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0월호

“핵심은 金九쿠데타 기도설, 염동진 배후설은 근거없다”

<백범 암살관련 美발굴문서 완전분석>

  • 도진순 < 창원대교수·사학 >

    입력2005-01-11 15: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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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염동진은 백범에 대해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다.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다.
    국사편찬위원회의 방선주 박사와 정병준 박사가 귀중한 문서인 ‘김구: 암살 배경 정보(1949. 6. 29)’(이하 )와 ‘남한 내 우익 활동(1948. 11. 11)’(이하 )을 발굴함으로써, 지난 9월 초 각 신문들은 백범 암살에 대해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크게 보도하였다. 하나는 안두희가 CIC 요원(agent)이었다는 것이 밝혀짐에 따라 백범 암살에 미국의 개입을 추정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백의사 총사령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백범 암살을 지시하였다는 것이다. 미국의 관련혐의에 대해서는 필자도 이미 한두 번 분석·주장한 바 있다(‘백범 암살의 배후는 미국 CIC인가’-‘월간 말’ 1992년 5월호. ‘백범 김구 시해 사건과 관련된 안두희 증언에 대한 분석’-‘성곡논총’ 27집 4권). 반면 백의사 관련사실은 아무도 주장한 바 없는 전혀 새로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발굴된 문서에서 언급되지도 않는 명백한 오보라고 판단된다.

    우선 에서 주목할 내용을 간추리면 ① 안두희가 백의사 내 혁명단이라는 특공대 제1소조의 구성원이며, 아울러 CIC 정보원(informer) 내지 요원(agent)이었다는 것 ② 청부 암살 전문 조직인 백의사의 총사령 염동진이 암살을 지시하면 단원들은 피의 맹세를 하고 수행한다는 것 ③ 염동진이 김구를 추종하는 우익 장교들의 내부 동향을 CIC 요원에게 제공하였다는 것 ④ 이러한 염동진에 의하면 1948년 말 당시 김구를 추종하는 일단의 우익 장교들이 반이승만정부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② 부분에서 “백의사의 총사령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백범 암살을 지시했다”는 구절은 문서 어디에도 없다. 은 주정보원 염동진을 설명하면서 백의사가 청부 암살을 즐기는 테러단체이고, 암살을 명령받으면 피의 맹세를 한다는 단원의 규율을 참고로 기술한 것뿐이다. 이 가운데 안두희와 관련되는 부분의 원문은 “He(안두희: 역자) has also taken the blood oath to assassinate, were he ordered to do so by Mr. Lyum Tong Chin”이다.

    언론의 오보

    이것은 안두희가 실제 염동진으로부터 암살지령을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만약 암살지령을 받았다면(were he ordered to do so by Mr. Lyum Tong Chin)” 그도 다른 단원들과 마찬가지로 피의 맹세를 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가정적 조건문에서도 염동진이 ‘김구’ 암살을 지령했다는 구절은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단순한 구절의 문제가 아니라, 이 문서가 안두희를 비롯해 백범을 암살한 인물이나 조직을 파헤치는 것이 기본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서를 통독해 본 사람은 쉽게 알 수 있듯이, 문서 전반의 흐름에서 염동진-백의사와 김구의 관련은 적대적이라기보다 상호의존적이다. 먼저 모두에 “김구의 밀고로 염동진이 중국공산당에 잡혀 고문을 당했다”는 구절은 염동진이 직접 언급한 것이 아니며, 또 사실과 다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염동진은 김구의 밀고로 중국공산당에 잡혀 고문당한 것이 아니라, 일본 관동군에 체포되어 밀정이 되었다.

    다음 염동진이나 백의사는 광복 이후 백범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염동진이 김구씨에 대해서는 때때로 격렬한 비난을 가하면서도 동시에 군사적 견지에서 김구의 장점과 가능성을 격찬한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염동진은 때때로 김구에 대해 비판적이기는 했으나, “염동진의 김구에 대한 비판은 중국에서 그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는 이승만 정부 인사들에 대한 증오에 미치지는 않는다”는 바로 다음 구절을 보면 당시 염동진은 적어도 이승만 정부측보다는 김구측을 더 선호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당시 염동진은 스스로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군사정부를 원하고 있는 일종의 동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민간인(염동진)은 스스로 김구의 개인적 친구라고 말한다” “염동진의 추종자(백의사) 대부분은 김구씨의 추종자” “염씨는 김구씨와 비밀 연락과 접촉관계를 갖고 있으며, 염씨는 한국군 내부의 우익 반대파(Rightist dissidents)의 통신을 김구씨에게 전달해주는 매개자 노릇을 해왔다” “그 민간인(염동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승만이 수반인 정부보다는 더 강력하고 군사적인 유형의 정부를 선호한다고 밝혔다” “그 민간인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의 한국군을 갖게 될 것이며, 필요한 경우 이 한국군은 그를 따라 38선을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첨부된 편지()는 북한의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에서 소요와 폭동이 있은 직후 우익 군사파벌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의 형성 단계에 김구씨와 염동진씨가 같이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등에 이르면 당시 염동진은 백범과 상호의존적 관계로 보는 것이 명백하다.

    이러한 관계의 연원은 별도의 검토를 요하지만, 적어도 1946년 찬탁·반탁과 좌우대립의 정국에서 백의사가 임시정부의 정치공작대와 연계하여 대북 테러공작을 전개한 사실은 꽤 유명하다(도진순, 1997,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76~80쪽). 1946년 3월1일 평양역 광장에서 열린 3·1절 기념대회에서 백의사 요원들은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당시 소련 장교 노비첸코의 헌신적인 경호로 김일성은 무사하였으나, 노비첸코는 오른팔을 절단하는 중상을 입었다.

    이후 1983년 북한과 소련은 노비첸코를 기리는 영화 ‘영원한 전우’를 공동 제작하였고, 1984년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면서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하여 노비첸코를 만났다. 올해 여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시베리아를 횡단하며 러시아를 방문할 때 노보시비르스크역에서 노비첸코의 유가족을 만날 것인지가 이슈가 된 것은 이러한 저간의 사정 때문이었다.

    이상의 언급을 정리하면 위의 두 문서에 보고된 범위 내에서 염동진은 백범에 적대적이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다. 또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문서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1948년 11월 당시 김구가 반이승만 군부쿠데타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같이 연루되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염동진을 통해서, 미군 정보장교가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 문서는 김구 암살자인 안두희의 배후나 지령자를 밝혀낼 목적에서 작성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1949년 이후 백범 암살이 조직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이 문서는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김구가 암살된 이유를 여순사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쿠데타를 중심으로 찾으려고 하는 미국의 시각이 깊이 깔려 있다. 이것이 문서의 이름이 ‘김구 암살의 배경’이 되는 이유이며, 별도로 1948년 11월 초의 쿠데타 관련 를 첨부한 이유다.

    여기서 염동진은 김구-우익의 A급 정보를 미군 CIC에 전달하는 주요 정보원으로 등장한다. 그의 의도는 우익 쿠데타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미군은 그것을 반대로 활용하였다. 쿠데타에 대한 진전된 정보를 캐내다가 CIC 요원이 난처해지거나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는 우려는 에서 정보제공자 염동진과 정보활용자 CIC의 묘한 대립관계를 보여준다.

    1948년 말 군부쿠데타 문제는 별도의 사실적 연구를 요하는 중요한 주제이지만, 분명한 것은 적어도 안두희, 나아가 이승만 정부와 미국도 당시 김구가 군부쿠데타와 관련있다고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문서에서 본 바와 같이 암살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은 당시 “여순 반란사건에 관련된 일부 극우분자”라는 표현으로 김구를 지목하였고, 국무총리 이범석은 “여순사건은 공산주의자가 극우정객과 연락한 극좌와 극우의 공모”라고 밝혔다.

    또한 CIC를 비롯한 미국 정보기관은 위의 문서 외에도 “G-2 Periodic Report” no. 164(1948. 11. 5), “G-2 Highlight” no. 332(1948. 11. 3), “Joint Weeka” (1948. 11. 6) 등에서 김구의 쿠데타와 공산주의자의 공격이 결합되는 것을 지극히 우려하였다(자세한 것은 도진순, 1997, 293쪽, 321-326쪽). 그간 이러한 보고서의 정보원(情報源)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번 문서로 볼 때 염동진 등이 중요한 정보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여순사건과 이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대처는 백범 암살사건에서도 분수령의 위치에 있다. 백범 진영과 이승만 진영의 대립은 대체로 다음의 세 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1948년 4월 백범의 남북연석회의 참석으로 서로 돌이킬 수 없는 적대화의 길을 걸었고, 1948년 말 여순사건 직후부터 1949년 초에 걸쳐 그 대립은 “죽고 죽이는 관계”로 비화되었다. 이 시기 정부조직은 신성모 국방장관 등 이승만대통령의 친위조직이 강화되었으며, 안두희를 포함한 서북청년단의 일부가 조직적으로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였다. 즉 이 시기는 한편으로는 이승만 친정체제가 강화되고, 다른 한편으로 백범 암살을 위한 구조가 정비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마지막 단계가 1949년 5월 이후 국회프락치사건과 조국전선 결성 문제가 부상하면서 시기를 못박아가면서 백범 암살이 촉구·집행되던 시기다.

    이렇게 보면 “안두희가 백의사의 제1소조의 구성원이며, CIC 정보원(informer) 또는 요원(agent)이었다는 것”은 김구의 쿠데타에 대해 정보를 제공한 염동진-백의사를 설명하는 과정에 짧게 언급한 부수적인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문서 작성자인 실리(George E. Cilley)의 의도와는 별개로, 우리는 여기에서 진실로 들어가는 또 하나의 문을 발견할 수 있다.

    안두희는 이미 백범 암살사건과 미국의 관련에 대해 몇 번에 걸쳐 언급한 바 있다. 1984년 ‘월간조선’의 오효진과 인터뷰, 1992년 4월13일 ‘동아일보’에 특종보도된 권중희에 의한 자백, 1995년 김석용의 권유로 녹취한 테이프 121개에 담긴 그의 ‘마지막 증언’ 등이 그것이다.

    먼저 1992년 4월13일자 ‘동아일보’ 특종 보도에서 ‘안두희는 ① 경무부장 조병옥과 수도청장 장택상 등의 소개로 미군 OSS의 한국 책임자 모 중령 등을 소개받았고, ② 미군 OSS 한국담당 장교와 안두희의 서북청년단이 긴밀하게 정보를 교환하였으며, ③ 미군 장교는 백범을 제거해야 할 Black Tiger라고 부르며 백범 암살의 필요성을 암시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안두희는 문화방송의 박경재와 가진 인터뷰에서 위의 내용은 권중희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며 부인하였다.

    안두희의 말대로 위의 내용 중에는 권중희의 강압으로 잘못 포장된 부분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OSS다. 안두희는 그의 ‘마지막 증언’에서 당시를 회고하면서 “아주 그 무식쟁이(권중희)가 OSS라는 말은 어떻게 외워 가지고서 아주 잘 아는 것처럼 자기 유식을 과시한다고 OSS를 찾는데…OSS가 무슨 뭐 미국 CIA말고 뭐 또 있었던 거 같은데 나는 몰라”라고 사연을 설명하였다.

    미국의 골칫거리 백범

    사실 OSS는 1945년 10월 초 해체되었고, 광복 후 한국에 진주한 미 육군 24군단의 정보기관은 CIC가 대표적이었다. 때문에 OSS에 대한 언급은 사실에 맞지 않는다. OSS가 착오라고 해서 1992년 증언의 진실성에 결정적인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전반적으로 사실에 가깝다. 안두희는 1984년 오효진과 ‘자유스러운 인터뷰’에서 이미 미국과 백범 암살의 관련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언급하였다.

    나는 정보에 밝았다. 미국의 정보원으로 서청원(西靑員)들이 많이 활약하고 있어서 미국 사람들이 백범을 싫어하는 것도 알았다. 언젠가는 미국의 비밀자료에서 ‘백범 제거계획’ 같은 것이 나올지도 모른다. 당시 가장 골칫거리가 백범이었으니까.(오효진, 1984, ‘안두희 고백’ (상) (하), ‘월간조선’ 7~8월호)

    여기서 안두희는 자신이 미국 정보원이라고 직접 밝힌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소속된 서청원들이 미국 정보원으로 많이 일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 백의사나 서북청년단 소속 청년들은 미군 정보원으로 많이 활동하였다. 이번 은 그 연장선상에서 안두희도 CIC 정보원(informer) 또는 요원(agent)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아가 1992년 그의 ‘마지막 증언’에서도 위와 마찬가지로 미군과의 관련은 한국 경찰 수뇌들의 소개로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안두희의 미국 관련 발언들은 상당히 일관되며 상호보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고, 모순되는 내용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안두희는 ‘마지막 증언’에서 당시 서청 등 청년단체 요원들과 경찰·군·정보원의 연결을 아주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경찰과 군부는 ‘비합법적으로 빨갱이를 때리는 데’ 청년단이 필요하였고, 서북청년단은 정부기관의 보증과 지원이 필요하였다. 특히 장택상은 그의 환갑연에 안두희를 초청하였고,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 사찰과장, 정보과장 최운하 등 정보 전문가들은 안두희와 정보를 자주 교환하였다.

    나아가 안두희는 동향인 육군 중령 김일환의 주선으로 군의 정보기관, 특히 특무대(SIS: Special Investigation Section)의 김창룡과 연결되었다. 당시 김창룡은 대위계급의 정보장교였지만 이승만 대통령, 채병덕 참모총장, 신성모 국방장관의 각별한 신임을 받은 ‘숙군의 마왕’으로 정보계의 실권자였다. 이런 안두희가, 그의 서청(西靑)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CIC 요원이며, 그의 백의사 보스인 총사령 염동진이 그러한 것처럼 CIC에 적극 협조하였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제 남은 쟁점은 안두희가 CIC 요원이라고 하더라도 1949년 암살 집행 당시 미군이 어떠한 영향력을 발휘했는가 하는 문제다. 그가 CIC 요원이라는 사실과 암살에 대한 미군의 영향력은 서로 관련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별개의 문제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도 안두희는 그의 ‘마지막 증언’에서 매우 생생하게 언급하고 있다.

    한 열흘에 한 번씩 일주일에 한 번씩 그 미군 중위, 미군 저 24사단 중위가 있잖아요? 중령 대신 나한테 뭐 연락하갔다 그러구 자주 좀 서로 통하자고 얘기하던 중위가 - 그런데 중윈지 대윈지 잘 모르겠어요. - 나타나는 데 마이켈이라는 건 알지, 언제 뭐 중위 옷 입고 올 적도 있고, 대위 계급장 달고 올 적도 있고, 절반 이상 사복을 입고 올 적도 있고, 그런 친군데, 자주 드나드는 거예요. 특히 우리 정부가 생겨서 5·10선거가 끝나구서 자주 오는데…젊은 사람인데도 나보단 4, 5세 2, 3세 아랜 데도 나보다 아는 거 많고, 정치적인 얘기만 자꾸 물어보니 내가 정치 같은 걸 알 리가 없지요…어디서 배웠는지 우리 한국말은 자주 쓰는 데…한국말로 하다가 영어두 섞어서…나두 이제 쪼끔씩 영어를 배우는 겁니다.(‘마지막 증언’, 184.)

    이 증언에 따르면 안두희의 접촉대상인 미군은 두가지 차원이었다. 하나는 미24군의 중령급 인물과 간혹 접촉하였는데, 문서 작성자 실리(George E. Cilley) 소령도 이 레벨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실무선의 중위급 인물 마이클이며 이 사람에게 영어를 배울 정도로 자주 접촉하여 정보를 교환하였다. 필자로서는 CIC 정보장교 명단에서 마이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정보장교들은 원래 본이름과 계급을 노출하지 않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예컨대 맥아더 사령부의 일개 사병이던 노만 존슨은 한국전쟁기에 여러 이름과 20개 정도의 계급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다양한 역할을 하였다(노만 존슨, 1994, ‘한국작전’, 삼진기획). 따라서 구체적인 안두희의 증언은 매우 신뢰할 만하다. 마이클 중위는 서북청년단에 자주 찾아와서 안두희가 모르는 ‘빨갱이 계통 정보’를 주었으며, 그것은 한국 경찰과 특무대의 정보와 일치하는 ‘고급 수준의 것’이었다.

    마이클이 준 소위 정보 소스 같은 걸 일일이 뭐 인천에 김일한이 같은 놈한테 전화 걸어서 알아보고, 또 특무대 본부의 장대위를 불러서 알아보고, 심지어 지금은 정정당당히 대한민국 경찰관 형사가 돼 있는 노덕술이 같은 거, 혹은 그 외에 몇몇 사람들을 일부러 만나서 지나가는 척하고서 얘기를 슬슬 물어보게 되면은, 이거 대개 앞뒤 꼬리가 맞는 얘기예요. 맞는 얘기니까 자연히 나도 이 사람을 중시하게 되고, 이 사람의 얘기를 내가 중요 소스로 인정 안할 수 없게 되지요.(‘마지막 증언’ 185)

    이 정보꾼 마이클은 백범과 한독당의 동향, 특히 ‘혁신보(革新報)’의 양근환의 동향에 각별히 주목하고 있었다. 이러한 마이클의 정보와 평가는 노덕술이 있는 한국경찰, 김창룡의 특무대 정보는 물론, 백범 암살을 기획·주도한 김지웅의 정보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거 물어보게 되면 김지웅이도 어떻게 알아보는지 여기저기 알아보고, 특히 양근환이는 주변 사건을 갔다가 아주 정확하게 마이켈 중위하고 이제 맥이 딱 맞아 들어가요.…그러니 점점 김지웅이를 중요한 정보소스로 인정 안할 수 없게 됐습니다.(‘마지막 증언’ 185)

    이상을 요약하면 안두희와 서북청년단은 경찰, 군 특무대와 연계되어 있었으며, 미군 정보장교와도 정기적으로 만나 백범과 한독당에 관한 정보를 논의했으며, 그것은 백범 암살을 기획한 김지웅의 정보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조심성이 많은 안두희로서는 백범 암살을 함부로 집행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정부 요인들의 견해를 탐문하고, 미국의 눈치를 보고 난 뒤에 실행하였다.

    미국측 공식문서에서는 백범 암살 당시 미국의 개입 여부를 엿볼 수는 없는가? 아마도 정보문건 계통에서는 앞으로 발굴될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로서는 1949년 2월 “백범이 통일정부의 수반이 되기 위해 잘못된 좌우합작을 시도하고 있다”는 대단히 비판적인 보고서 두 건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G-2 Perodic Report’ no. 1052(1949. 2. 1), no. 1055(1949. 2. 4)

    한편 공간된 ‘미 외교문서(FRUS)’에서는 그 성격상 암살사건의 전말을 보여주는 문건은 찾을 수 없다. ‘미 외교문서’에서 백범 암살사건과 관련하여 주한 미대사 무쵸가 미 국무성에 보낸 전문은 세 가지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 수록된 것은 1949년 6월27일 오후 5시발의 3급비밀 지급(Confidencial Priority) ‘전문 788호’가 유일하다.

    외교문서의 공간은 적절한 세탁절차를 거치기 때문에 예상한 바와 같이 특별한 내용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전문은 ‘안두희는 한독당원’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해서 암살 사건을 한독당 내 노선 대립의 일환으로 다루고 있다. 다만 “김구가 국민의 추앙을 받고 있고 암살사건에 대해 모든 사람이 비난하고 있으므로 장례식에서 큰 혼란이 예상되나, 경찰과 군대의 주도면밀한 준비로 한국정부는 이를 충분히 수습할 수 있을 것”으로 밝히면서 장례식 이후의 정국의 추이를 정확하게 예견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되는 대목이다.

    이 전문에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전문의 발신 일시, “6월27일 오후 5시”다. 안두희의 ‘마지막 증언’을 분석해보면, 암살 이튿날인 27일 그는 채병덕 참모총장의 지시로 헌병사령부에서 김창룡의 특무대로 이송되어 “호텔 같은 감옥”에서 취조대신 대대적인 의료진단 서비스를 받았다. 그 후로도 신문도 보고 라디오도 들으면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암살사건이 일어난 지 근 2주가 되는 7월 8일부터 ‘우호적인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요컨대 무쵸 미대사의 보고는 안두희에 대한 취조와 전혀 관계없이 마련된 것이다. 이 점에서 미국은 암살사건에 대한 시나리오를 이미 알고 있었거나 적어도 이승만 정권과 보조를 같이 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이러한 정보 활동을 기반으로 해서 미군 철수의 혼란기에 일어난 백범 암살사건을 능란하게 처리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백범 암살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부인하기 힘들다. 오히려 문제는 개입의 범위와 강도일 것이다. 현지 CIC 정보장교 차원이었는지, 대사관까지 개입된 수준이었는지, 본국 정부 정책의 일부였는지가 불분명할 뿐이다. 미국에서 출간된 한 책에서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 대외공작사의 암살사건에서 김구 암살이 첫 사례로 리스트에 올라 있는 것으로 밝혀져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에서 언급한 백의사가 백범 암살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면 그럼 누가 백범 암살을 지시한 것인가. 이를 위해 다시 그간의 연구를 존중하면서 광복 직후부터 암살사건까지 안두희의 활동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안두희는 1945년 12월 ‘신의주 학생사건’의 여파로 자신이 수사대상에 오르고, 1946년 북한의 토지개혁으로 집안 재산이 몰수되자 ‘극단적인 반공주의자’로 월남을 결심했다. 1947년 봄 신의주에서 사리원을 거쳐 해주 용당포에서 밀항으로 월남한 안두희를 처음 맞이한 것은 서북청년단이었다. 안두희는 서북청년단 부위원장이자 실세인 김성주와의 친분으로 얼마 후 서청의 서울 제1지부이며 본부 직속인 ‘종로지부’의 ‘사무국장’이 되었다. 극단적인 반공·반북주의자인 안두희가 백의사 요원이 된 것은 너무 당연해 보인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안두희나 서북청년단·백의사 요원들은 한편으로 경찰 및 군의 정보기관과 깊이 연결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미군 정보기관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안두희가 백범암살의 구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여순사건 이후 1948년 후반부터다.

    동향인 김일환의 소개로 안두희가 김창룡을 만난 그날 저녁이다. 백범 암살의 핵심 실무를 담당한 김지웅(金志雄)과 홍종만(洪鍾萬)은 목로주점에서 안두희를 만나 한독당 가입을 권유하는 단계부터 안두희는 거대한 암살 구조에 편입되었다. 결국 1949년 1월 말 ~ 2월 초 홍종만은 안두희를 김학규에게 소개하였고, 안두희는 입당 절차를 밟게 되어 4월14일자의 한국독립당 당원증을 발급받았다.

    그 후 암살이 구체적으로 집행되는 단계에서는 안두희의 직속 상관인 장은산 포병사령관이 날짜를 박아서 채근하였다. 6월23일 안두희가 지시받은 경교장 습격사건을 시행하지 않자, 6월25일 장은산은 안두희에게 다음과 같은 최종 명령을 하달하였다.

    무조건 내일 들어가서, 그전과 같이 일요일이니까, 그저 안중위가 놀러왔다는 것처럼 얘기허구, 가서 어저께 왜 공주 안 가셨냐는 거 물어보구, 또 김구 선생 있으면 올라가서 얘기하다가 그런 계제가 되구 타임(time)이 되어 해야 겠으면 해라.…너밖에 할 사람 없다. 우리가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안 했지만은 이거 할라구 약속했던 것 아니냐?(‘마지막 증언’ 193)

    장은산은 당시 알리바이를 위해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입원실 문을 나서는 안두희의 손을 잡고 장개석 국민당정부의 특별 테러단체인 남의사(藍衣社)의 사칙(社則)과 행동관례(行動慣例)를 언급하면서, ‘만약 일이 실패하면 너도 갈(죽을) 수 있다’고 협박하였다고 한다. 남의사의 사칙과 관례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백의사 단원인 안두희가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암살 공모자는 김지웅·홍종만이었으며, 구체적 지령자는 장은산 포병사령관이었다. 그 배후로는 안두희가 후송된 특무대의 김창룡, 특무대 이송을 지시한 채병덕 참모총장, 안두희의 재판을 담당한 원용덕, 이들의 상관인 국방장관 신성모 등이 그간 구체적으로 거론된 바 있다.

    문제는 이승만 대통령의 관련 여부인데, 이에 대해서도 안두희는 자세하고 흥미 있는 증언을 남긴 바 있다(‘일요신문’ 1996. 11. 3). 이에 따르면 ① 안두희는 1949년 6월20일 채병덕 참모총장, 신성모 국방장관 등과 함께 경무대를 방문하였으며, ② 대통령은 안두희에게 악수를 청하며 ‘으음, 자네가 안소위인가. 신장관에게 얘기 많이 들었네’라고 말하고 백범이나 한독당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으며, 다만 집무실을 나올 때 ‘높은 사람 시키는 대로 일 잘하고 말 잘 듣게나’ 했다는 것이다. ③ 퇴근 무렵 장은산 사령관에게 경무대 방문을 보고했더니 그는 빙그레 웃으며 ‘그것 봐. 내 말이 맞지’ 하더라는 것이다. 즉 안두희가 잘 움직이지 않자 신성모·채병덕·장은산 등이 경무대 면담을 추진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안두희는 “내게 뒤가 있다는 걸 확인한 뒤 최종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련

    안두희 이외 이승만 관련에 대한 증언으로는 “김익진 검찰총장이 영감님(이승만 대통령)이 노망이 들어서 한 일”이라며 양해를 구했다는 최대교 서울지검장의 증언, 1960년 4월 민주화운동 직후 장은산의 고백을 폭로한 고정훈의 증언, 사건 후 경무대에 보고하러 가니 ‘이박사가 이미 알고 있더라’던 당시 헌병부사령관 전봉덕의 증언 등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관련 여부에 대해서는 좀더 신중한 조사가 필요하지만, 당시 우익 내 정치적 대립구도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요컨대 위의 문서는 여순사건 이후 백범 암살이 구체적으로 집행되는 구조와 지령 구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기존의 연구성과나 증언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백범 암살 당시는 정부 수립 이후 근 1년이 되어, 백의사·서청 등 민간단체 요원들도 이곳 저곳으로 흩어진 시기이고 보면, 역시 군과 경찰에서 안두희와 연결되었던 사람들의 영향력이 민간단체보다 더 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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