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호

유럽역사기행

‘관용의 도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용감한 평민, 영리한 상인들이 몰고 온 자유의 물결

  •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입력2019-09-1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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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성결혼, 마리화나, 안락사 허용

    • 바다에서 국토를 건져내다

    • 사상 초유의 선물시장, 튤립

    • 돈과 권력에 굴하지 않은 예술가 렘브란트

    • 사상과 종교의 자유를 주장한 철학자 스피노자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전경. [백승종 제공]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전경. [백승종 제공]

    사람마다 특별히 좋아하는 나라와 도시가 있다. 나에게는 네덜란드가, 특히 암스테르담이 그렇다. 암스테르담에는 지금도 수백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운하가 유유히 흐르고 있고, 근교에서는 커다란 풍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줄기차게 돌아간다. 강가에 늘어선 풍차의 행렬은 이 나라에 대한 나의 사랑을 더욱 깊게 만든다.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402명/㎢)다. 땅도 좁고 자연조건도 평탄치 않다. 네덜란드라는 이름이 말하듯 워낙 ‘저지(低地)’라서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이 못 됐다. 번화한 암스테르담도, 스히폴공항도 당초에는 해수면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사람들은 댐을 쌓고 풍차를 돌려 바닷물을 밖으로 빼내는 작업을 통해 땅을 일궜다. 무려 국토의 4분의 1을 바다에서 건져 올린 셈이다. 

    암스테르담에 사는 친구 테오가 한 가지 흥미로운 속담을 들려줬다. “신이 만물을 창조했으나 네덜란드는 그 나라 사람들이 창조했다”라는 것이다. 과거 네덜란드는 쓸모없는 땅이란 생각에 중세기 탐욕스러운 귀족과 성직자들조차 이곳을 외면했다. 덕분에 암스테르담은 용감한 평민들의 도시가 됐다. 그들이 흘린 땀방울들이 한 뼘 한 뼘 땅으로 변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암스테르담은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인간 의지의 상징이다.
     
    암스테르담에 오자마자 나는 테오와 함께 국립해양역사박물관을 찾았다. 중앙역 근처에 위치한 이곳은 1656년 네덜란드 왕립해군의 무기 저장창고로 세워졌다. 현재는 도서관을 포함해 세계적으로 가장 큰 규모의 해양 소장품이 전시돼 있다. 박물관 앞에는 대형 범선 한 척이 정박해 있다. 18세기에 건조된 암스테르담호로, 17세기 최고 부국 대열에 올랐던 네덜란드의 번영을 상징한다. 

    네덜란드는 국가로서 출발이 다소 늦었다. 1588년 처음으로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이 성립됐다. 정치적 안정이 찾아오자 그들은 해외 진출을 서둘렀다. 암스테르담의 상인들은 동남아시아에 이르렀다. 당시 이들은 유럽 부유층을 매혹시킨 향신료 무역의 최강자였다. 17세기에는 ‘연합 동인도회사(VOC)’를 설립했다. 이어서 동남아시아와 남아프리카에 여러 개의 식민지를 건설했고, 북미 대륙에도 진출해 뉴암스테르담(현 뉴욕)을 지배 아래에 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에도 진출했다. 규슈 나가사키현의 데지마에 교역사무소를 열어 ‘난학(蘭學·네덜란드학)’이라는 신학문을 등장시켰다. 1858년 일본이 쇄국정책을 중단하고 미국과 통상을 결정했을 때도 배후에는 네덜란드가 있었다. 



    학자들은 네덜란드야말로 자본주의의 원산지라고 말한다. 17세기 암스테르담에서는 보험업, 운송업은 물론이고 증권시장도 빠르게 성장했다.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이가 암스테르담에 매혹되는 이유는 비단 자본주의 때문만은 아니다. 이 도시가 지켜온 ‘관용’의 전통이야말로 암스테르담을 정의 내리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관용과 자유, 이 두 가지는 암스테르담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자유롭다. 일찍이 동성 간의 결혼을 허용했고, 카페에서 마리화나도 거리낌없이 사서 피울 수 있다. 연명치료의 허울에서 벗어나 안락사를 인간의 당연한 권리로 인정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성매매도 어엿한 직업으로 대접받는다. 암스테르담은 아마도 전 지구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관용적인 도시일 것이다. 

    네덜란드인은 영어는 물론이고 불어나 독일어도 잘한다. 그래서일까. 좁은 땅 안에서 복작대며 자기들끼리 다투지 않는다. 세계 어디든 자유롭게 쭉쭉 뻗어 나가는 이들의 배포가 부러울 따름이다. 독일처럼 명품 자동차를 생산하지도, 거대한 재벌 기업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네덜란드의 평균소득은 유럽의 최강국인 독일을 크게 앞선다. 2018년 기준 네덜란드 1인당 국민소득은 5만5185유로(한화 7248만 원)로 독일 5만841유로(한화 6677만 원)를 뛰어넘는다. 

    17세기 유럽 해상운송물자의 절반 이상이 네덜란드 선박의 힘을 빌렸다. 암스테르담에는 신흥부자의 수가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당시 이 도시의 1인당 소득은 유럽 최고였다. 오랜 기간 호황이 지속되면서 기상천외한 일도 생겨났다. 1673년 일어난 ‘튤립 파동’이 바로 그것이다. 

    원산지가 터키인 이 화초는 당시 희귀품인 데다 재배 과정도 까다로웠다. 1636년 최고가의 튤립 구근은 알뿌리 무게의 100배에 해당하는 황금과 가격이 맞먹었다. 요즘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알뿌리 한 개 가격이 1억2000만 원 정도 된 셈이다. 암스테르담의 상인들은 튤립을 투기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은 여관의 밀실이나 레스토랑에서 다음 해에 수확할 튤립 뿌리를 미리 사고팔았다. 사상 초유의 선물(先物)시장이었다. 

    그 결과 1636년 11월에는 한 달 동안 튤립 가격이 4배까지 뛰었다. 12월 초에는 다시 한 달 전의 10배로 치솟았다. 잘만 하면 누구라도 일확천금을 노릴 수 있었다. 실제로 그때 투기로 한밑천 잡은 사람이 상당수였다. 하지만 거품은 빠지기 마련이다. 1637년 2월 3일, 튤립의 거품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적잖은 수의 상인과 시민이 파산했다. 오늘날 증권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놀라운 광경이 그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연출됐다.

    그림에 집착한 중산층

    렘브란트,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2 [마우리츠하이스 왕립미술관 소장]

    렘브란트,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2 [마우리츠하이스 왕립미술관 소장]

    호황 속에서 문화의 꽃도 피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는 ‘진주 귀걸이를 한 여인’과 같은 명작을 남겼다. 그보다 한 세대 먼저 태어난 렘브란트 반 레인(1606~1669)은 더욱 주목할 만한 천재다. 나는 테오와 함께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작품들을 오랜 시간 감상했다. 

    1885년에 개관한 국립미술관은 건축가 카이페르스(Pierre Cuypers)가 설계한 네오고딕 양식의 외관이 고풍스럽다. 뮈제윔 광장 근처에 위치하며 ‘레이크스’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이곳에는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유물과 유적, 예술품이 무려 8000여 점이나 전시돼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그림에 대한 수요가 부쩍 늘었다. 중산층이 늘어나면서 그림으로 부와 권력을 과시하려는 이들이 생겨난 덕분이다. 앞서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르네상스(14~16세기) 때와는 사정이 좀 달랐다. 이 시기 예술 작품은 대부분 가톨릭교회나 귀족들의 주문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네덜란드는 개신교를 믿었기에 종교 관련 작품에 대한 수요가 거의 없었다. 대신 인물화와 풍경화, 정물화 등이 중산층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얻기 위해서라면 돈은 얼마든지 지급할 용의가 있었다. 거듭 말하지만 17세기 암스테르담은 최고로 부유한 도시였다. 그들은 900만 길더(현 2억7000만 유로, 한화 3500억 원)를 쏟아부어, 야코프 반 캄펜(Jacob van Kampen)에 새 의사당을 건립할 정도였다. 

    테오는 나에게 렘브란트가 그린 집단 초상화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줬다. 1632년 암스테르담 외과의사 조합은 렘브란트에게 이 그림을 의뢰했다. 17세기 외과수술실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렘브란트가 생애 처음으로 그린 집단 초상화다. 등장인물 각각의 개성을 매우 또렷하게 표현해 여전히 많은 이의 갈채를 받고 있다. 

    당시 외과의사 조합은 유명한 의사 니콜라스 툴프 박사를 초빙해 조합원들 앞에서 인체를 해부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벌였다. 렘브란트는 등장인물의 얼굴을 한 줄에 배열하는 기존의 집단 초상화 공식을 깨고, 피라미드 구도를 새롭게 도입했다. 또 해부 강의에 시선이 집중되도록 인체를 환하게 그려 마치 조명을 비춘 것처럼 보이게 했다. 렘브란트를 ‘빛의 마술사’라 부르는 이유와 같다. 아울러 마치 사진처럼 세밀하게 묘사된 인물들의 얼굴 표정을 통해 이들의 심리 상태마저 가늠할 수 있다. 

    니콜라스 툴프는 외과의사이자 암스테르담 시의원이었다. 당대 최고의 권력집단인 섭정(攝政) 그룹에 속한 유명 인사였다. 암스테르담에 머무는 동안 나는 툴프 박사에 대해 서술해놓은 두꺼운 책을 한 권 읽었다. 책에 따르면 툴프 박사의 본명은 다이어만이었다. 1620년대부터 튤립 열풍이 불기 시작하자 그는 가문의 문장에 튤립을 새겨 넣었다. 이로써 사람들은 그를 툴프, 곧 튤립이라고 불렀다.


    소외된 이들의 자화상, 렘브란트

    17세기 암스테르담에서는 부자들의 비위만 잘 맞춘다면 실력 좋은 화가가 돈을 벌기란 매우 쉬웠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고객의 주문에 무조건 따르는 화가가 아니었다. 자신의 눈에 비친 모습을 신랄하게 묘사할 뿐이었다. 그 탓에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 그림을 의뢰하는 사람 수가 줄어들었다. 천재화가의 고집을 일반인은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렘브란트는 평범한 사람에게서도 ‘특별함’을 끄집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그가 말년에 완성한 그림 ‘포목상조합 이사들’은 탁자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은 상인 5명을 통해서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의 일상생활을 묘사한 소묘도 많이 남겼다. 이 도시에는 부자 못지않게 빈민도 많았다. 렘브란트는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의 얼굴을 화폭에 담길 좋아했다. 심지어 맹인과 같은 장애인들을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접목하곤 했다. 이런 유의 그림을 부자들이 좋아할 리 없었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인물의 개성과 심리를 포착하는 데서 희열을 느꼈다. 렘브란트가 22세 때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 있다. 이 그림을 감상한 독일의 문호 괴테는 우울과 방황으로 세월을 보내던 자신의 청춘 시절이 떠올랐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자화상은 훗날 괴테의 대표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탄생시켰다. 렘브란트는 20대 청년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100여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그에게 자화상은 자서전과 같았다.

    자유와 관용의 상징, 스피노자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를 빼고는 자유와 관용을 논하기 힘들다. ‘프랑스의 지성’으로 불리는 질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철학자들의 그리스도”라고 칭했다. 17세기 초 암스테르담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스피노자는 예속을 벗어난 자유의 철학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유대인공동체로부터 파문을 당했고, 1660년 급기야 신변의 위협을 느껴 도망치듯 고향을 떠났다. 그럼에도 스피노자는 암스테르담에 남아 있던 친구와 자유주의자들 덕분에 철학적 탐구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비록 몸은 조국을 떠났지만 그의 사상은 여전히 암스테르담의 지적, 철학적 활동의 중심에 존재했다. 

    저서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네덜란드를 ‘자유의 나라’라고 표현했다. “암스테르담은 상당한 번영을 이루었고, 전 세계가 감탄할 만큼 자유롭다. 번영을 구가하는 이 도시에서는 모든 인종과 종파의 사람들이 완전한 조화 속에서 살고 있다.” 과연 스피노자의 말처럼 당대의 어느 도시보다도 이곳은 사상적 자유와 종교적 관용을 추구했다. 

    하지만 그 시절 네덜란드는 “국가의 목적은 자유”라는 스피노자의 주장과 달리 탄압의 역사를 이어갔다. 스피노자에 대한 종교적 파문과 ‘신학정치론’을 금서로 정한 것만 봐도 알수 있다. 숱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는 끝까지 자유를 부르짖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는 그에게 교수직을 권했지만 스피노자는 이를 거부했다. 1673년 3월 30일, 스피노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 제안에 고사 의사를 밝히는 편지를 썼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공교육에 대한 불신과 기독교에 대한 비판 때문이었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 보낸 편지 후반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저를 움직이는 것은, 좀 더 나은 지위에 대한 열망이 아닙니다. 평안에 대한 사랑이 저를 움직이는 힘입니다. 저는 공적 교육활동과 거리를 둠으로써 약간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교회에 예속된 삶이 당연시되던 시대에 스피노자의 이러한 저항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합리성을 추구함으로써 삶을 긍정하고 자유를 꿈꿨다. 

    암스테르담은 14세기 무렵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현재의 왕궁과 신교회 지역이 신도시로 개발됐다. 16세기 유럽 전역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또 한 차례 변화의 물결이 밀려왔다. 프랑스의 개신교 신자들, 즉 위그노가 박해를 피해 암스테르담으로 몰려들었다. 그에 앞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종교적 박해에 시달리던 유대인들도 이곳으로 이주해왔다. 이 도시 특유의 종교적 관용 덕분에 암스테르담은 유능한 상인과 수공업자 그리고 지식인들을 자석처럼 끌어들였다. 그 덕에 암스테르담은 어느 순간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다.

    유대인의 안식처

    암스테르담 운하 풍경. [백승종 제공]

    암스테르담 운하 풍경. [백승종 제공]

    17세기에 들어서 암스테르담은 본격적인 황금기를 맞았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간섭에서 벗어나 해양강국으로 발돋움했다. 그 시작점으로 새로 만든 4개의 운하를 들 수 있다. 싱얼, 헤렌, 카이저, 프린스 운하를 중심으로 운하지구가 확대된 것이다. 암스테르담 서교회를 비롯해 안네 프랑크가 살던 집, 러시아 피터대제가 머물던 저택, 반 고흐의 삼촌집 등 암스테르담 명소 대부분이 운하지구에 속해 있다. 이곳은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암스테르담은 자유와 관용의 도시답게 그간 차별에 시달리던 유대인들에게 안락한 보금자리를 마련해줬다. 그 덕에 암스테르담 인구의 10%가 유대인으로 채워졌다. 독일의 나치 정권에 희생된 안네 프랑크도, 그의 할아버지는 암스테르담에서 크게 사업을 했다. 원래의 터전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였으나, 유대인에게 암스테르담은 중요한 사업장이었기에 안네의 가족도 이곳으로 옮겨오게 됐다. 

    아무리 자유분방한 네덜란드여도 한 가지 끊지 못한 악습이 있었다. 바로 ‘인종차별’이었다. 20세기 초까지도 네덜란드는 자신들의 식민지인 남아프리카와 인도네시아에서 현지인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최근 네덜란드에서는 ‘검은 피터’를 둘러싼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해마다 12월 6일 ‘신터클라스(Sinterklaas·산타클로스) 축제’를 여는데 축제 전날 ‘검은 피터’가 산타를 도와 아이들에게 선물을 준다. 문제는 검은색으로 분장한 피터의 얼굴. 최근 들어 많은 이가 이를 두고 과거 네덜란드에 노예로 잡혀왔던 흑인들을 연상시킨다면서 ‘인종차별’을 문제 삼고 있다. 자유와 관용이 넘쳐나는 도시 암스테르담에서조차 인종차별은 여간해서는 뛰어넘기 힘든 장벽이란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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