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호

K-기업가정신, 전 세계 기업인과 공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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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입력2023-07-28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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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기업가정신 수도’ 선포 5년 만에 국제포럼 개최

    • 憂國愛民, 事業報國이 핵심

    • 진주시는 ‘글로컬 혁신’ 본산

    7월 10일 경남 진주시 능력개발관 대강당에서 ‘K-기업가정신 진주 국제포럼’ 개회식이 열렸다. [홍중식 기자]

    7월 10일 경남 진주시 능력개발관 대강당에서 ‘K-기업가정신 진주 국제포럼’ 개회식이 열렸다. [홍중식 기자]

    기업(企業)의 사전적 의미는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운용하는 자본의 조직 단위’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종잣돈을 들여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점포, 가게, 회사가 모두 기업인 셈이다.

    ‘영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한국이나 서구 기업은 본질적으로 같다. 다만 한국 기업에는 우국애민(憂國愛民), 사업보국(事業報國)이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정신세계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설움을 겪고,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하는 과정에 한국의 기업가들은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이윤 추구 외에도 국가와 사회라는 공동체를 지키고 보존하기 위한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독특한 ‘K-기업가정신’이 생겨난 것이다.

    최빈국에서 70년 만에 세계 10위 경제대국으로 우뚝 올라설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한국 기업가들이 자발적이든 그렇지 않든 ‘나만 잘살겠다’는 이기심을 누르고 ‘함께 잘사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K-기업가정신의 모태, 진주시

    삼성 이병철, LG 구인회, GS 허만정, 효성 조홍제 등 한국이 배출한 글로벌 대기업 창업주 여럿이 자란 경남 진주시는 K-기업가정신의 모태와 같은 곳이다. 한국경영학회는 2018년 7월 10일 진주시를 ‘K-기업가정신 수도(首都)’로 선포했다. 그로부터 꼭 5년 뒤인 7월 10일 진주시 능력개발관 대강당에서 ‘K-기업가정신 진주 국제포럼’이 열렸다.



    진주 국제포럼은 진주에서 태동한 K-기업가정신의 뿌리를 찾고, 현대적 의미를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국내외 학자 및 기업인, 학생들과 공유하는 자리였다. 7월 10일부터 11일까지 이틀간 진행된 K-기업가정신 진주 국제포럼에서 논의된 다양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다.

    조규일 진주시장은 7월 10일 “인간을 존중하고 공동체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진주 K-기업가정신이 우리 사회가 직면한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과 기후변화 등 새로운 위기와 과제를 극복하고 더 나은 내일로 가는 희망의 사다리가 돼주기를 희망한다”며 K-기업가정신 진주 국제포럼의 시작을 알렸다.

    개회식에 이어 진행된 학술대회에는 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 첫 기조연설자로 나섰다. 박 전 장관은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은 저성장 기조가 굳어지고, 인구가 줄고 역량마저 낙후되는 추세 속에서 편가르기와 갈등이 증폭되고 규율과 기강이 느슨하며, 반(反)기업 정서가 만연한 상황”이라며 “과감하고 꾸준한 구조개혁을 통해 인적역량을 끌어올리고, 공정한 시스템을 복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K-기업가정신 진주 국제포럼에 참가한 국내외 학자들은 K-기업가정신의 뿌리를 주로 16세기 유학자 남명 조식의 ‘경의사상’에서 찾았다. 남명은 학문과 수양에만 집중하던 당시 주류 성리학과 달리 수양과 실천을 중시했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제자가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생전에 남명은 스스로 경계하기 위해 방울 ‘성성자’를 차고 다녔고, 불의한 것을 과감하게 끊어내기 위한 칼 ‘경의검’을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제자들에게는 “배운 것을 실천하면서 살라”고 강조했다. 남명 사후 20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남 지역에서 활동한 70여 명의 의병 중 곽재우, 정인홍 등 45명이 남명의 제자였던 것은 이같은 실천을 강조한 남명의 가르침에서 비롯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진주 승산마을과 한국 주요 기업 창업주 생가.

    진주 승산마을과 한국 주요 기업 창업주 생가.

    K-기업가정신 뿌리

    배종태 KAIST 교수는 “타인을 사랑하는 인(仁)을 강조한 유교적 가치관이 K-기업가정신에 큰 영향을 끼쳤다”며 “경(敬)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밖을 반듯하게 한다는 남명 조식의 경의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은 진주 지역에서 특히 실천 유학의 실사구시가 강조됐다”고 분석했다. 배 교수는 “이 같은 진주 지역의 역사적·사상적 특성이 기업가 육성과 기업가정신 창달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정대율 경상국립대 교수는 ‘남명의 경의사상과 K-기업가정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16세기 조선의 경상우도 대학자 남명이 확립한 경의사상과 우국애민, 실천 정신은 수많은 제자들이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 이후 그의 제자들과 후손들이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완성했으며, 구한말에는 일제 침략에 저항하는 항일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또한 그의 애민 정신은 진주를 중심으로 전개된 형평운동(사회적으로 차별받던 백정의 신분 해방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김구 선생이 주도하는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시작된 백산 안희제 선생의 백산상회와 백산무역주식회사 설립은 이후 지수면 승산마을 허만정 선생과 허순구 선생에게 기업 활동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으며, 삼성 이병철, LG 구인회, 효성 조홍제와 같은 세계적 기업인을 배출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아이만 타라비시 조지 워싱턴대 교수와 오준 전 유엔대사, 조규일 진주시장, 김기찬 가톨릭대 교수가 공동 집필한 논문 ‘한국 기업가 정신의 원류’에서는 K-기업가정신의 뿌리를 이렇게 해석했다.

    “기업가정신은 사고방식·정신을 의미하는 ‘마인드 셋’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실천행동’의 결합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국 기업가정신의 원류로서 남명 조식 경의사상은 마인드 셋으로서 ‘경’과 실천행동으로서의 ‘의’로 구성된다. 남명은 사람은 누구나 창조성과 혁신성을 갖고 있다고 봤다. 그래서 도전과 난관에 부딪혔을 때 타고난 창의성과 혁신성을 발휘하면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 중심 기업가정신은 자원이 없는 나라의 기업이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는 핵심 에너지가 됐다.”

    이춘우 서울시립대 교수는 ‘K-기업가정신의 고유성과 보편성’을 주제로 한 글에서 “K-기업가정신은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사회적 집단 경험을 통해 형성된 것”이라며 “기업 성장 때 정부 정책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는 점에서 ‘관치 기업가정신 또는 관제 기업가정신’이라 칭하는 것이 한국형 기업가정신의 특수성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불·선 사상이 융합된 한국의 사회문화적 가치관과 규범이 기업의 창업 이념과 경영 철학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K-기업가정신의 또 하나의 특수성”이라며 “기업가족주의, 연공서열주의 인사관리 관행, 수직적 위계적 관계, 종단적 노동시장 등은 한국의 사회문화적 가치관과 규범이 영향을 줘 나타난 특수성”이라고 분석했다.

    6·25전쟁을 겪은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근대화와 산업화 출발은 늦은 편이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부터 한강의 기적을 이루며 비약적인 고도성장을 이뤘다. 정부가 주도한 수출 장려 중화학공업 우선 정책과 우수하고 열정적인 인력이 맞물린 결과였다. 학자들은 한국의 고속 성장 바탕에는 기회 포착과 실행 중심의 한국인 특유의 기업가정신이 깔려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 경제전문지 ‘블룸버그’는 해마다 국가별 혁신지수를 발표하고 있다. 한국은 2014년 이후 2019년까지 6년 연속 1위를 기록했다. 2020년에는 근소한 차이로 독일에 1위를 내줘 2위를 기록했다가 2021년 다시 1위로 올라섰다.

    블룸버그 혁신지수는 연구개발 집중도, 연구 집중도, 특허 활동, 첨단기술 집중도, 제조업 부가가치, 생산성, 교육 효율성 등 모두 7개 항목의 점수를 합산해 국가 순위를 매긴다. 2021년 블룸버그 혁신지수 평가 때 우리나라는 연구개발 집중도 2위, 연구 집중도 3위, 특허 활동 1위, 첨단기술 집중도 4위, 제조업 부가가치 2위, 생산성 36위, 교육 효율성 13위 등의 평가를 받았다. 2위는 싱가포르, 3위는 스위스, 4위는 독일이 차지했다.

    K-기업가정신 진주 국제포럼에 참석한 인사들이 동아일보가 발행한 진주 국제포럼 특집 섹션을 살펴보고 있다. [허문명 기자]

    K-기업가정신 진주 국제포럼에 참석한 인사들이 동아일보가 발행한 진주 국제포럼 특집 섹션을 살펴보고 있다. [허문명 기자]

    대한민국 기업가정신 국립역사관

    김기찬 가톨릭대 교수는 “해외에서는 한국 제품보다 어떻게 그리고 왜 그렇게 빨리 성장하고 혁신할 수 있었는지 한국 기업의 성공 요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며 “그 답은 한국적 기업가정신, K-기업가정신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1960년대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 시대에서 3만5000달러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일등 공신은 K-기업이고, 이런 기업을 만든 정신이 K-기업가정신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한국의 고도성장을 뒷받침한 K-기업가정신의 특징을 △사람 중심 경영 △빠른 기회 포착력 △팀워크와 도전 정신 △글로벌 정신 △미래를 읽고 빠르게 업을 피보팅해 가는 동적 전환 능력을 꼽았다.

    김 교수는 서양이나 일본 등 다른 나라 기업가정신과 차별화되는 K-기업가정신의 뿌리를 남명 조식의 ‘시거이용현(尸居而龍見)’과 ‘연묵이뢰성(淵默而雷聲)’에서 찾았다. ‘시거이용현’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라”는 뜻으로 ‘기회 포착력’을 강조한 것이고, ‘연묵이뢰성’은 “때가 되면 큰소리칠 수 있도록 조용히 수련하라”는 의미로 ‘인재 육성’과 연결된다.

    한상만 전 한국경영학회 회장은 △기업의 성장과 사회 발전의 선순환 구조 확립 △제품과 서비스를 통해 창출되는 내재적 가치와 사회공헌과 같은 외부적 가치를 연결하는 공유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K-기업가정신이 나아갈 미래 방향으로 제시했다.

    K-기업가정신 진주 국제포럼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진주시는 삼성, LG, GS, 효성 등 진주 인근에서 태동한 한국 기업의 발전 과정과 글로벌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된 K-기업가정신을 입체적으로 보여줄 ‘대한민국 기업가정신 국립역사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기업가정신 역사관은 구인회 LG 창업주와 허만정 GS 창업주가 나고 자란 지수면 승산마을에 들어설 예정이다. K-기업가정신센터로 변모한 옛 지수초교 바로 옆에 기업가정신 역사관까지 건립되면 지수 승산마을은 K-기업가정신을 배우려는 전 세계 스타트업 창업자와 기업 CEO, 학생들이 모여드는 명실상부 ‘K-기업가정신 메카’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진주시는 또한 LG 구인회, GS 허만정 창업주가 나고 자란 지수 승산마을을 거점으로 인근 의령군에 위치한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 생가와 함안군 효성 조홍제 창업주 생가를 잇는 ‘진주 남강 부자 로드’를 관광자원화하는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승산마을에는 ‘부자 기운’을 받으려 찾아온 국내외 관광객을 위한 한국 전통 숙박시설 ‘승산에부자한옥’과 ‘지수남명진취가’가 들어서 있다.



    구자홍 기자

    구자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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