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는 ‘손태목’이라는 한국 이름과 하라 에이사쿠(原英作)라는 일본 이름을 함께 갖고 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 뵈야지, 가 뵈야지’ 벼르기만 하고 몇 달 동안 한번도 찾아가 뵙지를 못했는데 무슨 일이 나기라도 하면 이 불효를 어찌한단 말인가.
허겁지겁 아는 의사에게 연락해 사정사정해서 입원실을 부탁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병실이 있는 8층 안내소에 가서 아무리 아버지 이름을 찾아도 보이지가 않았다.
“저기, 방금 입원하신 손태목 환자를 뵈러 왔는데요.”
그러나 열심히 이름을 찾아보던 간호사의 대답은 간단했다.
“방금 입원한 환자는 일본인 한 분뿐인데요.”
‘하라 에이사쿠(原英作)’. 그렇다. 아버지는 분명히 ‘하라 에이사쿠’라는 일본 이름으로 환자 명단에 올라 있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간호사를 따라 병실로 들어서니 침대에 아주 조그만 체구의 노인 한 분이 팔에 링거를 꽂고 누워계셨다. 아버지는 날 보시더니 너무나 놀라고 당황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셨다.
“바쁜데 뭣하러 왔어? 며칠 있으면 괜찮아질 텐데.”
“아버지 이름이 없다”
미안해 어쩔 줄 몰라하시는 아버지 옆에서 일본인 어머니가 덥석 내 손을 잡으며 반가워했다.
“너무 놀랐어. 돌아가시는 줄 알고. 갑자기 어지럽다며 쓰러지시는 바람에 당황해서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어쩔 줄을 모르겠는데 아버지가 이 병원으로 가자고 하시더라구. 숙상이 다닌 대학의 부속병원이라고.”
일본말과 한국말을 반씩 섞어가며 더듬더듬 상황 설명을 하는 어머니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가득 고였다. 침대에 누운 아버지의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평생 무슨 잘못을 그렇게 하셨길래 나만 보면 저토록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시는 걸까.
저 조그만 체구의 노인이 옛날 그토록 화려했고 그토록 많은 사람을 울리고 가슴 아프게 했던 내 아버지가 맞는 걸까. 그런데 정작 내 아버지 손태목은 어디로 가고 하라 에이사쿠라는 일본 노인이 내 앞에 누워 있는 걸까. 그리고 옆에 계신 이분, 이 일본 여인은 또 무슨 인연으로 50여년 동안 내 아버지 곁에 계시는가.
올해로 여든여덟이 되신 아버지는 경남 밀양에서 천석꾼의 3대 독자로 태어나셨다. 워낙 자손이 귀했던 안동 손씨 종가에서 아버지는 큰댁으로 양자를 들어 종손이 된 뒤 금지옥엽, 귀하디 귀한 종손으로 온 집안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열다섯 살, 그러니까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던 해 집안에서 정해준 대로 동갑내기인 경북 상주 양반집 규수와 혼례를 치르셨다.
“가마에서 내리는데 어찌나 단아하고 예쁘던지 부처 새끼가 내리는 줄 알았다니까.”
친척 할머니 한 분은 처음 시집 오실때 내 어머님의 고운 모습을 두고두고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곱고 나무랄 데 없는 어머니의 결혼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때 이미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공부를 하셨던 아버지는 방학이 되어서야 겨우 두어 번 집에 들르셨을 뿐이었고, 그렇게 집에 오더라도 층층시하 시집살이 때문에 두 분이 오붓이 만날 기회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고 한다.
그뿐인가. 어쩌다 할머니가 합방을 시키는 날에도 어머니는 아버지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용감하지도 못하셔서 결국 몇 년이 지나도록 두 분은 서로 얼굴도 제대로 알지 못할 정도로 부부 아닌 부부생활을 하실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나이 열아홉에 언니를 낳았는데 그 해 아버지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시게 되었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날 밤 늦게 사랑에서 건너오신 아버지가 어머니 손을 잡고 함께 동경으로 떠나자고 사정을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층층시하 시집살이에 스무 살도 안 된 어린 신부가 신랑을 따라 야반도주할 배짱이 있었겠는가. 게다가 갓 태어난 어린아이까지 딸린 형편이니. 결국 어머니는 눈물로 그 애원을 뿌리쳤고 그날 이후 두 분의 애틋한 인연도 어긋나기 시작한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