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M, 자라, 유니클로, 망고, 포에버21….
- 요즘 명동은 생산에서 유통까지 전부 다 하는 글로벌 SPA 패션브랜드들의 격전지다. 디자인, 품질, 가격의 삼박자를 갖췄을 뿐 아니라 색다른 소비 경험까지 제공하는 이들 때문에 국내 패션업체들은 고심을 거듭하는 중. 과연 글로벌 SPA의 숨은 파워는 무엇이고, 이들과 맞수를 두려면 국내 업체들은 어떻게 환골탈태해야 할 것인가.
1 H&M 국내 첫 매장 오픈파티가 열린 2월25일 명동 H&M 눈스퀘어점에 많은 인파가 몰렸다. 2 유니클로 명동본점 전경. 2005년 국내 진출한 유니클로는 4월초 현재 48개 매장을 개장했다. 3 자라의 2010년 SS 컬렉션.
덥고 화창했던 5월5일 어린이날 오후. 서울 명동거리는 모처럼의 공휴일을 만끽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날 가장 많은 사람이 몰린 장소를 꼽으라면 단연 복합쇼핑몰 눈스퀘어(옛 코스모스백화점 부지)에 자리한 ‘H·M’과 사보이호텔 건너편의‘유니클로(UNIQLO)’.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두 패션브랜드 매장에는 주말 저녁 대형할인점과 같은 활력이 넘쳤다. 서로 부딪칠 정도로 매장 안이 붐볐으며, 가족끼리 온 손님이 많았고, 그리고 줄을 섰다. H·M 매장 입구에는 멋쟁이 젊은 남녀 100여 명이 ‘입장’이 허락되기를 기다리며 서 있었고, 유니클로 계산대 앞에는 티셔츠, 청바지, 레깅스 등을 팔에 걸친 손님들로 긴 줄이 세워졌다. ‘글로벌 SPA 패션브랜드가 명동을 장악했다’는 세간의 풍문이 실감났다. 이날 H·M에는 1만5000명, 유니클로에는 1만명의 고객이 찾은 것으로 집계됐다.
SPA(Speciality Store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란 제조직매형 의류회사, 즉 기획과 생산, 유통, 판매를 도맡아 하는 의류회사를 가리키는 용어다. 미국 갭(Gap)의 도널드 피셔 회장이 처음 이 용어를 사용한 이후 H·M, 자라(ZARA), 유니클로, 망고(MANGO) 등 글로벌 패션브랜드들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지금 명동은 글로벌 SPA와 이에 대응하는 국내 패션브랜드들의 가두(街頭) 매장 격전장이다. 유니클로 명동점에서 출발하자면 바로 그 옆으로 이랜드㈜가 유니클로에 대항해 내놓은 스파오(SPAO)와 망고의 플래그십 스토어가 나란히 있고, 또 그 옆에 지오다노, 빈폴, 갭의 대형매장이 서 있다. 인근의 엠플라자(옛 유투존)에는 자라와 미국 SPA브랜드인 포에버21이 별도의 출입문을 둔 채 각각 2개 층을 차지하고 있고, 그 아래 유서 깊은 금강제화 매장은 올가을 H·M 2호점으로 바뀔 예정이다. 눈스퀘어에는 H·M, 자라, 망고 등 유럽을 대표하는 SPA 브랜드들이 모두 들어와 있고, 큰길 건너 롯데백화점 영플라자에도 자라, 유니클로, 망고가 입점해 있다.
청담동 클럽을 능가한다?!
H&M의 2010년 비키니 광고 이미지.
이런 ‘H·M 효과’는 지금도 여전하다. H·M이 입점한 눈스퀘어의 자산관리를 맡고 있는 세빌스코리아 관계자는 “H·M 오픈 이후 눈스퀘어를 찾는 고객이 30%가량 늘었다”며 “주중에는 2만2000여 명, 주말에는 3만여 명이 눈스퀘어를 찾는다”고 밝혔다. 물론 이는 주중 1만여 명, 주말 1만5000여 명의 H·M 방문고객을 뺀 수치다. 눈스퀘어에 함께 입점해 있는 자라, 망고 등의 매출도 덩달아 뛰었다. 망고 관계자는 “H·M 오픈 이후 눈스퀘어점 매출이 70~80%가량 급신장했다”고 밝혔다. 요즘 패션피플 사이에서는 ‘명동 H·M 물이 정말 좋다’는 말이 나돈다고 한다. 청담동 클럽에서나 마주칠 법한 패셔니스타들이 H·M 매장 안에서 목격된다는 얘기다.
2005년 유니클로, 2008년 자라, 그리고 올초 H·M이 국내에 진출하면서 국내 패션업체들은 긴장을 넘어 위기를 절감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국내 패션시장은 여러 세력이 할거한 춘추전국시대와 닮은꼴이다. 연간 23조~24조원 규모의 시장을 수많은 중소 브랜드가 분할하고 있는 것. 가장 매출이 많은 브랜드로는 제일모직의 ‘빈폴’이 꼽히는데 연 매출 4500억원 수준이다. 이들이 연매출 10조원이 훌쩍 넘는 글로벌 ‘거인’들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벌써 업계에서는 “경쟁력 있는 일부 브랜드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수명을 다하게 될 것”이란 흉흉한 얘기가 나돈다. “제일 무서운 건 글로벌 SPA로 인해 소비자 구매 패턴과 기대 수준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란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과연 이들 글로벌 SPA의 숨은 파워가 무엇이길래 아시아에서 가장 패셔너블한 민족이라는 대한민국이 잔뜩 움츠린 걸까.
H·M, 소니아 리키엘의 스트라이프 니트가 5만9000원
2010년 봄 시즌에 선보인 ‘Sonia Rykiel pour H&M’ 콜렉션의 스트라이프 니트. 국내 판매가격은 5만9000원이었다.
‘패션과 품질을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한다.’ 이 거대한 패션브랜드는 이처럼 단순하고 명확한 경영이념에 따라 철저하게 움직인다. 최신의 트렌드에 부합하는 아이템을 선보이기 위해 스웨덴 본사에서 근무하는 120명의 디자이너가 재단사, 바이어, 회계 담당자 등과 팀을 이뤄 새로운 컬렉션을 제작하며, 전세계 매장에는 날마다 신상품이 입고된다. 그리고 그 가격은 많은 사람이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수준이다.
유통을 전적으로 자사가 전담하는 SPA 브랜드들은 매장을 가장 중요한 ‘대고객 채널’로 여긴다. H·M도 매장에 발을 처음 들여놓는 순간부터 H·M 브랜드에 대한 느낌을 받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총 4층, 2600㎡(786평) 규모의 H·M 명동매장에 근무하는 직원은 150명으로 여타 브랜드보다 많은 편이다. 이 중 매장의 시각적 요소를 전담하는 비주얼 머천다이저가 15명. 이들은 매장에 상주하면서 윈도 디스플레이를 전담하고 상품 구성을 수시로 바꾸며, 옷걸이가 빌 때마다 새 상품으로 채워 넣는다. H·M 한국지사 정해진 마케팅실장은 “그래서 고객들은 매번 올 때마다 신선감을 느끼게 된다”고 설명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H·M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세계적인 디자이너와의 콜래보레이션(협업)이다. 의류뿐만 아니라 전자제품에 이르기까지 디자이너나 아티스트와의 콜래보레이션은 이제 전 산업군에 퍼진 일반적인 마케팅 도구다. 그러나 이정민 PFIN 대표는 “H·M은 사람들이 그 순간에 가장 열망하는 화제의 디자이너와의 콜래보레이션을 지속적으로 선보인다는 점에서 가장 선두적”이라고 평가했다.
H·M은 2004년 칼 라거펠트와의 콜래보레이션을 시작으로 콤 데 가르송, 지미 추, 매튜 윌리엄슨, 소니아 리키엘 등과의 콜래보레이션 컬렉션을 출시해왔다. 칼 라거펠트의 재킷을, 지미 추의 구두를, 소니아 리키엘의 니트를 명품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살 수 있으니 소비자가 환호하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실제로 H·M 역사상 가장 큰 성공으로 꼽히는 도쿄 긴자점이 오픈할 당시 대규모 고객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때 콤 데 가르송과의 콜래보레이션 상품을 출시한 덕분이 크다(이 브랜드를 창시한 디자이너 레이 가와쿠보는 일본 출신이다). H·M 명동점 역시 오픈 때 ‘니트의 여왕’으로 칭송받는 파리 출신 디자이너 소니아 리키엘과 협업한 니트 컬렉션을 1만9000원에서 11만9000원의 가격에 선보였고, 오픈 당일 거의 모든 제품을 팔아치웠다고 한다.
마이클 잭슨 사망 5주 만에 자라에 걸린 ‘빅토리 재킷’
2008년 4월 오픈한 자라의 코엑스 매장 전경. 자라는 국내 진출 2년이 채 안 돼 총 17개의 매장을 열었다.
자라는 스페인 인디텍스(INDITEX)사가 보유한 8개 패션브랜드 중 하나로, 이 회사는 전세계 74개 국가에 4607개의 매장을 보유(2010년 1월31일 기준)한 세계 굴지의 패션기업이다. 인디텍스의 2009년 매출액은 110억8400만유로(약 16조원)로 규모나 매출 면에서 H·M과 어깨를 겨눈다.
자라는 인디텍스와 롯데쇼핑의 합작 형태로 2008년 4월 국내 시장에 진출했다(법인명 자라리테일코리아). 롯데 영플라자와 코엑스 매장을 필두로 지난해 서울, 인천, 분당, 대구, 광주, 울산 등에 총 17개 매장을 열었다. 지난해 매출은 850억원. 올해는 10개 매장을 추가로 개장해 1800억원의 매출을 달성한다는 목표다.
1975년 스페인에서 첫 매장을 연 자라는 널리 알려졌다시피 ‘패스트 패션’의 효시다. 보통 패션업체들은 1년에서 1년6개월 앞서 다음 시즌에 팔 제품의 디자인과 수량 등을 결정, 생산 주문을 낸다. 하지만 자라는 ‘지금 팔리는 옷을 지금 기획, 생산한다’는 경영 전략을 구사한다. 다른 SPA 브랜드들이 60~70%를 사전에 기획생산하고, 30~40%를 소비자 반응을 봐가며 생산하는 것과 반대로 자라는 베이식한 아이템을 중심으로 30~40%만 기획생산하며, 나머지 60~70%는 반응생산한다. 업계 관계자는 “고객에게 자라가 만든 것을 사가라고 푸시(Push)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풀(Pull)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6월 마이클 잭슨이 급작스레 사망, 전세계적으로 잭슨 붐이 일자 자라는 ‘빅토리 재킷’을 출시했다. 그런데 이 재킷이 국내 매장에 들어오기까지 5주도 채 소요되지 않았다고 한다.
자라가 이처럼 신속하게 ‘지금 고객들이 원하는 패션’을 선보일 수 있는 것은 매장 부문에 색다른 직능을 갖춘 전문가들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커머셜 디렉터, 스토어 매니저, 에어리얼 코디네이터, 스토어 코디네이터 등이 바로 그들로, 이들은 DT(Direccion de Tienda)의 진두지휘하에 매장과 길거리 등 각종 ‘현장’에서 얻은 소비자 정보를 취합, 스페인 본사에 알린다. 보통 7~8개 매장을 동시에 관리하는 DT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소비자 니즈를 분석하는 것. 국내에서도 여성복, 남성복, 아동복 등을 각각 담당하는 4명의 DT가 활동 중이다.
이런 현장 정보가 스페인 본사로 건너가 상품으로 개발돼 다시 현장(매장)으로 돌아오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빠르면 3주다. 인디텍스는 포르투갈, 모로코, 중국 등에 1189개의 자사 공장을 두고 있어 신속한 대량생산이 가능하다. 이렇게 생산된 제품들은 비행기를 타고 전세계 매장으로 재빠르게 배달된다. 자라리테일코리아 관계자는 “자라에는 생산비용보다 시간이 우선한다”고 강조했다.
UNIQLO “내년에는 1200만장만 팔고 싶다”
지난해 새로운 인물이 일본 부자 1위에 올랐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부스지마 구니오 닌텐도 대주주 등을 제치고 1위에 오른 사람은 야나이 다다시 패스트리테일링사 회장. 그는 1984년 베이식 캐주얼 브랜드 유니클로를 출시해 25년 만에 연매출 8조원 규모의 세계적 브랜드로 키운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유니클로의 경영철학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입을 수 있는, 패션 감각이 반영된 고품질 베이식 캐주얼을 시장 최저 가격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유니클로 매장에 가면 청바지, 셔츠, 폴로티셔츠, 속옷, 양말 등 2만여 가지의 제품이 갖춰져 있다. 가격도 무척 싸다. 청바지가 4만9000원, 티셔츠가 두 벌에 2만9000원 하는 식이다.
그러나 유니클로가 2005년 국내에 첫 진출해 해마다 60%씩 매출을 신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비단 저렴한 가격 때문이 아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품질로 소비자를 감동시켜왔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유니클로 명동점에서 만난 조희원(26)씨는 “아무리 빨아도 모양이나 색깔이 변하지 않고, 보풀도 생기지 않고, 심지어 실밥 하나 발견되지 않아 유니클로 옷을 즐겨 입는다”고 말했다.
유니클로가 일본에 770개, 영국 중국 홍콩 한국 미국 프랑스 싱가포르 등 해외에 92개 매장을 가진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한 배경에는 ‘후리스 신화’가 있다. 후리스(Fleece)란 가볍고 얇으면서 보온성이 뛰어나 방한복이나 등산복으로 애용되어온 소재다. 그러나 색상이나 디자인도 단조롭고 가격도 5000엔 이상이라 널리 대중화되진 않았다.
그러나 1998년 유니클로는 수십 가지 색상의 후리스 재킷을 단돈 1900엔, 우리 돈으로 2만원 남짓에 팔겠다고 선언했다. 곧 유니클로의 후리스 재킷은 박스에서 꺼내는 즉시 팔려나가기 시작했고, 1998년 200만장, 1999년 850만장, 2000년 2600만장이라는 경이로운 판매고를 달성했다. 야나이 회장은 1999년이 끝나갈 무렵 “내년에는 1200만장 정도만 팔고 싶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배 이상으로 팔려나간 것이다(이상 ‘야나이 다다시 유니클로 이야기’(비즈니스북스) 참조).
유니클로는 후리스에 그치지 않고 발열 보온 신소재 ‘히트텍’을 개발, 2008년 가을 2800만장을 팔아치웠다. ‘유니클로는 곧 품질’이라는 브랜드 가치는 이렇게 형성됐다.
대부분의 패션브랜드들은 생산을 인건비가 싼 중국과 동남아 지역 공장들에 의뢰하는 외주 방식을 택하고 있다. 유니클로도 마찬가지로, 패스트리테일링사는 생산공장은 전혀 보유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유니클로가 이처럼 품질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은 ‘다쿠미(Takumi)’라고 불리는 장인(匠人) 시스템에 기인한 바가 크다.
유니클로는 중국 상하이와 선전, 베트남 호치민, 방글라데시 다카 등에 해외사무소를 두고 이곳에 경력 30년 이상의 장인들을 파견한다. 이들은 일주일에 세 번 파트너 공장을 방문해 방적, 방직, 직포, 염색, 봉제, 마무리 출하 등 공정 전반에 걸쳐 노하우를 전수한다. 물론 생산 스케줄과 품질, 안전 문제 등도 점검한다. 여타 브랜드들이 1년에 한두 번 공장을 순회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긴밀한 협력이 이뤄지고 있는 것. 국내 유니클로 사업을 맡고 있는 에프알엘코리아의 안성수 사장은 “꾸준한 신소재 개발 노력과 이러한 장인 시스템이 결합해 뛰어난 품질의 제품이 생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들어 유니클로는 베이식 아이템을 추구하는 기본 방향에 패션성을 더해가고 있다. 유명 디자이너 질 샌더와의 콜래보레이션으로 +J 컬렉션을 출시했으며, 2003년부터 ‘UT’라고 불리는 티셔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매년 여러 나라의 아티스트들을 티셔츠 프린트 디자인에 참여시키는 것으로 이를 통해 수십 종의 다양한 티셔츠를 선보인다. 안 사장은 “+J 컬렉션은 일반 제품보다 30~50%가량 비싸도 20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반응이 매우 좋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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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의 60% 가격으로 팔겠습니다
“자라가 들어온다고 소문이 돌던 4~5년 전부터 긴장해온 게 사실이죠. 그런데 이제 H·M까지 들어왔으니 더 큰일 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전략을 어떻게 수정해야 하나 계속 고민 중입니다.”
대기업 계열사가 운영하는 영캐주얼 브랜드 관계자의 말이다. 이는 국내 패션브랜드들, 특히 글로벌 SPA들과 시장이 겹치는 중저가 여성복 및 캐주얼 브랜드라면 요즘 대개 갖고 있는 고민거리다.
이에 기존 전략을 수정해 실행에 나선 쪽과 아직 판세를 지켜보는 쪽으로 나뉜 가운데, 정면 승부를 선포한 기업이 바로 이랜드다. 이랜드는 지난해 11월 ‘유니클로 플러스 알파’를 내세우며 유니클로 명동점 바로 옆에 SPA형 캐주얼 브랜드 ‘스파오(SPA0)’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었다. 품질은 유니클로에 준하되 가격은 보다 저렴하고 디자인적 요소를 가미하겠다는 청사진이다.
또 이랜드는 자라를 겨냥해 SPA형 여성복 브랜드 ‘미쏘(MIXXO)’의 첫 매장을 6월 말 명동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미쏘 관계자는 “자라처럼 일주일에 두 번 신상품을 공급하고 글로벌하고 트렌디한 디자인을 선보일 것”이라며 “가격은 자라의 60%로 책정하고, 한국인 체형에 맞는 사이즈를 선보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여러 패션 브랜드를 보유한 이랜드는 그동안 프랜차이즈 방식으로 사업을 운영해왔다. 그러나 스파오와 미쏘는 직영으로 운영하며 최소 660㎡(200평)이상의 대형 가두매장만 열 계획이다.
LG패션은 남성복 브랜드 TNGT를 글로벌 SPA에 대항하는 SPA형 브랜드로 재정비했다. 지난해 여성복 라인인 TNGTW를 새롭게 론칭하면서 오피스 상권을 중심으로 매장을 오픈해 ‘비즈니스 피플을 위한 토털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전략이다. 한편 제일모직은 지난 4월 글로벌 SPA 브랜드인 망고를 국내 시장에 새로 들여왔다. 기존에는 국내 수입업자가 바잉(buying) 방식으로 수입했던 것과 달리 제일모직은 위탁 방식으로 계약해 상품 가격을 30%가량 내렸다. 제일모직 관계자는 “이제 SPA는 패션회사의 포트폴리오상 내버려둘 시장이 아니다”라면서 “일단 망고를 통해 이 시장에 진출해 글로벌 SPA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경험해보려는 취지”라고 말했다.
드러내진 않아도 많은 국내 브랜드가 여러 변화를 꾀하고 있는 점도 글로벌 SPA의 영향이다. 신상품 주기가 빨라진다든지, 반응 생산하는 물량 비중이 높아진다든지, 매장 면적이 점차 넓어진다든지, 제품 가격을 낮추는 것 등이 그 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변화를 꾀하는 브랜드들이 비단 자라, H·M, 유니클로 등과 같은 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업체들에 국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업계의 한 전문가는 “이는 글로벌 SPA들이 국내 업체들과는 ‘다른 문법’을 구사하기 때문이고, 그 문법을 국내 소비자가 선호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1 유니클로의 티셔츠 프로젝트 ‘UT’의 광고 이미지. 2 자라의 아동복 이미지. 3 H&M 매장 계산대가 계산하려는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다.
브랜드전략컨설팅회사 PFIN의 이정민 대표는 “유니클로가 들어오고 나서야 우리나라 남자들도 누가 사다준 옷을 입기만 하는 것에서 벗어나 직접 쇼핑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글로벌 SPA 브랜드의 매장에서는 점원들이 손님을 따라다니지 않는다. 손님은 아무 간섭을 받지 않고 매장을 돌아다니며 옷 구경을 하다가 원하는 제품을 마음껏 입어보는 자유를 누린다. 자라는 ‘오직 손님이 물어볼 때만 응대한다’는 경영지침을 갖고 있을 정도다. 이들 매장에서는 “저기요, 티셔츠를 입어봐도 되나요?”라고 물어볼 필요가 없다. 티셔츠, 바지, 스커트, 셔츠 등 원하는 제품들을 골라 피팅룸에 가져가면 된다. 피팅룸 안에 전신 거울이 달려 있기 때문에 점원 앞에서 “잘 어울리시네요” “사이즈가 딱 맞네요” 같은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
앞서 이 대표의 말은 한국 남성들이 점원의 응대를 불편해 하기 때문에 간섭받지 않는 SPA형 쇼핑 패턴을 환영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이는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자라 관계자는 “여성 고객 둘이 함께 매장에 오면, 각자가 헤어져서 자유롭게 구경하다가 피팅룸 앞에서 만나곤 한다”고 전했다.
엄마, 아빠 손잡고 SPA 나들이
패셔니스타들이 모인다는 H·M 명동매장이지만, 특히 주말이면 유모차족도 눈에 자주 띈다. 이는 H·M 4층 전체가 신생아에서부터 청소년까지 아우르는 유아동복을 취급하기 때문. 또 3층은 남성복 코너여서 엄마, 아빠, 자녀가 단체로 쇼핑하러 나오는 경우도 많다. 이는 자라나 유니클로 등도 마찬가지다. 의류뿐만 아니라 구두, 운동화, 속옷, 가방, 액세서리 등도 갖추고 있어 한 매장 안에서 온 가족에게 필요한 패션잡화를 모두 구매할 수 있다.
이처럼 글로벌 SPA 브랜드들은 대형매장에서 원스톱 쇼핑을 할 수 있도록 매우 다종다양한 상품을 구비하고 있다. 매장 크기가 최소 200평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이 고수하는 원칙. 물론 이 매장을 꽉 채울 수 있는 상품력도 갖췄다. 색상, 사이즈별로 구분하자면 매장당 2만여 가지의 아이템을 구비하고 있다. 유니클로 안성수 사장은 “유니클로가 처음 할인매장에 입점하려고 할 때 200평을 요구했더니 다들 ‘그러다 망한다’며 걱정해주었다”고 회상했다.
“그 넓은 공간을 채울 정도로 상품력이 있느냐는 우려였죠. 하지만 유니클로 명동점은 2300㎡(700평) 규모입니다. 이런 대형 매장도 서로 부딪칠 정도로 손님이 많고, 수익도 충분히 나고 있습니다.”
한편 H·M은 수시로 입장 제한을 해야 할 정도로 2600㎡의 매장을 채우고도 남는 손님들이 몰려와 트래픽 분산 차원에서 명동에 2호점을 낸다는 계획이다.
“가격과 품질 둘 다 포기 못해”
명동 눈스퀘어에 입점한 망고 매장 전경. 제일모직은 글로벌 SPA 브랜드 ‘망고’의 국내 유통 위탁업체로서 SPA 시장에 진출했다.
이 같은 전략은 품질 대비 가격 자신감이 있기에 가능하다. 이들은 전세계 소비자를 대상으로 대량 생산하기 때문에 가격을 대폭 낮출 수 있다. 또 생산공장과의 장기적이고 유기적 네트워크로 품질까지 담보한다. 패션 전문 컨설턴트 이은희 트렌드인코리아 대표는 이들 브랜드가 “싼 가격(Low Price)이 아닌 합리적인 가격(Resonable Price)을 선보이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국내 브랜드들도 무조건 싼 게 아니라 품질과 비교해 합리적인 가격이어야 글로벌 SPA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들이 품질과 가격 면에서 각광받는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뚜렷해진 ‘스마트 소비’ 경향과도 밀접하다. 최근의 불황 이후 원한다면 가격 구애 없이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의 실용성과 가치, 품질, 자신의 경제력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스마트 소비가 선진국을 중심으로 세계적으로 일상화되어가고 있다. 자라의 국내 진출 당시 컨설팅을 담당했던 국성훈 파비즈글로벌 대표는 “글로벌 SPA들의 좋은 품질과 합리적인 가격을 경험해본 소비자가 입점 수수료 등으로 가격이 높게 책정된 백화점 옷을 소비하려 할지 미지수”라고 지적했다.
백화점을 벗어나다
명동의 TNGT 플래그십 스토어 전경. LG패션은 TNGT를 ‘비즈니스 피플을 위한 SPA형 토털 브랜드’로 키운다는 전략이다.
이에 따라 소비자도 백화점을 벗어나 쇼핑하기 시작했다. “글로벌 SPA가 가두 상권을 활성화하고, 침체에 빠졌던 쇼핑몰 상권을 회복시켰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90년대 젊은이의 문화를 이끌었던 압구정 로데오 거리도 최근 오랜 침체기를 벗어나 글로벌 SPA들의 진출로 활기를 띠는 분위기다.
이 때문에 글로벌 SPA가 백화점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온다. 대기업 계열의 패션업체 관계자는 “글로벌 SPA의 주요 고객은 패션에 민감한 계층이기 때문에 동대문 손님보다는 백화점 손님이 아닐까 하는 게 우리의 시각”이라고 말했다. 이은희 대표는 “SPA뿐만 아니라 대형 쇼핑몰, 온라인 시장, 스마트폰 등 유통 채널이 다양해져가고 있기 때문에 백화점 영향력은 계속 감소하는 추세”라며 “백화점도 이젠 임대 위주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콘셉트를 추구하는 등 변화를 꾀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500장 對 1만장
이처럼 글로벌 SPA 방식의 패션사업이 대세라면 이를 따라가는 것이 맞다. 그러나 국내 패션업체들이 이들의 생산, 유통, 가격 정책을 따라가기에는 아직 역부족인 것이 사실이다.
글로벌 SPA의 가장 큰 장점은 생산 시스템이 안정화되어 있다는 점. 자라 이외의 글로벌 SPA들은 국내 업체들과 마찬가지로 자체 공장 없이 외주 제작하고 있지만, 이들은 자기 브랜드만을 장기적으로 취급하는 ‘전용 공장’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따라서 품질과 가격이 안정적이다. 이정민 대표는 “국내시장에서만 영업하는 우리 브랜드들은 한 아이템당 500장 주문하기도 능력에 부치지만, 글로벌 SPA들은 전세계 매장을 대상으로 1만장씩 주문하기 때문에 비교가 안 된다”고 지적했다. 대기업 계열 여성복 브랜드 관계자는 “물량이 적다보니 공장에서 우리 브랜드만을 특별하게 여기며 품질에 신경 써주지 않는다”며 “영세한 중국 공장들이 언제 문 닫을지 몰라 장기계약을 하기도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다음은 유통 문제다. 대부분의 국내 브랜드들은 직접 유통을 해본 경험이 없이 주로 백화점에 의존해왔다. 백화점에 입점하면 수수료만 부담하면 되기 때문에 초기 투자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고, 집객(集客)도 백화점이 알아서 해준다. 한 패션업계 인사는 “2000년대 중반 일부 백화점이 각 브랜드당 매장 면적을 15평에서 30평으로 넓혀준 적이 있다”고 전했다. 그에 따르면 얼마 안 가 매장 크기가 원래대로 축소됐다고 한다. 각 업체들이 넓어진 공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고, 매장이 넓어진 만큼 매출이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인사는 “그만큼 국내 브랜드들은 마케팅과 디스플레이 능력 등 스스로 고객을 모으는 노하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치열한 내부 경쟁으로 기술력이 신장된 국내 패션업계는 디자인, 소재, 재단, 봉제 등에 있어 실력이 뛰어나다는 강점을 가진다. 따라서 글로벌 SPA들의 유통, 마케팅 전략과 노하우를 배운다면 앞으로 기회가 있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이에 대해 이정민 대표는 “비즈니스 모델을 베끼기만 해선 안 된다”며 “타 브랜드와 구별되는 자기 브랜드만의 차별화 전략이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국성훈 대표는 H·M이 콜래보레이션으로 높은 성과를 올려도 이를 따라가지 않는 자라의 태도에 주목할 것을 주문했다. 그는 “H·M의 화려한 콜래보레이션에도 자라는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신속한 반응 생산 시스템을 더욱 정교화해가며 계속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은희 대표는 “이들보다 무조건 더 싸게 공급하려고만 하는 시도는 우려가 된다”며 “소재 등을 차별화해 무조건 싼 가격이 아닌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공습은 계속된다
글로벌 SPA의 공습은 H·M으로 일단락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자라의 인디텍스사는 자사 브랜드 ‘버시카(Bershka)’와 ‘마시모 듀티(Massimo Dutti)’를 올해 안에 한국에 진출시킬 계획이다. 버시카는 여성복, 남성복, 유아동복 등을 자라보다 젊고 트렌디하고 저렴한 가격에 선보이는 종합 브랜드이며, 마시모 듀티는 자라보다 고급한 여성복 브랜드로 이 두 브랜드는 이미 30개국 이상에 진출해 있다. 또 탑숍(TOPSHOP), 아베크롬비 앤 피치(Abercrombie · Fitch), 제이크루(J.Crew), 홀리스터(HOLLISTER) 등 다수의 글로벌 SPA 브랜드가 줄줄이 한국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다. 국내 패션 브랜드들이 이참에 업그레이드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