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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에세이

불면, 그 외로움의 깊이

  • 유안진│ 시인, 서울대 명예교수│

불면, 그 외로움의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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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가 그립다. 특히 가을 밤 비, 겨울 눈바람과 함께 오는, 종소리이건 쇠북소리이건 들리는 순간 경건해지는 그 자체가 다른 무엇으로도 얻어질 수 없는 평안함이 되곤 했다. 종소리를 따라 귀는 길어지고 유순해졌다. 천상의 신비이든 지상의 신비이든 신비체험으로 이어지곤 했는데, 아득한 어디 먼 데서 들릴 듯 말 듯 바람결에 묻어오는 머언 종소리의 위무(慰撫)가 있어주면 얼마나 편히 잠들 수 있을까. 어둠과 적막을 누릴 권리를 모두 박탈당한 도시, 밤낮으로 시달리는 빛의 횡포와 소음으로 찌들면서 단잠은 더더욱 힘들어진다.

아잇적부터 교회당 종소리나 절간의 쇠북소리를 먼 귀로 듣고 나서야, 비로소 베개를 안고 뒹굴고 뒤척이다 잠들 수 있었는데. 물론 잠들자마자 엄마의 성화는 시작됐지만, 어른들이 다 일어났는데 딸애가 자고 있다는 그게 바로 엄마 욕 먹이는 거라고. 성화는 자랄수록 심해져서 늘 혼수상태로 일어나게 돼, 식구들조차 내 눈이 본래 뻘겋다고, 눈이 커서 그렇다고도 했었지. 외국에서 공부할 때도 내 잠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아무리 진한 커피로도 깨워지지 않은 가수(假睡) 상태로 강의실에 들어가면, 가뜩이나 안 들리는 영어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고, 더구나 사투리 쓰는 교수이면 소음이거나 자장가 곡조였지.

늙고 있는 지금도 밤마다 잠과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책장을 넘기다가 눈이 아파서 TV를 보고, 그러다가 가까스로 졸린다 싶으면 얼른 들어가 눕지만 머리가 베개에 닿는 순간 잠은 천리만리 달아나버리고-. 배부르면 잠이 온다 해서 밥을 먹거나 군것질도 해보고, 못 마시는 술도 약 먹듯이 마셔보지만 몸만 녹초가 될 뿐 정신은 몽롱해져도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은 종일 비상 먹은 닭처럼 비실거리다가, 밤이 돼야 다시 제정신이 들곤 하는 반복. 이런 때 옆에서 단잠으로 내는 고른 숨소리나, 깊은 잠에 빠져 코까지 고는 소리가 들리면, 정말이지 미워지다 못해 문득 외롭고 슬퍼지기도 한다.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는 잠 못 자는 고통. 거리의 노숙자라도 잠을 잘 수 있으면 외로움은 줄어들 것도 같다.

내게는 잠자는 것이 먹는 것보다 늘 더 중요하다. 건강도 먹는 것보다는 수면으로 더 좌우되는 것 같다. 낮이라도 좀 눈을 붙이고 나면 몸이 개운해지고 정신도 맑아져, 웃고 수다 떨고 싶다. 하지만 낮잠을 못 잔 날은 종일 매사가 귀찮고 짜증나고 몽롱한 상태로 몸살 앓듯이 전신이 쑤신다. 평생 이런 식이니, 잠보다 더 생존과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것은 없다고 단언할 수밖에.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잠을 잘 못 자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고, 더 외로운 사람은 몇 날 연거푸 내리 잠을 못 자는 사람이라고, 잠으로 외로움의 정도를 가늠하기도 한다.

외로운 사람에겐 자기 방이 필수적이고, 또 여러 대의 침대도 필수적일 것 같다. 잠들지 못할 때 뭔가를 읽고 끼적거리기에 편한 침대, 엎드려 멍청해질 수 있는 침대, 꿈꾸거나 상상하기에 좋은 침대, 기다릴 수 있는 침대, 만나서 더불어 놀 수 있는 침대, 헤어져 홀가분하고 편안해지는 침대 등등. 외로운 사람에겐 침대가 많아야 할 것 같다.



불면, 그 외로움의 깊이
柳岸津

1941년 경북 안동 출생

서울대 교육학과·동 대학원 졸업, 미국 플로리다주립대 박사(교육심리학)

現 서울대 명예교수

시인, 수필가, 소설가

수필집 ‘지란지교를 꿈꾸며’ 소설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 시집 ‘물로 바람으로’ 등


그러나 더 외로운 사람에겐 침대보다도 베개가 더 많이 필요할 것 같다. 엎드려 턱 받칠 수 있는 베개, 베개 밑으로 머리통을 밀어 처박을 수 있는 크고 묵직한 베개, 뒤통수를 편하게 올려놓을 수 있는 베개, 얼굴에 올려놓아 두 눈에 무게감을 느끼게 해주는 베개, 가슴에 껴안고 뒹굴 수 있는 베개, 돌아누우면 등때기를 받쳐주는 배게, 두 무릎이나 사타구니 사이에 끼울 수 있는 베개, 엉덩이를 받쳐 무지근한 통증을 달래주는 베개, 두 다리를 올려놓을 수 있는 베개, 발등이나 발바닥으로 꼼지락거리며 간질거리는 오돌토돌한 촉감의 베개, 그래도 잠이 안 올 때 벌떡 일어나 앉아, 두세 번쯤은 집어던질 수 있는 베개, 더 나아가서는 발길로 몇 번이고 걷어찰 때 화풀이가 될 정도로 무게가 나가는 베개 등등. 밥숟가락보다 훨씬 필수적인 생필품으로서 베개는, 밤이 긴 가을부터 더 외로운 사람에게 특히나 많아야 한다.

신동아 201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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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시인,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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