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5년 되던 해 고향에 있던 산소를 이장했다. 길이 확장되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 산소를 부득불 옮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산소 자리 물색 등 이장작업을 하는 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성을 기울였다. 주초부터 시작한 작업은 금요일에야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고 금요일 이른 오후 산소 세 기(基)를 파묘하며 유골을 수습했다. 봉분을 어느 정도 허문 뒤 일하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동생과 나는 직접 손으로 땅을 파며 유골을 수습했다. 일하는 사람들이 연장으로 땅을 파다가 유골을 손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내가 직접 손으로 그 작업을 하고 싶었다.
작업을 다 마치고 준비한 깨끗한 상자에 유골을 모셨다. 그런데 세 분의 유골을 당일로 새로 준비한 산소에 옮겨 모시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는 다음 날 오후 1시에 유골을 입관하기로 했다. 그날 오후 나는 세 분의 유골을 차에 모시고 당시 내 임시 거처였던 친척 형님 댁으로 갔다. 할아버지 할머니 유골은 뒷자리에, 아버지 유골은 조수석에 모셨다. 나는 조금 떨어진 거처로 바로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총각 때부터 오래 사셨던 동네와 집을 돌아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주 천천히 차를 몰면서 옆에 모신 아버지 유골을 향해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 이제 아버지 사셨던 집 쪽으로 갑니다. 25년 만이시지요. 그동안 많이 바뀌었습니다.” 나는 갑자기 어떤 생각에 눈물을 왈칵 쏟았다.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간절히 지니고 있던 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꿈. 내 수명이 일 년 단축되더라도 단 하루 아버지와 대화를 했으면 했던 꿈. 그 꿈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아버지는 25년 만에 햇빛을 보셨고 나는 아버지와 만 하루를 지낼 수 있었다. 그 하루 대부분 시간 내내 나는 소리죽여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드렸다. 어쩌면 아버지께서 응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불가능하리라 생각되었던 내 버킷 리스트 중 하나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나는 어릴 적부터 꿈이 많았다. 젊은 시절을 비교적 어렵게 보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던 것 같다. 지금 나는 그 어려움들은 ‘위장된 축복’이었고 그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때그때 내 처지에서는 달성하기 어려워 보였던 많은 꿈이 이루어진 것에 또한 감사한다.
그래서 버킷 리스트에 새로운 한 줄을 추가했다. 나는 감사할 줄 알고, 물러설 때를 아는 공직자가 되고 싶다. 몇 해 전 개인 싸이월드 홈페이지에 글을 쓴 적이 있다. 스스로 공직생활에서 물러나야 할 때에 대한 경구(警句)의 글이었다.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또는 스스로 비전이 없어질 때. 일에 대한 열정을 느끼지 못하고 문득 무사안일에 빠지자는 유혹에 굴할 때. 문제를 알면서도 침묵할 때. 문제의 해결방안을 엉뚱한 곳에서 찾는 무능력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노안(老眼)처럼 느끼게 될 때. 잘못된 정책을 국민을 위한 것인 줄 알고 고집하는 확신범이란 생각이 들 때.
언제든 공직을 그만두면 나는 인생의 새 장(章)을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 진정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고 그 일을 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제는 오랫동안 가졌던 ‘아버지와의 대화’의 꿈을 거꾸로 가져본다. 두 아들의 아버지로서 자식들과 철든 남자 대 남자로서 대화하고 싶다는 소망을 내 버킷 리스트의 맨 윗줄에 올린다. 나는 누구였고 무슨 꿈을 갖고 있었는지 이야기하고 싶다. 또 두 아들과 인생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아버지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두 아들과 나누고 싶다.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와는 하지 못했던 뜨거운 포옹을 이야기 끝자락마다 나누고 싶다. 아, 돌아가신 아버지도 어쩐지 그 대화의 장(場) 어디에선가 나타나실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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