을 주도하며 메이지유신의 선봉장 노릇을 했다. 조선 침략을 주도한 제국주의 인물의 태실(胎室)로도 기억되고 있다. 시마즈는 ‘황제’라는 칭호를 쓰는 일본 국서를 조선이 받지 않자 “내가 조선에 가서 조선 왕을 모욕하면 나의 목을 칠 것이니, 이를 빌미로 조선을 정벌하라”고 할 만큼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살아 있는 사무라이’

    가고시마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여 개의 동상이 도심 곳곳에 서 있고, 의류·제과·완구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에 사이고가 활용된다. 시내 중심 덴몬칸에서 남쪽으로 1km 떨어진 곳에는 사이고의 대형 동상과 그의 후손이 운영하는 기념품 판매장이 있다.  
    사이고는 일본 역사에서 혁명군이자 반란군이었다. 하급 무사로서 사쓰마번주의 지원으로 군벌로 성장했고,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조슈번(長州藩)과 동맹을 맺고 막부 타도에 나서는 등 전설 속 인물처럼 살았다.  
    그러나 1870년대 정한론을 주장하며 한반도 침략을 추진하다 메이지 신정부의 반대에 부딪혔고, 국가 재건 세력으로 사무라이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신정부의 징병제에 막히면서 설 자리를 잃었다. 그러자 100여 명의 신정부 인사를 데리고 사쓰마로 낙향해 사립 군사학교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메이지 신정부와 충돌하기 시작했고, 끝내 반란군이 돼 정부군과 전쟁을 벌인다. 그것이 1877년 세이난(西南) 전쟁이다.
    “사무라이는 결코 지지 않을 것”이라던 일본인의 고정관념은 세이난 전쟁을 통해 무참히 깨졌다. 아무리 뛰어난 정신력을 지닌 사무라이라도 현대식 무기 앞에선 어쩔 수 없다는 ‘현실’을 일본인들은 알게 됐다. 사이고는 구마모토성 전투에서 몇 개월을 버티지 못하다 고향 사쓰마로 돌아와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이 전쟁의 정부군 책임자는 사이고의 죽마고우인 메이지유신 영웅 오쿠보 도시미치였다. 혁명 동지에서 정부군과 반란군 대장으로 바뀌어 내전을 치르는 기묘한 운명. 세이난 전쟁 이듬해에 오쿠보가 암살된 것을 보면 혁명은 사실이면서도 꼭 소설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쟁에서 승리한 신정부가 패배한 반란군을 대하는 태도는 달랐다. 살아 있는 자는 능지처참, 죽은 자는 부관참시해 더 이상 역적 모의를 못 하도록 하는 게 당시의 상식이었지만, 신정부는 시신을 한곳에 모아 집단매장했다. 세이난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이고와 그의 부하들을 집단매장한 곳이 시내 남쪽에 있는 난슈(南州) 공원이다.
    묘지 정중앙에 사이고가 있고, 이를 둘러싼 200여 기의 무덤이 화산섬 사쿠라지마를 바라본다. 구성진 까마귀 소리가 묘지의 분위기를 더욱 스산하게 만든다. 필자는 가고시마에 갈 때마다 난슈 공원과 사이고의 자결 동굴을 둘러봤다. 억울한 신분,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 목숨을 건 도박, 불굴의 정신, 미련 없는 죽음…. 혁명 영웅에서 반란군 수괴로 바뀌어 자결을 강요받고 죽음을 택한 그를 가고시마 사람들은 ‘살아 있는 사무라이’로 칭송한다.
    조선을 정벌하겠다는 사이고의 호전성은 당시에는 실패한 듯 보였지만, 메이지 신정부 세력은 차근차근 단계를 밟으며 결국 정한론을 실천에 옮겼다. 체제를 전복하고 근대화에 성공한 메이지유신 세력은 서양으로부터 받은 불평등을 조선과 중국에 그대로 강요했고, 자국의 부국강병을 넘어 국수주의, 군국주의, 제국주의를 장착한 괴물로 변하며 아시아 전체를 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평화를 위한 희생’

    가고시마 중앙역에서 완행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 남쪽으로 가면 미나미규슈(南九州)시가 있다. 녹차로 유명한 작은 도시지만, 태평양전쟁의 깊은 흔적이 남아 있다. 가미카제 특공대 훈련소가 있던 곳이다. 1944년, 전쟁 막바지에 일본은 젊은이를 전쟁터로 불러내 자살폭탄 공격을 감행케 했다. 이곳에서만 1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조선인도 10여 명이 희생됐다.
    미나미규슈에는 가미카제 특공대의 희생을 기리는 특공평화회관, 전사자의 사진과 유서 등 유품을 모아 전시하는 도미야료칸(富屋旅館) 등이 있다. 연말인데도 박물관과 전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특히 일본 정부의 지원 아래 미나미규슈시가 지난 2년 동안 이 유품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방문객은 더 늘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규슈 지방에서 주로 방문객이 왔는데, 지금은 도쿄, 오사카 등의 혼슈 지방에서 찾아오는 방문객도 늘고 있다는 게 회관 관계자의 설명이다.
    일본이 가미카제 특공대를 평화의 상징으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한다고 했을 때 한국과 중국은 반발을 넘어 ‘제 정신이 아니다’라고 비난했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이 어린 학생을 동원해 자살폭탄 공격을 한 것이 어떻게 평화를 위한 희생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난해 등재에 실패했지만 이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남기겠다는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  
    히로시마에서 손자를 데리고 역사 현장을 방문했다는 70대 재일동포는 “우리가 살아 있을 때 후손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으면, 일본의 의도대로 가미카제 특공대가 평화를 위한 희생으로 미화될 게 뻔하다”며 “이것이 전쟁에 대한 반성과 희생자에 대한 사죄가 없는 일본 극우의 본성”이라고 말했다.  
    주군의 명령에 따라 생사를 결정하던 사무라이는 메이지유신(1868년), 더 정확하게는 세이난 전쟁(1877년)으로 수명을 다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자결로 일본은 사무라이를 버리고 근대 국가로 전환했다. 권력을 움켜쥔 신정부 혁명 세력에게 사무라이는 구태였고 버려야 할 인습으로 인식됐다. 일본은 국민을 그렇게 교육시켰다.



    다시 태어난 사무라이들

    그런 사무라이가 20세기에 망령처럼 다시 살아났다. 1870년대 폐도령(廢刀令)을 내려 사무라이들에게 칼을 버리라고 한 혁명 세력이 다시 칼을 차고 나타났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쳐 식민지시대 조선 학교에서도 칼을 찬 일본인이 등장했다.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자살폭탄비행에 나서는 청년에게 사무라이 정신을 가르쳤다. 결국 일본은 용도 폐기된 사무라이를 제국주의의 확장 수단으로 삼았고, 바로 그 사무라이 정신 때문에 패망을 맞았다.
    지금 가고시마에는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메이지유신 150주년 기념 깃발이 나부낀다. 쇼코 슈세이칸을 비롯한 산업혁명 유적은 일본의 자부심을 상징하며 전국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가고시마에서 출발한 혁명의 불길이 전국을 넘어 아시아 지역 발전의 모범이 됐다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산업화가 군국주의, 제국주의, 식민지 침탈로 이어져 역사적 상처를 남겼다는 반성은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성공한 역사만을 기리고 있다.
    2018년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준비하는 캠페인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역사만 골라 강조한다. 상대가 인정하는 객관은 없고 자신의 주관을 상대에게 객관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이중적으로 설명되는 곳이 일본이고, 그것을 더욱 복잡하게 담고 있는 지역이 가고시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국길에 오르기 전 가고시마를 둘러보고 익숙한 이름을 만났다. 중앙역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가면 고라이초(高麗町), 고라이바시(高麗橋)를 만날 수 있다. ‘고려 마을’과 ‘고려 다리’다. 고라이초라는 동네에 한반도의 흔적은 없고, 고라이바시라는 다리는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사쓰마 영주이던 시마즈 가문에 의해 조선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와 산 곳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지만 답은 찾을 수 없다. 어쩌면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곳 이름이 고려 마을이었을 수도 있다.
    가고시마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은 고우스키가와(甲突川)이다. ‘갑돌천’, 일본에서 흔하지 않은 지명이다. 갑돌이, 갑순이라고 부를 때 쓰는 갑돌천이다. 가고시마를 상징하는 활화산 사쿠라지마를 둘러싼 바다의 이름은 긴코만(錦江灣)이다. ‘금강만’이다. 가고시마 박물관을 둘러싼 성터는 백제시대 양식이라고 한다.
    사실 확인과 고증이 필요하겠지만, 필자는 한반도와 가고시마가 우연의 일치를 넘어서는 깊은 역사적 관계를 맺었을 것으로 추정해본다. 이들이 어떻게 일본으로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이름의 흔적에서 한반도를 잊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패전으로 도망을 왔다면 원한 섞인 그리움일 것이고, 어쩔 수 없이 끌려왔다면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향수일 것이다.



    제2의 사쓰마-조슈 동맹

    아이러니하게도 갑돌천이 흐르는 고려 마을에서 메이지유신의 영웅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가 태어났다. ‘유신의 옛길’이라는 전시관도 갑돌천변(邊)에 있다.
    2004년에는 가고시마에 뿌리를 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노무현 대통령이 이곳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감행한 첫 총리인 고이즈미는 자신의 후계자로 아베 총리를 지목했다. 아베 총리는 야마구치(옛 이름은 조슈번(長州藩)) 출신이다. 사쓰마-조슈 동맹으로 막부 체제를 무너뜨린 것처럼 ‘강한 일본’을 주창하며 가고시마-야마구치 출신 총리들이 손을 맞잡고 우경화 행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가고시마에 한반도의 흔적이 너무 많아 두 나라 문제가 한꺼번에 풀릴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를 했다. 그렇지만 정반대로 오랜 시간 원한이 원한을 쌓아왔다면 한일 양국은 구원(舊怨)을 영원히 풀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스쳤다.

    *복잡계 _ 작은 사건처럼 보이는 수많은 변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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