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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

은소금 하얀 햇살 속 그리운 아버지여

전남 보성

  • 최학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은소금 하얀 햇살 속 그리운 아버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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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번화한 도심에서보다 한적한 면소재지 또는 읍 거리에서 문득 방향 감각을 잃고 멍하니 서성이는 때가 있다. 타지의 풍경 때문만은 아니다. 아무리 초행의 타지라 해도 이 땅의 자연과 사람살이 풍경은 다 눈에 익은 것이요, 자못 친근한 것이니 그럴 리가 없다. 차라리 갑작스레 맞이한 그 낯설고도 익숙한 음향과 냄새에 내 오감이 너무 쉽게 적응하려는 데 대한 육신의 반작용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봄날 하오, 정처 없이 차를 세운 보성읍 거리에서 또 그랬다. 여기가 어디지? 무슨 마음으로 차에서 내렸고, 어디로 가려고 길을 걷는 것일까. 거푸 자문하면서도 무작정 길을 걷기로 한다.

동서남북을 구분하지 못하는 거리에서는 군청이며 학교의 방향을 일러주는 표지판의 글자들마저 이해 못할 기호처럼 생소하기만 하다. 가게의 스피커 소리, 차 소리, 사람 소리…. 읍 거리에도 각종 소리가 넘쳐나지만 그것은 되레 바람소리, 물소리와 흡사해서 산속 고요보다 더 고요한 느낌만 줄 뿐이다. 키 낮은 가게에서 풍겨 나오는 음식냄새조차 풀냄새 흙냄새와 다를 바 없다.

뒤늦게 마땅한 식당이라도 눈에 뜨이면 때늦은 요기라도 할 요량이었음을 깨닫고는 꼬막정식, 순댓국 등의 간판을 좇아 골목길로 들어가본다. 꺼칠한 시멘트 담장 아니면 블록 담이 이어지고 1, 2층 슬래브 집들이 지붕을 맞대고 있는 골목. 인적 없는 그 골목길이 안온하다. 마침내 숨은 듯 부끄러운 듯 처마 밑에 걸린 여인숙 간판 하나까지 발견하면서 비로소 나는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저 집의 초라한 눈빛



늙은 개처럼 꼬리를 늘어뜨리고

게저분하게 웅크리고 있네

삭정이 삐걱 나와

눅눅한 햇볕을 쬘 때까지

사연 많은 사람들

초라한 집 뱃속에 누워

일어나질 않네

순대국처럼 모락 모락

김이 성기는 굴뚝 위로

곰삭은 바람

길을 잃고 머뭇거리네

- 박주택 시 ‘보성 여인숙’ 전문

소박하고 단아한 아름다움

시인도 어느 때 보성읍 거리의 뒷골목을 걸어본 듯싶다. 드러난 말투는 전혀 그렇지 않지만, 숨겨진 말이 전하는 그림은 지극히 따스하고 아름답다. 가난한 육신들을 거둬들이는 그 초라한 숙소를 향한 시선에는 혹독한 현실 저편에 대한 응시가 한몫 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힘든 일상을 끝내고 여인숙에 와서 눕는 이들의 삶은 어쩌면 묵은 된장과 김치, 장아찌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품는 집은 비록 게저분하지만 굴뚝에는 순댓국 같은 김이 성기고 곰삭은 바람이 부는 것이다.

그렇게 초라하고 예쁜 여인숙이 어찌 전라남도 보성에만 있으랴. ‘가난한 나그네가 묵는 집’은 서울에도 있고 제주에도 있다. 그런데 시 제목에서 보듯이 여인숙은 보성에만 있어야 될 것처럼 지명과 집 이름이 썩 잘 어울린다. 가난하지만 맘씨 고운 나그네들이 찾아드는 적격의 곳이 보성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만큼 보성은 산과 바다, 강까지 두루 갖추고 있음에도 화려함, 빼어남보다는 소박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가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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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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