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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시대의 클래식 캐릭터 ⑩

토착형 영웅의 매력 유쾌 상쾌 통쾌

홍길동 vs 전우치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토착형 영웅의 매력 유쾌 상쾌 통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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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형 영웅의 매력 유쾌 상쾌 통쾌

영화 ‘홍길동의 후예’의 한 장면.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이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 표범보다도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항상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음은 도대체 어떤 이유인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백성, 언제든지 권좌에 있는 자들을 끌어내릴 수 있는 원한에 찬 백성이 바로 호민이다. 허균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휴화산 같은 존재가 바로 호민이라고 본 셈이다.

“불행스럽게 견훤이나 궁예 같은 사람이 나와서 몽둥이를 휘두른다면 시름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 따르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홍길동의 방황은 자신의 신분적 제약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에서 시작됐다. 반면 전우치의 핵심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다. 전우치는 사실관계를 알아보기도 전에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눈물에 마음이 허물어지는 스타일이다. 홍길동의 주된 타깃이 적서(嫡庶)차별이었다면 전우치의 타깃은 순간순간 만나는 백성들의 아픔이었다. 홍길동은 어릴 적부터 거의 완성된 인간형으로 제시된다. 총명하고 출중하지만 신분의 장벽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인간형으로 형상화된다. 이에 반해 전우치는 좀 더 드라마틱한 ‘성장소설’에 어울리는 입체적인 캐릭터다. 홍길동에게 좌절된 벼슬자리에 대한 미련이 강하게 나타나는 반면 전우치는 강자를 혼쭐내고 약자를 도와주는 감성의 유희 자체에서 무한한 쾌락을 느낀다.

짓궂은 전우치의 성장



전우치는 주색잡기에 빠진 관료들을 혼내주기 위해, 술자리에서 창기를 데려다준다고 약속하고는 관료들의 부인을 데려온다. 그런가 하면 그림이 현실이 되는 둔갑술을 자주 사용한다. 족자에 말을 걸면 족자 속 미인과 동자가 걸어 나와 술을 따르기도 한다. 그는 오생이라는 사람을 현혹해 큰돈을 받고 미인이 그려진 족자를 팔아먹는다. 족자를 사간 오생이 밤에 미인을 불러내 술을 마시고, 술김에 춘정이 돋아나 미인과 침상에 들려는 순간, 오생의 처가 나타나 족자를 확 찢어버린다. 전우치는 자신의 족자를 찢은 벌로 오생의 부인을 구렁이로 만들어버린다. 이렇듯 전우치가 도술을 부리는 동력은 자신의 재미를 위해서일 때가 많다.

우치 그림을 보니, 미인도 그리고 아이도 있어 희롱하는 모양이로되, 입으로 말은 못하나 눈으로 보는 듯하니 생기 유동한지라. 모든 소년들이 보고 흠앙함을 마지 아니 하거늘 …… “내 족자의 화려함도 사람의 이목을 놀래려니와, 이중에 한층 더 묘한 곳을 구경케 하리라” 하고 가만히 부르되, “주선랑은 어디 있느뇨?” 하더니, 문득 족자 속의 미인이 대답하고 나오거늘. 우치왈, “미낭은 모든 상공께 술을 부어드리라.” …… 오생이 술이 대취하여 족자를 가지고 외당에 들어가 다시 시험하려 하고, 족자를 벽상에 걸고 보니, 선랑이 병을 들고 섰거늘, 생이 가만히 선랑을 불러 술을 청하니, 선랑과 동자 나와 술을 권하거늘, 생이 그 고운 태도를 보고 사랑하여, 이에 옥수를 이끌어 무릎 위에 앉히고 술을 받아 마신 후 춘정을 이기지 못하여 침석에 나아가고자 하더니, 문득 문을 열고 급히 들어오는 여자 있으니, 이는 생의 처 민씨라.

-‘전우치전’ 중에서

이렇듯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기질과 유아적이고 원초적인 욕망에 이끌리는 전우치가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중요한 계기는 자신보다 더 강력한 내공을 지닌 서화담을 만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적수라고 생각한 사람을 스승으로 인식하게 됨으로써 변신의 유희에 그치지 않고 성장의 필요성을 자각한다. 홍길동에게는 정해진 스승이 없는 반면(그는 어릴 때부터 이미 독학으로 완성된 존재로 그려진다) 전우치는 매번 새로운 사람을 만나 배우고 변하는 스타일이며 마침내 서화담이라는 거대한 스승을 만나 본격적인 배움의 여정에 들어선다. 말하자면 ‘홍길동전’에는 홍길동보다 잘난 인물이 없다. 홍길동의 유일한 스승은 바로 그 자신이다.

신이 전하를 받들어 만세를 모실까 했으나, 제가 천한 종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홍문관이나 문(文)으로는 예문관 벼슬길이 막혀있고, 무(武)로는 선전관 벼슬길이 막혔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사방을 멋대로 떠돌아다니면서 관청에 폐를 끼치고 조정에 죄를 지었던 것이온데, 이는 전하로 하여금 아시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홍길동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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