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호

‘그놈의 情’때문에

  • 입력2009-07-07 15: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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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그 내부의 파괴적 요소들을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다고 느껴 자기 자신의 생명을 저버리는 수가 있다. 죽음으로 파괴적 요소들을 떨쳐버림으로써 살아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의식과 당혹감을 갖게 만든다. 그는 순화되고 이상화된 자신의 이미지가 남아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죽은 뒤에는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다시 살아남으리라는 믿음, 즉 일종의 사후재생(死後再生)의 의식이다(알프레드 알바레즈의 ‘자살의 연구’에서).

    그랬을까?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하며 재생을 꿈꾸었을까?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그의 간결한 유서에서 사후재생의 의식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나로 말미암은 고통’과 ‘여생의 짐’, 그리고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는 건강’의 파괴적 요소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초월과 해원(解寃)의 당부로 구원되고 ‘운명과 오래된 생각’으로 종결될 뿐이다. 그러나 그는 재생했다. 최소한 500만 조문객의 기억 속에 살아남았다. 사람들은 “미안하다”고 했다. “기억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 놀라운 감성의 물결로도 당혹감을 온전히 씻어내기는 어렵다. 불과 1년 반 전만 해도 “모든 잘못은 노무현 탓”이라던 사람들이, 그래서 500만표라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이명박 대통령을 탄생시키고 한나라당에 몰표를 주었던 사람들이, 단지 그의 충격적인 죽음으로 변한 것인가? ‘노무현의 가치’를 그가 죽고 나서야 발견한 것인가? 아니면 한국적 정서인 망자(亡者)에 대한 집단적 애도의 표출인가?



    그것에 대한 해석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 내내 현안(懸案)이 될 것이다.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는 고인의 뜻대로 이번 비극을 화해와 통합의 계기로 삼자는 슬로건은 노제(路祭)의 만장 아래 초라했다. 우파-좌파, 보수-진보의 이분법적 대립구도에서는 그 어떤 화해와 통합의 메시지도 소통되지 못한다는 것을 재확인했을 뿐이다. 그 불신과 차단의 벽은 청와대와 봉하마을 간의 거리보다 길며, 부엉이바위의 높이보다 높을지 모른다.

    서울대 교수(124명)의 발표 이후 봇물이 터지듯 쏟아져 나온 시국선언문들은 한결같이 ‘민주주의의 후퇴’를 우려하고 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언론의 자유와 독립성이 훼손되고, 사법부의 권위와 독립성에 대한 국민적 신뢰에 상처를 입혔다는 등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인식은 이들의 우려와는 전혀 다르다. 그는 제 22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식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6·10 민주항쟁 2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누구도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확고하게 뿌리내렸다.”

    다만 민주주의의 제도적 외형적 틀은 갖춰져 있지만 운용과 의식은 아직도 미흡한 부분이 많으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법을 어기고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도 우리가 애써 이룩한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확고하게 뿌린내린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후퇴’ 사이의 간극은 한강에서 낙동강까지의 거리보다 멀다. 문제는 오늘의 한국사회에 이 간극을 메워줄 권력의 리더십도, 정치의 조정 능력도, 지성의 권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시민사회, 종교계, 문화계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분열되어 있다. 이럴 경우 양비론(兩非論)은 무난하나 무책임하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집권세력, 그리고 정권을 뒷받침하는 이른바 우파세력에 더 무거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먼저 이 대통령은 여권에서조차 지적하는 소통의 부재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모두들 밀어붙이기식 국정운영을 비판하고 염려하는데 “이럴 때일수록 중심을 잡고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식으로는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 이 말 저 말에 귀 기울이고, 비판을 위한 비판에 휘둘리며 시간을 낭비하다가 언제 경제를 살리느냐는 선의(善意)의 인식이라 할지라도 곤란하다. ‘노무현 신드롬’을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에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좌파적 성향의 영향 정도로 파악한다면 비록 경제를 살린다 해도 국민통합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경제만 살리면 모든 게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시대착오적이다.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겠지만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몰려든 조문 행렬은 경제 외의 가치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헤아려야 한다. 그것을 굳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복원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면 우리식대로 ‘정(情)의 복원’으로 생각하면 된다.

    노무현은 실패했지만 정의 이미지는 남았다. 그가 권위주의를 없앤다며 대통령의 권위마저 상실하고, 좌파 신자유주의로 좌충우돌했으며, 지방분권의 이상을 좇다 전국의 땅값만 올리는 등의 실수를 저질렀다 해도 많은 사람은 그가 보였던 진정성, 즉 정은 믿었다고 본다. 욕하고 조롱하고 비난했지만 ‘그 놈의 정’ 때문에 그 많은 사람이 조문 행렬에 참여한 게 아니겠는가.

    그 점에서 ‘용산 참사’를 이토록 오랫동안 방치하고 있는 정치적 무감각은 놀라울 지경이다. 법대로만을 외친다면 인간이 존재할 수 없다.‘메마른 법치’는 지도자의 편협성을 부각시킬 수 있다. 법치 이전에 덕치(德治)는 여전히 진리다.

    4대 강 살리기 사업의 경우, 대통령은 진작 대운하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어야 한다. “국민이 원한다면 안 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할 게 아니라 “대운하는 절대 안 한다”고 못을 박아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대운하로 의심받을 만한 소지가 적지 않은 터에 대통령이 분명하게 매듭을 지어주지 않으면 국정에 대한 불신만 높아질 것이다.

    보(洑)로 강물을 막으면 그 안의 물이 썩는 것은 당연지사 아닌가. 따라서 4대 강 살리기가 아니라 ‘4대 강 죽이기’라는 등의 비판에도 설득력 있는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이는 실무적 홍보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청계천 복원도 처음에는 반대하는 소리가 많았지만 다 해놓고 나니까 다들 잘했다고 하더라, 4대 강 살리기가 끝나면 대운하 하자고 여론이 바뀔 것이다.’ 행여 대통령이 이런 생각이라면 위험하다. 4대 강과 청계천은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더욱이 경부대운하는 환경은 둘째 치더라도 경제성부터 떨어진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의 의견이지 않은가. 미련을 둘 이유가 없다고 본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정치적 타살’이라고 주장할 증거는 없다. 노 전 대통령의 오랜 측근인 문재인 전 대통령비서실장도 “정치보복에 의한 타살로까지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그러나 “수사와 관련된 여러 상황이 노 전 대통령 스스로 목숨을 버리도록 몰아간 측면은 분명히 있으니 타살적 요소는 있다”고 말했다.

    검찰은 물론 ‘타살적 요소’를 전면 부인한다. 그러나 민주당은 국세청이 재계 순위 600위권에 머무는 태광실업에 대한 특별세무조사를 벌이고 지난해 11월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이 그 결과를 이 대통령에게 직보했다는 점을 의심한다. 한 전 청장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을 검찰에 고발한 뒤 미국 유학을 떠났다. 국세청-검찰로 이어진 ‘표적수사설’이 나오는 이유는 한 전 국세청장의 ‘기획출국설’과 맞닿아 있다.

    그런데도 검찰은 ‘박연차 로비’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한씨가 귀국해도 불러 조사할 계획이 없다고 했다. 일반의 상식으로는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 결론이다. 두 개의 설, 즉 기획출국설과 표적수사설을 말끔하게 해소시키지 못한다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타살설도 해소되지 못할 것이다.

    때로 드러난 사실보다 개연성 있는 심증이 더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타살설도 그런 경우다. 이는 근원적으로 전 정권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지워버리려는 듯한 우리 정치문화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더구나 이른바 좌파정권에서 우파정권으로 바뀐 지난 1년 반은 ‘좌파 청소기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무현은 좌파세력의 상징적 존재였다. 그러니 그가 ‘최종 타깃’이었고 그 결과 죽음으로까지 내몰렸으리라.” 이런 정도의 분석은 요즘 시정(市井)의 어느 주막 술청에서도 어렵잖게 들을 수 있다. 부패 혐의는 사라지고 정치적 죽음의 심증만 떠돌고 있다.

    아무튼 현재 상황에서 이 대통령이 직접 사죄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수 있다. 그러나 간접적이라도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일반의 의혹 어린 심증을 해소시켜야 한다. 그 효과적인 방법이 국정기조의 변화요, 국정쇄신이다. 이제 효율성만 따지는 밀어붙이기식 국정으로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남은 3년 반의 임기 내내 ‘죽은 노무현’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대통령의 불행이자 나라의 불행일 수 있다.

    ‘그놈의 情’때문에
    전진우

    1949년 서울출생

    동아방송 기자

    월간 신동아 편집장

    동아일보 논설실장·대기자

    現 경원대·한성대 초빙교수

    저서: 작품집 ‘하얀 행렬’ ‘서울의 땀’, 칼럼집 ‘역사에 대한 예의’


    얼마 전 한 우파논객은 “좌파가 진보냐?”고 했다. 한국의 ‘수준 낮은 좌파’를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검은 백조’처럼 형용모순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꼭 맞는 것도 아니다. 그의 말이 더욱 높은 설득력을 가지려면 ‘우파는 보수인가? 우파는 무엇을, 어떤 가치를 보수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얘기했어야 했다. 전문적 지식이나 어려운 개념 설명을 떠나 이를테면 예의염치 같은 우리 사회가 지켜나가야 할 보편적 가치를 준거로 말했으면 더욱 좋았겠다. 비록 이념적으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전직 대통령을 ‘조폭 두목’에 비유하는 수준의 우파는 진정한 보수인가? 그들이 지키려는 가치는 과연 무엇인가? 등에 대해 자문했어야 한다. ‘수준 높은 우파’가 늘어나야 보수정권도 성공할 수 있다. 오래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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