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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의 한국혼 ②

이율배반의 ‘영웅’ 역도산

“차별의 사각 링에 서려면 네 귀퉁이를 모두 쳐다봐야 해!”

  • 김충식 동아일보 도쿄지사장 seescheme@donga.com

이율배반의 ‘영웅’ 역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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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의 본명은 김신락(金信洛).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 신풍리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는 누나 셋, 형 둘이 있었다. 아버지 김석태(金錫泰)는 풍수를 잘보는 지관이었다. 매일처럼 산에 올라 풍수를 살피는 아버지는 때로 산삼 같은 약초를 캐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먹이곤 했다고 한다.

신락이 열 살무렵 아버지가 몸져누웠다. 그래서 살림은 어머니 전기(田己)와 큰형 항락(恒洛)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여자치고는 체격도 크고 농사일에도 손이 빠른 여장부였다. 하지만 큰형 항락은 평범한 농사꾼이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체격과 힘이 빼어난 장사였다. 게다가 산삼을 먹은 덕인지 함경도 일대에 이름을 떨친 씨름꾼이 되었다.

항락은 씨름이 전업이 되어 집안일은 뒷전이었다. 둘째형 공락(公洛)은 공부가 뛰어나 서울에 유학중이었다. 말이 유학이지 돈을 보낼 형편이 못되어 의사가 된 어느 친척집에 더부살이를 시켰다. 그러므로 집안일과 아버지 병시중은 신락의 몫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10대인 신락은 큰형 못지않은 체구에 씨름도 제법이었다.

1938년 단오절. 예년처럼 풍작을 기원하는 씨름대회가 열렸다. 우승에 황소 두 마리, 준우승에 황소 한 마리, 3위에 광목(옷감)을 내건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우승을 거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큰형 항락. 그러나 진짜로 주목을 받은 인물은 바로 신락이었다.

큰형이야 30대의 산전수전 다 겪은 유명한 씨름선수이지만 신락은 15세의 무명소년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준결승전까지 오른 뒤 3, 4위 결정전에서 이겨 3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때 까까머리 소년 신락을 유심히 지켜본 일본인 둘이 있었다. 오가타 도모카쓰(大方寅一)라는 일본인 형사와 그의 양아버지 모모타 미노키치(百田己之吉)였다.



오가타는 현지 경찰서에 부임해온 형사였고 모모타는 양아들을 만나러 온 김에 씨름구경을 하게 된 것이었다. 사업가인 모모타는 일본씨름 스모의 열광적인 팬으로 동향 출신 스모선수 다마노우미의 후원회 간사를 맡고 있었다.

모모타는 씨름이 끝나자 신락의 집으로 찾아가 일본에 데려가 스모선수로 키우고 싶다고 말한다. 체격도 좋고 힘도 기술도 좋고, 대형 씨름선수인 항락과도 한 피가 아닌가. 그러나 모모타의 열망은 벽에 부딪쳤다. 몸져누운 아버지의 간병문제, 그리고 어머니와 형 항락의 강한 반대에 직면한 것이다.

혹독한 스모 수련

그렇게 모모타만 몸이 단 채 2년 세월이 흐른 뒤, 신락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이 돌변한다. 신락이 어머니와 형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본행을 결심한 것. 가족은 “일본에 가고 싶다면 아버지 3년상은 치르고 가라”고 말렸다. 억지 결혼도 시켰다. 인근 마을 물레방앗간 집 딸 박신봉과 전격적으로 혼사를 치렀다. 그러나 신락은 일본행을 단념하지 않았다. 모모타의 권유로 마음 들뜬 신락은 곧바로 현해탄을 건넌다.

1940년 신락은 다마노우미가 이끄는 스모도장에 들어가 89명의 제자 중 한 명이 된다. 당시 신락의 키는 175㎝ 체중은 84㎏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기록에는 출신지 조선, 본명 김신락, 선수명(시코나) 역도산으로 남아 있다.

역도산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준 것일까. 당시 스모선수 중 경남 함양 출신의 노하우(盧夏于)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의 선수명이 처음에 함양산이었다가 나중에 지리산으로 바뀌었다. 그런 식으로 당시에는 선수명에 고향의 인연을 반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역도산이라는 이름에는 출생지와 이어지는 연이 전혀 없다.

수련 1년이 지나면서 그에 관한 서류상의 기록도 바뀐다. 일본의 히젠(肥前·나가사키현 및 사가현의 옛 지명) 출신 역도산 광호(光浩). 이후에는 나가사키 출신 역도산 신락(信洛)이라는 엇갈리는 기록도 나온다.

조선 출신이라는 멸시와 차별을 견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말도 서툴고 스모의 기초도 모르는 그가 가진 것은 오직 튼튼한 몸 하나뿐이었다. 유일한 자산인 몸에 기술과 힘을 붙여 상대를 이기는 것, 그것만이 일본에서 살아남는 길이요 자존심의 상처를 치유하는 수단이었다. 역도산의 승률은 놀랄 정도로 높았다. 1941년 1월대회 저단급(조노쿠치)에서 5승3패. 5월대회에서는 6승2패. 이듬해 1월에는 전승으로 우승하는 등 첫 시작 이래 승률이 언제나 반타작 이상이었다.

그는 가혹한 스모 수련 중에 ‘아리랑’을 부르며 망향의 슬픔을 달래기도 한다. 역도산은 후원자 스즈키 후쿠마쓰(당시 지바현 야치마타 거주)의 집에 자주 들러 그의 어린 딸 기미에에게 ‘아리랑’을 부르며 가르쳐주었다. 기미에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의 ‘넘어간다’를 일본식으로 ‘누오모간다’라고 부르곤 했다. 역도산이 몇 번이나 바로잡아줬으나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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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식 동아일보 도쿄지사장 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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