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구니에서 식칼을 꺼내 거울 앞에 섰던 날에도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바구니에 담았다 나 대신 바구니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구니를 구석에 던지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피를 흘려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저것 담아온 바구니가 비어버린 날도 있었다 그럼 난 비어있는 바구니를 안고 어쩔 줄 몰랐다 울면서 하천을 거닐고 신발을 신은 채 물가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상을 하느냐고 온몸이 젖었다
선생님 제 바구니가 텅 비었어요 이것저것 많이 담아온 것 같은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바구니 안이 전부 비어있었어요 손을 넣어봐도 끈적하고 까만 것만 바닥에 붙어있었어요 선생님은 마음을 비우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바구니는 텅 빈 채로 사라지지 않는다 죽은 사람들은 또다시 아픈 모습으로 내 꿈에 나타나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자꾸만 나를 죽이려 한다 바구니는 왜 사라지지 않을까 모든 것을 잃고도 왜 일정한 모형을 유지한 채 내 손에 달려있을까
바구니를 깨끗하게 씻고 침대에 누웠다 하나, 둘, 셋 하면 내가 사라져 있기를 기도하며 조용히 아침을 기다렸다 옷은 오랫동안 마르지 않았다
[Gettyimage]
● 2001년 충남 부여 출생
● 2022 ‘창작과비평’ 신인문학상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