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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소설, ‘그리고’의 세계

  • 함정임 │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이야기, 소설, ‘그리고’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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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소설, ‘그리고’의 세계

그리고 산이 울렸다<br>할레드 호세이니, 왕은철 옮김, 현대문학, 1만4800원

그리고, 할레드 호세이니의 소설을 말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를 서두에, 그것도 첫 문장의 첫 번째 자리에 놓는 행위는 선(先)역사를 거대한 괄호로 묶는 것, 괄호 안의 세계를 공유한 자들 간의 암묵적인 기호 같은 것.

여기에서 선역사란 19세기부터 20세기 후반까지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들의 작품이 해당된다. 이들을 ‘그리고’라는 괄호 안에 넣고 할레드 호세이니의 소설을 만나는 것은, 작가론에 준하는 선행 정보들을 공유한다는 의미가 전제되어야 한다. 첫째 그는 아프가니스탄 카불 출신이라는 것, 둘째 그는 현직 의사라는 것, 셋째 그는 서사문학의 원류인 이야기(스토리텔링)에 강한 작가라는 것, 넷째 그것으로 21세기 세계 소설 독서계를 열광시키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현재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라는 것.

영어를 공용어로 다인종-다언어-다민족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국의 현대소설은 딱히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는 특수한 환경이다. 최근 10년 동안 새롭게 등장한 미국 소설을 통해 파악한 바로는, 다인종-다언어-다민족 이민자 공동체에 뿌리를 둔 이민자 작가들의 약진이 주목할 만하다. 인도 뱅갈 출신의 줌파 라히리(‘이름 뒤에 숨은 사랑’, 2000), 도미니카 출신의 주노 디아스(‘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2007),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할레드 호세이니(‘연을 쫓는 아이’, 2003)가 그들이다. 신분이 다른 열두 살 동갑내기 두 사내아이의 우정 이야기를 아프가니스탄의 불행한 역사 현실 속에 녹여낸 할레드 호세이니는, 일찍이 발자크가 꿈꾸었던바, 한 명의 작가가 소설(펜)을 무기로 세상에 떨칠 수 있는 감동(영향력)의 최대치를 보여주었다.

나는 1975년의 어느 춥고 흐린 겨울날,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때 나는 열두 살이었다. 나는 그날, 무너져가는 담장 뒤에서 몸을 웅크리고 얼어붙은 시내 가까이의 골목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래된 일이다. 사람들은 과거를 묻을 수 있다고 얘기하지만, 나는 그것이 틀린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과거는 묻어도 자꾸만 비어져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지난 26년 동안 아무도 없는 그 골목길을 내내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할레드 호세이니, ‘연을 쫓는 아이’, 왕은철 옮김, 현대문학



‘21세기의 경이’

소설이란 주인공이 자신이 품고 있는 이상과 맞지 않는 현실에 맞서다가 고난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인식하는 과정(여행)을 기본 틀로 삼는다. ‘연을 쫓는 아이’는 소설에 대한 20세기 루카치의 고전적 명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의 여정이 소설의 핵심을 이루는 것. 이는 소설 독자에게 가장 익숙하고, 안정적인 구조다.

‘21세기의 경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가 탁월한 이야기꾼(스토리텔러)으로 인정받게 된 데에는 그의 소설이 인류의 서사 원형 가운데 하나인 ‘천 하루 밤 이야기(千一夜話)’의 원리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세헤라자드가 매일 밤 왕에게 새로운 이야기(에피소드)를 들려줌으로써 하루하루 목숨을 구한 ‘천 하루 밤 이야기’는, E. M. 포스터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토리(이야기)’의 세계를 대변한다.

문학 장르에 대한 전문적인 구별 없이 오락으로 소비하는 독자에게 소설은 ‘꾸며낸 재미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동시에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구어(口語)의 세계다. 어린 시절, 잠들기 전에 자장가 삼아 할머니나 어머니에게 청해서 수없이 들었으되,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던 ‘옛날 옛적 어느 마을에’로 시작되는 옛이야기 유가 그것이다. 신작 ‘그리고 산이 울렸다’에서 호세이니는 이 방식을 아예 비석처럼 첫 장에 드러낸다.

그래, 얘기를 해달라니 해주마. 그러나 딱 하나만이다. (…) 아득히 먼 옛날에 아유브라는 이름의 농부가 살고 있었단다. 그는 마이단 사브즈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단다. 그런데 아유브에게는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많아서 날마다 힘들게 일을 해야 했다. (…) 그래도 아유브는 스스로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야. (…) 아유브는 자식 모두를 사랑했지만, 속으로는 막둥이인 카이스를 특히 좋아했단다. 막내는 이제 막 세 살이었어. (…) 그런데 참, 세상일이란 게 얘들아, 아유브의 행복한 나날은 곧 막을 내리고야 말았다. 어느 날, 악마가 마이단 사브즈 마을에 왔단다. (…) 가족은 이튿날 새벽까지 한 아이를 내줘야 했단다.

-‘그리고 산이 울렸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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