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학교 의무교육 후 청취·독해력 향상
- 영어권 한국 유학생, 일본보다 2.5배 많아
- 토익 점수 높을수록 신입 연봉 상승
- 수출 경쟁력, 동북아 경제 패권에도 한몫
“우리나라에서 영어는 취업을 위한 필수요소지만, 일본에서는 해외파트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만 일정 수준 이상의 영어 실력을 요구한다. 더구나 예전에는 일본 자동차와 가전제품을 찾는 해외 수요가 많아 우리처럼 굳이 영어를 열심히 배워 해외 판로를 개척하지 않아도 수출이 잘됐다. 이런 이유로 학교에서든, 기업에서든 영어를 등한시하다 보니 젊은이들이 영어에 대한 두려움으로 해외 파견 근무나 유학을 꺼리는 ‘우치무키(내향화)’ 현상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한국 ‘급상승’ vs 일본 ‘제자리’
일본 문부과학성이 발표한 2008~09년 통계자료에 따르면 영어권 유학생 중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2.5배가량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양국 학생이 가장 많이 찾는 유학 지역은 미국이었고 다른 지역에선 편차를 보였다. 일본인은 미국 다음으로 영국을, 한국인은 호주와 캐나다를 선호했다.
한국토익위원회가 1990년부터 2011년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정기적으로 실시된 토익(TOEIC) 평균점수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영어 실력이 일본을 앞지른 것은 2001년부터다. 양국의 토익 성적은 2000년까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대등한 수준을 유지했지만 2001년부터는 한국이 계속 더 좋은 성적을 냈다.
한국은 토익 점수가 2001년(566.2점)부터 2011년(632.7점)까지 해마다 꾸준히 향상돼 10년간 66.5점이 오른 반면 일본은 2001년 558.1점에서 2011년 576.1점으로 18점을 올리는 데 그쳤다. 1990년에는 한국이 551.2점을 기록하며 일본(552.0점)보다 0.8점 뒤졌지만 2001년에는 8.1점, 2011년엔 56.6점을 앞서며 큰 폭으로 격차를 벌렸다.
토익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언어 본래의 기능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에 중점을 두고 일상생활이나 국제 업무 등에 필요한 실용영어 능력을 평가하는 글로벌 시험이다. 1979년 미국 ETS(Educational Testing Service)가 개발한 이래 전 세계 120개 국가의 1만 개 기관이 승진이나 해외파견 인원 선발 등을 목적으로 이를 활용한다. 이 시험은 독해력(RC, Reading Comprehension)과 청취력(LC, Listening Comprehension)에 각기 495점을 배점해 총 900점이 만점이다.
양국의 영어 실력을 독해력과 청취력으로 나눠 점수를 비교해도 한국이 모든 면에서 우월한 것으로 나타났다. 읽기와 쓰기 실력을 반영한 독해력 점수는 2003년까지 일본이 더 높았지만 이듬해 역전됐다. 말하기와 듣기 실력을 평가한 청취력 성적은 1990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이 계속 우위를 지켰다.
日도 초등 영어 의무교육 시작
한국의 영어 실력이 일본을 앞지른 데는 공교육의 힘이 컸다. 우리나라는 1997년부터 영어를 초등학교 정식 과목으로 채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전부터 “영어는 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인 만큼 삶의 질을 높이려면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돼 있었다. 또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기 전부터 가정이나 사설 교육기관에서 영어교육을 실시해왔다.
정부는 이런 사교육비를 줄이고 모든 학생에게 공평한 교육 기회를 주고자 초등학교에 영어 과목을 도입했다. 교육학적인 측면에서도 초등학교 시절이 다른 언어를 인식하고 습득하는 데 가장 좋은 시기이기도 했다. 모든 초등학생에게 3학년 때부터 영어를 배우게 하면서 조기유학, 영어유치원 진학 등 사교육 열풍이 더 심해졌다는 부정적 견해도 있지만 영어에 대한 자신감과 회화 실력이 크게 향상되는 긍정적 효과가 컸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의 영어 실력은 얼마나 차이가 날까. 한국토익위원회가 각 세대에 속하는 1988년 출생자와 이전 출생자의 동일 시점(대학교 4학년, 한국나이 23세)을 기준으로 토익 성적을 비교한 결과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세대가 그렇지 않은 세대보다 토익 성적이 높았다.
영어 능력은 신입사원의 연봉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조사됐다. 취업사이트 커리어넷이 경력 3년 이하의 직장인 1350명을 대상으로 연봉과 토익 성적 간 상관관계를 설문조사한 2009년 자료에 따르면 토익 점수가 높을수록 신입사원 연봉이 높았다.
한국이 영어 공교육을 통해 경제발전과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자 일본 문무과학성은 2011년부터 초등학교 교과목에 영어를 넣어 5학년 때부터 배우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영어교육 노하우를 배우러 오는 일본 교육관계자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일본 오키나와현 초등영어연구팀은 지난해 4월 강원도를 찾아 강원외국어교육원의 교원연수과정과 도교육청 초등영어교육 현황에 대한 정보를 얻어갔다. 대학교수와 초등 영어교사 등 4명으로 구성된 연구팀은 강원외국어교육원의 6개월 장기 심화연수 과정을 참관하고 양양 회룡초교와 홍천 오안초교를 방문했다.
영어교육도 한류 열풍
같은 해 6월엔 일본 교육시찰단이 한국의 선진 디지털 교육환경과 영어교육 실태를 살피려고 서울 유석초등학교를 방문했다. 시찰단은 이 학교 선생님들과 한일 교육 현안을 논의한 후 스마트 기기를 활용하는 영어수업을 참관했다. 정재근 교감은 “우리 학교에서는 전체 학생을 15명씩 나눠 수준별 분반수업을 하고, 방학 중에는 캠프를 열어 영어를 집중 지도한다”면서 “일본 교육시찰단은 스마트 환경을 이용해 영어교육의 효과를 높이는 수업방식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전했다.
교육현장에서만 영어에 열을 올리는 것이 아니다. 최근 일본에는 사원 영어교육에 힘을 쏟는 기업이 부쩍 늘었다. 해외기업 홍보전문가 김지수 씨는 “요즘 일본에서 영어는 ‘필요한 사람만 할 줄 알면 되는 언어’에서 ‘취업 활동에 필요한 언어’로 인식이 바뀌어가고 있다. 심지어 패스트리테일링과 라쿠텐 같은 일본 기업은 지난해부터 사내 공영어로 영어를 사용한다”고 귀띔했다.
교육 전문가들은 일본의 영어 공교육 강화가 당장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겠지만, 10년 안에 양국의 영어 수준 격차가 크게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민선식 대표는 “일본의 엔저 정책과 영어 능력 향상이 우리 수출과 경제성장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긴장의 고삐를 늦추면 안 된다”는 당부의 말을 보탰다.
재계 일각에서는 일본보다 더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중국을 지목했다. 중국에 진출한 한 기업인은 “해외 각국의 선진기업들이 중국에 진출하고 중국 기업의 대외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영어 잘하는 중국인이 급격히 늘었다. 최근 중국은 여러 산업 분야에서 기술력이 좋아진 데다 영어 실력까지 뒷받침되면서 수출 경쟁력으로 우리는 물론 일본도 위협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제 한국과 일본이 중국보다 제조업 품질 경쟁력이 높다고 안심할 상황이 아니다. 동북아 경제의 패권이 영어 실력에 달린 셈”이라고 꼬집었다. 한중일 세 나라의 ‘영어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한국이 영어를 포기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