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호

MB와 孫은 잘 알 것이다

  • 입력2011-06-22 14: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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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중반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계열사 사장단회의에서 자신의 말에 반대하거나 토를 다는 임원에게 “당신, 해봤어?”라고 물었다고 한다. “해본 건 아닙니다”라는 답이 돌아오면 ‘왕 회장’의 질책이 떨어졌다고 한다. “해보지도 않고 뭘 알아!”

    이명박 대통령은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즐겨 하는데, 그것이 현대 시절 ‘왕 회장’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경험을 중시하는 실용주의자의 측면에서 본다면 세간의 구설에 오를 것까지는 없을 듯도 싶다. 실용주의는 경험에 의한 유용성(有用性)을 중요시한다. 실제 해봐서 좋으면 그것이 진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실용주의에는 높은 도덕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경험에 의한 유용성이 공공성(公共性)에 부합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실용주의가 국가철학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는 청교도적인 엄격한 도덕성이 바탕이 되었다.

    문제는 이 대통령의 실용주의가 효율성에 치우쳐 공공성을 훼손하지 않았느냐는 데 있다. 공공성을 잃은 실용주의는 무원칙한 편의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절차의 정당성이 결여된 편의주의로는 도덕적 권위를 담보할 수 없다. 도덕적 권위를 잃은 국가리더십은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 이윤추구를 최대 목표로 하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와 국가지도자가 달라야 하고,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정부는 2008년 미국발(發) 경제위기를 나름대로 선방(善防)했고 세계로부터 경제위기에서 빨리 벗어난 성공사례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성공의 과실은 대부분 수출대기업과 소득상위 20%의 부자들에게 돌아갔다. 빈부 양극화는 심화되었다. 부자 감세와 고환율, 저금리의 친(親)대기업 정책이 낳은 결과라는 비판이다.

    이 정부 출범 후 3년간 10대 재벌그룹 계열사는 212개(52.2%)나 늘어났고, 이들은 기업형 슈퍼마켓에서부터 외식업, 와인 판매, 문방구, 떡볶이 장사에까지 진출하면서 중소기업은 물론 자영업자와 골목상권을 몰락시켰다. 이 대통령이 강조하는 대기업-중소기업 간 상생이 무색한 결과다. 이래 가지고서야 정부여당이 ‘부자를 위한 정부’ ‘부자를 위한 정당’이라는 비난을 모면할 수 있겠는가. 이래서야 어찌 공정사회를 얘기할 수 있겠는가.



    민심은 돌아섰고 그 결과는 ‘천당 아래 분당’에서의 패배로 나타났다. 내년 총선을 앞둔 한나라당은 화들짝 놀랐고, 소장파와 친박(親朴)계는 탈(脫)청와대를 외쳤다.

    신임 황우여 원내대표는 그 기세를 타고 ‘반값 등록금’을 민심수습책으로 내놓았으나 ‘덜컥 수’였다. 그의 제안은 대번에 잊혔던 MB의 ‘반값 등록금’ 공약을 되살렸다. 내연(內燃)하고 있던 대학가의 등록금 투쟁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이 대통령은 반값 등록금을 공약으로 제시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선후보 당시 구성한 경제 살리기 특위 11개 분과위원회 중 하나가 ‘등록금 반값 인하위원회’였다. 직접 말하지 않았으니 공약한 게 아니라는 주장은 옹색하다.

    당내 분란도 일었다. 친이(親李) 구주류 측은 ‘정치적 포퓰리즘’이라고 공격했다. 그러자 신주류 측은 반값이 아니라 등록금 부담 완화이고 체감할 만한 수준으로 인하하자는 뜻이라고 말을 돌렸다. 그러나 그런 말장난은 ‘미친 등록금’으로 고통 받는 대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분노만 키울 뿐이다.

    한 해 전체 대학등록금은 14조원. 그것을 반값으로 깎아주려면 단순계산으로는 7조원이 필요하지만 기존의 장학금을 제하는 등 다른 여러 계산으로는 3조∼5조원이 든다고 한다. 문제는 재원인데 명목이 무엇이든 국민 세금으로 지원할 수밖에 없다. 민주당은 추가 감세할 돈(6조원)이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설령 추가감세방침을 철회한다고 해도 없던 6조원이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다. 기존의 국가재정에서 지출해야 한다.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재정지출의 우선순위를 변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돈 쓸 곳은 널려 있다. 민주당이 증세를 하지 않고 추진하겠다는 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보육은 또 무슨 재원으로 마련할 것인가. 재원대책 없는 복지에 솔깃할 만큼 국민은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민주당이 지난 1월 내놓았던 반값 등록금의 추진 원칙은 저소득층 하위 50%를 대상으로 반값 등록금제를 실시하고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단계적 접근’이었다. 손학규 대표가 촛불집회에 참석해 이런 당의 방침을 설명하자 대학생들은 “도대체 한나라당과 다른 게 뭐냐?”고 항의했다고 한다. 당장 2학기 등록금이 발등의 불인데 무슨 한가한 소리냐는 것이었다. 손 대표는 다음날 내년 신학기부터 반값 등록금 전면 시행으로 노선을 바꿨다.

    현실에 맞지 않는 정책이라면 당연히 바꾸어야 한다. 대학생들의 절박한 처지에 공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1야당의 대표라면 적어도 당론을 통해 정책전환의 필요성을 국민에게 먼저 설명했어야 한다. 수조원의 세금이 들어갈 정책을 대학생들 항의 몇 마디에 뒤집는다면 국가를 운영할 잠재적 지도자로서 심각한 결함을 노출한 것이 아니겠는가. 중도개혁 성향의 신중한 이미지로 한나라당의 아성이던 분당에서 승리한 정치인 손학규가 당내 ‘진보 다툼’(정동영 최고위원 등은 아예 대학등록금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조바심을 내고 있다면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반값 등록금은 이념의 문제가 아닌 생활의 문제다.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비싸다는 비정상적인 등록금으로 수많은 대학생과 학부모가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생활고와 취업난으로 자살하는 대학생이 매년 300명에 달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문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떡하든 등록금 부담을 경감해야 한다. 정부와 여야 정치권, 대학과 사학재단, 고액 연봉과 65세 정년 지키기에 눈이 어두워 학생의 고통을 외면해온 대학교수 모두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대학진학률은 82%로 세계에서 유례없이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취업률은 4년제 정규대학을 나와도 50% 수준이다. 절반은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고도 오랜 시간 청년백수로 젊음을 허비해야 한다. 한 개인과 가정을 넘어 국가적인 낭비다. 수많은 젊은이의 좌절과 분노가 가져오는 사회적 손실은 숫자로 계량할 수 없다.

    반값 등록금 문제가 촛불집회로 이어지면서 백가쟁명(百家爭鳴)하듯 각종 해결책이 쏟아지고 있다. 왜 그렇게 다들 대학에 가려고 하느냐고 한탄하는 이에서부터, 기업이 대학졸업생만 뽑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라고 핏대를 세우는 이들도 있다. 부실한 사립대학을 통폐합하고 국영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이른바 스카이(SKY)의 정원을 줄여 명문대의 영향력을 축소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전문대 및 실업계고등학교의 산학(産學) 연계로 기업이 필요로 하는 맞춤형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도 하고, 대졸자와 고졸자의 임금 차이를 획기적으로 줄여나가야 한다고도 한다. 대개 몇 차례씩 들어본 얘기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가하거나 비현실적인 진단도 적지 않다. 예컨대 높은 대학진학률을 낮추어야 한다는 주장의 경우, 기성세대가 대학 안 나오면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사회를 만들어놓고 왜 기를 쓰고 대학에 가려고 하느냐고 한탄한다면 듣는 젊은이들의 감정만 상하게 할 것이다. 대졸자와 고졸자의 임금격차 축소 문제도 그렇다. 동일한 노동을 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도 줄이지 못하는 현실이다. 중장기적으로 풀어나갈 문제들이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조건 없는, 당장의 등록금 반값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과 함께 고통받고 있는 학부모들의 요구이기도 하다. 흙탕물에서 숨을 헐떡이는 물고기에게 먼 강의 맑은 물을 가져다주겠다고 하는 것은 죽으라는 소리나 진배없다. 대학등록금이 지나치게 비싸다는 데에 우리 사회가 공감한다면 단기적 해결방안부터 제시해야 한다.

    대학총장들은 정부가 대학교육에 대한 재정지원을 늘리면 점차적으로 등록금을 낮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학재단에 쌓아놓은 적립금에는 손댈 수 없다고 한다. 재단적립금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대학으로 육성하기 위해 필요하며 적립금 재원은 등록금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전국 주요 사립대 100곳이 지난해 등록금으로 거둬들인 등록금 회계 수입 중 적립금으로 돌린 돈이 8117억원에 달했다. 대학당 평균 81억여 원의 등록금이 적립금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총장들 말대로 적립금 재원이 등록금이 아니라면, 최소한 학생들을 위해 쓰지 않은 8117억원에 해당하는 등록금은 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전국 149개 4년제 사립대의 누적 적립금은 7조원에 달한다고 하는데, 이 돈의 46%가 건축 용도이고 학생을 위한 장학 적립금은 8.6%에 불과하다고 한다. 사립대 138개 학교법인 중 65%가 넘는 90곳에서 설립자의 배우자나 친인척이 이사장 총장 이사 등으로 재직 중인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2010년 기준). 감사원의 감사(그들이 제대로 감사한다는 전제하에) 결과가 나오면 그동안 쌓인 사학비리 백태가 과연 어느 정도일지 모를 일이다.

    MB와 孫은 잘 알 것이다
    부실 사립대학과 사학재단에 대한 국민 불신이 높은 상황에서 무턱대고 국민 세금으로 반값 등록금부터 만들 수는 없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반값 등록금 문제에 대해) 정부는 차분하게 시간을 갖고 진지하게 대안을 마련하라”고 했다고 마냥 시간을 끈다면 대학생들과 그 부모들, 그리고 등록금 인하에 공감하는 여론은 결코 조용해지지 않을 것이다. 6월 말 이전에 이명박 대통령과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영수회담을 갖기로 했다. 늦어도 그때까지는 ‘반값 등록금’에 대한 단기대책이 나와야 한다. 대책 없이 여름방학 두 달을 보내고 나면 가을 신학기다. 촛불이 다시 거리를 메울 것이다. 사태를 그렇게 끌고 가선 안 된다는 것은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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