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호

사형폐지운동 나선 전직 교도관 고중렬

“사형집행 200여회 참관, ‘포인트’ 당길 때마다 나도 함께 죽었다”

  • 이남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irun@donga.com

    입력2005-01-25 11: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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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형폐지운동 나선 전직 교도관 고중렬

    서울구치소 근무 당시 고중렬씨의 교도관 신분증명서.

    1959년 7월31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유난히 푸르렀다. 전직 교도관 고중렬(高重烈·75)씨는 결코 그 날을 잊지 못한다. 그에게 운명이자 천형(天刑)과도 같은 사형집행을 처음 목격한 날이기 때문이다.

    두 동료 교도관에 이끌려 서대문형무소 교수대에 선 인물은 진보당 당수 조봉암. 당당한 걸음걸이, 흔들림 없는 눈빛. 가족들이 맞춰 보낸 흰 한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들어선 그에게선 기품과 위엄이 흘렀다. 어느 누가 죽음 앞에서 저리도 초연할 수 있을까.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서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유언을 하는 조봉암의 목소리는 떨렸다. 이윽고 두 손과 무릎, 두 발이 포승줄에 묶인 조봉암의 머리에 흰 주머니가 씌워졌다. 한 교도관이 그의 목에 밧줄을 건 뒤 나무판자를 두드리자 다른 교도관이 마루청과 연결된 ‘포인트’를 잡아당겼다.

    ‘쿵!’ 밧줄에 매달린 조봉암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곧 숨이 끊어졌지만 30분도 넘게 매달아뒀다. 민족지도자로 추앙받던 죽산 조봉암은 간첩 누명을 쓰고 이렇듯 하루 아침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왜 죽여야 합니까?’

    오랫동안 이 같은 의문이 고씨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억울한 죽음을 ‘방조’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자신의 처지에 가슴이 시렸다.

    그러나 국가공무원인 교도관은 명령을 거스를 권리가 없다. 차마 맨정신으론 집에 돌아갈 수 없어 고씨는 눈물로 통음했다.

    19년간 사형수 담당

    19년 동안 사형수 담당 교도관으로 근무한 고중렬씨는 조봉암의 사행집행을 목격한 유일한 생존자다. 1952년부터 1971년까지 사형수 교화 담당 교도관으로 근무하며, 200명이 넘는 사형수의 죽음을 목격했다.

    교도관을 그만둔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에겐 사형제 폐지운동이 삶의 이유이자 목표다. 사형제 폐지운동가들 사이에서 그는 독보적 존재로 통한다. 전직 교도관으로서 사형 폐지를 공개적으로 주장해온 유일한 인물이고, 사형수들의 삶과 죽음을 가장 많이 지켜본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여야 국회의원 175명이 서명 제출한 ‘사형제 폐지 특별법안’이 국가보안법 파동 등으로 유야무야되는 광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 법안은 지난 16대 국회에서도 의원 156명의 서명을 받아 법사위에 상정했으나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고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형제도가 폐지되는 것을 보고 죽는 게 마지막 소망”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마지막을 지켜본 사형수들의 이름과 죄수번호를 적은 메모를 조심스럽게 보여주면서 “이 세상에 ‘죽어 마땅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가 사형제 폐지를 이토록 간절히 바라는 이유는 뭘까.

    “국가가 범죄자에게 형을 집행하는 것은 교정·교화를 위함인데, 사형은 보복에 지나지 않아요. 범죄자에게 참회와 속죄의 기회를 주지 않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건 또 다른 ‘살인’일 뿐입니다.”

    그는 ‘시간이 걸릴 뿐, 인간은 교화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그건 19년 교도관 생활이 그에게 준 가르침이다. 형장에서 죽어간 이들을 위해 그는 지금도 매일 기도를 드린다.

    고씨가 사형수 담당 교도관이 되기로 한 것은 종교적 사명감 때문이었다. 1950년대 초 교도관 학교를 졸업하고 군산형무소에 배치된 그는 처음으로 사형수와 대면했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신의 고귀한 뜻을 알려주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일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주저없이 서대문구치소행을 자청했다. 더 많은 사형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1954년 서대문구치소 ‘사형수 교화담당 위원’으로 발령받았다. 보안과장, 교도소장으로 승진할 기회도 있었지만 이를 모두 거부하고 사형수를 위한 교화위원으로 남을 것을 고집했다.

    ‘지옥 3정목’에서 주저앉다

    고씨가 교도관으로 재직하던 시절은 국가가 행하는 살인의 공포가 극에 달하던 때다. 한국전쟁을 겪고 난 뒤 급격한 이념 대립으로 사형을 당하는 ‘간첩’들이 넘쳐났다. 죄 없는 양민들도 ‘공산당에 부역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하기 일쑤였다.

    “교도관 생활 초기인 1954년부터 3년 동안은 출근해서 해질 때까지 하루 10∼15명씩 사형이 집행됐어요. 닭장에서 닭을 꺼내 목을 비틀듯 너무도 쉽게 사람을 죽였습니다. 인간이 인간의 목숨을 이렇게 함부로 해도 되는 걸까…. 의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사형폐지운동 나선 전직 교도관 고중렬
    독재정권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정적을 만들고 살해했다. 고씨는 인간의 생사 여탈이 그 같은 정치적 목적에 좌우되는 현실에 끝없이 좌절했다. 그렇다고 제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30년이 지났건만, 사형집행 광경은 아직도 그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요즘도 그 장면들이 가끔 꿈에 나타나 가슴을 짓누른다. 그때마다 고씨는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법무부 장관이 사형 날짜를 고시하면 교도소장이 사형집행령을 내립니다. 사형집행일엔 평소 틀어주던 방송이나 야외 사역, 아침 운동도 없지요. 교도관은 ‘1995번 의무과 체중 검사!’ ‘교무과장 면회!’라면서 무심한 표정으로 사형수를 불러냅니다.

    미결수인 사형수는 교도관의 안내로 서대문구치소 담을 넘어 형무소로 건너갑니다. 교무과나 의무과로 가는 줄 알았던 사형수는 이른바 ‘지옥 3정목’(사형집행장)으로 꺾어지는 길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운명을 실감합니다. 그러면 다리에 힘이 빠져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거나 한숨을 내쉬지요. 그를 지옥 3정목으로 이끄는 교도관의 팔엔 더 힘이 들어갑니다. 행여 도망이라도 갈까 싶어 긴장하기 때문이죠.”

    사형집행에 참여하는 사람은 원심 검사, 교도소장 및 교무과장, 의무관, 보안과 교도관과 목사, 신부 등 종교인사 들이다.

    교도소장은 사형수의 신분장을 펴놓고 그들을 내려다보며 확인 신문을 시작한다. 이름, 나이, 본적, 현주소 따위를 묻고 몸에 흉터나 점은 없는지 등을 살핀다. 사형수 곁에 선 교도관이 옷을 벗겨 직접 확인시켜준다. 어느 한 과정도 지체되는 법이 없다.

    사형수는 교수대인 마루청 위에 앉는다. 마루청 밑은 1.5m 높이의 2평 남짓한 콘크리트 공간이다. 사형수들은 버둥거리지 못하도록 손발이 꽁꽁 묶여 있다. 유언을 남기는 사형수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린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하던 사람, ‘담배 한 개비만 피우게 해달라’며 시간을 벌던 사람, 말없이 조용히 눈물만 흘리던 사람…. 죽음의 순간에 초연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들의 유언이 횡설수설 길어지면 집행관이 말을 끊어버립니다. 언제까지 감정에 휘둘릴 수만은 없기 때문이죠.”

    사형수의 시신은 아무도 돌보지 않은 채 방치되는 경우가 다반사라 더욱 서글프다.

    “지하 바닥에 떨어진 시신을 처리하는 건 재소자들의 몫입니다. 물론 사형집행에 참관한 의무관이 사형수의 숨이 끊어졌는지 확인한 다음 교도관들의 지도하에 이뤄지죠. 시신은 의무과에 3일간 안치됩니다. 그 사이 가족이 찾아가지 않으면 인근 성당의 공동묘지나 벽제 근처 교도소 공동묘지에 고이 묻어줬습니다.”

    지금도 그는 자신이 대부(代父)가 되어준 한 사형수의 묘지를 찾는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사회도 등을 돌린 그를 위해 기도한다.

    7번 죽는 사형수

    흔히들 사형수는 6번 죽는다고 한다. 1심 선고 때, 2심 때, 3심 확정판결 때, 사형집행장인 ‘지옥 3정목’으로 가는 길목에 이르렀을 때, 집행장 건물을 봤을 때, 그리고 교수대에서 모두 6차례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7번, 8번 죽어야 했던 사형수도 많다. 엉성한 사형집행 방식 때문이다. 한 번의 집행에서 죽음에 ‘성공’하지 못한 사형수는 또 한 번 죽음의 의례를 치러야 한다. 고씨는 이왕 보내야 할 사람을 단번에 편하게 보내지 못한 것을 죄스러워했다.

    “한 번에 목숨이 끊어지지 않아 다시 교수대에 올라간 사형수도 부지기수입니다. 사형수의 목에 오랏줄이 제대로 걸리지 않거나 조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포인트를 당기는 바람에 사람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는 거죠. 때론 밧줄을 너무 길게 걸어 형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어요.

    손발이 묶인 사형수들은 비명을 질렀고, 온몸은 피투성이가 됐습니다. 교도관들은 바닥에 떨어진 그들의 몸을 끌어올려 다시 밧줄을 목에 드리웠습니다. 15분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의무관이 그들의 숨이 끊어졌는지 확인합니다. 이후에도 15분을 더 매달아 놓습니다.”

    사형으로 그 누구보다 마음의 상처를 입는 사람은 바로 교도관들이다. 고씨 또한 자신의 손으로 타인의 목숨을 끊어야 하는 잔혹한 운명을 몸서리치게 증오했다.

    사형집행 공문이 내려오는 날엔 교도소 분위기가 뒤숭숭해진다. ‘오늘은 누가 형을 집행할 것인가’를 놓고 교도소 보안과장이 배치표를 짜는 데 골머리를 앓는다. 보안과 직원들이 ‘아프다’ ‘지난번에 했다’는 등의 핑계를 대며 포인트 잡는 걸 피하려 들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에 의해 사형수가 죽어나가는 걸 목격한 후 심적 고통을 견디다 못해 직장을 뛰쳐나간 교도관도 있었다.

    언젠가는 사형집행 중 실수로 교도관이 사형수와 함께 마루청 밑바닥으로 떨어져 정신을 잃은 일도 있었다. 수동 사형집행 방식이 낳은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교도관이 사형수 머리에 흰 주머니를 씌우고 오랏줄을 건 후 미처 자리를 피하기도 전에 다른 교도관이 실수로 포인트를 당겼습니다. 교도관과 사형수가 동시에 지하 콘크리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죠. 피투성이가 된 교도관은 곧장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그후로는 그 교도관을 형무소에서 볼 수 없었어요.”

    사형 반대론을 편 명지대 김철수 석좌교수(헌법학)는 “사형제도는 사형선고인, 사형집행 확인인 등 관련자들의 인간 존엄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외국의 경우 사형 담당 교도관의 스트레스를 덜어주기 위해 심리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사형을 집행할 때도 4명의 교도관이 한꺼번에 버튼을 눌러 누가 사형수를 직접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알지 못하도록 한다. 한국은 1980년대 후반에야 이 시스템을 도입했다.

    엽기 살인마를 교화하다

    고중렬씨는 “사형집행에 참가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술을 마셨다”고 회상한다. ‘차라리 사형수 대신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포인트를 당긴 동료 교도관은 집에 들어가면 아이도 한번 안아주지 않고 끙끙 앓아누웠다고 한다.

    고씨 외에도 많은 전직 교도관들을 찾아나섰지만, 그들은 사형을 집행하던 이야기를 차마 꺼내지 못했다. 가슴속 깊숙이 죄의식이 깔려 있는 듯 상처를 건드리는 데 하나같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교도관들의 사형제 폐지 찬성률이 다른 집단보다 낮다는 사실이다.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언론인과 법관의 경우 54%가 사형제 폐지에 찬성한 반면, 교도관과 의무관은 각각 11.3%, 11.0%로 사형제 폐지 찬성률이 낮았다. 이 같은 조사결과는 사형수를 포함한 범죄자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교도관들의 현실 인식 때문일 것이다. 사형제가 없어지면 재소자 관리를 위한 그들의 업무 부담은 그만큼 늘어나게 된다.

    감옥에서도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연일 폭탄발언을 해온 연쇄살인범 유영철을 관리해야 하는 교도관들의 경우 심한 심리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죄의식 없이 20여명의 여성을 무참히 살해한 그를 완전히 교화시킬 수 있을까. 인면수심의 범죄를 저지른 그를 용서해야만 하는 걸까.

    고씨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유영철도 교화할 수 있다”며 한 연쇄살인범의 사례를 들려줬다.

    “1962년 희대의 엽기 살인마로 불린 조일룡이란 인물이 있었죠. 그는 경찰을 사칭하면서 주로 밤에 데이트중인 남녀만 골라 죽였습니다. 살해된 이들이 16명에 이르렀어요. 젊은 여성을 강간하고 몽둥이로 머리를 내려쳐 죽이는 등 범행 수법도 잔인했어요. ‘1960년대 유영철’이라 부를 만한 인물이었죠.

    그가 그런 범죄를 저질렀던 건 세상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은 가난하고 불행한데 남들은 짝을 만나 사랑하고 행복한 삶을 꾸려가는 모습을 보는 게 견디기 힘들었던 거죠. 그는 제대로 교육받지도, 가정에서 따뜻한 사랑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온갖 공갈과 행패로 같은 감방 사람들조차 공포에 떨게 만든 그도 결국은 교화됐습니다. ‘사랑과 용서’의 의미를 깨닫게 됐기 때문이죠.”

    고씨는 조일룡과 섬뜩한 만남으로 인연을 맺었다. 조일룡은 면회하러 찾아온 고씨에게 몰래 만든 칼을 들이댔다. 하지만 고씨는 당황하지 않았다. “당신은 나를 죽여도 결코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며 침착하게 설득했다.

    다른 교도관이 이 장면을 목격했고, 조일룡은 소란죄로 한 달간 징벌방에 갇히게 됐다. 그러나 고씨는 그를 용서하고 징벌방에서 꺼내줬다. 이후 조일룡은 서서히 변했다. 3년이 지나서는 가톨릭 세례를 받았고, 감방 동료들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넬 줄도 알게 됐다. 조일룡은 세상을 떠나며 고씨에게 고마움의 메시지를 전했다.

    “대부님, 죽기 억울하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더. 다만 세상에서 진 그 많은 죄를 다 갚지 못하고 그냥 갈라카이 염치 없을 따름이지예.”

    고씨가 사형집행을 부당하다고 여기는 데는 재판부의 오심이 많다는 이유도 있다. 사형수의 대다수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국선변호인들은 교도소에 면회 한번 오지 않고, 법정에만 의무적으로 출석했다. 그들이 제대로 변호해줬다면 죽음에까지 이르지 않았을 많은 서민들이 죽어갔다.

    가난한 자들만 죽다

    “전당포를 터는 친구들 망을 봐주다 살인사건에 연루된 김홍준이란 사람이 있었어요. 친구들이 실수로 전당포 주인을 밀쳐서 죽게 했는데, 그 죄를 김씨까지 덮어쓰게 된 거죠. 사람들은 그의 억울함을 알았지만,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정당한 판결은 없었습니다.”

    2005년 1월 현재 한국의 사형수는 60명. 1997년, 23명의 사형이 무더기로 집행된 후 단 한 차례도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강력범죄가 늘어남에 따라 사형수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고, 17대 국회에 상정된 사형제 폐지 법안은 정쟁에 밀려 유야무야됐다. 이런 현실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고씨는 마지막 바람을 털어놓았다.

    “살인을 방조했다는 원죄의식은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사형제가 폐지된다면 그나마 편히 눈감고 떠날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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