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절 특사'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들과 담소를 나누는 설경구. 현장에서의 그는 듬직한 맏형 같다.
이런. 드디어 악명 높은 설경구식 어투의 등장이다. 아닌게아니라 그는 입이 걸다. 욕을 달고 다닌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다지 상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다.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한 비어·속어의 사용 외에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존대어를 사용한다. 우리말에서 적절한 존대어법의 구사만큼 힘든 부분도 없다. 물론 친한 후배들에게는 꽤 ‘쎈’ 호칭을 쓰기도 한다. 위악(僞惡)이라기보다 애교에 가까운 친밀감의 표시다. 한편으로는 강한 보스 기질이 느껴진다.
“학교 다닐 때는 범생이었어요. ‘바른생활 사나이’ 있잖아요. 집이랑 학교만 왔다갔다하고, 친구들도 다 착했어요. 술? 담배? 에이- 그런 걸 왜 해요. 우리 땐 그런 애 별로 없었어요. 얼마나 조용히 살았냐 하면,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 서울역 찾아가는데 어디서 내려야 할지 몰라 시청까지 갔어요. 아차 싶어 다시 돌아오려다 보니 또 지나칠 거 같더라구. 불안해서 서울역까지 걸어갔죠. 어쩌다 미도파백화점 같은 데 가긴 했는데, 샤프 사러. 뭐 먹는 거나 좋아하고…. 진짜 특징 없는 애였어요. 있으나마나 한 녀석.”
공부는 중간 안쪽, 아니면 그보다 좀 잘하는 수준…. 어쨌거나 초·중·고 12년 동안 지각 한번 하지 않았다. 밋밋하고 숫기가 없는 탓인지 좋아하는 여자애도, 좋아해주는 여자애도 없었다.
초등학교 몇 학년 땐가는 5일만 되면 가슴이 벌렁거렸다고 한다. 담임선생님이 5번, 15번 하는 식으로 책읽기와 문제풀이를 시켰기 때문이다. 수학을 지독히도 싫어했고 고등학교 땐 물리, 화학까지 합쳐 ‘양’ ‘가’를 밥먹듯 받았다. 대신 국사, 세계사, 지리, 사회 같은 인문계 과목은 넘치도록 좋아해 성적표는 늘 극심한 불균형의 연속이었다. 언제인지 모르게 사춘기가 지나갔고, 중학생 무렵부터는 집에 가면 제 방문 꼭 닫고 들어가 안에서 뭐 하는 지 알 수 없을 만큼 속모를 소년이었다.
“역사 과목 좋아하면 특정한 시대나 인물이나 사상이나 그런 데 관심이 가잖아요. 그런 거 없었어요?”
“없었어요.”
“수학은 어느 정도 못했는데요.”
“숫자 자체가 싫어요. 전화번호도 잘 못 외워요. 이사할 때 돈 받잖아요. 지난번 전셋집 옮길 때도 부동산에서 잔금 세 보라고 하는데, 아휴,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구요. 쪼꼼 하다 말아버렸어요. ‘뭘 세요, 맞겠죠’ 했더니 상대편이 더 당황하던데요.”
그렇다고 설경구의 암기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그는 영화판에서도 집중력 뛰어나기로 유명한 배우다. 대본 분석, 인물 연구, 이런 거 하고 담 쌓고 사는 그는 현장에 나오기 전 대본을 암기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자기 차례 오기 전 눈에 힘주고 딱 보면 그냥 외워진단다. 어떤 때는 슛 들어가기 직전 감독에게 “대사 한번 읽어달라”는 염치없는 부탁을 하기도 한다. 그러고도 일단 촬영을 시작하면 어느새 대사가 입에 착 달라붙어 있다. 놀라운 능력이다.
유일한 취미는 학교 중창단 활동이었다. 또래 7명이 아카펠라 팀을 꾸려 방과 후 음악실에서 노래연습을 하곤 했다. 연말연시에는 제법 바빴다. 특히 교회 공연이 많았는데(멤버 중 기독교인이 있어서) 하루 세탕을 뛰기도 했다.
“어, 다음 어디야? 지금 몇 시야? 그러면서 무슨 연예인들처럼 몰려다녔죠. 재밌었어요. 제 포지션은 테너였는데, 왜 그걸 했냐하면 새 멜로디를 외우지 않아도 되니까. 베이스 같은 거 하면 밤밤밤밤…, 뭐 그런 새 곡조를 익혀야 하잖아요. 제가 그래요. 되게 게을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