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물지 않게 학생들을 인솔해 하회에 들를 때마다 내게는 적잖은 고민이 있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게 할 것인가, 이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가지지 못한 때문이었다. 류씨 문중과 서애 류성룡을 말하고 하회탈춤이며 줄불놀이를 얘기하고 강물이 휘돌아가는 풍광에 곁들여 풍수지리를 일러줘본들 그것은 판에 박힌 학습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경치가 제법 그럴싸하네” “민속촌처럼 옛날 집들을 잘 보존하고 있구나” “양반 동네에 뭐 먹을 만한 게 없을라나”하며 대충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리고 기념품 가게에 걸린 탈이나 구경하다가 양진당, 충효당을 거쳐 강가 솔밭으로 나오기가 예사인 요즘의 젊은 세대들에게, 하회마을이 던져줄 언어들이 너무 경직돼 있음을 토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회마을에 앉은 시간
그 무렵 내가 읽은 풍수책 하나가 썩 재미있었다. 태극 형국으로 마을을 감싸 도는 강에 대한 얘기며 연화부주형의 마을 형세에 대해선 그동안 많은 언급이 있었지만 이 책에서 주목하는 삼태봉 이야기는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책은 쉬 관념화될 수 있는 풍수를 현장 중심으로 구체화해 직접 현상을 목격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점이 마음에 드는데, 삼태봉 이야기도 그중 하나였다.
양진당 툇마루에서 대문 지붕 위로 볼 수 있는 산봉우리에 관한 이야기는 대강 이런 것이다. 하회마을 나들목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세 봉우리 산이 있는데 이것이 삼태봉이다. 풍수에서 삼태봉은 삼정승의 배출을 기약한단다. 양진당 대문 위로 보이는 산봉은 마늘봉이라고 하는데 삼태봉과 직접 연결되면서도 적잖은 간격을 두고 있다. 풍수 형국에서 보면 마늘봉은 삼정승이 임금 앞에 설 때 손에 드는 홀(笏)에 해당한다. 계급사회의 신분증이나 다름없는 홀 하나를 집안으로 끌어들인다면 삼태봉이 기약한 삼정승 모두를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나 같다. 굳이 양진당이 마늘봉을 향해 좌향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이 책이 설명하고 있는데 그럴싸하며 재미있다. 이렇듯 하회마을 또한 사소한 하나라도 눈여겨볼라치면 볼 것이 참으로 많지만 그렇지 않은 뜨내기 눈에는 용인 민속촌보다 볼 것이 없는 강가 시골 마을에 지나지 않는다.
냇물이 마을을 돌아 흐른다고
하회(河回)
오늘도 그 냇물은 흐르고 있다.
세월도 냇물처럼 흘러만 갔는가?
아니다. 그것은 고가(古家)의 이끼 낀 기왓장에 쌓여
오늘은 장마 뒤 따가운 볕에 마르고 있다.
그것은 또 헐리운 집터에 심은
어린 뽕나무 환한 잎새 속에 자라고,
양진당(養眞堂) 늙은 종손(宗孫)의 기침소리 속에서 되살아난다.
서애대감(西崖大監) 구택(舊宅) 충효당(忠孝堂) 뒤뜰,
몇 그루 모과(木瓜)나무 푸른 열매 속에서,
문화재관리국 예산으로 진행 중인
유물전시관 건축 공사장에서 그것은 재구성된다.
- 김종길 시 ‘하회에서’ 전문
하회에서는 세월이 냇물처럼 흐르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인생과 세상을 다 읽은 원숙한 시인이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는데 그 말소리조차 평소의 음성처럼 낮고 그윽하며 한편으로 어눌하다. 고가의 이끼 낀 기왓장에 쌓인 세월쯤이야 누군들 눈치 채지 못하랴만 ‘장마 뒤 따가운 볕에 마르고’ 있는 세월 같은 것은 이런 큰 시인이 아니곤 도저히 바라볼 방법이 없다. 나아가 시인은 어린 뽕나무 잎새와 모과나무 열매 속에서도 자라온 그 세월이 ‘문화재관리국 예산으로 진행 중인 유물전시관 건축 공사장’에서 재구성된다며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 그것이 긍정이요 승인이란 뜻인가, 아니면 부질없다 웃긴다는 뜻인가, 물어볼 이치도 없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잠깐 앉았던 의자가 어느새 이 자존심 강한 양반 동네에서도 소중한 유물이 되어 모셔져 있는 사실에서 보듯, 시간의 구성은 어디까지나 지금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하회마을 솔밭 쪽에서 강 너머로 보이는 깎아지른 절벽이 부용대다. 절벽의 오른쪽 끝에 깃들인 기와채가 류성룡의 독서당인 옥연정사요 왼쪽 숲 속에 든 집채가 서애의 형인 류운룡이 공부하던 겸암정사다. 형과 아우의 거처를 연결하는 좁고 위태로운 돌길이 그 바위벽 허리에 가로질러 나 있는데 사람들 눈에는 쉬 뜨이지 않는다. 간담을 서늘케 하는 이 바윗길에는 없는 길을 내겠다고 정으로 돌을 쪼아낸 흔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서애가 고향에 머물며 책을 읽던 때는 아침저녁으로 이 길을 걸어 형님께 문안을 드리고 학문을 논했다고 전한다. 옛 사람의 정과 예를 더듬어 생각할 수 있는 이 길을 걷는 경험은 하회의 속살을 보듬는 것과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주차장에서 차를 버리고 산기슭 길을 걸어 도산서원으로 드는 때는 문득 석굴암을 찾아가는 토함산 산길이 연상된다. 그리고 서원 뜰 앞, 짓궂은 내 학생들은 간혹 이쯤에서 1000원짜리 지폐를 꺼내들고 그 뒷면에 그려진 서원 그림과 현실의 서원을 비교해보기도 했으니 나도 잠깐 돈 얘기를 해도 괜찮을 성싶다. 다른 인물보다 퇴계와 율곡이 비교되는데 왜 율곡이 5000원권이고 퇴계가 1000원권인가? 액면 따라 인물의 서열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식의 정의를 보더라도 율곡보다 학번(?)이 높은 퇴계가 마땅히 5000원권에 와야 하지 않는가? 이것은 실제로 안동 유림에서 있었던 얘기다. 여기엔 신사임당과 퇴계의 어머니 박씨 부인의 비교도 한몫 곁들여진다. 부덕으로 치면 박씨 부인이 신사임당에 뒤질 바 없는데 세상엔 신사임당만 드높게 현양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동 유림은 늘 이런 결론을 낸다. “나라 망하는 때까지 노론이 세상 권세를 다 쥐었는데 그 영향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도산서원은 이러한 한가한 시비까지 곁들이면서 구경하면 한결 흥미가 있다. 퇴계의 위패 옆 어느 쪽에 류성룡과 김성일을 모시느냐는 문제 때문에 영남 유림끼리 붙은 200년의 서열싸움 ‘병호시비(屛虎是非)’를 떠올려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서원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도산서당이 있다. 이곳은 아직 서원의 모습을 갖추기 이전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늦은 봄날이면 진도문으로 오르는 층계 길 양편에는 작약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서원의 중심 건물인 전교당을 둘러보고 쪽문을 나서면 서원의 살림집인 고직사(庫直舍)들이 나타나는데 작은 방들과 곳간들이 오밀조밀 붙어 있는 이 살가운 공간에 서면 그 옛날의 고지기들이 문틈으로 전교당을 훔쳐보며 저희끼리 속삭이던 말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일흔 번 사직한 퇴계의 도산서원
조선시대 사대부 가운데 퇴계만큼 여러 번 벼슬하러 오라는 임금의 명을 받고 또 그럴 때마다 사정을 하며 물러나기를 많이 한 이도 드물 듯싶다. 일흔 번 넘게 사직소를 올린 것만 봐도 그렇다. 취미와 특기가 공부뿐인 퇴계에게는 장관이며 도지사 벼슬 같은 것은 성가시기만 할 뿐 전혀 영양가가 없는 것이었다. 어느 때는 퇴계가 임금의 명을 받고 정말 서울까지 올라왔다. “이번엔 벼슬을 받으실 모양이다”해서 서울에 있던 후배들이며 제자들이 죄 뚝섬으로 환영인사를 갔다. 나룻배에서 내린 퇴계는 곧 자리를 펴 북쪽 궁궐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올리곤 이내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돌아가버렸다. 명색이 신하인데 산골에서만 매번 사양하기가 미안해서 잠깐 서울 행차를 했던 것뿐이었다.
3년의 봄을 한양에서 지내니/ 시절은 망아지에 멍에 매기 재촉하네./ 한가한 뜻에 무슨 유익함이 있을까./ 밤낮으로 나라의 은혜만 부끄럽구나./ 내 집은 맑은 물가 즐겁게 노닐 수 있는 한가한 촌이라네./ 이웃에서는 봄 일을 시작하고/ 닭과 개가 울타리 지키는 곳/ 책이 있는 자리는 고요하고/ 아지랑이 개울물에 피어오르네./ 시내엔 고기와 새들 소나무 밑에는 학과 원숭이가 있네./ 즐겁구나, 산사람이여!/ 돌아간다 말하며 술잔 높이 드네.
-퇴계 이황 시 ‘봄을 느끼다’
시에서 보듯, 부득이 서울에 머무는 때에도 퇴계한테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일념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퇴계를 앞뒤 꽉 막힌 골샌님이거나 근엄하기 짝이 없는 도학자로만 보는 것은 잘못이다. 퇴계 또한 큰 그릇에 걸맞게 때에 따라서는 한없이 다정다감할 뿐 아니라 유머 감각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퇴계의 둘째 며느님이 청상에 과부가 됐다. 홀로 된 젊은 며느리를 보는 시아버지의 심정이야 안쓰럽기 그지없지만 양반의 법도가 엄중한 시대인 만큼 달리 도울 길이 없었다. 그 며느님이 어느 봄날 친족 여인네들과 꽃놀이를 다녀왔다. 저녁 때, 화초에 물을 주던 퇴계가 야유에서 돌아오는 며느리의 행색을 눈여겨봤다. 그러곤 저고리 고름에 꽂힌 진달래꽃 한 송이를 눈에서 떨치지 못했다. 그날 밤, 퇴계의 엄명을 받은 큰아드님이 100리 밖 홀아비를 불러들여 여자를 보쌈해 가도록 했다. 꽃 한 송이에도 애틋한 정분을 갖는 여인네가 한평생 독수공방에서 쌓을 고통을 퇴계가 헤아리고 있었다.
제자 하나가 퇴계의 병문안을 왔다. 벌써 퇴계는 여러 날 몸져누워 있는 형편이었다. 막상 선생을 뵈었지만 제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누워 있는 이에게는 절을 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퇴계가 누운 채로 제자에게 말했다.
“뭘 그리 우물쭈물하는가. 자네도 나처럼 누워서 인사를 하면 되지.”
별세계, 지례예술촌.
안동대학교를 지나 영덕으로 가는 임하댐 호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수애당 및 지례예술촌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댐을 건너서 처음 마주하는 고가가 수애당이요, 그 길을 계속 가서 높은 산 하나를 넘으면 지례예술촌이다. 이 두 곳 다 고래의 안동 명문가 집이다. 고요한 데서 고유의 안동 양반문화를 체험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것도 두 집안이 같다.
대대로 살아오던 마을이 댐의 물속에 잠길 처지가 되자 조상의 얼이 담겨 있는 종갓집과 서당, 제실 등을 마을 뒷산 허리로 옮기고 그 관리와 보존의 이로움을 생각해 예술촌으로 사용 형질을 변경한 지례예술촌의 경우, 근래에 이르러 청소년에서부터 외국인에게 이르기까지 독특한 한국문화 체험학습장으로서의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나 자신 휴대전화조차 통하지 않는 이곳 별채에서 한 주일을 머물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린 때가 있고 어린 학생들 앞에서 문학수업 같은 것을 한 적도 있는데 바라보이는 것은 산과 물뿐 시간조차 흐르지 않는 듯한 별세계에서 가지는 이러한 한때의 적막은 그 후로도 오래 기억이 남아 그리운 것이 됐다. 의성 김씨 종부가 만들어내는 맛깔스러운 음식에 대한 추억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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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곳 촌장인 김원길 시인은 대단히 의욕적인 사업 하나를 꾸미고 있다. 안동지역은 물론 전국에 산재해 있는 명문 종가들을 하나의 문화관광 벨트로 묶는 것이 그것이다. 아무리 내력이 깊은 고가라 해도 사람의 손길과 발길이 그치면 머잖아 폐가가 되게 마련. 그 아까운 유산들을 오래 보존하며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옛 사대부 집안이 가졌던 전통의 생활상을 보여준다는 목적을 가진 이 일에는 벌써 100여 집안이 동참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퇴계 태실이며 학봉 종가 등이 뜻있는 신혼부부들의 신혼 여행지로 부상하고 있음도 이들 명가 후손들의 바뀐 의식과 수요자들의 개성적인 문화의식이 결합된 데서 비롯된 것임은 말할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