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두’가 ‘공주’(문소리)를 강간하려는 장면이 있다. 누가 봐도 ‘섹시하지 않은’ 뇌성마비 장애인 ‘공주’를 ‘종두’는 예뻐서 어쩔 줄 모른다. 강간이야 물론 극악무도한 짓이고, 사실 ‘종두’는 그럴 만큼 독한 놈도 못되지만, 어쨌거나 그 장면에 가득 묻어나는 건 극한의 폭력성이 아닌, 한 여자를 미치도록 예뻐하는 한 남자의 투둥거리는 심장 소리, 그 여자의 발가락마저 다 먹어버리고 싶은 한 남자의 고통스럽기까지 한 욕정이다. 정치적으로 전혀 올바르지 않은 이런 감정을 가차없이 이끌어내는 이창동 감독이, 또 그걸 진짜 제대로 연기해낸 설경구가 징그럽고 밉살스러울 지경이다.
“어쩌면 그렇게 배역에 빠져들 수 있어요? 그런 순간 당신 자신은 어디에 가 있나요?”
“저는… 빠져드는 거 잘 못해요. 어떤 극한의 상황에도 그 인물 속에는 나 설경구가 있어요. 나와 그 놈이 만나 하나가 되는 거죠. 내가 그 놈을 느끼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 꼴리는 대로 가는 거예요. 전 분석할 줄 몰라요. 분석은 감독이 하는 거죠. 감독은 영화 갖고 예술 하지만 배우는 그냥 ‘사는’ 거예요. 그럼 영화는 감독 거냐, 아니면 배우 것이냐. 아니죠. 영화는 관객 거예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그렇다. 혹자는 그를 두고 ‘변신의 귀재’라 하지만 그는 변신한 적이 없었다. 그도 말한다. “변신은 무슨 개뿔, 배우가 무슨 변신로봇인가.” 전혀 다른 삶들 속에서 길 잃음 없이, 본연의 자아를 완전히 녹여낼 줄 아는 저 진기한 능력. 설경구가 무서운 배우인 건 그에게 연기란 ‘연기’가 아니라 본능이기 때문일 게다.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가 부르는 김광석의 노래를 듣는다. 부드럽지만 힘있는 목소리다. 기교 없이 주욱 뻗어나와 담배연기 자욱한 허공으로 물감처럼 번져간다.
노래 한 곡 끝내고 한숨 돌리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비로소 그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잘생긴 것도, 남자다운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마음 가득 애잔함이 밀려온다. 저 백지(白紙) 같음이 그를 우리 시대의 페르소나로 만들었나. 한 인물을 만나면 그 인간의 가슴 밑바닥까지 곧바로 몸 던져버리는 저 무구함.
그의 얼굴에 강물이 흐른다.
바다가 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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