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의 시름을 잊고 가끔 여유를 찾을 것. 그리하여 삶과 세상의 진리를 터득해갈 것. 바로 장승업이 추구한 예술의 방향일 것이다.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고 보는 이유도 같을 것이다. 모두들 조그맣게 등불을 켜기를. 그 등불 밑에 모여 오순도순 살아가기를. 외암리를 떠나며 마음이 차분해졌다.
잘사는 농촌은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농부들이 자가용을 타고 다닌다, 집 안 곳곳에 에어컨이 설치돼 있다, 화장실이 반짝반짝 청결하고 편안하게 돼 있다. 또 하나의 지표는 그 지역의 역사를 담아내는 현지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있다는 것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웅장할 필요는 없다. 그냥 있으면 된다. 문화나 유적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그만큼 삶에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20년 전 그때 한국의 농촌은 그러지 못했다. 일본과 한국은, 자존심에 상처가 나긴 하지만, 그러니까 약 20년의 격차가 난다.
“시골집에서 자고 갈래요?”
요즘 한국의 지방을 가보면 사는 ‘품새’가 예전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기념관이나 박물관을 신경 써서 만들어놨다. 제주도 서귀포의 이중섭 거리도 그렇고, 충남 예산 수덕사 앞에 있는 이응로 화백의 ‘수덕여관’ 같은 곳도 그렇다. 이제 한국도 ‘문화적인 것’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전국 곳곳이 세련되게 바뀌고 있는 것이다.충남 아산에 있는 외암리를 가게 된 것은 순전히 전성환 충남문화산업진흥원 원장 때문이다. 그가 그랬다. 마치 ‘봄날은 간다’의 이영애가 유지태한테 얘기하듯이. 물론 라면을 먹고 가라는 둥, 그런 톤이나 그런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 그냥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시골집에서 자고 갈래요?” 그가 사는 곳이 바로 외암리와 5분 거리에 있는 마을이다.
6월 중순 충남 천안 미디어센터에서 ‘극장을 찾아서2’ 행사가 열렸고 거기서 거의 일주일을 먹고 자고, 서울로 오르락내리락해야 했다. 전 원장의 시골집 운운하는 얘기는, 내 몰골이 꽤나 피곤해 보이던 행사 5일째쯤에 나왔다. 사실 그날만큼은 서울로 올라가기에 심신이 지쳐 있긴 했다. 그래서 그의 시골집에 가서 자기로 한 것이다.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극장을 찾아서’ 행사 얘기를 좀 하고 넘어가겠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얼마가 될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한 줌’이라도 있다면 그분들이라도 꼭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극장을 찾아서’는 말 그대로 ‘극장’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겠다고 천명한 행사다.
그렇다면 극장이 없어서인가. 전국의 스크린 수는 약 2400개다. 극장은 곳곳에 있다. 극장 시설도 아시아 최고, 아니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국내 멀티플렉스 좌석들을 다른 나라 극장의 그것과 비교해본 적이 있는가. 과장해서 얘기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한국 극장가에 관객이 미어터지는 것도 이런 최고 수준의 시설 때문일 수 있다. 멀티플렉스가 경쟁적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개·보수를 하는 것도 그 때문일 수 있다.
극장을 찾아서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좋은 극장’들이 모든 영화에 개방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극장들은 돈이 되는 영화에만 문을 열어준다. 돈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가차없이 빗장을 꽁꽁 걸어 잠근다.국내에서 만들어지고 수입되는 영화의 약 30%는 비(非)상업영화다. 이 영화들이 상영될 극장이 없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른바 과도한 스크린 독과점 때문이다. 2400개의 스크린 중에 심할 때는 영화 한 편이 2000개에 가까운 스크린을 차지한다. 이런 나라는 없다. 이건 미친 짓이다. 그러니 이른바 ‘작은 영화’들이 비집고 설 틈이 없다.
‘극장을 찾아서’는 그런 비상업영화들을 위해 전국의 ‘빈’ 공간 혹은 ‘유휴’ 공간을 찾아 상영회나 기획전을 여는, 일종의 영화운동이다. 여기서 유휴 공간이라 함은 전국에 깔려 있는 문화회관, 구민회관, 대학 내 상영시설, 미디어센터 등을 말한다. 이들을 망(網)으로 연결하면 전국적으로 300~350개 스크린을 갖춘 새로운 체인 극장이 된다.
‘극장을 찾아서’ 운동이 궁극으로 가고자 하는 목표 지점이 바로 그것, 곧 ‘체인화’인바, 그 이전까지 2~3년 동안은 꾸준히 전국을 돌며 이 새로운 민간자율형 프랜차이즈 극장의 필요성을 대중에게 전파하고, 무엇보다 비상업영화의 재미와 의미를 일반 관객에게 ‘교육’하는 게 목적이다. 어떤가. 심훈의 ‘상록수’가 생각나지 않는가. 러시아혁명 초기 일부 지식인들이 주도한 ‘브나로드(인민 속으로)’가 연상되기도 한다.
‘극장을 찾아서’는 극단적인 자본주의적 욕망에 사로잡힌 한국 영화계를 개혁하기 위한 ‘나로드니키(브나로드 운동가)’들의 운동인 셈이다. 근데 이게 과연 될까. 회의적인 시각을 지닌 사람이 적지 않지만 일단은 밀어붙여볼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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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민속마을은 너무 유명해져 이제 그 유명세의 손길, 손때를 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연보다 인공의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이제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아산건재고택에서는 얼마 전 비극적인 죽음까지 발생한 모양이다. 누군가 저 오래된 집을 어마어마한 돈에 매입하겠다며 나서고 어찌어찌, 이른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네 마네 하다가 엎어진 모양인데, 그 과정에서 수십억 원의 돈이 물린 누군가가 목을 맸다고 한다.
인명은 재천이라고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사람이 하기에 달린 일이다. 모든 게 다 돈이 빚어낸 일이며 돈을 둘러싼 사람들의 어찌하지 못하는 과도한 욕망이 만들어낸 일이다. 모든 건 아파트든 한옥이든, 집이든 땅이든, 조금이라도 돈만 생기면 부동산을 사들이려는 한국식 천박한 자본의 욕심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변호사 수임료로 100억 원대를 챙기는 시대다. 그 돈으로 변호사든 검사든 집을 백 몇 채를 구입한다. 도대체 그 많은 돈과 그 많은 집, 그 많은 외제차를 가지고 있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 그래 봐야 한순간 ‘훅’ 흘러가는 게 인생인데 집을 수백 채 가지고 있으면 무엇을 할까. 그것도 배운 사람들이. 공부를 했다는 사람들이. 돈 욕심도 10억 원 정도면 다 용서될 것을. 그 정도면 죽을 때까지 배곯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을. 판사 출신이라고 하는 여자가 한 번 변호하는 데 100억 원을 받는다면 도무지 이 세상에 공정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교육부 고급 공무원이라는 사람이 대중을 개, 돼지라고 하는 세상이다.
공부하는 이유가 오로지 개인의 출세와 영달인 사람이 부지기수로 늘어나고 있는데, 그건 다 이 사회가 비뚤어져서인 것이다. 걸그룹 소녀가 안중근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가리켜 ‘긴또깡’이라고 말하는 세상인 것이다. 그 세상의 탁류(濁流)가 이곳 외암민속마을까지 흘러들어온 셈인데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자꾸 스산해진다.
초가집 돌담길 사이사이를 걷다 보면 영화가 주는 집중력, 클로즈업의 마술 같은 것이 새삼 느껴진다. 강제규 감독은 ‘태극기 휘날리며’의 초반 장면, 그러니까 장동건과 원빈이 전쟁으로 갈라지기 전 지내던 마을 장면을 여기서 찍었다. 물론 여기서만 찍은 것은 아니다. 외암리에서 몇 커트, 그리고 전남 순천의 어느 마을에서 몇 커트 하는 식으로 전국 여기저기서 찍었다.
강제규와 나눈 술잔
영화는 그런 것이다. 하나의 시퀀스 안에는 로케이션 공간이 여러 개가 숨어 있고 그렇게 조합되는 것이다. 풀 쇼트와 미디엄 쇼트, 클로즈업 쇼트가 한데 뒤섞이면 그게 마치 다 한 공간에서 찍힌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영화가 마술을 부리는 것은 그 때문인데, 외암민속마을에 사는 사람 대다수는 ‘태극기 휘날리며’의 ‘그’ 장면을 모두 이곳에서 찍은 것으로 생각한다. 뭐 아무러면 어떻겠는가.강제규 감독이 언젠가 주말 늦은 시간에 불러 같이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만날 수 있냐고 그가 물었다. 조금 취기가 오른 뒤 강 감독이 말했다. “오늘 오후에 시나리오를 털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하고 같이 술을 마시고 싶었다.” 그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짠해졌다. 천하의 강제규도 마음이 약해졌구나. 난다 긴다 하던 강제규도 마음 한구석이 불안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했는데. 강제규조차 불안해하는가 싶으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는 지난해 ‘장수상회’를 내놨지만 그다지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평단의 반응도 비교적 싸늘했다. 영화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걸작이 아니었을 뿐이다. 세상에, 감독이 어떻게 매번 걸작을 만들겠는가. 그런데 종종 평단과 관객은 그걸 용납하지 않는다. 걸작을 내놓지 않는 감독은 게으르다고 여긴다. 강제규는 ‘장수상회’를 내놓기 직전 단편 ‘민우씨 오는 날’을 만들었지만 사람들에게 회자되지 못했다. 사실은 그게 꽤 수작이다.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마을은 서울에서 기껏해야 1시간 반 거리에 있다. 물론 모든 것을 서울 중심으로만 생각하면 안 될 일이다. ‘신동아’ 독자가 서울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닐 터다. 부산이나 광주에서는 그보다는 오래 걸리고 제주에서는 더 오래 걸릴 거리다. 그래도 시간을 내서 가볼 만한 곳이다. 지치고 힘든 도시 생활에 찌든 현대인이라면 더욱 더 그럴 것이다. 사람이 산다는 게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다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 그래서 매번 욕심을 내서 살 일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결국은 측은지심이다
아산건재고택에서 장승업의 예술혼이 느껴졌다면 외암리 입구에 마련된 퓨전 카페와 식당에서 막걸리를 한잔하는 것도 감칠맛 날 것이다. 인생의 시름을 잊고 가끔 여유를 되찾을 것. 그럼으로써 삶과 세상의 진리를 터득해 갈 것. 바로 장승업이 추구한 예술의 방향이기도 할 것이다.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고 영화를 보는 이유도 같을 것이다. 모두들 조그맣게 등불을 켜기를. 그 등불 밑에 모여 오순도순 살아가기를. 외암리를 떠나며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500년 마을의 오랜, 편안한 느낌 때문일까. 시간과 역사는 때로 내게 선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