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70년대 대중음악의 주류는 단연 트로트였다.
- 그러나 이것만로는 부족했던 대중의 ‘고급취미’를 만족시킨 것이 바로 패티김이 구사한 스탠더드 팝이었다. 이 시기 한국 대중음악이 특정장르 일색을 넘어 최소한의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꾸준히 자신의 스타일을 견지했던 패티김의 공이 상당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요계 노장들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걸고 단독공연의 흥행을 자신할 수 있는 가수는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패티김은 예나 지금이나 공연만 했다 하면 객석이 꽉꽉 들어찬다. ‘할머니’나 다름없는 그가 지금도 흥행 보증수표 인기가수라는 점은 경이로운 일이다. 대부분의 가수가 10년 정도의 전성기를 보낸 뒤 이름값으로 버티는데 반해 그의 콘서트는 어쩌다 날짜가 신세대 스타 공연과 맞물려도 전혀 패퇴의 기색이 없다. 그에겐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가요시장의, 아니 삶의 순리마저 통하지 않는다.
1959년 트로트와 신민요가 전부이던 시절에 서구의 냄새가 짙은 스탠더드 음악으로 데뷔와 동시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가요계에 우뚝 선 지 40년. 그 오랜 세월 그는 한결같이 트로트와는 다른 감성의 노래를 불렀지만 히트 레퍼토리는 줄을 이었다. 팬들은 패티김을 통해 ‘고급스런 가요’에 대한 갈망을 해소했다.
외국 여가수의 노래라고 착각하게 한 팝송 ‘사랑의 맹세(Till)’든, 씩씩한 ‘서울의 찬가’든, 시린 가슴을 달래준 ‘초우’나 ‘이별’이든 그가 남긴 모든 히트곡은 격이 달랐다. 그는 1960~70년대 당시 대중음악으로는 드문 품위와 격조의 음악을 통해 우리 가요의 외연(外延)을 확장하는 동시에 수준 향상에 기여했다. ‘거물 가수’ ‘대형 가수’ ‘글래머 가수’ ‘서구형 가수’ 등등의 부러움 섞인 표현은 그만이 누릴 수 있는 특전이었다.
‘상류층 가수’의 도도함
때문에 그의 팬 층은 폭이 넓으면서도 딴 가수들과는 뚜렷한 차이점이 있었다. 한창 때 ‘국회의원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꼽혔던 사실이 말해주듯, 팬에는 유난히도 정·재계 유력 인사가 많았다. 트로트가 서민을 기반으로 한 반면, 그의 노래는 사회 고위층 인사들을 독점한 것이다. 일례로 고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자민련 총재도 소문난 그의 팬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유명한 사람을 보려면 패티김 공연장에 가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대중가수에게 드문 품격은 그를 상류층 인사들이 좋아하는 가수로 만든 밑거름이었지만, 한편으로 그 때문에 일반 대중과는 약간의 거리감도 존재했다. 그토록 대중의 사랑을 받고있는 가수인데도 친근하고 편한 이미지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고고하고 도도해 보인다.
그런 선입견 때문인지 인터뷰를 앞두고 부담이 컸다. 그의 공연 매니지먼트를 맡고있는 기획사 관계자는 “예상과 달리 편하게 얘기를 끌어가는 분”이라고 안심시켰지만 걱정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약속 장소인 남산의 한 커피숍에 나타난 패티김은 놀랍게도 전성기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얼마 전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진 추석공연의 피로가 가시지 않은 듯 조금은 피곤해 보였지만 여전히 매혹적인 분위기와 스타일이었다. 자리에 앉으면서 그는 공손하게 “양해하실 줄 알고 조금 늦었습니다”라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영원한 프로답게 인터뷰 내용을 충분히 예상한 듯 그의 답변은 성실하고 충실했다. 필자의 걱정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 어떤 때는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응답했으며, 때로는 격앙된 어조로 때로는 여유로운 미소로 시종일관 인터뷰를 주도해갔다. 그의 언변은 ‘폭포수와 호수’를 연상시키는 그의 노래와 흡사했다. 더러 정확한 묘사를 위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애타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그렇다고 흐름이 끊기지는 않았다.
-지난 추석공연은 어땠습니까. 성황리에 마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이틀 동안 무대에 섰는데 아무래도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세월의 벽을 느끼지는 않았는지요?
“공연은 아주 좋았어요. 이틀간 네 차례 공연을 했는데 빈 객석이 눈에 띄지는 않았습니다(옆자리의 기획사 관계자는 유료입장객 비율이 90%였다고 귀띔했다). 제 공연을 찾아주시는 팬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합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공연은 힘들어요. 무엇보다 노래는 호흡을 끌어가는 게 중요한데, 나이가 들면 그게 어렵습니다. 제가 지금도 매일 1000m 수영을 빠지지 않고 하는 것도 호흡을 위해서죠. 공연은 이틀이 딱 적당한 것 같습니다. 하루는 적고 사흘은 벅차거든요.”
-수영 얘기가 나와서 그렇습니다만 패티김씨는 공연을 앞두고 준비가 아주 유별난 것으로 유명합니다. 배불리 먹지 않는 것은 물론 철두철미하고 세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준비를 하십니까.
“공연 때뿐 아니라 평소에도 내가 만들어놓은 규칙에 봉사한다는 자세로 삽니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 반드시 양치질하고, 손발톱 다듬고, 매니큐어도 새로 바릅니다. (손을 들어 보이며) 오늘 인터뷰를 위해서도 이렇게 매니큐어를 새로 바른 걸요. 여가수는 몸가짐이 생명이니까요.
1999년 데뷔 40주년 공연을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무심코 ‘평소에 신던 신발은 무대에서 신지 않는다. 흙을 밟았던 신발을 신고 무대로 올라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기자들이 그 말에서 어떤 의미를 찾았는지 여기저기 신문에 크게 났던 기억이 납니다. 무대가 어떤 곳입니까? 그냥 노래하는 데가 아니라 ‘신성한 장소’입니다. 오늘날 저를 만들어준 곳인데 건성으로 임할 수는 없지요. 저만 유별난 것이 아니라 모든 가수가 그럴 것이고, 또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철저한 준비가 중요하다는 말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까다로운 사람으로 비칠 수도 있는 말이다. 사실 패티김에게는 ‘도도하고 깐깐한’ 이미지가 있다. 함부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매사 조심하고 경계하는 듯해서 수더분하고 친근한 맛은 없다. 솔직히 말하면 자존심이 세고 콧대가 높아 보인다.
그는 그런 면모가 어머니의 교육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하면서, 엄격함으로 오랜 세월을 보내다 보니 자신의 실제와 대중들의 인식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인터뷰 내내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그의 벌이를 비롯한 전반적인 생활형편이 궁금했다. 잘 따지고 챙기는 성격이니 꽤나 부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기획사 직원은 그를 일러 ‘가난한 유명인사’라고 말했다.
“패티김이 가난하다고 하면 누가 믿겠어요? 가난한 것은 아니고 그럭저럭 살아요. 제 수입은 뻔합니다. 몇 차례의 행사나 공연에서 받는 돈이 전부예요. 많이 뛰고 뻔질나게 나다녀야 돈이 들어올 텐데 제가 딴 일은 하지 않잖아요? 부자는 못됩니다. ‘가난한 유명인사’는 좀 극단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팬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편차가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나 봅니다.
사실 옛날부터 쭉 그래왔어요. 제 전성기 시절 가수의 주 수입원은 야간업소 출연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밤무대 환경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고 권유도 많았지만 저하고는 궁합이 맞지 않더라고요. 한번은 끈질긴 섭외에 무교동 업소에 세 번 가량 출연했는데 어색해서 곧 그만두었습니다. 공연횟수가 적으니 큰돈을 벌 리 없지요. 돌이켜보면 전 아무리 인기가 있었어도 돈과는 거리가 있었어요. 한마디로 양보다 질을 택했던 거죠.”
-그렇게 말씀하셔도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 같은데요.
“알고 있습니다. 전 과거부터 지금까지 참 오해도 많이 받고 그래서 불이익도 많이 봤던 사람입니다. 제가 뭘 해도 사람들의 시선은 다르더라고요. (격앙된 어조로) 제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가 뭔지 아십니까? ‘패티김은 미국에 살다가 용돈 떨어지면 한국에 와서 공연한다’는 말이에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낭설입니다. 오죽 화가 났으면 한때는 한국도 미국도 아닌 일본으로 귀화할 생각까지 했겠어요.”
-내친김에 묻습니다만, 국적에 대한 소문도 알고 계십니까? 오래전부터 미국을 왔다갔다 하신 탓인지는 몰라도 일각에는 ‘패티김이 미국과 한국 이중국적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것도 오해입니다. 어디서 그런 소문이 나왔는지 모르지만 맹세코 전 미국국적을 소유한 적이 없어요. 아마도 1960년대부터 미국에 자주 들락날락하고, 제 생김새도 도도해 보이니까 확인절차도 없이 마구 얘기가 부풀려진 것 같습니다. 미국이니 돈이니 하는, 저와 관련된 얘기들은 상당부분 틀린 것들입니다.
물론 제 잘못도 있어요. 내가 너무 감추고 산 결과일 수도 있으니까요. 자주 나서서 말하고 사실을 밝혔더라면 그렇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게 열린 스타일이 못 돼요. 속으로 간직하는 스타일이죠. 그렇다보니 오해를 피하기 위해 갈수록 더 엄격한 생활 쪽으로 가더라고요. 창살 없는 감옥이 따로 없었지요. 비록 외롭고 고독했지만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누가 뭐래도 나 패티김은 떳떳합니다.”
‘외교관 지망생’이 ‘섹시한 가수’로
주로 음악 얘기를 한다고 약속해놓고 사적(私的)인 얘기로 흐른 듯해서 화제를 노래로 돌렸다. 패티김은 처음에는 음악이 자신의 꿈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했다. 1938년에 함경도 함흥이 고향인 아버지와 경기도 개성이 고향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어릴 적 꿈은 외교관, 좀더 커서는 방송국 아나운서였다.
음악은 당시 국악 또는 국극단이 인기 있던 시절이라서 중학교 3학년 때 국악을 접한 게 전부였다. 전국 중고교 국악콩쿠르 창 부문에서 1등을 차지할 만큼 재질은 뛰어났지만 ‘창 배우면 기생된다’는 집안의 반대로 국악과의 인연도 그나마 중앙여고 1학년 때 끝내게 된다. 그러나 이 짧은 인연은 이후 패티김의 음악생활에 큰 도움을 준다. 이를 계기로 성량과 가창력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던 것. 그가 미국에서 활동하던 1960년대 현지 관계자들은 “팝송을 동양적인 분위기로 소화한다”는 평을 전하곤 했다.
평범한 학생이던 그가 본격적으로 가수생활을 시작한 것은 고교졸업 후 취직자리를 알아보던 시절, 음악을 좋아하던 주변의 오빠가 우연히 던진 “가수가 돼 보라”는 한마디가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소개로 얼떨결에 미8군 쇼무대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인 가수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959년 3월 미8군 무대에 데뷔한 그는 순식간에 폭발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무엇보다 음악관계자들은 한국 여성에게서는 기대하기 힘든 폭발적인 가창력에다 서구적인 외모와 몸매에 넋을 잃었다. ‘섹시한 가수가 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가요계에 퍼졌다. 당대 최고의 작곡가 박춘석도 그 소문을 들었다.
하지만 패티김은 그때만 해도 외교관 지망생답게 노래라곤 팝송을 원어로 부르는 것밖에 몰랐다고 한다. 박춘석씨는 그에게 앨범을 내자고, 그것도 우리말로 불러야 한다고 강력하게 설득했다. 그리하여 데뷔앨범을 통해 ‘사랑의 맹세’ ‘파드레’ ‘서머타임’ 등 지금도 올드 팬들의 기억에 선연한 팝 번안 명곡들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패티김씨는 음악얘기를 꺼낼 때마다 늘 박춘석 선생이 선견지명이 있는 분이라고 찬사를 보냅니다. 아마도 패티김씨에게 잘 맞는 곡을 써주었기 때문일 텐데요, 행여 다른 어떤 이유가 있습니까.
“사실 전 처음에 ‘사랑의 맹세’나 ‘파드레’를 우리말로 부르기를 주저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미국에 가고 없는 동안, 즉 주인 없는 동안에도 노래가 대중들한테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더라고요. 참 놀랐어요. 저를 발탁한 것도 그렇지만 나중에 보면 박선생님이 권유한 게 맞는 겁니다.
박선생님이 제게 유난히 클래시컬한 곡을 많이 써주신 것도 그래요. 선생님은 트로트를 많이 쓴 분이잖아요. 그런데 저한테는 마치 특혜처럼 유독 그런 곡을 주시는 거예요. 한번은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워낙 트로트 음악이 지배하는 풍토라서 많이 쓴 것이지 난 원래 클래식 쪽’이라면서 ‘패티김 아니면 그런 곡을 누구한테 주겠어?’ 하시더군요. 선생님은 정말 한국 가요작곡분야에서 다시는 없을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 국악을 빼놓고는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한 적이 없다고는 하셨지만, 악단이나 오케스트라의 반주로 노래할 때는 여유있게 단원을 리드하고 심지어 틀린 연주가 있으면 지적까지 한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가수들이 땀 흘리며 악단에 끌려가는 것과 비교하면 신기합니다. 그런 능력은 어떻게 갖춘 것인지 궁금하네요.
“전 음악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땐 다 그랬어요. 공부하고 노래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단지 청각에 관한 한 선천적으로 발달한 것 같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수많은 악기음색이 다 들리고, 만약 연주가 틀리면 그게 귀에 딱 걸리는 거예요. 이럴 경우 지휘자가 그냥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할 때도 있는데 난 그걸 못 참아요. 끊고 과감하게 틀렸다고 말하고 다시 가는 거죠. 그런 점 때문에도 패티김은 깐깐하다는 악명을 얻었어요. 아무튼 난 무난한 가수는 못됐어요.”
음악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패티김은 스탠더드 팝 음악에서, 특히 발라드 분야에서 한 획을 긋는다. 하지만 당시 스탠더드 팝은 국내 가요계의 주류는 아니었다. 반대편에 또 다른 한 축을 형성한 음악은 말할 것도 없이 트로트였으며, 여기에는 바로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가 있었다.
이미자가 경제성장기의 가부장제에 봉사하는 여성을 노래에 담아낸 서민정서의 음악적 표상이었다면, 패티김은 신분상승의 서구지향성을 음악적으로 대변한 인물이었다. 그것은 결코 우열을 잴 수 없는 성질이었다. 서로 가는 길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본의 아니게 두 사람은 여가수 1위 자리를 놓고 다투는 라이벌로 비친 감이 없지 않다. 과연 서로 상대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패티김과 함께 우리 가요계를 대표하는 여가수는 역시 이미자입니다. 묘하게 1959년 데뷔 연도도 같고요. 비록 음악의 외피가 다르지만 가수로서 이미자씨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그리고 두 분이 실제로는 어떤 사이였는지 듣고싶습니다.
“이미자씨요? 한마디로 독보적이면서 특별한 가창력을 갖고 있는 가수예요. 재능은 말할 필요가 없죠. 노래를 정말로 잘하기 때문에 지금의 위치에 올라섰고 흔들림 없이 정상을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미자만큼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는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겁니다. 한창 때 우리는 라이벌도 아니었고 그런 의식도 없었어요. 지금도 언니 동생 하는 사이인데요, 뭘(이미자는 1941년생으로 패티김보다 세 살이 아래다). 우린 항상 같이 갔지, 경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미자씨는 얼마 전 자서전에서도 패티김에 대한 열등감을 슬며시 내비친 바 있습니다. 트로트는 알게 모르게 천대하고 패티김의 노래 같은 서구스타일을 동경하는 풍토에 대한 약간의 피해의식이라고 보는데요. 행여 패티김씨는 반대로 우월감을 품지는 않았습니까.
“저도 이미자가 ‘난 늘 패티김한테 주눅들어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워낙 솔직하고 겸손한 성격이어서 그렇게 말했을 겁니다. 한창 때도 저한테 ‘언니는 키도 크고 노래도 잘하고 정말 부럽다’며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곤 했으니까요. 난 그때마다 미자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할까 생각했죠. 과거나 지금이나 우월이니 열등이니 하는 감정은 조금도 없어요. 아마 미자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저 말을 하다 보니 그런 거였겠죠.”
-두 분이 세월에 변함없이 가요계의 쌍벽으로 불리는 것을 보면 어떤 음악적 공통점도 있을 듯합니다. 노래 부르기라는 측면에서 비슷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습니까? 두분 모두 기교 없이 노래한다고 보는데요.
“맞아요. 저나 이미자나 소리를 꾸며내지 않고, 가진 소리를 순수하게 내는 스타일입니다. 보컬 테크닉을 거의 구사하지 않지요. 그래서 ‘이미자와 패티김 두 사람만이 한 노래를 아무리 여러 번 불러도 오리지널과 유사하다’고들 하죠. 저도 한 노래를 그토록 여러번 불러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이미자도 그렇고. 노래의 생명은 테크닉이 아니라 순수라고 봅니다. 기교를 부린 노래는 당시는 어필할지 몰라도 나중에는 듣기 싫은 법이니까요.”
이혼노래가 돼버린 ‘이별’
-지금까지 부른 곡이 얼마나 됩니까. 발표한 앨범 숫자는 기억하시나요? 그중에서 요즘 들어도 마음에 드는 곡이 있다면 어떤 곡입니까.
“아마 앨범은 65장 정도 될 겁니다. 노래는 오리지널 가요가 350~400곡 될거구요. 팝, 샹송, 칸초네 같은 외국 곡이 200곡이 넘을 겁니다. 팝송을 많이 부른 편이죠. 맘에 드는 곡은 10곡도 안돼요. 그중 흡족한 것은 후반기 곡이라고 할 1983년 노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입니다. 이 곡은 세 번 만에 녹음을 끝냈는데 녹음실에서 노래를 마치고 나니까 밖에서 스태프들이 만세를 부르더라고요. 녹음실에서 이미 히트한 셈입니다. 미흡한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도 드물게 만족스런 곡입니다.
그 뒤에 나온 ‘가시나무새’도 맘에 들고 1966년에 발표된 탱고리듬의 노래 ‘4월이 가면’도 잊을 수 없습니다. 원래 이 곡은 스윙 리듬이었는데 내가 주장해서 탱고로 바뀌었지요. 그 때문에 나중에 표절로 묶여서 20년 동안이나 햇빛을 못 봤지요. 돌이켜보면 나 때문에 일이 잘못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대중가수로서 대중들이 좋아했던 곡들에 애정을 갖는 건 당연하죠. ‘초우’ ‘연인의 길’ ‘못 잊어’ ‘사랑은 생명의 꽃’ 같은 노래들은 대중의 사랑도 받고 저도 좋아한 곡들입니다. 특히 ‘사랑은 생명의 꽃’은 요즘도 부를 때마다 소름이 돋습니다.”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이별’을 언급하지 않는 게 이상하네요.
“‘이별’은 대중적인 곡입니다. 멜로디도 무난하고 가사도 좋아요. 하지만 팬들은 애청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부르는 맛이 적은 편이에요. 가창력을 발휘할 수 없는 곡이라고 할까요? 콘서트에서 ‘이별’을 자주 부르지 않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혹시 애증이 교차한 음악적 동반자이자 전남편인 길옥윤 선생에 대한 감정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것 아닐까요?
“(기다렸다는 듯) 말씀 잘하셨어요. 길선생님과의 관계 때문에 음악적으로 맘에 들고 아니고는 아니지만 사연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별’은 길선생님과 제가 1년 반에서 2년간 별거 중일 때 미국에 계시던 길선생님이 뉴욕 하늘을 보고 제 생각을 하면서 썼다는 곡입니다. 그러나 나한테 악보가 왔을 때 제목은 노래의 첫 구절인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였습니다.
멜로디도 좋고 대중성도 갖췄는데 다만 제목이 걸렸습니다. 난 단순한 제목을 좋아했거든요. 전화를 걸어서 제목을 ‘이별’로 하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러자는 겁니다. 그런 사정으로 ‘이별’이 된 거예요. 그런데 얼마 후 길선생님과 내가 팬들의 기대와 다르게 이혼해버렸잖아요. 순식간에 노래가 ‘이혼의 노래’로 둔갑해버린 겁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또 나 때문에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버린 꼴이지요. 저로부터 빚어진 안 좋은 일이 왜 그렇게 많은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패티김은 가수지만 사회활동도 활발하게 한다. 지나해 9월 청와대에서 이희호 여사와 기념촬영을 했다.
“그랬어요. 우리가 이혼했을 때 팬들은 대단히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평소 잉꼬부부로 알려졌기 때문일 거예요. 사람들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게다가 그 무렵 국내에서 이혼이 지금처럼 맘에 안 맞는다고 돌아서는 손쉬운 일이 아니었잖아요. 그래서 길선생님과도 애초 별거라는 방식을 택했던 겁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어땠냐 하면 ‘패티김은 강자, 길선생님은 약자’라는 식으로 돌아가더라고요. 한마디로 헤어진 데 따른 여론의 독화살이 전부 나한테 돌아온 겁니다. ‘솜사탕처럼 착한 남자를 콧대 센 패티김이 차버렸다’는 거죠. 그때 사람들의 눈초리는 지금 생각해도 무섭습니다. 제가 이혼 후 미국으로 간 것도 ‘상당기간 팬들과 거리를 두는 게 좋겠다’는 판단에서였어요. 아마 저에 대한 일반의 오해는 이 사건부터 시작됐을 겁니다. 왜 두 사람이 갈라섰냐에 대한 얘기는 굳이 하고싶지 않습니다. 그냥 ‘삶의 방식’이 달랐던 것으로 해두지요.”
-현재 한국여성단체연합 후원회장이시지요? 이런저런 일들로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이 생겨났을 것으로 봅니다만 패티김은 오로지 무대에서 노래하는 가수로 알려져서 솔직히 낯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서 맡게 됐습니까.
“저도 경험했지만 한국의 여성 치고 여성의 권리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러나 말씀한대로 내겐 노래가 모든 것의 최우선이었습니다. 여성문제는 늘 가슴에 담겨있었을 뿐이었죠. 1960년대에는 오히려 노인문제에 더 관심 있었어요. 그때 우리 어머니도 위독하셨고, 따지고 보면 노인들은 희망이 없는 분들이잖아요. 그때부터 자선공연을 해왔습니다. 양로원을 참으로 많이 다녔죠. 다만 나타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을 따름이죠. 한번은 양로원의 할머니가 두 손을 잡고 ‘이 큰아가씨가 우리 천사야?’ 할 때 눈시울이 뜨거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여성단체연합 후원은 1995년 ‘여성의 전화’로부터 구구절절 슬픈 내용이 담긴 편지 석 장과 여성학대를 고발하는 사진을 받고 나서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요청이 와야 거들었다면 지금은 제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하지만 이 일도 내놓고 떠들고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그가 보유하고있는 가요계 ‘최초’의 영예는 수두룩하다. 1960년 한일수교가 있기 전 NHK 초청으로 국내가수 중에는 처음으로 일본에 진출한 것을 위시해서 ‘리사이틀’이란 표현도 그가 처음 썼으며, 1966년에는 국내 최초로 창작뮤지컬 ‘살짜기 옵서예’를 선보이기도 했다.
세종문화회관 개관 이후인 1978년 대중가수공연으로 첫 테이프를 끊은 인물 역시 패티김이다. 이혼 후유증에 시달리며 4년 이상 미국에 머물던 그는 이 공연을 계기로 한국으로 컴백한다. 1985년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팝 콘서트를 가진 것도 최초였고 1989년 역시 한국가수로는 처음으로 2200석의 카네기 콘서트홀에서 노래했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또한 한국에 팝송을 이식한 주인공을 패티김이라고 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와 함께 스스로도 말하듯 ‘한국의 상류층이라면 좋아하는 가수는 패티김이어야 한다’는 공식이 확립됐다. 아마도 한국 가요계에서 근사한 타이틀을 그처럼 많이 갖고 있는 가수도 없을 것이다. 그 모든 영광이 자신의 가창력을 지탱하려는 필사의 노력이 가져온 산물임은 말할 것도 없다.
-가수에게 필요한 조건이나 덕목은 무엇일까요. 또 선천적인 능력과 후천적 노력 가운데 어느 것이 중요하다고 보십니까.
“성량이나 음감, 음색과 호흡을 타고났다면 최고 조건이지만 난 그것보다 자신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먼저 자기를 알아야지요. 그리고 나서는 그것을 살리고 확대하려는 고민과 실천이 중요합니다. 말하자면 태도와 몸가짐이지요.
특히 여가수는 남자가수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됩니다. 먼저 얼굴이 예쁘든 아니든 자신의 개성과 매력을 살려야 합니다. 한마디로 ‘여자로서의 아름다움’을 잃으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그것을 지키기 위해선 하고싶은 일을 억누르고 참는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제 신조가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게 없다(No pain, no gain)’입니다. 세상살이가 그렇지만 노래도 절대로 공짜는 없어요.”
패티김은 알마노 게디니씨와 재혼한 이래 행복한 가정과 인생을 꾸려가고 있다. 큰딸 정아씨는 유엔의 외교관으로 성공해 엄마의 못다 이룬 꿈을 대신 성취했고 둘째 딸 카밀라는 가수로서 엄마의 대를 잇겠다는 꿈을 키워 지난 추석공연 때 정식으로 데뷔했다. 패티김은 어머니로부터 배운 그대로 딸에게 ‘여자는 정숙해야 하며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는 철칙을 대물림하고 있다.
외로운, 그러나 당당한 뒷모습
생명과도 같은 패티김의 자존심 가운데 하나가 호칭문제이다. 아무리 친해도 후배 남자가수한테는 어디까지나 ‘선배님’ ‘선생님’이지 함부로 ‘누님’이라고 부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조영남에게만 누님이란 호칭을 허락했다고 한다.
노래를 잘하는 후배가수들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그는 “솔직히 없다”고 잘라 말했다. 대성할 자질을 갖춘 가수들도 얼마 지난 뒤에 보면 ‘아닌 길’로 빠지더라는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해 “그것은 본인보다 매스미디어 특히 방송의 책임이 더 크다”고 강조했다.
“요즘 가수들은 매스컴에 너무 휘둘리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텔레비전이 시키는 대로 무턱대고 따라가는 겁니다. 그러면 당연히 수명은 짧아집니다. 그런 환경에서 부와 성공을 쫓으면 자기를 지킬 수 없게 되죠. 만약 제가 TV에서 원하는대로 했다면 지금의 패티김이 있겠습니까? 아마 없을 겁니다.
가수라면 당장은 손해가 있더라도 자기 본연과 자존심으로 버텨야 합니다. 그게 기본이고, 기본이 흐트러지면 끝이에요. 저는 오직 노래를 위해서 모든 악의적 소문, 오해, 고통 그리고 상대적인 불이익을 견뎌냈습니다. 노래에 지장이 되는 것은 의식적으로 멀리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잘못한 것도 적지 않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패티김은 인터뷰 내내 ‘큰 인물은 작은 기본을 섬기는 데서 자라난다’는 삶의 오랜 교훈을 일깨워 주었다. 인터뷰가 끝나자 그는 다음 스케줄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속일 수 없는 세월에 걸음걸이는 부자연스럽고 뒷모습은 외로워 보였지만, 여전히 당당했다. 패티김의 40년 노래인생의 실체를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