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호

‘노무현 정부 秘史’기록한 안보전문기자 김종대

“청와대 오찬서 ‘노무현 사퇴’주장한 YS, 전두환 전 대통령이 뜯어말려”

  • 황일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10-04-02 13:3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자주냐 동맹이냐’ 논쟁 귀결은 2006년 10월 전작권 전환 합의
    • 예비역 비판 의식한 합참의장의 ‘줄타기’와 대통령의 진노
    • 노무현식 부국강병론 뿌리는 ‘장인 빨치산 전력’ 논란
    • 럼스펠드의 당혹스러운 한마디 “전작권, 한 5,6년 준비하면 되나?”
    • 핵실험 이틀 뒤 DJ의 전남대 강연과 노 대통령의 다급한 전화
    • 청와대 참모들에게 남긴 “전두환은 참 멋있는 전직 대통령”
    • “안보 논쟁은 계속된다…문제는 소통의 시스템”
    ‘노무현 정부 秘史’기록한  안보전문기자 김종대
    한국에는 기록이 없다. 엄청난 정책들이 정부 안에서 어떤 토론과 논쟁을 거쳐 만들어졌는지는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지고 만다. 간간이 나오는 당국자들의 회고록은 신문기사를 스크랩하는 수준이거나 공허한 자기과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부시 행정부의 안보정책 결정과정과 의식구조를 해부한 밥 우드워드의 ‘공격 시나리오(Plan of Attack)’ 같은 책은 찾을 수 없다. 전임자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기록을 없애고, 후임자는 텅 빈 공백에서 다시 출발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안보 전문매체 ‘D·D포커스’의 김종대 편집장이 최근 펴낸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어느 때보다도 안보 문제가 첨예한 논쟁 주제로 떠올랐던 지난 정부 시기 한국의 안보를 좌우한 초대형 이슈들의 결정과정을 들여다본 560여 쪽 분량의 책은, 본인의 경험에 더해 당시 최고위 안보당국자들과의 장시간 대면 인터뷰를 통해 노무현 정부 안에서 벌어진 갖가지 안보 관련 논쟁과 참여 인사들의 속내를 손에 잡힐 듯 묘사하고 있다. 책의 주제의식에 동의하느냐 여부를 떠나 기록이 가진 의미만으로도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14대 국회 국방위원회 비서관으로 안보 분야에 발을 들여놓은 김 편집장은 2002년 대선 캠프에 합류하면서 노 전 대통령과 첫 인연을 시작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거쳐 청와대 국방보좌관실에서 행정관으로 일했던 그는, 2005년 청와대를 떠나 비상기획위원회 혁신기획관과 국방부 정책보좌관으로 일했다. 2007년 공직을 벗어나 안보전문 매체를 창간한 이후에는 한국의 주요 안보 이슈에 관해 전문성 있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속살’에 누구보다 근접해 있는 김 편집장의 책은 방대한 이슈를 다룬다.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용산기지 이전 협상, 주한미군 감축 공론화, 평화체제 논의와 서해 북방한계선(NLL) 논쟁 등이 그것이다. 당시 청와대와 정부는 물론 온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들 가운데 기자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최근 다시 논란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전시작전통제권 문제가 결정된 일련의 과정이었다.

    흔들리는 군 수뇌부



    노무현 정부 시기를 관통한 이른바 ‘자주 대 동맹’ 논쟁의 최종적인 귀결이었던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문제는, 공교롭게도 북한의 핵실험으로 최대의 위기국면이 조성됐던 2006년 가을에 ‘2012년 환수’로 최종 결정된다. 이 시기야말로 노 정부 안보정책에 있어 가장 드라마틱한 국면이었던 셈. 3월8일 서울 서초동 D·D포커스 사무실에서 진행된 김 편집장과의 인터뷰 역시 대부분의 시간이 이 무렵 청와대와 국방부, 워싱턴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복기하는 데 할애됐다.

    ▼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실명으로 등장하는 당사자들이 부담스러워했을 것 같다는 겁니다. 항의하는 분들이 있던가요.

    “정권 내부에서 싸움을 벌였던 당사자들이 많이들 우려의 뜻을 전해왔습니다. 그렇지만 갈등은 갈등대로 기록물로 남겨야 그 교훈이 다음에 정책을 담당하는 이들에게 유용할 수 있죠. 논쟁의 과정에는 악인도 선인도 없었다고 봅니다만, 눈앞에 닥쳐온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했다는 차원에서 동맹 중시를 주장했던 보수적인 관료들이나 새로운 한미관계를 외쳤던 이른바 자주파들이나 그 진정성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노 대통령이 사실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내려온 자주국방론의 연장선상에 서 있었다는 거고, 이에 반대하고 공격했던 예비역 원로들은 박정희 시절부터 이를 비판했던 보수적 현실주의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자주냐 동맹이냐라는 논쟁 자체는 1970년대의 구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거죠. 이렇게 놓고 보면 한국의 안보 논쟁은 자주국방세력과 연합방위세력의 대립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 그런 의미에서 전작권 전환 결정과정과 관련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당시 군 수뇌부의 행보는 사뭇 의외입니다. 뚜렷한 주관이나 판단 없이 대통령과 예비역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요.

    “먼저 짚어둘 것은 전작권 문제가 결정되던 2006년 봄 군 수뇌부는 2012년 전작권 전환에 대해 완전하게 합의한 바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상희 당시 합참의장이나 각군 총장 모두 말이죠. 여기에는 2007~11 국방중기계획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기계획대로 전력 확충이 이뤄진다면 2012년에 전작권이 전환돼도 주한미군 대체전력은 확보할 수 있겠다고 합의한 것이고, 대통령에게도 그렇게 보고한 것이죠.

    그러다가 예비역들이 반대하고 나서자 그해 8월경부터 이상희 의장의 입장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당초 노 대통령과 윤광웅 장관은 2009년 환수 입장이었지만 합참과 군의 보고에 따라 이를 2012년 안으로 양보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마저 흔들리고 합참의장의 말이 바뀌니까 노 대통령은 불신을 느끼게 된 것이죠. 대통령의 진노에 맞닥뜨린 군은 결국은 대통령의 지침에 다시 소극적으로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2012년 안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콤플렉스와 마타도어

    당초 “전력 현대화를 위해 국방비를 증액한다면 2012년까지 전작권 전환을 추진할 수 있다”고 보고했던 이상희 의장은, “2006년 여름 이 문제에 관한 보수 여론이 부정적으로 기울자 석연치 않은 태도를 보였다”고 김 편집장의 책은 기술하고 있다. 2012년까지 준비하는 데 이상이 없겠느냐는 대통령의 질문에 이 의장이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아 대통령이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는 것. 두 달이 지난 10월1일 국군의 날 행사장에서 노 대통령이 다시 같은 질문을 던지자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어려움이 많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대통령과 군 수뇌부 사이에 싸늘한 냉기가 흘렀고, 윤광웅 당시 국방장관이 이를 두고 “합참의장이 정치를 하고 있다”고 한탄했다는 게 김 편집장의 기록이다.

    이와 관련해 책에는 당시 이상희 합참의장이 한 예비역 장성에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고 밝히고 있다. 이 예비역 장성의 말을 잠시 인용한다.

    “예비역들이 전작권 협의와 관련해 청와대에 협조하고 있는 이 의장을 다그치면, 그는 ‘일단 전작권 전환에 협조하면 국방비가 많이 확보된다’며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했다. 합의가 이뤄진다 해도 실제로 환수하기까지 수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에 당장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본 것이다. 대신 자신의 재임기간 중 전력에 투자할 수 있는 예산을 확보한다는 매력적인 대안으로 기울었던 것 같다.”

    다시 김 편집장의 설명을 들어보자.

    “당시 이 문제에 대해 군의 진정한 소신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없다는 게 가장 슬픈 대목입니다. 통수권자의 지침과 예비역들의 여론 사이에서 끊임없이 정치를 하느라 바빴다는 거죠. 특히 전작권 논의에 관여했던 당시 군 수뇌부가 정권교체 후 ‘나는 이렇게 노무현에 저항했다’는 방증으로 그때의 논란을 역이용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이러니한 대목이라고 봅니다. 심지어는 당시 함께 논의에 참여했던 군 선후배나 동기생들끼리 ‘저쪽이 주무였다’고 마타도어를 뿌리는 모습까지 나타나고 있으니까요.”

    ▼ 정작 노무현 대통령 본인이 자주국방론을 통해 당시 군 수뇌부의 이러한 국방예산 증액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이 더욱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전쟁이냐 평화냐’라는 구호로 당선된 정권의 지지층 입장에서는 의외였을 테고요.

    “노 대통령이 자주국방이라는 이슈를 꺼내든 것에는 자신에 대한 군의 비토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었다고 봅니다. 대선 때부터 ‘강한 국가’를 표방함으로써 이른바 ‘장인 빨치산 전력’ 문제로 인한 레드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정치적 시도가 있었고, 재임기간 내내 이를 의식했으니까요. 군에 대한 의식적 존중과 배려가 자주국방론이나 비약적인 국방예산 증가로 나타난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노 대통령은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의 부국강병론자는 아니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김장수 장관의 ‘당선인 보고’

    이러한 우여곡절과는 어울리지 않게 정작 전작권 전환 시점이 최종적으로 결정되는 과정은 맥이 빠질 정도다.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도널드 럼스펠드 당시 미 국방장관이 마치 농담하듯 한국의 2012년 안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전작권 전환의 시점에 대해 미국 측이 2009년을 고집하자 2012년을 염두에 뒀던 청와대와 국방부는 당혹해 했다. 최종결정을 내리기로 한 2006년 10월20일 SCM을 앞두고 노 대통령은 “미국이 2012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미국 뜻대로 2009년에 전작권을 가져오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는 것. 실제로 SCM이 진행되는 동안 청와대는 ‘2009년 전환’을 발표하기 위한 대책회의를 열고 있었다고 김 편집장은 전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워싱턴으로 날아간 윤광웅 장관에게 리셉션 자리에 나온 럼스펠드 장관은, 프랑스 여성 국방장관의 미모에 관해 농담을 던지다 “전작권 전환 그것, 한 5,6년 준비하면 되는 것 아니냐”며 2012년 안을 손쉽게 수용한다. 배석했던 미 국방부 실무자들의 안색이 급변할 정도로 난데없는 결론이었다.

    “당시 미국은 이라크 전쟁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 전작권 문제는 별 이슈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윤 장관도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어 황당했다고 하더군요. 우선은 당시 중간선거를 앞두고 경질 직전이었던 럼스펠드 장관이 거의 체념한 상태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이라는 존재, 특히 한국의 전작권이라는 문제가 우리 생각만큼 미국에도 심각한 이슈였던 것은 아니라고 볼 근거도 되겠죠. 따지고 보면 몇 년 차이에 불과한데 그에 집중할 만한 에너지는 없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사실 미국에게 전작권 문제는 비즈니스였습니다. 군사비 절감을 위해 전세계 미군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작업을 한반도에서 시작하자는 판단이었죠. 국내에서는 이를 죽고 사는 문제 혹은 이념의 문제로 접근하는 이가 많았지만 미국의 기준은 달랐던 거죠. 이건 분명 현재 시점에서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주한미군 핵심전력은 오히려 최근 들어 가장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미국이 이 문제를 비즈니스 영역으로 사고해왔다는 걸 감안하면, 쉽게 말해 우리가 이 속도를 줄이거나 전작권 전환시점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방위비 분담금이나 무기구매에서 엄청난 지출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 되니까요. 일각에서는 한미연합사 체제가 상징하는 전통적 동맹에 어떤 변화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강조하지만, 그럴 경우 우리가 얼마나 많은 부담을 감당해야 할지 따져보면 경악할 만한 수준일 겁니다.

    이명박 정부도 이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다고 봅니다. 대선 직후인 2008년 1월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으로 국방부를 방문했을 때 김장수 당시 국방장관은 ‘(전작권 전환 연기는) 말 한마디만 꺼내면 수조원’이라고 보고한 바 있습니다. 이 대통령이 이에 ‘알았다’고 답했고, 그전까지 인수위 주변에 흘러 다니던 전작권 재협의 이야기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죠.”

    ▼ 최근 다시 거론되고 있는 전작권 전환 연기 주장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는 건가요. 얼마 전 김태영 국방장관은 ‘2012년에 (미국에서 한국으로) 전작권이 넘어오는 게 최악의 상황’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는데요.

    “현재 우리 정부의 공식적인 태도는 2011년에 최종작전능력(FOC) 수준을 검토한 뒤 결정하겠다는 것인데요, 그때 가면 일정 연기는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전작권 전환 준비가 진행될수록 연기로 인해 발생하는 추가비용은 훨씬 더 커지니까요. 기존의 합의를 깨고 새 스케줄을 도출해 관리해낼 프로세스는 이미 실기(失期)했다는 겁니다. 김 장관이 거론했던 근거는 주로 정치적인 사항입니다. 한미 양국의 대선이나 북한의 강성대국론 같은 것들이었죠. 실제로 국방부 주변에서는 이 문제를 정치적인 이슈로 판단하는 듯한데요, 그러나 군사적 효율성의 잣대로 접근하는 워싱턴 입장에서는 전작권 이야기에 미국 대선을 거론하는 것은 황당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핵실험 다음날의 청와대

    다시 2006년으로 돌아가보자. ‘자주국방론을 바탕으로 전작권을 환수해 평화체제 등 대북 협상을 주도할 수 있는 여건을 확보한다’는 인식으로 공격적인 행보를 이어나가던 노무현 대통령은, 그러나 2006년 10월9일 북한의 핵실험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는다. 7월 미사일 발사 때만 해도 일관된 대북정책을 고수하겠다던 정부의 입장이 핵실험 징후가 분명해지자 흔들리기 시작한 것. 윤광웅 장관은 국회에서 “핵실험을 한다면 전작권 전환도 재검토할 수 있다”고 발언했고, 10월8일 열린 안보관계장관회의는 “우리의 대북정책을 총체적으로 재검토한다”는 방향으로 입장이 모아졌다고 김 편집장은 기술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秘史’기록한  안보전문기자 김종대

    북한 핵실험 이튿날인 2006년 10월10일, 청와대에서 열린 오찬 간담회장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전 대통령을 안내하며 들어서고 있다.

    ▼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청와대의 핵실험 직후 상황은 여러모로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우선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참모들이 명확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컨트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도 들고요.

    “책을 쓰면서 가장 고민스러웠던 대목입니다만, 핵실험 전후부터 2차 정상회담 시점까지 정부의 안보분야 정책결정자들이 사분오열돼 있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외교안보에 있어 확고한 일관성을 갖고 있거나 핵실험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맞이할 경우 내놓을 대안이 명확하지 않았죠. 대통령은 ‘한국의 외교안보가 실패한 것 아니냐’고 엄청난 좌절에 빠졌고, 참모들은 우왕좌왕했습니다. 어떤 정부든 그렇듯 엄청난 사태 앞에서 평정을 유지하기는 어려웠겠죠.”

    핵실험 이튿날인 2006년 10월10일, 청와대에서는 전직 대통령들을 초청한 오찬이 열린다. 이 자리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준비해온 성명서를 꺼내 “역사의 죄인 김대중과 노무현은 국민 앞에 사죄하라”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고 한다. 오히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가가 위기에 처했는데 우리끼리 싸우자는 것이냐, 그만 좀 하라”고 끼어들었다는 것. YS의 비난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반박하면서 설전이 벌어졌고, 노무현 대통령은 1시간20분에 걸친 간담회 동안 거의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대신 오찬이 끝난 뒤 노 대통령은 YS의 발언을 제지해준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 “참 멋있는 전직 대통령”이라고 평했다는 이야기다.

    흔들리는 노 대통령의 모습에 화가 난 DJ는 이튿날 전남대 강연 자리에서 “대화를 포기하고 제재로 기운 노 대통령은 햇볕정책의 적자(嫡子)가 아니다”라는 폭탄선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이를 확인한 노 대통령은 광주로 향하고 있는 DJ에게 전화를 걸어 “포용정책 재검토는 본의가 아니다”라고 설득했다는 것. 이 일을 계기로 노 대통령은 ‘원래 서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는 게 김 편집장의 평가다.

    “전혀 뜻하지 않게 부시 대통령의 대북정책이 극적으로 바뀌면서 국면 전환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지만, 핵실험 직후 노 대통령은 분명 햇볕정책의 총체적 파산을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말하자면 전직 대통령 오찬 같은 공론의 장을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임기 초부터 노 대통령에게는 외교안보 사안에 대해 보수든 진보든 의견을 편식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었고, 집무실에서까지 ‘반대자들이 말하게 해줘라’라는 분위기가 형성되곤 했습니다. 난장판 같은 토론이 상시적으로 벌어지다보니 외부에는 ‘바람 잘 날 없는 정부’로 비쳤지만, 토론을 통해 학습하고 발전하는 측면이 있었다고 봅니다. 한반도 현실에서 언제든 최악의 위기가 불거질 수 있음을 감안하면, 당시 노무현 정부의 경험을 진지하게 반추하고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핵 문제가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이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나 분석이 없었던 것은 반성해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고요.”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

    ▼ 마지막 질문입니다. 노무현 정부 기간 내내 이어졌던 자주냐 동맹이냐 논쟁이 지나치게 파괴적이지 않았느냐는 비판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한국 사회가 치러야 했던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는 생각도 들고요.

    “논쟁을 대통령이 주도하다보니 한국 사회의 이념의 전시장이 청와대에서 고스란히 반복되는 한계가 분명 있었죠. 그러나 안보에 새로운 개념을 부여하고자 하는 대통령은 보수냐 진보냐 관계없이 필연적으로 군이나 관료들과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실제로 군과 가장 많은 갈등을 빚은 분은 군 출신인 노태우 대통령이었으니까요. ‘물태우’라는 말도 군부로부터 맨 처음 나온 것이었고요.

    문제는 이러한 갈등을 중재하고 해결할 제도적인 소통장치가 없어 군과 통수권자의 인간적인 관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거겠죠. 통수체계가 선진화하지 못했다는 것이야말로 문제의 본질이라는 말입니다. 지난해 국방예산 문제를 두고 청와대와 국방장관 사이에 벌어진 논쟁에서 보듯, 보수적인 정부라고 해서 군이 무조건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가슴 아픈 대목은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풍토가 있었다는 겁니다. 용산기지 이전, 주한미군 감축, 전략적 유연성 문제 모두, 당시 조직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내부 문제제기에 유연하게 대응했다면 그렇듯 ‘죽느냐 죽이느냐’에 가까운 갈등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앞서도 말했듯 문제제기의 이념적 배경이 보수냐 진보냐는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대통령과의 토론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김희상 당시 청와대 국방보좌관이나 사령탑 격이었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가 전략적 유연성 같은 주요 이슈를 외면하고 미국에 끌려 다닌다고 비판한 이른바 ‘진짜 자주파’들이나, 그 사심 없는 진정성은 인정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노무현 정부에서 개인적으로나 정책적으로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의 좌절이야말로 길게 보면 한국의 안보를 위해 불행한 일이었다고 봅니다.”



    인터뷰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