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전쟁 때 만들어진 무지개 제초제가 고엽제의 원조
- 모기, 거머리 막으려 몸에도 바르고 군화에도 뿌리고
- 미군, 우리 국무총리 허락받고 고엽제 140만ℓDMZ에 살포
- 퇴역 주한미군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온 충격적인 증언들
- “가해자인 미국이 해결할 문제를… 한국인들에게 미안하다”
미군기지 내 고엽제 매립 사실을 증언한 전 주한미군 하우스씨.
그의 증언이 보도되자마자 한국 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그가 말하는 고엽제는 개인의 건강장애뿐만 아니라 수대에 걸쳐 기형 및 건강장애를 일으키고, 광범위한 인위적 환경파괴로 심각한 생태계 교란을 야기하는 등 인류를 위협하는 심각한 물질이기 때문이다.
고엽제가 처음 개발된 동기는 아이러니하게도 6·25전쟁이다. 전쟁 발발 당시가 6월이니 한국은 초목이 울창할 때였다. 북한군은 그 울창한 산림 속을 통해 남하했고 적을 식별해야 하는 한국군과 미군에게 이 초록색 산림은 엄청난 장애가 됐다. 고엽제는 “어떻게 하면 이 나무들과 산림을 제거하고 시야를 확보해 전투를 할까”하는 고민이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약품을 뿌려 나무의 잎사귀를 말려 죽여야 시야를 확보한다는 생각으로 만든 화학물질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고엽제의 이름이 무지개 제초제(Rainbow Herbicides)였다. 이 물질을 담은 드럼통에 에이전트 블루·오렌지·화이트·퍼플 등 각기 다른 색 페인트를 칠해 구분했다. 무지개라는 예쁜 이름을 쓰며 색깔을 달리 표시한 이유는, 각각의 고엽제가 성분이 조금씩 달라 죽이고자 하는 식물에 따라 에이전트 오렌지를 쓸 것이냐, 블루를 쓸 것이냐가 달랐기 때문이다.
에이전트 오렌지는 ‘2,4-D’와 ‘2,4,5-T’라는 화학 성분이 반반씩 섞인 고엽제다. 이 두 분자 모두 식물의 성장호르몬인 옥신(Auxin)과 구조가 비슷하다. 호르몬은 식물이나 동물 같은 다세포 생물이 자라고 생존하는 데 필요한 세포 사이의 신호를 전달하는 물질이지만, 성장호르몬인 옥신은 농도가 아주 높으면 오히려 식물의 잎을 말려 죽인다. 이 원리를 응용해 만든 것이 고엽제다. 식물에 에이전트 오렌지를 뿌리면 식물은 이것을 화학약품이라고 생각지 못하고 성장호르몬인 옥신이라고 스스로 착각해 죽어가는 것이다. 즉 식물에게 고엽제를 성장호르몬이라고 속이면서 식물이 자살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난 6월2일 경북 칠곡에 있는 캠프 캐럴에서 한미공동조사단이 고엽제 등 묻혀있는 물체를 발견하기 위한 지하수 채취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미국 재향군인국 자료에 따르면 당시 살포된 고엽제 양은 무려 8360만ℓ에 달했다. 그렇게 미국 화학회사는 베트남전쟁으로 고엽제를 대량 판매하며 큰돈을 벌어들였고 고엽제는 막대한 군수 비즈니스를 창출했다. 미군은 이 고엽제를 사용해 전투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게 돼 좋았고 미국 화학회사는 정부에 고엽제를 팔아 엄청난 이익을 얻어 좋았다. 적어도 이 고엽제가 인간에게 엄청난 후유증을 준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인간이 만든 최악의 물질 다이옥신
(위) 6·25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로 쳐들어온 북한군 (아래) 베트남전에 참여한 미군
베트남전 당시 전장에서 이 고엽제를 살포하던 병사들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하루하루 전투가 치열했던 상황이라 고엽제 후유증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비행기에서 뿌려지는 이 고엽제를 모기약이라고 착각하고 온몸으로 맞거나 거머리 등을 방지하기 위해 군화 속에 뿌리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뿌린 지 4분 안에 시야를 확보해주는 이 고엽제가 전장에서는 얼마나 고마운 존재였는지 모를 일이다. 다이옥신이 무엇인지, 자신들의 미래가 어찌 될지에 대해 그들은 당시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미국이 고엽제에 함유된 발암물질인 다이옥신 성분을 파악하고 고엽제 사용을 금지한 때는 1971년이다. 하지만 이미 1964년부터 미국과학자연맹에서는 미국이 에이전트 오렌지를 사용한 생화학무기를 실험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1966년에는 존 에드설 하버드대 교수를 비롯해 30여 명의 과학자가 에이전트 오렌지 살포는 야만적 행위이며, 군인과 민간인 모두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이라고 경고했다. 고엽제 생산 회사들은 생산 단계에서 이미 이 위험성에 대해 알고 있었고 미국 정부도 충분히 인지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베트남전에 이 고엽제가 광범위하게 쓰일 수 있었던 것은 냉전시대 안보 상황 때문이었다. 고엽제가 인간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물질이지만 그때 자유주의 국가를 공산주의 국가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냉전의 신념은 고엽제 휴우증에 대한 우려를 뛰어넘었다. 군사안보를 위해서라면 민주주의나 환경, 복지 등은 희생당해도 된다는 구시대 안보개념이었다. 원래 안보란 외부의 군사적 침략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인데, 이를 이유로 다른 가치들을 희생시켜도 무방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현실은 바로 그 안보 개념의 결과이다.
고엽제 휴우증을 살펴보자. 발암성이 가장 높다는 맹독성분인 다이옥신에 의한 폐암, 간암, 임파선암, 혈액암 등의 건강장애가 제일 심각하고, 심각한 생식기능장애, 면역기능 손상으로 각종 전염성 질환에 걸릴 수가 있다. 호르몬조절 기능 손상으로 불임, 기형·장애어린이 출생, 발육 장애 등이 올 수 있다. 에이전트 오렌지에는 맹독성인 다이옥신 외에도 인체에 해로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여러 화학물질이 함유돼 있다. 피부발진, 사지감각손실, 신경손상, 성욕소실, 불면증 등을 일으킬 수 있고, 이외에도 두통, 위장염, 신장염, 장출혈, 혈관질환 등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마땅한 치료제가 없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다. 이에 유엔은 고엽제를 ‘제네바 일반의정서’에서 사용 금지한 화학무기로 보고, 베트남전쟁 이후 고엽제 사용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다.
고엽제 후유증은 베트남전이 끝난 이후 참전군인들 사이에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병의 이름도 모르고 시름시름 앓는 원인이 고엽제라는 사실을 자각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체에 치명적인 손상을 끼치는 에이전트 오렌지 때문이었지만 관계당국은 초기에는 참전 군인들의 원인 모를 발병에 대해 고엽제와의 상관성을 발뺌하거나 부인했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고엽제와 참전군인들의 질병 간 상관관계가 밝혀졌다. 사람들은 에이전트 오렌지가 밀림을 고사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그에 노출된 사람들을 오랜 고통에 시달리다가 결국 죽게 만들고 유전적으로 후손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고엽제 후유증 환자들을 슬로 블릿(slow bullet)이라고 부른다. 서서히 죽어간다는 뜻이다.
이 고엽제의 정체를 알고 난 후 미국 베트남 참전군인들은 ‘오렌지 희생자회’를 결성했고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 사회에서 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979년 9월 오렌지 희생자회가 에이전트 오렌지를 제조했던 다우케미컬 주식회사 등 7개 업체를 대상으로 400억달러 규모의 집단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이 소송은 무려 5년간 끌다가 1984년 5월 업체에서 고엽제 피해자와 가족에게 1억8000만달러의 기금을 준다는 약속을 받고 합의해 사법부의 판단을 보기도 전에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애초 오렌지 희생자회가 제기한 400억달러에 비하면 그 합의금은 정말 생색내기에 불과했다. 베트남전에 사용된 고엽제의 피해를 군인들이 증명하기가 힘든 상황이었고 너무 오랜 시간 소송에 지쳐서 고엽제 제조회사가 내민 이 합의금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이후 미국 정부는 고엽제 피해에 대해 침묵했으며 인정하더라도 되도록 보상 범위를 줄이고자 노력했다. 미국이 모든 고엽제 피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면 미국의 베트남 참전 군인뿐만 아니라 호주, 한국, 뉴질랜드 등 다른 참전 국가의 군인들까지 가세해 그야말로 소송 러시를 가져올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다이옥신 독성, 청산가리 1만배
한국은 1965년부터 1973년 철군할 때까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32만명을 베트남전쟁에 파병했다. 이 전쟁에서 한국군은 4960명의 전사자, 1만962명의 부상자를 냈다. 전쟁은 어쩌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사전에 아무런 정보나 지식 없이 미군에 의해 고엽제에 정면으로 노출됐던 파월 장병들의 고통이 끝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병사들도 고엽제를 몸에 바르면 정글에서 모기 등 해충을 방제해주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귀국 후 서서히 고엽제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름도 모르는 병마가 그들을 괴롭혔다. 하지만 그 원인이 고엽제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세월만 흘렀다. 그러다가 1991년 호주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이 내한해 고엽제의 피해로 원인 모를 병을 앓아 죽어가고 있다고 호소하면서 고엽제 문제가 국내에도 알려지게 됐다.
1970년대 중반부터 고엽제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미국과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대처는 너무 늦었다고 하겠다. 현재 국내에는 ‘대한민국고엽제후유의증전우회’ ‘베트남전쟁참전전우회’ 등이 조직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엽제로 인한 국내 사망자는 현재에도 한 해 2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어쩌면 고엽제로 인한 사망자가 베트남전 전사자 수를 뛰어넘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고엽제 후유의증환자 지원 등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한 것은 1993년 2월이다. 이후 국가보훈처에서는 고엽제 피해자들에게 보상 및 치료를 실시하고 있다.
위의 사실들은 어디까지나 베트남전이라는 특수한 전쟁 상황에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한국에서도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이 치명적인 고엽제가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으로 사용됐다는 점이다. 특히 1968년 4월부터 비무장지대(DMZ) 서부전선에서 동부전선까지, DMZ 남방한계선 남쪽에서 민간인통제선 이북 지역으로 2200만평(약 7273만㎡)에 고엽제가 살포됐다. 철책선 양쪽 100여m와 전술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한 지역, 그리고 주요 도로 양쪽 30여m에 주로 고엽제가 살포됐다. 이 지역은 남한과 북한이 직접 대치하고 있는 지역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다. 북한 간첩이 DMZ에 울창하게 퍼져 있는 수풀을 헤치고 남한으로 올 수도 있다. 그래서 미군 입장에서는 이 수풀이 적의 동향을 살필 수 없는 결정적 장애에 해당됐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미군은 고엽제를 사용했다.
당시 뿌려진 고엽제는 베트남전 때 사용된 것과 똑같은 에이전트 오렌지였으며 원액 2만1000갤런(약 315드럼)을 경유와 3대50으로 섞어 사용했는데, 살포한 분량이 무려 140만ℓ, 드럼통으로 7000여 개에 달했다고 알려져 있다. 해제된 미 국방부 문서로 주한미군사령부가 1968년 미국 화생방사령부에 보낸 고엽제 살포작전 평가보고서에 따르면 주한미군은 1968년 김신조 등 무장간첩이 일으킨 1·21사태 이후 ‘식물통제계획 1968(Vegetation Control Plan CY-1968)’이라는 작전계획을 세워 한미 합동으로 서부전선에서 동부전선까지 휴전선 DMZ 남방한계선 이남 민간인 통제구역 일대 2200만평에 고엽제를 집중 살포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고엽제 살포작전은 당시 본 스틸(Charles H. Bonesteel) 주한미군사령관이 미국 정부에 건의해 딘 러스크(Dean Rusk) 미 국무장관의 승인을 받은 뒤 1968년 9월20일 정일권 당시 국무총리의 재가를 받아 실시된 것으로 돼 있다. 한미 양국 당국은 1995년 미 상원의 증언을 통해 1968년 4월15일부터 5월30일까지, 1969년 5월19일부터 7월31일까지 두 차례 DMZ 일대에 고엽제가 살포됐다고 공식 발표했다.
영문도 모른 채 시름시름 죽어가
당시 살포작업에는 주로 한국군이 동원됐고 주한미군은 감독만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국방부의 각종 기록들에 따르면 살포작업에 2만6600여 명의 한국군이 동원됐다. 그러나 현재 드러나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보다 더 많은 7만명가량의 한국 병사가 이 작업에 동원되었으리라 추측된다. 베트남의 비극은 한반도에서도 되풀이됐다. 고엽제의 독성에 대해 전혀 모르던 한국 병사들은 아무런 보호 장비도 없이 살포작업에 동원됐다. 고엽제 중에 가장 독성이 심하다는 모뉴런 같은 분말 고엽제를 철모에 담아 맨손으로 뿌렸다는 증언도 나왔다.
오클라호마 대학 앨빈 영 박사가 미 국방부 용역을 받아 2006년 12월 국방부에 제출한 고엽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군은 분말 형태의 제초제인 모뉴런을 철모에 담아 손으로 뿌리기도 했다. 1968년 4월15일부터 4월28일까지 손 또는 기계로 1560에이커에 걸쳐 1에이커당 255파운드씩 모두 39만7800파운드를 뿌렸다는 것이다. 한국의 최고위 관리는 3만명 이상의 한국 전역 군인이 고엽제 노출로 인한 질환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6월1일 유영숙 환경부 장관(앞줄 가운데)이 장관 취임 첫 일정으로 경북 칠곡 캠프 캐럴 미군기지 내 고엽제 매립 추정지역을 방문해 존슨 미 8군사령관의 설명을 듣고 있다.
그렇게 뿌려진 고엽제 성분은 토양이나 동식물에 30여 년 동안 잔류하기 때문에 군인들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주민들도 고엽제 피해에 노출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당시 전투 지역이었던 베트남은 물론 혈맹이라는 한국에서 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할 때 이미 고엽제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베트남 참전 미군 고엽제 피해자들의 소송을 담당해 뉴욕주 한 지방법원의 판결문에 등장하는, 미국 대통령 과학자문위원이었던 고든 맥도널드 박사의 증언은 이를 말해준다. 판결문에는 한국에서 에이전트 오렌지가 살포되기 3년 전인 1965년 백악관 회의에서 이미 고엽제가 인체에 끼치는 유해성에 관해 논의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DMZ에 고엽제인 에이전트 오렌지가 대량으로 살포됐다는 사실이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주한미군 병사였던 스티브 하우스씨가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미국 언론에 증언한 후에야 국내에 그 심각성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스티브 하우스씨는 1978년, DMZ가 아닌 후방 경북 왜관의 캠프 캐럴에서 중장비 기사로 일했다. 그는 “그 드럼통을 묻는 작업을 하기 전에 나는 드럼에 표시된 ‘에이전트 오렌지 베트남’이라는 글자를 똑똑히 보았다. 대략 600여 개의 드럼을 헬기장 근처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으며 그때 나와 같이 근무한 다른 병사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증언했다. 그가 심각한 간 이상을 느끼며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바로 당시 한국 땅에 묻었던 고엽제 드럼통이었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당시 같이 작업한 동료를 찾았고 그도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을 알고 자신의 병이 그 고엽제에서 왔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동분서주하며 자신의 병을 규명하러 미 보훈처를 쫓아다녔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보훈처는 내가 한국에서 고엽제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완전 부정했다. 보훈처에서는 ‘당시 캠프 캐럴은 병참기지였다. DMZ 같은 군사 작전 지역이 아니기에 고엽제 노출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이 사실을 밝히려 노력했다.”
그가 애리조나 지역 방송국인 피닉스의 KPHO-TV의 ‘5 investigater’라는 프로그램에 제보하면서 그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는 캠프 캐럴에서 근무한 13개월을 포함해 4년간 군 생활을 마치고 고향 미시간 주에 정착했으나 3년 전 발전소 기사로 일하던 중 건강악화로 해고된 뒤 애리조나로 이주했다. 방송 후 한국 언론뿐만 아니라 미국 CNN이나 ABC까지 가세해 그의 이야기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하우스씨는 “나는 이제 죽어가고 있다. 앞으로 있을 몇 번의 수술로 나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 사실을 한국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나는 보훈처에서 전혀 혜택을 받지 못했지만 나와 같이 근무했던 다른 동료들이라도 병원비 없이 치료를 받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저는 이미 늦었지만 한국 사람들은 아직 늦지 않았다”라고 필자에게 말했다.
철모에 담아 맨손으로 뿌렸다
다른 주한미군 퇴역 군인들의 증언도 봇물 터지듯 이어졌다. 전역 주한미군들의 인터넷 사이트 커뮤니티 ‘한국전 프로젝트(koreanwar.org)’에는 한국에서 고엽제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다루어졌는지에 대한 퇴역군인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 지역도 DMZ와 부천, 군산, 의정부, 춘천 등으로 다양하다. 1968년부터 3년간 부평 애스컴 기지(캠프 마켓) 공급수송 부서에서 일했던 랜디 왓슨은 “1967년 당시 부평기지 내에 고엽제를 보관했다. 우리는 한국 남부지방과 DMZ 등 한국 전역으로 물자를 수송했다. 고엽제가 든 것으로 추정되는 드럼통들을 DMZ로 몇 차례 실어 보냈으며, 수송 과정에서 드럼통에서 물질이 새어 나오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1968년 애스컴 기지에서 근무했다는 웨인 올굿은 같은 사이트를 통해 “당시 부대에 근무했던 동료로부터 애스컴 기지에 고엽제가 보관돼 있었으며, 창고에 있던 고엽제 통들이 손상돼 있었다고 들었다. 나는 2000년부터 암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했다.
지난 6월 2일 경북 칠곡군 왜관읍 캠프 캐럴 내 헬기장 부근에서 미군측 관계자들이 지하수 채취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페이스북에는 당시 춘천 캠프에 근무하던 동료들이 모여들어 증언을 이어갔고 그중에는 아주 충격적인 사실도 있었다. 1972년 캠프 페이지에서 핵무기 유출 사고도 있었다는 것이다. 필자와 인터뷰한 댈러스 스넬씨는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억했다. “1972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찌는 듯한 무더위가 극성을 부리던 날이었다. 그날 점심을 먹고 쉬는데 갑자기 전 부대에 사이렌이 울렸다. 캠프 페이지에 있던 나와 내 동료들은 처음엔 그 이유를 전혀 몰랐다. 사병과 헌병 등이 3중으로 경비하는 어니스트 존 핵미사일 보관소에 모였다. 우리는 그 장소를 닉네임으로 메탈룸(metal room)이라고 불렀다. 헬기 등이 보관된 격납고나 탄약고와는 다른 장소다. 이 메탈룸이 열리면서 부대원 20~30명이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핵탄두가 장착된 어니스트 존 미사일을 등지고 디펜스 자세를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0~30명이 미사일을 등지고 빙 둘러쌌다. 나중에 미사일 탄두에 무슨 문제가 생겨서 헬기가 수송하러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페이스북에는 그의 증언 밑에 코멘트로 당시 그와 함께 이 핵탄두 수송 임무를 맡았던 또 다른 동료의 증언이 덧붙여졌다. 게리 폴씨는 “나도 그날을 아주 똑똑히 기억한다. 나는 그 상자를 들고 나른 사람 중 하나다”라고 했다.
필자는 이 사건에 대한 또 다른 증인들을 수소문했고 그날의 사건을 알고 있는 3명을 더 접촉할 수 있었다. 그들의 진술과 목격담은 대부분 일관됐다. 30여 년 전에 벌어진 일이지만 대부분의 진술이 일치했다. 하지만 스넬씨를 제외하곤 모두 실명을 밝히기를 거부했다. 그들 대부분이 제대 직전 비밀서약을 했기 때문이다. 비밀서약이란 복무 중 벌어진 사건이나 임무에 대해 일정기간 비밀을 유지할 것에 서명한 증서다. 그 때문에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퇴역군인은 “캠프 페이지에 핵무기가 있다는 사실조차 비밀로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 이 핵무기 사고가 났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당시 그 사고는 명백한 핵탄두 고장으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도 그때 그 박스를 날랐던 사람이고 지금은 만성 폐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다. 2022년 나의 비밀서약 기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다 밝힐 수 있다.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지금은 말할 수 없는 처지다”라고 말했다.
앞서 고엽제 살포와 핵탄두 사고를 증언한 댈러스 스넬씨는 운 좋게 이 비밀서약을 하지 않은 경우여서 필자에게 증언할 수 있었지만 다른 퇴역군인들은 대부분 이 비밀서약에 묶여 있어 증언을 못했다. 스넬씨는 “우리들은 그때 춘천에 버리고 온 고엽제를 그냥 독성 쓰레기(Toxic waste)라고 부른다. 고엽제라는 말을 쓰는 것 자체가 무섭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기억에는 그 드럼통에 칠해진 아름다운 페인트 색깔을 똑똑히 기억한다. 보라색, 오렌지색, 파란색… 그것은 고엽제 드럼통이었다. 운전병으로 일하던 나는 그것들을 항상 군용 차량에 비치했다. 고엽제는 전투 장비와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벌어지면 언제든 내 두 손으로 그 물질들을 쥐고 흩뿌려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그 위험성을 너무도 몰랐다. 그래서 내가 지금 백혈병과 신장 이상으로 죽어가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고엽제 살포도 핵탄두 사고도 모두 이 캠프 페이지에 있었던 사실이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춘천 시민들이 짊어지고 가야 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모든 것이 밝혀져 적어도 내가 그리고 춘천 사람들이 왜 이런 피해를 당했는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누구의 책임인가?
이번 한국의 고엽제 파동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미국 정부로서는 한국에 주둔했던 미군에 대한 고엽제 문제는 여러 가지 부담이다. 우선 보상 범위가 문제다. 그동안 모르쇠로 일관하던 미국 정부가 한국에서의 고엽제 살포를 최초로 인정한 것은 1968년 당시 동두천에서 주한미군 의무병으로 복무했던 미군 병사가 통증과 소화기 이상, 암 등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다 1999년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내 피해보상판정을 받은 사건이 계기가 됐다. 이 사건으로 처음 확인된 것이다. 그전까지는 미국 정부 입장에서 한국에 고엽제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소송으로 미국 정부는 한국에서도 고엽제가 사용됐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여파는 곧장 한국으로 이어졌다. 그 위험한 고엽제가 단 한 명의 병사만을 후유증에 시달리게 했을 리는 만무하다. 더 많은 피해자가 한국 땅과 미국에 퍼져 있다는 뜻이다. 그 후 미 보훈부는 ‘한국 고엽제 피해 미군 지원 법령’을 통해 이전까지 ‘1968년 4월부터 1969년 7월까지 DMZ 인근 부대에 근무한 군인’에 대해서만 지원하던 고엽제 피해 보상 수혜범위를 ‘1968년 4월1일부터 1971년 8월31일까지 근무한 군인’으로 2년 늘렸다. 이 규정에 의하면 앞서 증언한 스티브 하우스씨나 댈러스 스넬씨는 보상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 모두 DMZ 인근이 아닌 후방 지역에 근무했기 때문이다. 하우스씨는 “보훈처는 후방에서 고엽제 드럼통을 묻어서 후유증이 생겼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 규정이 빨리 바뀌어야 한다. 후방에 있었어도 나는 고엽제에 노출된 사람 중 하나였다”라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자국 퇴역군인에 대한 보상도 이처럼 야박한데 DMZ에서 고엽제 살포로 고통받는 한국 후유증 환자들에 대해 미국 정부의 법적 보상은 기대할 수가 없는 처지다. 1995년 이미 윌리엄 코언 당시 미국 국방장관에 의해 DMZ 고엽제 살포가 한미 간 협의 아래 한국 정부가 결정한 일이므로 미국은 고엽제 보상의 법적 책임을 부담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다. 우리 정부에서는 한미 간 협의는 있었지만 살포작업이 미군의 요청에 따라 미군 주도하에 실시됐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미국 정부는 미국 정부대로, 우리 정부는 우리 정부대로 피해 보상에 관한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런 미국 정부가 하우스씨 증언 이후 입장을 조금 바꿨다. 문제가 된 경북 왜관의 캠프 캐럴 고엽제 매몰 사건에 대한 한·미 공동조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존 존슨(John D·Johnson) 미8군사령관이 밝힌 것이다. 그는 “이번 사안의 긴급성과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며 “동 사안에 대해 한국 측과 긴밀히 협조·협력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내 여론이 만만치 않게 흘러가자 미국으로서도 보다 적극적인 조사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한미 합동 조사팀을 꾸리고 캠프 캐럴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얼마나 진실이 밝혀질지는 미지수다.
더는 숨길 수 없다
이번 조사와 관련해 미국 정부가 신경을 쓰는 것은 사실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다. 한국 내 미군기지에 광범위하게 고엽제가 매몰됐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미국 정부는 소파(SOFA)규정에 따라 적당한 선에서 피해보상을 하면 되지만, 정작 미국 본토에서는 퇴역 주한미군들의 소송이 줄줄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에 보상해주는 문제보다 미국 내 보상 문제가 더욱 골머리를 앓을 사안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미국 입장에서는 가능하면 이 사건을 축소해 보상 범위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국방부 예산도 줄이고 이라크, 아프간 두 전쟁으로 인한 전비도 대폭 줄이고자 긴축 재정에 나선 미국 정부로서는 천문학적인 고엽제 보상비용을 가능한 한 줄이려 할 것이다. 하우스씨는 이 부분에 대해 “한국인들이 이 사실을 규명하는 것에 보다 적극적으로 앞장서주기를 바란다. 나뿐 아니라 자신이 고엽제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이름 모를 병으로 고통받는 한국 사람들이 이제는 나서야 할 때이다”라고 말했다. 춘천에서도 캠프 페이지에 대한 재조사가 촉구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스넬씨도 “반가운 소식이다. 가해자인 우리가 나서서 해결했어야 하는 문제인데 오히려 피해자인 한국인들이 나선 것에 대해 미안함과 감사함을 느낀다. 진실이 밝혀져서 모든 것이 명확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고엽제는 반인륜적인 화학약품이다. 그래서 고엽제 문제는 인권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대를 이어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자신의 병이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른 채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것은 명백한 인권 유린이다. 몇 십 년 전 전쟁의 상처가 지금도 끝나지 않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새로운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이라크, 아프간 전쟁을 치르는 동안 우리가 모르는 제2의 고엽제 문제가 또다시 몇 십 년 후에 나타날 수도 있다. 지금은 인간에게 치명적인지 모르고 사용한 그 무엇이 두고두고 우리 후손을 괴롭힐 수도 있는 것이다.
베트남전쟁 당시 고엽제를 팔아 큰돈을 벌던 미국 화학회사들이나 피해를 알고 있었지만 공산주의자 소탕에 열중한 나머지 인간의 고통을 외면했던 미국 정부는 지금 영화 ‘괴물’에 나오는 괴생명체와 같은 고엽제 문제를 만났다.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이라도 철저한 조사를 통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
하우스씨는 “한국이든 미국이든 고엽제 피해자들에게는 진실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우리 모두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권리를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노병의 한숨 섞인 마지막 말이 지금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가 지켜야 할 인권이며 바로 이것이 정부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