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년 하위 팀을 2년 만에 미국 최고의 미식축구팀으로 만든 감독이 있다.
- 그는 감독 재임기간에 74%라는 놀라운 승률과 다섯 번에 걸친 슈퍼볼 우승을 기록하며 미식축구의 역사를 새로 썼다.
- 사후 40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미국 최고의 스포츠 지도자로 꼽히는 고(故) 빈스 롬바르디 그린베이 패커스 감독이다. 승리를 위한 무서운 집념과 철저한 준비, 선수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능력을 통해 놀라운 성과를 낸 그는 청교도적인 생활을 한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 미국인들이 열광하는 슈퍼볼 게임의 우승 트로피 이름이 바로 ‘롬바르디컵’이다.
제43회 슈퍼볼 최우수선수로 뽑힌 피츠버그 스틸러스의 와이드 리시버 샌토니오 홈스가 빈스 롬바르디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고 있다.
특히 흥행이나 경제적 파급 효과의 관점에서 보면 NFL의 인기가 압도적이다. 월드시리즈 7차전, 월드컵 축구 결승전 등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스포츠 경기가 무수히 많지만 여러 이벤트 중에도 단일 경기 중 최대의 파급력을 지닌 경기, 중계권료가 가장 비싼 경기가 바로 미식축구계의 왕중왕을 가리는 ‘슈퍼볼(Super Bowl)’이다.
매년 2월 첫째 주에 열리는 슈퍼볼 기간에는 미국 전체가 들썩인다. 대통령을 비롯한 유명 정치인, 유명 가수 등이 경기장을 찾으며 끊임없이 슈퍼볼 관련 언급을 내놓는다. 평균 시청자도 1억명에 달한다. 그 많은 사람이 지켜보기에 광고 단가도 무척 비싸다. 광고 한 편당 평균 단가는 280만~300만달러다. 1초당 광고 단가가 1억원이 넘는 셈이다.
입장권이라고 다를 리 없다. 가장 싼 좌석이 600달러(약 70만원), 프리미엄석은 9000달러(약 1000만원)다. 그런데도 표를 구하지 못해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른다. 암표는 적게는 서너 배, 많게는 수십 배 가격에 거래된다.
시청자가 소비하는 돈도 만만치 않다. 우선 먹어치우는 음식량이 어마어마하다. 이날 하루에만 추수감사절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음식이 미국인의 입으로 들어간다. 전미소매협회(NRF)에 따르면 지난 2월 2011년 슈퍼볼 경기가 열린 기간에 미국인이 소비한 금액은 총 101억달러(약 11조원)였다. 지난해 미국인들이 핼러윈데이에 쓴 58억달러보다 두 배가량 많은 액수다.
이처럼 대단한 슈퍼볼 우승팀에 주어지는 트로피의 이름은 무엇일까. 바로 ‘빈스 롬바르디 트로피’다. 고(故) 빈스 롬바르디(Vince Lombardi·1913~70)는 슈퍼볼이 처음 열린 1967년부터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 그린베이 패커스 팀의 감독이다. 그는 슈퍼볼이 시작되자마자 2년간 우승을 차지한 것을 비롯해 총 5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또 감독 재임기간 74%라는 놀라운 승률을 기록하며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우승 트로피의 명칭에 그의 이름이 붙은 이유다.
스포츠 천국인 미국에서는 명망 있는 지도자가 무수히 많이 배출됐다. 우수한 지도자와 관련된 서적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성공한 스포츠 지도자는 잭 웰치 전 GE 회장 등 성공한 경영인 못지않게 존경받고 많은 돈을 버는 게 미국 사회다.
하지만 그 많은 지도자 중에 롬바르디처럼 우승 트로피에 자신의 이름이 달린 감독은 없다. 미국인들이 롬바르디를 최고 지도자로 손꼽고 있다는 증거다. 그는 아직도 미국 스포츠 사상 가장 우수한 지도자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대부분 1위를 차지한다. 롬바르디가 프로팀 감독으로 활동한 기간이 총 10년여에 불과하다는 점, 그가 죽은 지 무려 40년이 지났다는 점을 감안할 때 흥미로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과연 미국인들이 이토록 열렬히 그를 추앙하는 이유가 뭘까. 그 리더십의 본질을 탐구해보자.
왜 미식축구와 슈퍼볼이 미국을 상징하는가
롬바르디 감독에 대한 추모 열기를 이해하려면 우선 미식축구와 슈퍼볼이 왜 미국에서 그토록 인기가 있는지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지리적으로 광범위한 면적과 3억명의 거대한 인구를 지닌 나라다. 각 주는 완전히 다른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자연환경과 풍습, 법규와 제도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3억명의 국민 또한 다양한 인종적,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미국 사회는 건국 초기부터 개인의 자유와 독립성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강조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각 개인에게 공동체 의식을 부여하고, 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소속감을 심어주는 일은 매우 어렵고 중요한 과제다. 국가 존속의 근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에서 바로 이 사회 통합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는 요인이 스포츠다. 미국 프로 스포츠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산업으로 발전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단순한 문화 상품이 아니라 미국 사회 제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야구와 미식축구는 모두 미국을 대표하는 스포츠다. 특히 미식축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 6개월이 넘는 기간 매일 경기를 하는 미국 프로야구(MLB)는 미국인에게 생활의 일부나 다름없다. 반면 매년 9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매주 일요일에만 경기를 하는 미식 프로축구(NFL)는 세계에서 오직 미국인만 즐기는 미국인만의 특별한 축제다. 즉 야구가 매일 먹는 ‘밥’이라면 미식축구는 명절에 먹는 ‘명절 음식’에 비유할 수 있다. 역사와 저변은 야구가 훨씬 깊고 넓지만 흥행성과 스타성은 미식축구가 앞선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미식축구는 미국 내에서 이미 1970년대부터 야구를 제치고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이 역시 단순히 운동에 대한 선호도의 변화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 변화의 과정은 미국 사회 구조의 변동과 새로운 정체성의 등장을 의미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운동은 단연 야구였다. 특히 야구는 미국의 아버지와 아들 간 남성적 유대 관계를 상징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공을 던지고 받으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친밀한 부자 관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미식축구의 인기가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2010년 여론조사기관 해리스 인터랙티브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가장 선호하는 스포츠로 미식축구를 꼽은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31%였다. 야구는 17%에 불과했다. 25년 전인 1985년에는 이 비율이 각각 24%와 23%로 별 차이가 없었다. 왜 최근 몇 십 년간 야구의 인기는 떨어지고 미식축구의 인기만 급상승했을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TV 보급과 여가 문화의 변화다. 1960년대를 지나면서 미국 가정의 텔레비전 보급률이 급격히 높아졌다. 야구는 정해진 시간이 없이 경기가 끝날 때까지 지속되고, 진행 속도가 느리며, 텔레비전 화면으로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어려운 경기다. 게다가 야구 시즌인 여름은 가족들이 집보다는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 시청자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반면 미식축구는 짧은 시간에 ‘화끈한’모습을 빠른 전개로 보여줄 수 있어 텔레비전 중계에 적합했다. 게다가 미식축구 기간이 사람들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가을과 겨울이어서 더욱 안성맞춤이었다. 미식축구 기간인 매년 9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는 일요일 낮에 집에서 미식축구 경기만 종일 시청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카우치(Couch) 족이다. 카우치는 몸을 비스듬히 기댈 수 있는 소파를 말한다. 주말에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 칩을 먹으며 뒹굴뒹굴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둘째, 강력한 남성성의 구현이다. 야구는 비가 오거나 날씨가 나쁘면 경기를 미루기도 하고 중단하기도 하지만, 미식축구는 그런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선수들은 빗속에서도, 눈 속에서도, 진흙탕에서도 뒹굴었다. 서부 개척의 역사를 지닌 미국은 육체노동에 큰 의미를 부여해왔다. 바로 강력한 남성성의 구현이다. 그러나 산업화와 더불어 남성의 정체성은 위기에 직면했다. 기업의 위계적 조직구조는 남성성의 핵심인 개별성과 독립성도 위협하기 시작했다. 즉 미식축구 같은 운동 경기는 사그러드는 남성성을 확인시키는 수단이다.
이런 연유로 미식축구의 인기는 날로 높아졌고, 슈퍼볼은 사실상 미국의 비공식적인 명절로 자리 잡았다. 보통 슈퍼볼은 미국 남부, 즉 겨울에도 따뜻한 플로리다나 텍사스에서 주로 열린다. 미국인들은 단 하루 열리는 슈퍼볼 경기를 보기 위해 아예 며칠 휴가를 내고 가족끼리 놀러가는 일을 즐긴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슈퍼볼에 진출했건 안 했건 별 관계가 없이 따뜻한 휴양지에서 슈퍼볼 결승전을 열심히 시청한다.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나 보스턴 레스삭스와 같은 전국구 팀이 붙어야 시청률이 잘 나온다는 식의 걱정을 하는 메이저리그와는 접근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이날을 위해 많은 사람이 텔레비전과 가구를 구입한다. 추수감사절 못지않은 명절인 셈이다. 광고비가 비싼 만큼, 기업들은 이 행사를 위한 텔레비전 광고를 별도로 제작한다. 광고는 흔히 경기의 절반이 끝난 하프타임(halftime)에 집중적으로 쏟아진다. 보통 프로 미식축구 경기의 중간 휴식 시간은 15분이지만, 슈퍼볼은 그 두 배인 30분이다. 광고를 조금이라도 더 넣기 위해서다.
롬바르디 감독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이 NFL에서 전설적 지도자로 이름을 남긴 롬바르디 감독은 과연 누구인가. 그는 1913년 뉴욕 브루클린의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5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당시 그의 가정을 지배했던 건 엄격한 가톨릭 문화였다. 일요일에는 반드시 미사에 참석해야 했고, 성당에 다녀온 후에는 대가족이 모두 모여 식사를 했다. 롬바르디는 어릴 때 성 마크 성당에서 복사(服事·미사를 집전하는 사제의 시중을 드는 소년)로도 활동했다. 이는 그가 훗날 구도자에 가까운 스포츠 리더가 되어 선수들에게도 영적인 힘과 믿음을 강조한 것과 무관치 않다.
1933년 그는 뉴욕 브롱스에 있는 포드햄 대학에 축구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다. 청소년기에 다녔던 다른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포드햄 대학 역시 로마 가톨릭 교단의 예수회 소속 학교였다. 당시 수비수였던 롬바르디의 체격은 신장 5피트8인치(176.8㎝), 몸무게는 180파운드(약 81㎏)로 미식축구 선수치고는 체격이 작은 편이었다. 게다가 3학년 때는 경기를 하다 치아 몇 개가 부러질 정도로 큰 부상을 입어 선수로는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1937년 대학을 졸업한 롬바르디 앞에 닥친 건 대공황의 후폭풍이었다. 미국 경제 전체가 휘청거리고 있던 시절이라 스타 선수도 아닌 그가 일자리를 얻는 건 쉽지 않았다. 미국 사회의 지배 계급인 앵글로색슨 혈통이 아니라는 점도 걸림돌이었다. 결국 그는 대학 졸업 후 2년을 쉬어야 했다.
1939년 그는 마침내 일자리를 구했다. 뉴욕 맨해튼의 허드슨 강 건너편에 있는 뉴저지 주 잉글우드의 성 세실리아 고등학교의 보조 코치 자리였다. 여자친구였던 마리 플래니츠와 결혼해 가정도 꾸렸다. 당시 성 세실리아 고등학교의 감독은 포드햄 대학 시절의 동문이자 쿼터백으로 활동했던 앤디 파우로 그가 롬바르디에게 일자리를 제안했다. 롬바르디는 미식축구 외에 학생들에게 라틴어, 화학, 물리학 등도 가르쳤다. 1947년에는 모교인 포드햄 대학에서 잠시 미식축구 및 농구 코치로 활동했다.
롬바르디는 1948년 미국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에 부임했다. 그가 맡은 역할은 공격진 담당 코치였다. 웨스트포인트에서의 경험은 성장기에 접한 가톨릭 문화 못지않게 지도자 롬바르디의 리더십 구축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당시 웨스트포인트의 미식축구 팀 감독은 레드 블라익 대령이었다. 롬바르디는 엄격한 훈련과 규율, 질서정연함, 명예를 중시하는 군인들의 지도 방침에 완전히 매료됐다.
1954년 롬바르디 감독은 드디어 프로팀의 지도자로 부임한다. 뉴욕 자이언츠의 공격 담당 코치 자리였다. 하지만 여전히 감독(head coach)은 아니었다. 그는 뉴욕 자이언츠 코치 재직 시절 노트르담대학 등 몇몇 대학의 감독 자리에 계속 지원했으나 신통치 않았다.
그린베이 패커스에서의 기적
몇 년을 더 기다린 끝에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1959년 2월 무려 48세의 나이에 그는 처음 감독으로 취임한다. 부임한 팀은 위스콘신주에 위치한 그린베이 패커스(Green Bay Packers)였다. 팀 이름에 ‘포장(pack)’에 관한 명칭이 붙은 건 창단 당시 구단주가 통조림 회사를 운영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뉴욕, 뉴저지 인근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는 롬바르디였지만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중서부의 한적한 시골로 가는 것을 마다할 상황이 아니었다.
1919년 창단한 그린베이 패커스는 창단 후 위스콘신의 소도시인 그린베이에서 한 번도 연고지를 바꾼 적이 없는 자부심 강한 팀이다. 게다가 시민이 주주여서 성적에 관계없이 항상 열성적인 팬을 보유하고 있었다. 영하 20℃의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활기차게 경기하는 팀으로도 유명했다. NFL은 아메리칸 리그와 내셔널 리그로 나누어 있던 시절이었고 그린베이는 내셔널 리그에 소속돼 있었다.
1959년 초 그린베이 패커스의 상황은 그야말로 암담했다. 그린베이는 1958년 시즌을 1승 10패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마쳤다. 승률 10%의 팀에 소속되어 있으니 팀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당시 팀원들은 실력도, 자신감도 부족했다. 그러나 빈스 롬바르디는 부임하자마자 이 3류 팀을 챔피언 팀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패커스 선수들은 그의 호언장담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선수로도, 지도자로도 경력이 시원찮은 이가 감독으로 와서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망상을 떠벌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곧 달라졌다. 롬바르디는 1959년 시즌에 7승5패를 기록하며 그린베이 패커스의 승률을 60%로 끌어올렸다. 꼴찌 팀을 승률 60%의 팀으로 바꿔놓자 미식축구계의 시선도 확 달라졌다. 초보 감독은 그해의 감독상에 이름을 올렸다.
뉴올리언스를 창단 후 첫 슈퍼볼 정상으로 이끈 쿼터백 드루 브리스가 우승컵인 ‘롬바르디컵’을 치켜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당시 공격형 가드로 활동했던 게일 길링햄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잘못된 점은 있기 마련이고, 녹화 필름을 보면서 감독에게 혼나는 일도 많았다. 어떨 때는 말 그대로 비난 일색이었다. 때로는 감독의 지적이 정말 가혹하게 느껴졌다”고 술회했다. 당시 그가 선수들에게 가장 자주 했던 말이 “우리는 쉬지 않고 완벽을 추구해야 한다. 어쩌면 완벽을 달성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계속 완벽을 추구하다보면 다른 사람보다 적어도 월등해질 수는 있다”였다. 이 말은 그의 어록으로 남았다.
무서운 노력과 연습을 통해 꼴찌 팀 선수들은 점차 자신감을 쌓기 시작했다. 팀은 갈수록 승승장구했다. 1961년과 1962년 그린베이 패커스는 연속으로 내셔널 리그 챔피언에 올랐다. 롬바르디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1962년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한 뒤에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그를 불러 다시 육군으로 돌아와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롬바르디는 이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1967년 통합 NFL이 출범했다. 그린베이 패커스는 댈러스 카우보이와 첫 슈퍼볼 패권을 다투게 됐다. 그해 12월31일 그린베이의 홈구장에서 열린 경기는 영하 20℃를 넘나드는 강추위 속에서 진행됐다. 게임 종료를 16초를 남기고 그린베이는 17-14로 3점을 뒤지고 있었다. 그린베이는 엔드라인을 2야드 남긴 상태에서 마지막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린베이 선수들은 동점을 가능하게 하는 필드골을 넣어 연장 승부를 노리는 대신 터치다운을 성공시킴으로써 21-14로 승리했다. 마지막의 극적인 역전승은 그린베이 패커스와 롬바르디의 명성을 한껏 드높였다.
예상치 못한 죽음
롬바르디는 1968년 그린베이 패커스 팀의 단장(general manager)으로 승진했다. 감독직은 오랫동안 그의 밑에서 코치로 활동했던 필 벵슨에게 물려줬다. 하지만 벵슨이 감독이 된 후 그린베이 패커스의 성적은 급락했다. 슈퍼볼은커녕 양대 지구 우승 팀과 나머지 성적 좋은 2팀이 진출하는 플레이오프 진출에도 실패했다.
실망한 그는 1969년 워싱턴 레드스킨스 팀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린베이 패커스에 처음 부임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 팀 역시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롬바르디의 지도력은 여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그는 한쪽 귀가 먼 젊은 선수 래리 브라운을 러닝백으로 기용했다. 그는 브라운에게 청력을 높여주는 보조 장치 기구를 착용할 것을 권유했고, 그에게 자신감과 동기를 불어넣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브라운의 기량은 쑥쑥 성장했고 그는 곧 팀을 좌우할 스타 선수가 됐다.
그가 워싱턴 레드스킨스의 부활을 이끌려는 찰나 불행이 찾아왔다. 1970년 6월 그는 결장암을 선고받고 워싱턴 조지타운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사실 그는 1967년 초부터 소화불량 등으로 고생했다. 하지만 검진을 받으라는 의사의 권유를 계속 무시하다 탈이 났다. 입원했을 때는 이미 암이 온몸으로 퍼진 상태였고 회생이 불가능한 말기라는 판정이 내려졌다.
미국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닉슨 대통령은 직접 전화를 걸어 “미국 전체가 당신의 뒤에 있다. 반드시 포기하지 말고 병과 싸우라”고 격려했다. 하지만 그의 병세는 급속도로 나빠졌다. 결국 그는 입원 3개월 만인 1970년 9월3일 57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답게 그가 숨을 거두기 전 사제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자리했다. 롬바르디는 신부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다만 인생에서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해 후회가 남습니다.” 참으로 그다운 말이 아닐 수 없다.
나흘 뒤 뉴욕 맨해튼의 성 패트릭 대성당에서 장례식이 열렸다. 테렌스 쿠크 추기경이 직접 추도사를 낭독했고 NFL 커미셔너인 피트 로젤도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린베이 패커스, 워싱턴 레드스킨스, 뉴욕 자이언츠 팀의 선수와 관계자 외에도 1500명의 시민이 그의 장례 행렬을 따르는 바람에 5번가(Fifth Avenue)의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 그는 부모가 묻힌 뉴저지 주 미들타운 타운십 공동묘지에 영원히 잠들었다.
롬바르디 리더십의 키워드
① 청교도적인 삶과 윤리 의식
롬바르디는 팀의 승리와 관련 없는 일체의 것을 거부한 채 그 자신부터 청교도적인 생활을 했다. 스포츠 리더라기보다는 구도자에 가까운 삶이었다. 새벽같이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했고 휴일에도 쉬는 법을 몰랐다. 다른 운동이나 취미 활동도 없었다. 그가 뉴욕 자이언츠에서 코치로 활동할 때 감독이었던 짐 리 하웰은 롬바르디를 이렇게 평가했다. “모든 선수와 코치들이 집으로 귀가한 뒤에도 방 하나에는 항상 불이 켜져 있었다. 바로 롬바르디의 방이었다.”
미식축구 경기를 피 튀기는 전투처럼 묘사한 영화가 있다. ‘7월 4일생’‘플래툰’ 등 선 굵은 정치 영화를 만든 올리버 스톤 감독의 ‘애니 기븐 선데이’다. 이 영화에서 명배우 알 파치노가 분한 디마토 감독의 롤 모델이 바로 롬바르디다.
알 파치노는 마지막 시합을 앞둔 선수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한다. “인생과 풋볼이란 게임에선 겉으로는 작게만 보이는 1인치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어떤 종류의 싸움이건 죽을 각오를 한 자만이 그 1인치를 찾아낸다. 내 소원은 그 1인치를 찾다 죽는 것이다. 그게 바로 삶이다.” 롬바르디가 직접 말한 듯한 대사다.
롬바르디는 자신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선수들이 운동이 아닌 다른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경기장 안에서 모든 것을 쏟아 붓고 남은 것이 단 하나도 없어야 한다고 선수들을 독려했다. 그는 훈련 때 빈둥거리던 선수를 이렇게 나무랐다. “연습할 때 꾀를 부리면 너는 시합에서도 꾀를 부릴 것이다. 시합에서 꾀를 부리면 앞으로 살아가면서도 꾀를 부릴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걸 용납할 수 없다.”
그에게 성공이란 돈과 명예,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쇼맨십과 같은 개념이 아니었다. 희생, 극기, 겸손, 완벽하게 절제된 의지 등의 다른 말이었다.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변변한 선수 및 지도자 경험도 없이 만 50세가 다 돼서야 감독직을 맡은 그가 승리와 성공을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리 만무했다. 그가 “리더십은 영적인 소양에 기초한다. 남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바로 리더십”이라고 강조한 이유다.
② 철저한 연습과 준비
롬바르디는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을 실천한 지도자였다. 그는 연습한다고 반드시 완벽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연습을 했을 때만이 완벽하게 된다고 강하게 믿었다. 연습에서 실수를 저지르는 선수는 시합 때 더 큰 실수를 저지를 수 있으므로 완벽한 연습을 통해 이를 미리 차단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부단한 연습을 하려는 선수들의 의지를 갈망(desire)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선수 선발과 기용에도 이 원칙을 엄격히 지켰다. 롬바르디의 표현이다. “나는 50%의 능력과 100%의 갈망을 가진 선수를 원한다. 100%의 갈망을 가진 선수는 매일 연습을 할 것이고, 그의 능력에 맞는 체계를 세울 수 있다. 하지만 100%의 능력과 50%의 갈망을 지닌 선수는 어느 날 밖에 나가 딴청을 피울 수 있다. 그 자신 뿐 아니라 팀의 모든 체계를 와해시킬 수 있다.”
롬바르디가 연습을 얼마나 강조했는지, 그의 선수들은 오히려 경기하는 날을 더 편하게 느꼈다. 그린베이 패커스 선수들은 종종 “경기가 있는 일요일이 일주일 중 가장 편한 날”이라고 했다. 매일 18시간의 연습을 하고, 라커룸에서 잠을 자는 날도 많으니 차라리 경기장에 나가는 날 덜 피곤했던 것이다.
물론 롬바르디는 선수들의 연습 동선과 계획을 미리 철저히 준비했다. 그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준비하지 않는 것은 실패를 준비하는 것과 같다”라는 말을 철저히 신봉했다.
코치를 선발할 때도 철저한 준비 자세가 된 사람을 선호했다. 코치 면접 때 그는 코치들을 갓 미식축구를 배우려는 어린 학생처럼 다뤘다. 선수가 달리면서 상대의 패스를 가로채는 방법 등에 관한 것까지 시시콜콜 묻는 감독이 바로 롬바르디였다. 그의 밑에서 코치 생활을 했던 레드 코크런은 면접 당시 일화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가 어찌나 세세한 것까지 묻는지 미식축구교실 입단 시험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③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능력
롬바르디는 뛰어난 커뮤니케이터이기도 했다. 선수들을 혹독하게 몰아붙였지만 결코 선수들에게 “이건 내 방식이니까 무조건 따라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상세한 설명과 따뜻한 격려를 잊지 않았다.
그린베이 패커스의 공격수였던 제리 크레이머와의 일화다. 한여름에 떠난 전지훈련에서 선수들은 무더위와 싸우느라 녹초가 됐다. 90분간의 강도 높은 훈련을 치른 후 크레이머가 오프사이드 점프에서 약간의 실수를 범했다. 롬바르디는 불같이 화를 냈다. “대학 선수의 한계는 5분, 고등학생은 3분, 유치원생은 30초다. 그런데 너는 그것보다 못하다. 어디서 프로 선수가 그토록 어이없는 실수를 범하나?”
연습 후 라커룸에서 크레이머는 혼자 고민에 빠졌다. 이때 롬바르디가 다가와 말한다. “언젠가 자네는 미국 최고의 선수가 될 거야. 점프 실수를 만회할 방법을 찾아보게”라고. 크레이머는 “롬바르디에게 그 말을 들은 이후 내 목표는 최고의 선수가 됐다. 그 방법에 매진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삶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모든 선수가 다 이해할 수 있도록 천천히, 반복적으로 지도했다. 특히 그의 노트에는 다른 감독의 노트 글보다 훨씬 단순하고 짧은 글들만 적혀 있었다. 경기장에서도 결코 선수들에게 여러 가지를 주문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작은 사항만을 철저히 익힐 것을 요구했다. 만약 한 선수라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경기 중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롬바르디는 미식축구에서 승리하기 위해 결코 어렵고 복잡한 전술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는 상대방보다 블로킹과 태클만 잘하면 누구든 이길 수 있다고 늘 강조했다. “단순 명료한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얘기해 누구나 확실하게 이해하게끔 만들라”는 것이 롬바르디 식 커뮤니케이션의 요체다.
④ 인생의 교본 같은 인격
롬바르디는 리더십은 곧 인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지도자가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느냐는 그 자신의 품성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리더십에 관한 롬바르디의 이런 철학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엄격한 종교 교육과 웨스트포인트의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능력은 빌려올 수도, 흉내 낼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의 인격을 빌려오거나 흉내 낼 수는 없다. 리더가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뛰어난 능력과 전략적 의사결정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 자체의 됨됨이, 즉 인격이다.
그는 선수들에게 지식을 전달해주는 지도자가 되기보다는 인생 자체의 교본이 되는 지도자가 되길 원했다. 본보기(Modeling)의 효과가 극대화되어 나타날 수 있는 조직이 바로 스포츠 팀과 군대다. 코치나 장교가 없을 때도 노장 선수와 하사관이 리더의 역할을 대신해 그 팀과 그 부대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조직이 훌륭한 조직이다. 수직적 위계질서가 엄격한 조직에서 상급자의 말이 위력을 발휘하려면 능력보다 인격이 우선해야 한다고 롬바르디는 굳게 믿었다.
스포츠에서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인생의 승리를 위해 거짓을 추구하고, 거짓을 좇는다. 50년 전 활동했던 롬바르디가 아직도 미국인의 우상으로 굳건히 살아남아 있는 이유는 그가 단순히 승리만을 좇는 지도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걸어간 정도(正道), 강력한 윤리의식, 절제된 성품이 이 부박한 세상에서 여전히 유효한 가치이기 때문에 그를 추앙하는 것이다. 너무 케케묵고 도덕책 같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진실이란 원래 고루한 것이기 때문이다.
‘스포츠 리더와 성공’(제임스 J 오닐 저, 2005, 지식의 날개)
‘나도 성공하고 싶다’(빈스 롬바르디 2세 저, 2006, 원북스)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 미국, 미국문화 읽기’(강인규 저, 2008, 인물과 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