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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정상’인 세상, 이곳은 전쟁터

[황승경의 Into the Arte] 넷플릭스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

  • 황승경 공연칼럼니스트·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죽음이 ‘정상’인 세상, 이곳은 전쟁터

  • 한 사람이 죽었다. 그에겐 이야기도, 꿈도 있었다. 평범하고 소박한, 하지만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작은 우주’다. 죽음으로 끝이 났다. 이야기의 마침표이자 꿈의 단절이다. 한 인간이 종말을 맞이했건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다시 같은 죽음이 반복된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 앞에 개인이란 하나의 숫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이고 만다.
제1차 세계대전은 지루한 참호전 양상으로 나타났다. [넷플릭스]

제1차 세계대전은 지루한 참호전 양상으로 나타났다. [넷플릭스]

2022년 1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접한 국경에 대규모 병력을 전개한다. 이어 2월 24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특별 군사작전 개시를 명령하자 러시아 T-72 탱크가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었다. 21세기 유럽 최초의 국가 간 전쟁이 시작됐다. 우크라이나가 며칠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리라는 예상과 달리 우크라이나는 강력히 항전했고,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면서 전쟁은 장기전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푸틴 대통령이 2022년 9월 동원령을 내리고 ‘조국의 영광’을 외쳤지만 우크라이나가 동부 지역 영토를 회복하고 있다. 전장을 마주한 러시아 청년들은 부족한 군수물자에 고통받고 명분 없는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깨닫는다. 러시아군 사상자는 10만 명을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루하고 끔찍한 이 전쟁은 마치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프랑스가 5년간 맞선 서부 전선을 떠오르게 한다.

넷플릭스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 포스터. [넷플릭스]

넷플릭스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 포스터. [넷플릭스]

전쟁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불을 뿜는 기관총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전사에게 힘의 논리니, 균형이니 하는 국제정치학자들의 갑론을박은 한가한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 100여 년 전 서부 전선에서 쓰러져 간 독일 청년들도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주입된 애국심으로 자원입대한 파울 보이머(펠릭스 카머러)의 비극을 담은 넷플릭스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인간의 생존·번영과 국가의 그것이 왜 불일치하는지, 이 경우 인간은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2022년 독일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1929년 출간된 에리히 레마르크(1898~1970)의 자전적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레마르크는 프랑스계 독일인이다. 보불전쟁(1870~1871)으로 국민감정이 격해지자 그의 조부는 성 ‘Remarque’를 독일식인 ‘Remark’로 변경한다. 독일인으로 성장한 그는 18세가 되자 징집당해 전쟁(제1차 세계대전)에 투입된다.

1917년 6월 레마르크는 치열한 참호전이 지속되던 서부 전선 최전방에 배치된다. 그는 교전 한달 만에 심각한 부상을 당해 1년 넘게 후방 야전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처참한 몰골로 밀려들어 오는 부상병들의 절절한 이야기에 그의 가슴속에는 인간애와 반전(反戰)사상이 꽃피운다.

전쟁이 끝난 뒤 일상으로 복귀한 레마르크는 여러 직업을 두루 거치면서도 틈틈이 집필을 병행했다. 어린 나이에 두 눈으로 목격한 전쟁의 참상은 창작의 근원이기도 했지만 빠져나와야 하는 외상의 늪이기도 했다. 22세에 출간한 첫 소설에서 그는 전쟁의 잔혹함을 패자의 견해에서 담담하고 진솔하게 서술한다.



레마르크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집필하기 시작할 즈음부터 원래 성이었던 ‘Remarque’를 필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전쟁이 끝난 지 10여 년이 흘렀음에도 당시 독일은 여전히 배상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세계적 경제 호황을 맞아 앞다퉈 샴페인을 터뜨리던 미국과 영국도 갑자기 불어닥친 경제 대공황으로 파국을 맞는 등 세계 정세도 혼란스러웠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출간되자마자 단박에 베스트셀러로 등극한다. 소설은 승자이든 패자이든 전쟁을 다시 곱씹어 보고, 초토화된 자신들의 삶을 직시하게 했다. 소설은 ‘독일이 왜 전쟁에 졌느냐’를 따지지 않는다. 독일, 영국, 미국 병사 모두 참호 속에서 비슷한 처지로 소모돼 가는 모습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묘사했다. 아울러 과연 인간은 전쟁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의문을 던진다.

괴벨스를 불편하게 만들다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 젊은 청년들은 국가의 세뇌로 입대해 목숨을 잃고 만다. [넷플릭스]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 젊은 청년들은 국가의 세뇌로 입대해 목숨을 잃고 만다. [넷플릭스]

사실 전쟁 직후인 1920년 독일 사회는 참전용사이자 무공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 에른스트 윙거(1895~1998)의 소설 ‘강철 폭풍 속으로’에 열광했다. 자원병으로 입대한 그는 전장의 포성에도 굴하지 않는 전우들의 영웅적 활약상을 생생히 묘사해 상심한 독일 국민을 위로했다. 레마르크는 참전 기간 대부분을 병동 야전침대에서 보냈다. 반면 윙거는 전쟁 내내 치열한 접전을 거듭하며 화려한 전공을 세웠다. 처지가 다르다 보니 같은 전쟁일지라도 이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도 달라진 것이다. 1920년대 독일 국민은 엄청난 전쟁배상금에 허리가 휠 정도였다. 전쟁 복구에 허덕이는 독일인에게 허무한 전쟁의 잔상을 곱씹는 것은 사치였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남은 자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던 전쟁의 참상이 전달되기까지 꼬박 10여 년이 걸린 셈이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문학박사 출신 나치 나팔수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괴벨스는 선전장관으로 임명되자마자 레마르크의 작품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날개 돋친 듯 팔리던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독일에서 1933년부터 12년 동안 ‘비애국적’ 금서로 지정되고 영화도 상영 금지됐다. 정부는 레마르크가 제1차 세계대전에 복무하지 않았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그를 깎아내렸다. 거짓 뉴스에 속아 넘어간 독일 국민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1933년 생명에 위협을 느낀 레마르크는 스위스 별장으로 피신한다. 1938년에는 시민권마저 취소된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 미국으로 망명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독일에 가족과 함께 남아 있던 그의 여동생은 나치에 대한 저항활동을 펼치다가 체포돼 교수형에 처해졌다. 1952년 레마르크는 저서 ‘생명의 불꽃’을 자신의 여동생에게 헌정했지만 이 소설의 독일어 버전에는 그의 헌정이 생략됐다. 그때까지도 나치의 거짓 선동에 속은 일부 독일인의 오해가 풀리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참혹한 현실, 허무한 죽음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군인들은 전쟁이 길어질수록 참전 이유를 잊고 생기를 잃어간다. [넷플릭스]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군인들은 전쟁이 길어질수록 참전 이유를 잊고 생기를 잃어간다. [넷플릭스]

넷플릭스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후반부로 갈수록 소설과는 다른 결을 보인다. 호각지세 강대국들이 떼를 지어 일으킨 제1차 세계대전은 4년 동안 10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낳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엔 양 진영 모두 참호를 파고 대치하다가 적재적소 타이밍에 돌격하는 백병전으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기관총, 전차, 화학무기 등 신무기 개발로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참호를 넘어 지뢰를 피하고 철조망을 뚫는 동안 기관총을 피해 살아남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유럽 서부 전선엔 길고도 험한 참호만이 길게 늘어났고, 병사들은 참호 속에 웅크리고 대치하다가 하나둘 쓰러져갔다.

영화는 전쟁 발발 후 3년이 지난 1916년 서부 전선에서 시작한다. “앞으로 전진”만 외치는 소대장은 떨고 있는 독일 병사 하인리히를 잡아채 참호 밖으로 돌격시킨다. 하인리히는 이를 악물고 적진을 향해 달려가지만 설상가상 총까지 고장 난다. 진퇴양난 급박한 상황에서 손에 잡히는 것은 야전삽뿐. 급한 대로 이것이라도 들고 적에게 대항하지만 결국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다. 하인리히는 내복만 걸친 채 전장 어딘가에 동료들과 매장당한다. 그의 피 묻은 군복과 진흙 범벅 군화는 세탁과 수선을 거쳐 신병에게 보내진다.

이듬해인 1917년 하인리히의 군복은 만 17세 파울의 손에 쥐여진다. 파울과 친구들은 시대적 사명을 운운하는 교장의 설득으로 전쟁놀이하듯 단꿈에 젖어 자원입대한다. 이들은 고향조차 마음껏 벗어나 본 적 없는 순박한 10대다. 결사반대하는 부모의 절규는 겁쟁이의 잔소리로 치부하고, 교장의 선동적 언사만이 가슴에 꽂힌다.

참전만 하면 순식간에 파리 에펠탑에 독일 깃발을 꽂을 것이라 의기양양하던 파울과 친구들은 참혹한 현실에 절망한다. 참호 환경은 군인에겐 최악이었다. 흙을 파고 만든 참호는 침수돼 차디찬 진흙탕이 됐다. 24시간 물속에서 대기해야 하는 날이 늘어만 갔다. 조금만 얼굴을 들었다가는 날아오는 총알의 표적이 되고, 돌격했다가는 기관총 세례에 벌집이 되고 말았다. 군인들은 줄타기를 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비참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같이 참전한 고향 친구들은 하나둘씩 처참하게 희생당하고, 이를 슬퍼할 겨를도 없이 다시 전장에 투입되는 파울의 표정엔 점점 생기가 사라진다. 순진했던 청년들은 전투 기계로 변해 평화가 온다고 해도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지 헷갈리는 단계에 이른다.

1917년 러시아 제정을 붕괴시킨 혁명정부는 전쟁에서 빠진다. 동부 전선에서 숨통이 트인 독일은 서부 전선에 가동 가능한 모든 인력과 물자를 집중시켜 대공세를 편다. 하지만 1918년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고, 대규모 미군이 프랑스 해안에 상륙한다. 독일은 국가 존립 임계점에 다다른다. 혁명이 일어나 황제가 물러난다. 혁명정부는 협상 테이블에 앉길 제안한다. 1분 1초가 아까운 협상단 대표(다니엘 브륄)는 프랑스 측 대표 페르디낭 포슈와 피 말리는 담판을 벌여 1918년 11월 11일 11시를 기점으로 발효되는 휴전협상에 서명한다. 끝까지 살아남아 서로를 의지하던 분대장 카진스키(알브레드 슈흐)는 휴전을 목전에 두고 민가에서 거위를 훔치려다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다. 휴전을 목전에 둔 독일 지휘관은 15분을 남겨놓고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 죽으라며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는다. 파울은 11시 휴전 나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적국 참호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디플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국제오페라단 단장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



신동아 2023년 1월호

황승경 공연칼럼니스트·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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