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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 ⑤

자연과 문명의 접합점에서 발견하는 절대 고독

충북 영동

  • 최학│우송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jegang5@yahoo.com

자연과 문명의 접합점에서 발견하는 절대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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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한 황간에서 병마와 싸우던 시인

충북 영동군 황간은 예나 지금이나 작은 고을이다. 10년 전 20년 전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적한 가도 양쪽으로 작은 집들이 처마를 맞대고 있고 집 나온 개들이 게으른 걸음을 걷고 있다. 시장 모퉁이의 막걸리 집 주모 또한 10년 전 그대로 텃밭에서 딴 풋고추만 달랑 안주로 내놓을 줄 알며, 마을을 휘도는 개울에서는 해질녘만 되면 여전히 피라미 떼가 수면 위로 뛰며 은빛을 튕기는 장관을 연출한다. 변하지 않는 황간. 그래서 언제 찾아가도 정겹다. 하여 나는 거처를 다시 서울로 옮기고도 자주 황간을 찾았다. 강가 매운탕 집에서 바라보는 월유봉(月留峰)이 철따라 날씨따라 모양새를 달리하는 것이 좋고 반야사(般若寺)의 호젓함을 즐기다가 백화산 주행봉을 오르는 재미도 쏠쏠하기 때문이다.

그 사이 모양새를 크게 달리한 것이 황간역이다. 작은 성냥갑 같던 전형적인 시골 간이역이 아담한 현대식 건물로 고쳐졌으며 아지랑이 놀던 선로에는 시속 300㎞의 고속열차를 지나다니게 하는 전신주들과 전선들이 어지럽게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 시골역 플랫폼에 서면, 한평생 몹쓸 외로움 속에 살다간 시인을 만날 수 있다. 한성기의 시 ‘역’의 무대가 바로 이 황간역이기 때문이다. 6·25전쟁 직후 산후병으로 아내가 세상을 떠났는데 둘째, 셋째 딸이 차례로 어미를 따라갔다. 그뿐인가. 시인 스스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깊은 병을 앓았다.

‘가장 절망적이면서도 가장 살고 싶었던 때’, 시인은 이 적막한 황간의 산골에 묻혀 병마와 싸웠다. 간혹 약을 구하러 대전에 나가기 위해 역 출입을 했다. 플랫폼의 나무 의자에 앉아 기차를 기다리던 시인, 그가 바라본 조그마한 역은 언제든 있는 듯 없는 듯한 제 자신처럼 외롭고 적막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시인이 약 봉지를 든 채 거닐었을 황간 거리를 걷는다. 손바닥만한 면 소재지의 외줄기 큰길. 이편 끝에서 저편 끝까지 가는 데도 10여 분이면 족하다. 길을 더 나아가 강줄기 휘도는 곳에 이르면, ‘이런 곳에 이런 경치가 있나’ 싶게 홀연 멋진 풍광 하나가 펼쳐진다. 돌올한 산봉과 가파른 벼랑, 그 기슭을 파고들며 유연히 흐르는 청명한 물줄기. 월유봉이다.

기이하나 삿됨이 없고, 품세가 작으나 그 자체로 넉넉한 이곳 산수는 그 자체로 완미(完美)의 한 폭 그림이다. 봄여름의 경치도 좋지만 늦가을 혹은 눈 내리는 날, 인적 그친 이곳에 서면 그 처연한 아름다움에 자못 가슴이 떨리기도 한다.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그 너머편의 강변 오솔길의 운치 또한 아는 이만 알고 있는 비경이 된다.

황간 중심지로 되나와 977번 도로를 타면, 소문나지 않은 또 다른 명소 반야사 석천계곡과 상주 모동으로 갈 수 있다. 황간고등학교에서 6㎞쯤 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오른편이 상주 방향이며 왼편이 석천 골짜기로 가는 길이다. 충청도 영동과 경상도 상주로 행정구역이 다르지만 석천 맑은 물줄기는 산협을 통해 상주에서 영동으로 흐르며 그 물줄기를 거느린 큰 산이 백화산(933m)이다.

‘한가롭지 말아라’

먼 거리가 아니니 황간에 온 걸음이면 고개 너머 상주 모동에 가서 황희 정승을 배향한 옥동서원을 둘러보고, 산행의 여유까지 있으면 백화산을 오르면 좋다. 산마루에는 신라 백제의 격전지 금돌성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금돌성에서 정상에 이르는 능선 코스는 조망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스릴까지 맛볼 수 있는 자극적인 산길이다. 반대편 황간 쪽의 반야사 입구에서 쳐다보이는 산봉이 백화산 정상 포성봉과 짝을 이르는 주행봉인데 등산객들은 되레 이편을 더 즐겨 찾는다.

산행을 마다할라치면 신라 성덕왕 때 세워졌다는 반야사를 보고 나와 석천 개울물에 발을 담근 채 아득한 산봉에 걸쳐진 구름이나 쳐다보고 있어도 세상 시름을 잊을 수 있다.

이름도 특이한 민주지산(1242m)은 황간의 이웃인 영동군 상촌면에 있다. 경부고속도로 황간 톨게이트 옆으로 난 579번 도로를 이용하면 한 시간 안에 산기슭의 물한계곡에 닿을 수 있다. 황간 월유봉 앞을 흐르는 강물 또한 이 물한계곡에서 비롯된 것은 물론이다.

1980년대 초, 처음 이 골짝을 찾아가던 때의 기억이 새롭다. 골짜기를 돌고 돌아 한없이 산속으로 들어가는데 차량은커녕 인적도 만날 수 없었다. 감꽃이 떨어지는 봄날이었는데 정녕 나는 이런 순결한 자연을 본 적이 없었다. 시간여행을 통해 태고로 돌아온 느낌마저 없지 않았다.

이제 이 계곡과 산도 예전의 그 처녀티는 많이 벗었지만 아직도 꾸밈새 없는 맑은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근래는 맑은 골물을 지키겠다고 골짝 양편에 길게 철망까지 쳐놓았지만 경관의 문제를 떠나서 그 고육지책을 이해할 수 있다. ‘한가롭지 말아라(勿閑)’라는 골의 이름은,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교훈이라기보다 자연이 사람에게 주는 교훈이다.

민주지산은 충북 영동, 경북 김천, 전북 무주에 걸친 큰 산으로 각호산, 석기봉, 삼도봉으로 이어지는 8㎞의 주능선의 위용이 장쾌하다. 산행 기점은 물론 유원지 입구의 신암골이다. 또 다른 산행 기점의 하나인 도마령은 영동과 김천의 접경이 되는 고갯마루인데 황간에서 도마령에 이르는 49번 국도는‘한국의 아름다운 길’의 하나로 뽑힐 만큼 그 주변 경치가 어여쁘다. 특히 길가의 억새가 물결처럼 출렁이고 가로수로 심은 감나무에 붉은 감들이 가지가 부러져라 주렁주렁 달리는 늦가을의 경관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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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우송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jegang5@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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