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른바 명문대학을 나와 한국 최고의 직장에서 탄탄대로를 걷던 30대들이 어느날 ‘마이 웨이’를 선언했다. 남부럽지 않은 보수, 보장된 출세, 든든한 ‘바람막이’를 포기하고 그들이 택한 곳은 어찌 보면 황량한 벌판,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정글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 보물이 묻혀 있다고 믿는다. 야심만만한 모험가만이 캐낼 수 있는 탐스런 보물상자가.
6월8일 서울 여의도에 사무실을 낸 리 캐피탈 투자자문(Rhee Capital Advisors) 이남우(李南雨·38) 사장의 화려한 커리어다. 내로라하는 국내·외 대형 증권사를 2∼3년에 한번씩 옮겨다녔고, 옮길 때마다 직위는 수직상승을 거듭했다.
특히 30대 중반에 삼성그룹 계열사의 이사와 상무 자리에 앉은 것은 전문인력에 대한 파격적 인사가 종종 단행되는 삼성에서도 흔치 않은 사례다. 그런 그가 막강한 재량권과 억대 연봉, 내년 8월이면 행사할 수 있는 2만주의 스톡옵션(6월17일 현재 삼성증권 주가는 1주당 4만50원이다)을 마다하고 삼성증권을 떠났다. 역마살이 낀 것일까.
“시장이 미더워 나왔다”
“이 바닥에서 직장을 옮기는 계기는 두 가집니다. 돈과 권한이죠. 제 경우는 후자였습니다. 권한이 커질수록 많은 걸 배울 수 있거든요. 1991년 말에 대우에서 자딘플레밍으로 간 것은 그 이듬해 국내 증시의 대외 개방을 앞두고 외국 투자자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후 아시아 시장으로 시야를 넓히기 위해 JP모건에서 한국과 일본, 대만 리서치를 담당했습니다. 소니 등의 애널리스트를 하면서 좋은 공부를 많이 했어요. 페레그린으로 옮긴 것은 처음으로 관리자 역할-리서치 헤드-을 맡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다양한 경험을 쌓다가 40대가 되면 국내 회사로 옮길 계획이었는데, 예상보다 일찍 기회가 왔어요. 삼성에서 리서치와 국제영업 전권을 주겠다고 제의한 겁니다. 백지(白紙)에다 그림을 그려볼 수 있겠구나 싶어서 흔쾌히 받아들였죠.”
그가 이끈 삼성증권 리서치센터 애널리스트들은 여러 기관이 선정하는 분야별 베스트 애널리스트 랭킹에서 최상위권을 휩쓸며 성가를 높였다. 이사장 자신도 홍콩의 금융전문지 ‘아시아머니’, 미국의 기관투자가 모임 ‘인스티튜셔널 인베스터’ 등에서 ‘한국의 베스트 애널리스트’로 선정되는 등 외국인 투자자들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애널리스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혀 왔다. “시장에 대해 가장 건실하고 이론적인 코멘트를 한다”는 게 그 근거였다.
그런 그가 삼성이라는 튼튼한 울타리를 뛰어넘어 들판으로 나선 것은 ‘시장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다.
“우리 기업들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어요. 최근 수년간 꾸준히 질적 개선을 이뤘고, 이게 가시화하면서 각종 지표가 빠른 속도로 호전되고 있습니다. 몇몇 우량기업은 경쟁력과 시장점유율에서 일본 기업들을 따돌렸어요. 외국 투자자들도 깜짝 놀랄 정돕니다. 우리 외평채의 가산금리는 일본의 국영기업체인 NTT도코모 수준까지 좁혀졌어요. 더욱이 이머징 마켓 중 동유럽과 중남미 시장의 유동성이 떨어지면서 아시아로 자금이 집중되고 있는데, 아시아에선 한국 외엔 대안이 없습니다. 국내 기관들도 신규자금 유입속도가 빨라지고 있어 주식편입비율을 높여갈 수밖에 없고요.
이렇게 역동적인 상황이라면 대기업 품안에 안주하기보다 직접 시장에 뛰어들어 리스크 테이킹(risk taking)을 해볼 만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내년이면 제 나이가 우리 나이로 마흔이라 지금 저지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어요.”
사정이 이런데도 주가가 시원스레 뻗어오르지 못하는 것은 정부의 과도한 규제, 기업의 투명성과 지배구조 문제 등에도 일부 원인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국내 투자자들이 국내 기업의 실력을 너무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사장은 이를 ‘자학적인 자기평가’라고 비꼬았다.
리 캐피탈 투자자문의 자산운용 형태는 헤지펀드로 가는 중간단계로 볼 수 있다. 기관과 개인 자산을 가리지 않고 주식과 채권은 물론 부동산, 외환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기법을 동원해 고수익을 추구하는 본격적인 헤지펀드는 국내에서 아직 허용되지 않고 있다. 우리 자본시장의 기반이 취약해 헤지펀드가 시장을 교란할 우려가 있기 때문.
이사장은 저평가된 우량 주식 위주로만 투자하고, 리스크 헤징 수단으로는 주로 해외 선물이나 ADR, GDR 등 해외 주식예탁증서를 이용할 계획이다. 국내에선 헤징 수단에 대한 제약이 많기 때문이다. 투자종목 선별을 위해 대우증권 통신장비담당 애널리스트 출신의 허성일 상무, 모건스탠리 애널리스트 출신의 황기두 이사, 신영증권 반도체담당 애널리스트를 지낸 이승우 부장 등을 영입했고, 이사장과 대우투자자문 출신의 박진현 상무가 펀드매니저를 맡는다.
이사장이 잡은 목표수익률은 연 20∼25%. 이는 전세계 헤지펀드의 평균 수익률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사장은 “향후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 기업수익 증가율, 그리고 주가재평가 전망치 등을 감안하면 결코 무리한 목표가 아니다”라고 자신했다.
리 캐피탈 투자자문은 지분의 3분의 2 정도를 대표이사와 자산운용 전문인력이 보유하는 독특한 지배구조를 갖고 있다. 이는 주요 주주인 사장과 자산운용 인력이 파트너십 형태로 회사를 경영함으로써 고객의 장기적, 안정적인 수익이 회사의 발전과 직결되도록 하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이사장의 명함에는 직함이 ‘Managing Partner’라고 찍혀 있다.
이남우 사장은 굿모닝증권의 이근모 전무와 함께 국내 증권가의 대표적인 ‘해외통’(본인은 ‘기지촌파’라고 부른다)으로 꼽힌다. 국내·외에서 10년 넘게 리서치 활동을 하며 교류한 외국 투자자들이 굵직굵직한 헤지펀드나 뮤추얼펀드를 운용하고 있어 이들을 중심으로 구축된 해외 네트워크가 탄탄하다. 초등학교 시절 부친이 한국은행 런던지점에서 근무해 2년 반 동안 본고장에서 ‘조기 영어교육’을 받은 데다 미국에서 MBA를 했기 때문에 영어도 유창하다.
삼성증권 시절 이사장은 1년에 3∼4개월을 해외에 머물며 이들 인맥과 정보를 교환하고 거액 투자자들과 안면을 텄다. 외국의 ‘큰손’들은 웬만큼 얼굴을 익힌 사이가 아니면 돈을 맡기지 않는다. 직접 만나서 사람 됨됨이를 살피는 것은 물론, 과거에 같은 직장에서 근무한 사람을 수소문해 뒷조사까지 한다. 대신 한번 눈에 들면 확실하게 믿고 돈을 맡긴다.
이사장이 회사를 차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평소 이런 관계를 유지해온 미국, 영국, 홍콩 등지의 펀드매니저들이 투자의사를 밝혀왔다고 한다. 이사장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외국인 자금을 본격적으로 유치하고 자문하는 것은 물론, 이들로부터 입수된 해외의 고급 정보를 자산 운용을 위해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이사장은 새벽 5시30분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블룸버그 통신과 CNBC TV를 통해 해외 증시 동향을 체크한 후 7시에 아침 미팅을 갖고 오후 3시까지 국내 증시를 지켜본다. 장이 끝나면 투자자를 면담하거나 기업을 방문하고 돌아와 다음날 조간신문 가판을 챙기는 것까지가 공식적인 일과다. 하지만 일과 후에도 한국과 낮밤이 반대인 해외 투자자들과 전화나 e메일을 주고받느라 늦은 밤까지 잠을 설칠 때가 많다. 신문 5개와 잡지 6개를 읽고 각종 인터넷 정보를 검색하는 데 하루 평균 6시간을 투입한다.
이사장은 하루 종일 쉼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에 치이고 묻힌다. 이쯤되면 정보의 양이 중요한 게 아니다. 무엇을 골라들고 무엇을 버리느냐가 관건이다. 이건 보통 노하우로 되는 일이 아니다.
“단기적인 것, 작은 것은 보지 않으려 합니다. 시황도 크게 봐야지 작은 변화에 연연해하면 안돼요. 펀더멘털을 챙겨야 합니다. 지난 5월 삼성전자 주가가 하락세로 접어들기 전에 분명한 징조가 있었어요. 대만 증시에서 대기업들이 대규모 증자를 했거든요. 그런데 국내에선 여기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어요. 아시아 주요 시장의 수급상황이 삼성전자 주가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데도 말입니다. 증자를 할 때 기관투자자들이 주식을 대량 매입하면 10∼20%씩 할인해주기 때문에 이들은 삼성전자 주식을 팔아 대만 주식을 청약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건 눈을 조금만 크게 떠도 빤히 보여요. 외국 투자자들은 한국 증시에 대해 특별히 많이 아는 것은 없지만, 이처럼 입체적으로 시장을 보기 때문에 돈을 버는 겁니다.”
그가 영자경제지 가운데 ‘파이낸셜타임스’는 하루종일 끼고 다니며 읽으면서 ‘월스트리트저널’은 가능하면 읽지 않으려 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다. 전자가 짧은 시간 안에 사실을 입체적으로 분석하는 능력이 뛰어난 데 비해 후자는 기사들이 어딘가 모르게 평면적이고 따로 노는 느낌이라는 것.
한 달 100회 기업방문
이남우 사장이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은 기업방문이다. 재무제표나 뉴스에 나오지 않는 부분을 꼼꼼하게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리 캐피탈 투자자문 애널리스트들은 한 달에 100회 이상 기업을 방문할 계획이다. 이사장도 하루에 최소한 한 곳씩은 돌아볼 생각.
“몇가지 체크포인트가 있어요. 건물이나 사무실 치장이 얼마나 화려한지, CEO의 여비서가 미모인지 아닌지, PC나 집기의 레이아웃 상태는 어떤지, 사원들의 표정은 어떤지 등을 보면 그 회사가 얼마나 실속있는 기업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개는 회사의 덩치에 비해 건물이 초라할수록 내실있는 기업이죠. 모델같은 여비서를 채용한 코스닥 기업들은 나중에 한번씩 사고를 치더군요. 굴지의 우량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전자나 포스코 같은 회사는 10년 전에 갔을 때도 사무실 레이아웃이 질서정연했습니다. 기업의 사정을 제대로 알려면 이처럼 애널리스트의 ‘바텀→업(bottom→up)’ 방식으로 접근하는 게 펀드매니저의 ‘톱→다운(top→down)’ 방식보다 효과적일 때가 많아요.”
외환위기 이후 외국계 대형 컨설팅 회사들이 국내 민간·공공부문 컨설팅 시장을 장악한 현실에서 두 살배기 ‘순수 토종’ 인터젠 컨설팅 그룹은 여러 모로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인터젠은 기업의 성장전략과 구조조정, 경영진단, 신사업 구상, 해외진출 지원, M&A 전략, 온라인·오프라인 기업의 특성에 맞는 e비즈니스 추진전략, 공공부문의 정책평가와 새로운 기술·정보·정책 이슈 등에 대한 리서치를 주업무로 삼는다.
또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사업을 계획하거나 창업후 투자유치를 희망하는 국내 기업과, 투자처를 찾는 국내·외 투자자를 효과적으로 연계해주는 것도 인터젠의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다. 이 과정에서 인터젠은 기업에게 투자유치를 위한 전략을 수립해주고 투자 소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등 컨설팅을 지원한다. 기존의 벤처 인큐베이팅 업체가 투자나 컨설팅 중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반면 인터젠은 두 가지 핵심 서비스를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전략이다.
인터젠은 30여 명의 석·박사급 컨설턴트를 확보하고 있다. 이들은 전문분야에서 10여 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중견 컨설턴트들로서 국내 주요 연구기관을 비롯, 아서 앤더슨, 언스트 앤 영, 딜로이트, 오라클 등 외국계 컨설팅업체와 포스데이타, 대우정보시스템, 대림정보시스템 등 SI업체 출신들이 주축을 이룬다.
인터젠 박용찬(朴墉燦·41) 사장은 “외국계 컨설팅 회사들이 국내 주요 기업에 대한 경영자문은 물론, 정부기관과 공공기관의 조직개편 컨설팅까지 독점하다시피 하는 것은 매우 우려스럽다”고 지적한다.
“그들의 전문적인 노하우를 필요로 하는 부분도 있지만, 컨설팅 과정에서 공공부문의 핵심 정보들이 그들의 데이터베이스로 속속 유입됨으로써 우리의 행정, 경제, 사회의 기본틀이 종속화될 가능성이 있어요. 그들이 진정 우리의 국익을 대변할 만한 중립적인 솔루션을 제시할 수 있을 지도 의문입니다.”
산자부 전자상거래과 초대 과장
서울대 기계공학과 79학번인 박사장은 4학년 때인 1982년, 공학도 출신으로는 드물게 행정고시(26회) 재경부문에 합격했다. 부전공으로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경제학과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는데, 당시 경제학과 학생들 중 상당수가 행정고시를 준비중이었던 것. 박사장도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시험을 봤는데, 그해 처음으로 따로 뽑은 재경부문 합격자 15명 중에 들게 됐다.
그는 상공부 근무를 희망했지만, 고시 성적이 중간인데다 병역 미필이라 과학기술부 기술정책실로 발령받았다. 그후 3년쯤 근무하니 공부 욕심이 생겨 영국문화원 유학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영국 서섹스대 대학원에서 산업기술정책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 대학은 기술과 경영의 결합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곳으로 유명한데, 마침 당시 영국에선 전통적 제조업인 자동차산업의 구조조정이 이뤄지고 IT 영역이 부상하면서 산업구도가 전환되는 시점이었다. 덕분에 국가와 기업의 혁신전략이 구체화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귀국 후에는 과기부로 복귀했다가 상공부 통상협력관실로 옮겨갔다.
“슈퍼 301조를 둘러싸고 한·미간 통상협정이 난항을 겪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자동차, 담배, 농산물, 통신, 지적재산권 등 가장 골치아픈 분야의 협상실무를 맡았죠. 한 해 10여 차례씩 해외출장을 다니며 기술과 산업의 관점에서 다양한 체험을 했습니다.”
1995년 서기관으로 승진, 산업자원부 기술정책국에서 기술 인프라 플랫폼 구축업무를 담당했고, 이듬해엔 산자부 샌프란시스코 무역관에 파견돼 실리콘밸리에 3년간 머물며 캘리포니아 주정부와 실리콘밸리의 산업투자, 무역협력 사례 등에 대해 연구했다.
버클리대 정책대학원과 스탠포드대 아·태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적(籍)을 두고 미국의 IT산업과 실리콘밸리의 메커니즘을 주요 테마로 한 각종 연구활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1999년 산자부 유통서비스산업과장으로 돌아온 박사장은 당시 유통과 물류분야에 불어닥친 IT화 바람을 일반 산업분야로 부작용없이 확산시키기 위해 발품을 들였다.
협의를 거듭한 끝에 이 부문 업무를 전담할 기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2000년 1월 산자부에 전자상거래과를 신설했다. 박사장은 초대 과장 자리에 앉았지만, 석 달 후인 그해 4월 공직에서 물러났다.
“전자상거래 주무과의 틀과 기본활동계획을 만들고 나니 제가 할 일은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가 서른아홉 살이었는데, 대여섯 살 연상인 고시 동기들이 막막한 심정으로 쉰 고개를 바라보고 있는 걸 보니 저도 불안해지더군요. 40대도 이렇게 흘려보내면 영 돌이킬 수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마침 대기업에서 신사업을 같이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도 있고 해서 사표를 냈는데, 한달 반쯤 쉬면서 고민해보니 지난 17년간 쌓은 공직 경험과 인적 네트워크를 밑천 삼아 제가 직접 전략과 정책을 테마로 한 전문기업을 만드는 것도 괜찮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박사장은 외국계 대형 컨설팅 회사와 차별성을 기하기 위해 ‘국내 산업의 특성을 가장 잘 이해하는 전문연구업체’를 표방했다. 국내 기업이나 컨설팅 회사 근무경험이 있는 30대 중반∼40대 초반의 중견 전문인력을 영입해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들과 같은 독립체제를 형성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고객기업에게 끈끈한 ‘밀착 컨설팅’을 한다. 인터젠은 2000년 5월 출범한 이래 50여건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전문성을 인정받아 왔는데, 민간부문과 공공부문이 각각 절반씩을 차지한다.
설립 3년차에 불과한 인터젠은 브랜드 인지도에서 열세일 수밖에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케이스에 따라 외국계 컨설팅 회사와 제휴하거나 컨소시엄을 형성해 프로젝트를 공동 수행하기도 한다.
물론 이들과 손잡으려면 이들에게 없거나 부족한 지식과 노하우를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박사장은 “머리를 빌려주고 글을 팔아서 수십억원의 매출을 올려야 하기 때문에 인터젠 임직원들 사이에는 한시도 자기계발에 소홀해선 안된다는 긴장감이 감돈다”고 말한다.
“직원들에게 ‘자신이 가진 시간과 역량의 70%를 고객 컨설팅에 투입하고, 나머지 30%는 공부에 쏟아부으라’고 합니다. 워낙 다양한 기업과 기술을 다루기 때문에 변화의 흐름에 뒤처지면 살아남을 수 없어요. 그래서 매주 서너 시간씩 할애해 우리 자신을 위한 지식 축적 세미나를 갖습니다. 제가 촌음을 아껴가며 대학(이화여대 경영학과)에 강의를 나가고 신문에 정기적으로 경제·경영서 서평을 기고하는 것도 의무감이 없으면 나태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 김범수 | NHN 사장 PC방 구석에서 키운 게임 왕국의 꿈
NHN주식회사 김범수(金範洙·36) 사장의 공식 직함은 ‘공동대표’다. 그가 만든 온라인 게임업체 한게임은 2000년 4월 인터넷 포털업체 네이버와 합병, ‘NHN(Next Human Network)’이라는 이름으로 거듭났고, 그는 네이버 창업자인 이해진 사장과 함께 NHN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NHN이 제공하는 한게임은 1999년 12월 서비스를 개시한 지 2년 반 만에 실명회원 1300만명, 하루 이용자 200만명, 동시 접속자 17만명을 확보한 세계 최대 규모의 온라인 게임 사이트다. 많은 인터넷 업체들이 수익모델을 찾지 못해 사라져갔지만, 한게임은 워낙 이용자가 많다보니 이들을 기반으로 포털 사이트에 게임 솔루션을 팔거나 인터넷 광고를 유치해 초기부터 짭짤한 수익을 올려 왔다.
특히 지난해 3월 유료 회원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매출이 급증, 연말에는 240억원의 매출과 6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올해 목표는 매출 600억원에 영업이익 240억원. 닷컴기업 중에서는 성장률과 영업이익률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 다른 회사에서 개발한 게임을 한게임 사이트에 띄워주고 수익을 나눠갖는 퍼블리싱, 게임을 하기 위해 접속한 사람을 전자쇼핑 등으로 유도하는 비즈니스도 전망이 밝다.
김사장은 서울대 산업공학과(86학번)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전공분야는 ‘신뢰성 공학’. 제품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확률적으로 접근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모뎀을 연결할 때 전화를 몇번 걸어야 한번 접속이 이뤄지는지를 이론적으로 따져보는 학문이다. 덕분에 컴퓨터, 인간공학, 경제, 경영 등의 다양한 분야를 깊지는 않더라도 넓게 훑어보는 기회를 가졌다.
당구, 고스톱, 포커, 바둑, 장기 같은 잡기를 두루 좋아하는 자신의 취향에도 잘 맞았다. 결과적으로 이런 취향과 체험이 ‘게임왕국’을 쌓아올린 밑바탕이 됐다.
그는 ‘컴퓨터를 만지며 먹고 사는 직장’을 원했다. 그래서 삼성SDS에 입사했다. 병역특례혜택도 있었다. 양식편집기 ‘폼 에디터’와 호암미술관 소장품 화상관리시스템 등을 개발하면서 희망했던 대로 컴퓨터 하나는 원없이 만져봤다. 1996년에는 PC통신 유니텔 사업 지원팀으로 차출돼 전용 에뮬레이터(접속 프로그램)인 ‘유니윈’ 설계와 개발작업에 투입됐다.
“처음엔 겨우 7명으로 출발했는데,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어요. ‘PC통신’ ‘게시판’ ‘동호회’ 같은 말뜻도 잘 모르던 시절이었죠. 당시 PC통신의 선두주자이던 천리안만 해도 명령어를 일일이 입력해야 하는 텍스트 방식의 에뮬레이터였는데, 저희는 국내 최초로 명령어 대신 마우스를 클릭해 접속하는 윈도기반의 에뮬레이터 개발에 들어갔습니다. 화면의 그림을 그리는 일부터 관련기반 구축, 솔루션 개발까지 다 해봤어요.
몸은 고달팠지만, 컴퓨터에 관한 것은 삼성SDS에서 다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몇백만명을 상대하는 첨단 시스템을 개발해보는 건 프로그래머에게 흔치 않은 기회거든요.”
삼성SDS는 한때 ‘벤처사관학교’라 불렸다. 외환위기 이후 삼성SDS를 떠난 수십명의 임직원이 벤처기업 사장으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김범수 과장’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인터넷의 가능성에 주목했습니다. 처음엔 필요한 정보만 찾고 나갔지만, 다음엔 약간의 콘텐츠를 이용하느라 잠시 머물게 되고, 여기서 더 나아가면 사람과 사람이 연결돼 뭔가를 함께 할 수 있는 곳이 되죠. 사람과 컴퓨터가 만나서 하는 일엔 끝이 있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하는 일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터넷과 게임을 결합하는 비즈니스를 떠올렸어요. 더구나 당시는 PC통신으로 게임에 접속하던 단계에서 웹 시대로 가는 중간지점이었기 때문에 사업성도 있다고 봤지요. 하지만 대기업 조직에선 이런 아이디어가 먹혀들지 않더군요.”
그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회사를 나왔다. 뜻을 같이 한 대학 선후배 5명과 오피스텔을 빌려 모였지만 막막했다. 큰 흐름은 잡고 있었지만 남들에게 보여줄 만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은 없었다. 네트워크 비용도 큰 부담이었고, 당장 수익을 낼 게 없으니 난감했다. 결국 3명이 도중하차했다.
김사장은 우선은 입에 풀칠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에 PC방 자리를 알아보러 다녔다. 한양대 부근에 목이 꽤 좋은 점포를 찾아냈는데, 임대료와 시설비를 합쳐 2억4000만원이 필요했다. 손에 쥔 돈은 500만원. 이 돈으로 가계약을 한 뒤 친척들에게 닥치는 대로 돈을 꾸고 부친의 명예퇴직금을 빌려 어렵사리 잔금을 치렀다.
“PC방 한쪽 구석에 ‘개발실’을 만들고는 낮엔 손님 상대하고 밤에는 프로그램 개발에 매달렸습니다. 밤엔 집사람이 가게를 봤죠. PC방이 막 뜨기 시작하던 때라 장사가 아주 잘 됐습니다. 또한 저희에게 필요해서 만든 PC방 관리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어 내친 김에 이 프로그램을 깔아주고 PC 설치까지 해주면서 전국에 30여 개의 PC방을 만들어줬습니다. PC방을 차린지 석 달 만에 ‘한게임 커뮤니케이션’을 설립할 수 있었어요. 물론 그때만 해도 PC방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던 만큼 PC방은 그후 1년 반 동안 영업을 계속했습니다.”
9개월 만에 세계 1위
한게임은 처음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문을 열기가 무섭게 회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서비스 개시 9개월 만에 페이지뷰 기준으로 전세계 게임 사이트 부문 1위에 올랐다. 지난해 유료 서비스를 시작한 것도 워낙 회원수가 많아 전체 회원 중 1%만 유료 회원으로 가입해도 연간 120억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됐다. 이만한 규모의 회원을 기반으로 한 인터넷 비즈니스 모델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김사장은 한게임의 급성장 요인을 ‘환경’과 ‘아이템’에서 찾는다.
“초고속통신망이 광범위하게 깔린 국내 인터넷 환경이 일등공신입니다. 엔터테인먼트 사이트는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저 즐기기 위해 들어갑니다. 게임 하나 하려고 힘들게 모뎀 접속하고 사람 찾아 헤매진 않죠.
또 하나의 요인은 대중적인 아이템입니다. 한게임에서 즐길 수 있는 게임은 스타크래프트나 리니지처럼 복잡하지 않아요. 바둑, 고스톱, 포커, 당구, 윷놀이, 빙고게임 등 대부분 일반인에게 친숙한 것들이죠. 저희는 남녀노소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패밀리 게임’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오프라인에서 수십, 수백년 간 많은 사람이 즐겨온 ‘놀이’이기 때문에 온라인 공간으로 가져가도 먹히는 겁니다. 요즘 주부나 노인 대상 컴퓨터학원에선 초보자들을 한게임에 접속하게 해놓고 ‘인터넷에선 이렇게 재미있는 것도 할 수 있다’며 흥미를 유발시킨다고 합니다.”
한게임은 아이템의 강점을 무기로 해외 진출도 본격화할 태세. 이미 일본에 자회사를 설립했고, 미국, 중국, 대만, 유럽 등지로도 영역을 넓혀갈 계획이다. 한게임은 게임강국 일본에서 인터넷 게임 분야 3위에 올라 있다.
“나라마다 문화가 다르지만, 그 진입장벽이 가장 낮은 게 게임입니다. 가령 바둑은 오프라인에선 한국, 일본, 중국, 대만 정도만 즐겼지만, 이를 온라인화하면 세계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엔 한국에서 서비스하는 아이템 그대로 통용될 수 있는 것도 많아요. 그래서 한게임의 초기 사업모델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김사장은 놀면서 일하는 CEO다. 소문난 게임광답게 집에서는 초등학교 3학년, 1학년인 아이들과 게임을 하며 토닥거리고, 회사에서도 직원들과 틈만 나면 일전을 벌인다. 그것도 그냥 즐기는 게 아니라 늘 갖가지 새로운 룰과 복선을 깔고 즐긴다. 그렇게 놀면서 떠올린 아이디어들이 게임 프로그램에 반영돼 흥미를 더한다. 일과 놀이에 경계가 없는 삶을 산다는 건 흔치 않은 행운이다.
지난해 11월, 세계 유수의 컨설팅 기업인 보스턴 컨설팅 그룹(BCG) 한국지사의 박영훈(朴永勳·36)·나윤호(36)·이형돈(36) 컨설턴트가 나란히 사표를 내고 한 벤처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울대 85학번 동창생인 세 사람은 각각 마케팅·기획, 금융,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전문가로 인정받던 ‘드림팀’.
‘셀빅’ 브랜드 PDA(개인휴대단말기) 메이커로 잘 알려진 제이텔이 이들의 새 직장이었다. 박씨는 사장, 나씨는 재무담당 부사장, 이씨는 사업개발담당 부사장으로 영입됐다. 삼성전자 PDA팀장 출신의 엔지니어로 제이텔을 설립하고 셀빅 시리즈를 직접 개발한 신동훈(39) 전 사장은 이사진으로 물러났다.
1997년 설립된 제이텔은 1998년 독자적인 운영체계(OS)를 개발, 국내 첫 PDA를 출시한 이래 국내 PDA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고수해 왔다. 주요 사업분야는 PDA 개발 및 판매, 스마트폰 및 IMT-2000 관련기술 개발, OS 라이센싱, 모바일 SI 등. 지난해 11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 예상 매출액은 300억원이다.
“직급은 몇단계나 뛰어올랐지만 연봉은 절반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PDA가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꿔놓을지를 잘 알기에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박영훈 사장은 어느새 ‘PDA 전도사’로 변해 있었다.
“요즘은 ‘PDA+휴대전화+인터넷’의 복합기능에 초점을 맞춥니다. 컴퓨터, 전화, MP3, 디지털 카메라, 전자책, 게임기, 알람시계 등이 PDA 한 대에 통합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e메일을 체크하거나 적외선 포트를 이용해 정보를 주고받는 등 컴퓨터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지하철 안에서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선(線)으로부터의 자유가 가능해지는 거죠. 더구나 PDA는 컴퓨터와 달리 하드웨어에 OS가 내장돼 있기 때문에 부팅도 필요없습니다.”
그는 “PDA는 향후 한국의 전략상품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PDA의 핵심부품인 메모리 반도체와 LCD(액정표시장치)는 한국이 종주국이나 다름없는데다, 독자적인 OS와 설계·제조기술을 갖고 있어 로열티를 물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외국산 제품의 절반 가격에 제품을 출시할 수 있다고 한다.
경영·기술분야 두루 경험
서울대 경영학과와 동 대학원을 나온 박사장은 1993년 삼성물산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회사는 그가 서울대 출신이라 당연히 관리업무를 원할 것으로 여겼으나 그는 영업파트 근무를 고집했다. 영업을 해봐야 고객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시스템사업부에서 공장자동화 설비를 납품하는 게 첫 업무였고, 이후 영업, 사업기획 등을 담당했다.
당시만 해도 케이블 등에 문제가 많아 납품한 대형 컴퓨터가 작동을 멈추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면 엔지니어들과 함께 달려가 밤을 지새며 뜯어고치곤 했다. 소중한 ‘필드’ 경험이었다.
대리 시절인 1995년엔 회장 비서실로 발령받았다. 삼성은 1993∼1994년에 반도체 호황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 그러자 이건희 회장은 “자만하지 말고 차세대 제품을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전 계열사에서 차출된 10여 명의 임직원들이 인터넷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미국으로 파견됐는데, 박사장도 그 일원이었다. 인터넷 발아기였던 당시 미국의 인터넷 관련 기술과 정보를 수집, 가공해 삼성으로 보내는 게 주임무였다. 이를 합법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미국 파트너와 합작회사를 세웠는데(IBS, Inc.), 그는 이 회사에서 기술개발과 대외협상 등을 맡아 일했다.
“미국 친구들과 함께 일하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이들이 매니지먼트와 엔지니어의 자질을 겸비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엔지니어도 영업, 재무, 시장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었고, 매니지먼트도 기본적인 프로그래밍 정도는 스스로 해결하는 등 기술분야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췄더군요. 우리는 학교에서부터 문과·이과를 갈라놓고, 기업에서는 양쪽의 기능과 역할이 더욱 철저하게 구분되지 않습니까. 이 때문에 우리 같으면 두 사람이 할 일을 미국 기업에선 한 사람이 해내는 경우를 종종 봤어요. 그 때부터 ‘좌뇌는 엔지니어, 우뇌는 매니지먼트’라는 모토를 내걸고 양쪽 모두를 갖추려 노력했습니다.”
귀국한 후에는 삼성전자에서 MP3 사업을 맡았다. 사업기획에서부터 콘텐츠 확보, 제품 출시에 이르는 전과정에 관여했다. 물산에선 장사를, 전자에선 하드웨어 공부를 제대로 한 셈이다. 그는 1999년 삼성을 나와 컨설팅 회사인 부즈-앨런 앤 해밀튼으로 옮겼다.
“큰 회사라 누릴 건 많았지만 과장쯤 되니까 제 일 못지 않게 조직관리와 ‘줄서기’ 같은 업무 외적인 쪽에 신경을 써야 할 경우가 생기더군요. 제 개인적으로는 영업, 사업기획, 개발파트 등을 두루 거치며 많은 것을 배웠으니 이젠 좀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마침 컨설팅 회사에 다니던 친구들이 ‘기업을 경영인의 관점에서 총괄적으로 보는 눈을 길러준다’며 컨설팅 회사를 권했어요.”
박사장은 부즈-앨런 앤 해밀튼에서 1년반, 보스턴 컨설팅 그룹에서 1년 동안 일하며 통신, 인터넷 등 주로 IT 기업의 해외 마케팅과 구조조정 프로젝트를 맡았다. CEO의 관점에서 짧은 시간에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제한된 자원으로 해답을 찾아가는 노하우를 익혔다.
그러다 ‘이젠 웬만큼 정리가 됐다. 작은 규모의 회사에서라면 내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을 즈음 제이텔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제이텔 신동훈 전사장은 회사설립과 제품개발, 론칭까지는 끌고 왔지만,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사업전략과 마케팅, 조직개편 등을 위해서는 전문경영인 영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박사장은 올들어 기업용 PDA 시장 공략을 본격화했다. 셀빅이 15만명이 넘는 개인사용자를 확보, 일반 소비자 시장에선 확고한 입지를 다졌기 때문에 기업고객 시장으로 눈길을 돌린 것. 이를 위해 마케팅본부를 신설했고, 고객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영업본부를 경기도 분당 본사에서 서울 사무소로 옮겼다. 그는 “기업용 PDA의 활용범위는 사실상 무한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이 분야의 고속 성장을 확신했다.
“정수기 회사의 예를 들어보죠. 지금까지는 고객의 집을 방문한 애프터서비스 직원이 두터운 자료철을 뒤적여 기록을 찾거나 필터를 열어 일일이 육안으로 검사한 다음 필터를 교환하고는 ‘얼마 주시면 되겠네요’ 하는 식이었습니다.
PDA를 도입하면 사정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PDA의 바코드 스캐너로 정수기의 바코드를 읽으면 구입시점, 필터교환시기, 각종 애프터서비스 기록, 부품 상태 등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어요. 필요한 조치를 취하면 LCD창에 정확한 가격이 표시돼 신뢰도를 높여줍니다. 고객이 PDA에 장착된 신용카드 리더로 현장에서 결제할 수도 있습니다. 그후 직원이 PDA 버튼 하나만 누르면 그날 발생한 업무가 고스란히 본사 데이터베이스로 보내져 애프터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중고차 딜러들도 PDA를 도입해 업무효율을 크게 높였습니다. 지금까지는 격주간으로 발행되는 가격정보지에서 고객이 원하는 차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2주쯤 지나면 차값도 변하고, 정보지에 나온 차가 팔렸는지 안 팔렸는지도 몰라요. 조건이 안맞아 고객이 다른 차를 찾으면 같은 일을 다시 반복해야 합니다. 이런 정보가 인터넷엔 있지만, 야드에서 일하는 딜러들이 그때마다 사무실을 들락거릴 수는 없죠. 그런데 이젠 PDA LCD창에 표시된 그림을 누르기만 하면 고객이 원하는 차가 어느 야드에 있는지는 물론, 정확한 현재가격과 사고여부 등을 리얼타임으로 알 수 있습니다. PDA가 기업 문화를 확 바꾸고 있어요.”
▶ 정성호 | 유니스 앤 컴퍼니 사장 패션名家 설계하는 액세서리 마니아
‘타테오시안 런던’은 영국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액세서리 브랜드다. 최근 해외 패션가에서 다양하고 개성있는 표현력을 무기로 액세서리 시장의 주류로 부상 중인 ‘브리지 주얼리(brid ge jewelry)’의 시조 격이다.
주얼리 액세서리는 크게 파인(fine) 주얼리, 브리지 주얼리, 커스텀(custom) 주얼리로 구분한다. 파인은 금과 다이아몬드를, 브리지는 은을, 커스텀은 주철을 기본 소재로 한다. 고가의 파인 주얼리 시장은 수요층이 한정돼 있고, 커스텀은 값은 싸지만 가치가 너무 낮아 외면받으면서 그 둘 사이를 잇는 브리지 주얼리가 각광받고 있다.
요즘은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른 파인 주얼리가 브리지 주얼리의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브리지에도 금, 다이아몬드, 백금은 물론 각종 유색 원석과 진주 등이 다양하게 사용되는 추세다. 브리지는 소재나 디자인은 물론, 세부적인 장식에도 신경을 많이 써서 시선을 끄는 효과를 더했다.
유니스 앤 컴퍼니는 타테오시안의 브리지 주얼리를 독점 수입·판매하는 회사다. 지난해 3월 창업, 8월 서울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에 첫 매장을 열었고 이후 현대백화점 압구정점과 대구백화점에도 입점했다. 20대∼40대 초반의 전문직 종사자와 연예인들을 중심으로 입소문이 돌면서 올들어 매달 월 매출이 30% 이상 늘고 있다.
패션업계에는 ‘연예인이 자발적으로 사 쓰면 뜬다’는 속설이 있다. 사실이라면 이 회사는 대단히 고무적인 상황을 맞고 있다. 최근 탤런트 김하늘은 TV 드라마 ‘로망스’에 타테오시안의 하트목걸이를 걸고 나왔고, 변정수는 ‘위기의 남자’에 흰색과 검은색 보석 원석이 포도송이처럼 크게 장식된 타테오시안 반지를 끼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거침없는 사랑’의 오연수도 타테오시안 제품을 착용했다. 김하늘이 하트목걸이를 한 모습이 TV로 방영된 후 이 제품은 재고가 바닥나 수백명이 미리 돈을 입금해놓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유니스 앤 컴퍼니는 단순히 수입·판매상에 머물지 않고 나름의 시장조사에 근거한 소비자 정보와 신제품 아이디어 등을 본사에 제공하는 사업파트너로서 사실상 아시아지역 헤드쿼터 노릇까지 하고 있다. 유니스 앤 컴퍼니 정성호(鄭聖鎬·31) 사장은 “국내 브리지 주얼리 수요층이 두터운데도 시장이 제대로 형성돼 있지 않아 적은 자본과 인력으로도 마켓 리더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고 창업배경을 설명했다.
“종로 일대 금은방에서 디자인 개념없이 대량 생산한 제품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브리지 소재라도 브랜드 주얼리로 보긴 어렵죠. 브리지 주얼리의 시장 전망은 아주 밝습니다. 브리지는 파인보다 가격은 낮지만 상당히 호사를 해야 즐길 수 있거든요. 예컨대 파인의 경우 금이나 다이아몬드가 박힌 150만원짜리 목걸이가 있으면 1년 내내 그것만 하고 다녀도 됩니다. 이에 비해 브리지는 20만∼30만원이면 살 수 있지만, 색깔과 디자인, 옷과의 조화에 따라 구색이 다양하므로 여러 개를 갖춰놓게 됩니다. 패션감각이 있고 자기표현 욕구가 강한 고소득 계층을 주요 타깃으로 하는 시장이죠.”
정사장은 고려대 경영학과 90학번. 고교 때는 미대 진학을 꿈꾸며 미술공부를 했지만 보수적인 집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부친은 서울지방법원장을 지낸 변호사며, 형은 현직 판사다. 그래도 법대는 안 가겠다고 버텨 경영학과로 타협을 봤다.
진학 후 한동안 방황을 거듭했으나 마케팅 과목에 흥미를 붙이게 됐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학문이라는 데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 자신의 미술감각에 마케팅을 접목할 수 있는 패션 비즈니스 분야로 진로를 정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96년, 그는 영국계 다국적 광고회사인 오길비 앤 마더에 입사했다. 영어와 마케팅 실무를 익힐 요량이었다. 운이 따랐던지 마침 외국인 직원이 대부분인 해외 마케팅 파트에서 컨설턴트로 일하게 되어 뜻을 이룰 수 있었다. 더구나 그해 말에는 영국 본사에 파견되어 1998년 초까지 영국에 머물며 영어와 마케팅 공부에 속도를 더했다. 그는 영국에서 패션 코디네이션 과정을 수강했는데, 이때 타테오시안을 처음 접하게 된다.
귀국 후에는 지방시 한국지사에 들어가 실무책임자인 마케팅 매니저를 맡았고, 다시 해외 브랜드 수입·판매사인 아베코로 옮겨 관리자인 마케팅 디렉터로 일하며 국제 비즈니스 감각을 익혔다. 대학 때 설정한 목표대로 패션 비즈니스에서 사업을 일으키려고 주도면밀하게 커리어를 관리해갔던 것이다. 당시 한창 바람이 일던 MBA 유학도 고려했지만 생각을 고쳐먹었다. 함께 근무했던 MBA 출신의 지방시 지사장이 이렇게 만류했기 때문이다.
“MBA를 하려고 유학가는 사람은 대개 세 부류다. 영어를 못해 영어공부 하려고 가는 사람, 출세하고 싶지만 인맥이 없어 이를 커버하려고 가는 사람, 집안이 좋아 백수로 살고 싶은데 간판 하나쯤은 필요하다는 생각에 가는 사람…. 너는 영어도 잘하고, 명문대를 나왔으니 인맥도 있고, 재벌 아들도 아니니 평생 놀고 먹을 수도 없는데 왜 가겠다는 거냐.”
정사장 생각에도 이미 적성을 찾고 진로를 잡고 실무경험까지 쌓은 마당에 2년이라는 시간과 2억원이 넘는 돈을 유학비용으로 투자하기보다는 그 돈과 시간을 자신의 사업에 투자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더욱이 그 무렵 그는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었다.
“외국계 회사는 연봉도 높고 근무여건도 안정적이지만,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한 일 자체를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성과와 실적이라는 수치를 맞추는 데만 급급해 낭비적이고 불합리한 면이 많았습니다.
가령 매출과 비용 목표치를 세워놓되, 열심히 일해서 매출은 목표보다 늘리고 비용은 목표보다 줄이면 좋은 것 아닙니까. 하지만 외국계 기업에선 이걸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예요. 올해 목표를 초과 달성하면 내년 목표를 그 수준에 맞춰야 하니 부담스럽다는 거죠. 그 무렵부터 제 사업구상을 본격화했습니다.”
“저랑 사업하실래요?”
그는 몇 달 동안 외국 패션잡지와 인터넷을 뒤지며 타테오시안에 대한 시장조사를 했다. 이를 토대로 사업기획서를 작성, 타테오시안의 창업자이자 CEO인 로버트 타테오시안에게 대뜸 e메일을 보내 “한국시장을 내게 맡겨달라”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바로 다음날 타테오시안 사장이 직접 e메일로 답신을 보내왔다. “관심이 있으니 우리 회사 일본지사에 가서 디렉터를 만나보라”는 내용이었다.
정사장은 일본에 다녀온 후 수십장 분량의 마케팅 전략 기획서를 만들어 보냈다. “타테오시안은 많이 팔리긴 하지만 브랜드 캐릭터가 모호해지고 있다. ‘우리적 디자인’과 장인정신은 있으나, 좋은 제품을 만드는 데만 열중할 뿐 체계적인 마케팅이 미진하다. 만드는 사람의 생각만 쏟아부을 뿐, 소비자의 기호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고 지적하면서 구체적인 홍보·마케팅 전략을 제시했다.
이를 검토한 타테오시안 사장은 “내가 오랫동안 고심해온 부분을 당신이 해결해줬다”며 전세계 지사로 정사장의 기획서를 보냈다. 정사장의 조언에 따라 타테오시안 본사는 대대적인 CI(기업 이미지 통합) 작업에 착수했다.
타테오시안이 정사장에게 한국시장을 맡긴 것은 당연지사. 타테오시안은 세계 300여 개 도시에 1000여 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지만, 지사를 두고 영업하거나 현지 백화점과 직거래만 해왔다. 정사장의 경우처럼 수입대행사를 두고 영업권을 일임한 것은 최초의 사례다. 특히 아시아 시장은 불법 복제품 천국이라 신뢰가 웬만큼 두텁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타테오시안은 정사장에게 제품 공급가격까지 할인해주며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한국시장에선 아직 브리지 주얼리에 대한 인식이 낮고, 백화점에 입점할 경우에 커미션을 줘야 하며, 한국와 영국의 물가수준에 차이가 많다는 점 등을 배려해 세계에서 유일하게 도매가를 깎아주고 있는 것. 그래서 타테오시안 제품은 앞마당인 런던 해롯백화점보다 머나먼 이국땅 서울에서 더 싼 값에 팔린다.
정사장은 “궁극적인 목표는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 해외시장으로 진출, 패션명가(名家)를 여는 것”이라고 한다. 한국의 액세서리 가공기술은 잠재력이 뛰어나지만 브랜드 인지도가 워낙 낮고 독창적인 디자인 컨셉트가 없어 원가 수준에 팔리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 그는 “일부 수입 브랜드 제품을 국내 액세서리 제조회사에 생산 하청을 줘 토종 브랜드 개발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