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비닐하우스 마을에 사는 주민들이 박문수 신부에게 조언을 얻고자 예수회 인권연대 연구센터를 찾아왔다.
박문수 신부는 1941년생이다. 고향은 미국 미네소타주다. 그는 슬로바키아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 사이에서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가족은 모두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온 가족이 다 함께 성당에 가는 것이 중요한 일상이었다.
그의 고향은 체코인과 슬라브인이 밀집해 살던 지역이었다. 이웃끼리 서로 어떻게 생활하는지 훤히 알 정도로 친밀했다. 그가 어린 시절 경험한 ‘풀뿌리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미국에서는 2000~3000명만 모여도 자기들끼리 소방서와 경찰서, 교육기관까지 만들어요. 공동체에서 무엇이 필요하고 구성원이 어떻게 역할 분담을 할 것인지 스스로 정해나갑니다. 한국에 지방자치제도가 도입됐지만, 경찰과 교육제도까지는 적용되지 않았죠. 반면 미국은 지방자치가 매우 발달해 있어요.”
▼ 모범적인 학창 시절을 보내셨죠?
“초·중·고등학교 모두 천주교 학교를 다녔어요. 미국에서는 어린 학생에게 노는 시간을 많이 줘요. 공부하라고 많이 요구하지 않아요. 가르치는 대로 답을 쓰면 되니까, 성적은 무척 좋았어요. 고등학교 때는 좀 분위기가 달랐어요. 배우는 것에 대한 자발성을 중시하더군요.”
박 신부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스프링힐대에 입학했다. 전공은 철학과 생물학이었다. 대학 진학 후 더 넓은 세상을 목격하면서 그는 사제의 꿈을 품었다. 정의를 구현하는 삶에 대한 동경이 무엇보다 컸다.
“젊은이들이 자기 자신을 다 바쳐서 세계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게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당시 케네디 대통령이 평화봉사단을 만들어 개발도상국에 파견했는데 그런 움직임도 영향을 미쳤죠. 인종차별 극복을 주장한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서도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故 제정구 의원과의 만남
1960년 미국 예수회에 들어갔다. 당시 미국 예수회에서는 한국에 관구를 설립하기 위한 움직임이 한창이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데다가, 미국에 교육받으러 온 한국인들과 교류하면서 그는 주저 없이 한국행을 택했다.
“‘나중에 서강대에 가서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1960년부터 이미 하고 있었어요. 당시 1년 선배인 이한택 주교님과 함께 교육을 받으며 한국에 친숙해졌죠. 새 관구가 생기는 한국에 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박 신부가 한국에 온 1969년은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위해 ‘3선 개헌’을 강행한 시점이었다. 대학과 노동계 등 각 분야에서 발생한 민주화운동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폭력이 자행됐다. 언론에는 재갈을 물렸다. 서강대 생물학과 조교로 일하며 한국말을 익히던 그는 ‘사제와 생물학자의 길을 동시에 걷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자연과학 공부를 좋아했어요. 미국에서는 학문과 정의 구현 활동을 동시에 할 수 있다고 낙관적으로 생각했죠. 하지만 그 꿈이 한국에 오며 깨졌어요. 권력 탄압 사건이 계속 일어나는 한국에서 생물학자로 할 수 있는 시급한 일이 없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유전공학과 생명윤리가 천주교에서 중요한 분야지만, 30년 후에야 이슈가 될 것 같았습니다. 생태학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한국은 모든 게 개발 위주였죠. 생물학자와 사제 일을 동시에 한다면 제 생활이 갈라질 것 같았어요. 마침 서강대에서 사회학과를 만들 계획을 갖고 있어, 전공을 바꾸기로 결심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