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은 공정경쟁의 영역”
솔직하고 거침없는 모습에 ‘대리 만족’
“독한 술 먹는 것과 비슷한 느낌”
“‘어른’인척 하지 않고 뱉어내는 언어”
7월 26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CJ ENM에서 열린 Mnet ‘쇼미더머니8’ 제작 발표회 모습. [뉴스1]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 2000년대 드렁큰 타이거 이후 비주류로 밀려났던 힙합이 다시 대중화되기 시작한 건 ‘쇼미더머니’, ‘고등래퍼’ 같은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전파를 타면서부터다. 특히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 이후 출생)는 힙합에 열광했다. 힙합 특유의 자수성가 서사와 솔직하고 거침없는 표현이 이들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밑바닥에서 온(Came from the bottom)
힙합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 시작한다. 기획사에 들어가 연습 과정을 거치는 일반적인 가수 지망생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기성 래퍼들에게 ‘랩 레슨’을 받는 소수의 래퍼 지망생도 있지만, 대부분은 직접 가사를 쓰고 비트에 랩을 뱉으며 힙합에 입문한다.이어 ‘사운드 클라우드’ 등 음악 플랫폼에 자신의 작업물을 올려 리스너(청취자)들에게 인정받고, 마음 맞는 동료들과 ‘크루’(친분 혹은 음악적 교류 목적으로 래퍼들이 꾸리는 소그룹)로 뭉쳐 공연하며 입지를 다진다. 그러다 ‘쇼미더머니’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해 인지도를 높이면 빠르게 부와 인기를 거머쥐기도 한다.
힙합 음악에는 밑바닥에서부터 혼자 힘으로 경력을 일궈왔다는 자부심이 듬뿍 묻어난다. 랩 가사에 ‘Started from the bottom(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 ‘Came from the bottom(밑바닥에서 온)’ 같은 자수성가형 성장 서사가 흔히 등장하는 이유다. 자신의 실력으로 증명하며 성공을 이루는, 이른바 ‘랩스타’의 탄생 과정을 밀레니얼은 공정하다고 평한다.
고려대 사회학과에 재학 중인 김태현(25) 씨는 “취업하려면 학원 다니며 자격증 따고, 자기소개서도 여기저기서 첨삭 받아야 한다. 인턴 등 경력이 없으면 취업시장에서 불리하기도 하다. 힙합은 펜과 종이로 시작해 (스스로 실력을 쌓으면) 인정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공정 경쟁이 이뤄지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힙합의 자수성가 서사에서 빠질 수 없는 건 ‘돈 자랑’이다. 래퍼들은 노력으로 일군 자신의 부를 랩을 통해 과시한다. 이들은 자기만족과 자아도취를 의미하는 ‘swag(스웨그)’, 자랑하다는 뜻의 ‘flex’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적나라한 자랑을 두고 밀레니얼은 불쾌감을 느끼기보다 ‘노력의 결과’로 인정한다. 대학 입시를 준비 중인 서 모(19) 씨는 “기성세대는 돈 자랑하는 래퍼들을 따가운 시선으로 보는데, 래퍼들은 한순간에 억만장자가 된 게 아니다. 밤새워서 고민하고, 열심히 작업한 결과이기 때문에 리스펙(존경)한다”라고 말했다.
출구 없는 생존전쟁
2월 22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CJ ENM에서 열린 고교 랩 대항전 Mnet ‘고등래퍼3’ 제작발표회 모습. [뉴스1]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에 따르면 입시와 취업, 결혼 등 만성적인 고민과 불안을 달고 사는 밀레니얼에게 힙합은 하나의 출구다. “타인의 눈치를 보며 할 말 못 하고 사는 2030세대들에게 일종의 쾌감을 주고” “출구 없는 생존 전쟁을 매일 벌여야 하는 현대인에게 일상의 피로함을 날려주는 사이다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트렌드 코리아 2017’ 中)
이 때문에 밀레니얼은 힙합의 솔직함에 끌린다. 서류 전형에서 경험을 부풀리고, 면접을 위해 ‘이미지 메이킹’하는 자신과는 달리, 래퍼들은 본인의 감정과 이야기를 그대로 가사에 녹여내고 이를 무대 위에서 뱉어내기 때문이다. 바이오업체에 재직 중인 최 모(26) 씨는 대학 휴학 뒤 진로를 고민하던 시기에 힙합에 매료됐다.
“래퍼들은 자신의 얘기를 가사로 쓴다. 본인만의 스타일로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꾸민다. 주변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걸 한번 해보는 느낌이다. 나는 누구고, 어떤 가치관을 가져야 할까 고민하던 시기에 래퍼들의 솔직하고 과감한 태도가 인상적으로 보였다.”
힙합 음악을 즐기면서 취업 스트레스를 풀기도 한다. 외국계 기업 퇴사 후 조리사 자격증 취득을 준비 중인 최재영(32) 씨는 취업준비생 시기에 힙합에 푹 빠져 살았다. 그는 기업 50여 곳에 지원하며 쌓인 스트레스를 힙합을 통해 해소했다. 특히 캐나다 출신 래퍼 드레이크(Drake)의 음악을 즐겨들었단다. 영어 욕설이 난무하는 곡을 들을 때 쾌감이 짜릿했다.
최 씨는 “독한 술을 먹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며 “취업 스트레스로 욕을 막 하고 싶은데 대신해주는 것 같아 시원했다”고 말했다.
21세기의 시
강보라 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은 “‘날 것의 언어’로 표현하는 힙합은 ‘21세기의 시’”라면서 “욕설과 과격한 표현뿐 아니라, 또래 래퍼들이 자신이 처한 현실을 ‘어른인 척’하지 않고 친밀하고 일상적인 언어로 뱉어내는 데 밀레니얼이 열광하는 지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강 연구원이 부연했다.“밀레니얼은 어렸을 때부터 학교, 가정 등에서 목표 지향적으로 공부에 ‘올인’하게끔 관리 받아온 세대다. 경쟁에 대한 고질적 부담을 느껴왔다. 이런 환경에서는 손해 볼만한 발언을 기피하기 마련이다. 안전하고 여과된 말만 뱉어야 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상황에, 자신의 연약한 부분이나 단점도 솔직하게 드러내는 힙합의 특성이 맞물려 호응을 얻는 부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