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적 가치 창출이 기업의 생존과 성장을 위한 새로운 필요조건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타자리(利他自利)의 경영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되 적정 이윤을 지향하고, 준법경영을 넘어 윤리경영을 정착시키고,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공유하는 기업. 이것이 동반성장이 요구하는 기업의 모습이다.
기업의 사회적 가치는 기업의 경영환경 전반을 흔들어놓을 4차산업혁명 시대에 더욱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7월 초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19 무인이동체산업 엑스포’.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그러나 지금 한국 경제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성장률은 2%대로 주저앉아 몇 년째 횡보하고 있고, 잠재성장률은 계속 추락하고 있습니다. 과거 압축 고도성장 과정에서 파생한 여러 문제는 사회 모든 분야에서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고 있는 형국입니다. 특히 선성장·후분배 정책이 야기한 소득불균형과 양극화는 우리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심각한 불균형은 성장 잠재력을 떨어뜨립니다. 또한 불균형 사회는 감당할 수 없는 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는 “시장의 불균형은 역동성, 효율성 그리고 생산성을 마비시키고, 파멸적인 악순환 고리를 형성해 결국 사회 전체를 침몰시키게 될 것”이라고까지 경고했습니다.
불균형 상태를 균형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노력을 전면적이고 지속적으로 전개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기업의 역할이 아주 큽니다. 눈앞의 이익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사회 발전을 견인하는 건강한 기업시민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한국 경제가 산업화를 거치는 동안 기업인들, 특히 대기업들은 기업보국, 사업보국, 기술보국과 같은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우리의 기업관 속에는 알게 모르게 기업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에 대한 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컴퍼니 어원은 ‘빵을 나눠 먹는 사람’
그러나 지금까지 대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만족스럽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대기업에서는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기도 버거운데 너무 많은 책임을 지우는 게 아니냐’는 불만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책임에 기반을 둔 가치경영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기업이 생존할 수 있는 필수요건이 됐습니다. 투자자와 소비자들은 기업의 사회 기여를 투자 기업과 제품·서비스를 선택하는 주요 기준으로 삼는 추세가 확산하고 있습니다. 요즘 대기업을 중심으로 시장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 모두를 추구하는 흐름이 커지고 있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사실 기업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관심은 어제오늘 시작된 게 아닙니다. 기업이 빈곤, 안전, 환경 등 사회문제에 대응해온 것은 오래됐습니다. 원래 기업 ‘Company’의 어원은 라틴어 ‘Companio’에 있습니다. ‘Companio’는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기업가 ‘Entrepreneur’ 또한 ‘사회와 더불어 주고받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내포해 있습니다. 기업가, 기업 모두 사회적 가치 사슬 내에서 규정돼 있었던 것입니다.
1960년대 미국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 등장할 당시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이익을 올려 고용을 늘리고 임금을 더 지불하고 세금을 많이 내는 것으로 간주됐습니다. 그러다 2003년에는 기업에 인격을 부여해 시민의 의무와 책임을 부여하는 ‘기업시민’의 개념이 등장합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기업 경영의 주요한 축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민은 마이클 포터와 마크 크레이머가 제시한 ‘공유가치 창출(CSV·Creating Shared Value)’로 진화합니다. CSV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역량이 기업 경영에 큰 영향을 주는 것에 착안해, 사회문제 해결을 기업의 본 사업과 연계해 장기적인 경쟁우위를 확보한다는 전략입니다. 한마디로 수익을 내면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성장전략입니다. CSR이 기업이 사후적으로 이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라면 CSV는 선행적으로 시장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창출하는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CSV는 글로벌 시장의 급격한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시장을 창조하고 리드할 수 있는 이노베이션이라고도 평가받습니다. 또한 대기업의 납품단가 후려치기나 기술 탈취 등의 불공정 관행도 CSV를 통해 일정하게 예방하는 효과도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기업이 이전처럼 막무가내식으로 행동해 경제적 가치에 비해 사회적 가치가 크게 하락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기 이익과 장기 성장의 균형감각 필요
그렇다면 이러한 세계적 흐름 속에서 한국 기업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보기로 합시다.한 자료에 따르면, 세계 기업들의 평균 수명은 단 13년에 불과하고 30년이 지나면 80%의 기업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100년 이상 된 초일류 장수기업들은 수많은 위기를 겪으면서, 발 빠른 변신과 함께 환경 대응력을 높여 지속적인 성장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속 가능한 탁월성(Sustainable Excellence)을 지닌 영속(Built to Last)기업이야말로 우리 기업이 지향하는 ‘기업’의 표상일 것입니다.
복잡다단하면서도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21세기의 경영 환경에서 영속기업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한 첫 번째 덕목은 아마도 ‘균형감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업의 단기 이익과 장기적인 성장, 공격적인 확장과 시스템의 안정화 등 여러 가지 상충되는 목표와 가치 사이에서 경영자는 균형감각을 유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균형감각은 기업의 안정과 성장이라는 순수 경영적 가치, 글로벌-혁신-창조로 이어지는 시장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책임-동반성장-공유가치로 이어지는 사회적 가치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이냐에 대한 것입니다. 현재 우리 기업들도 시장경제적 가치에 더해 사회적 가치 창출까지 고려함으로써 새로운 사업 영역을 개척하려는 시도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사회문제 해결이 기업 혁신의 한계를 돌파하는 열쇠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좋은 기업의 조건
이제 구체적으로 좋은 기업의 조건을 하나씩 따져보기로 합시다.첫째, 모든 기업이 추구하는 전통적인 목표와 그들의 존재 이유는 ‘이윤 극대화(Profit Maximization)’에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비전을 내세운 기업일지라도 기업 활동의 지속성을 담보할 영양분인 이윤을 내지 못한다면 도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업들이 이익을 극대화하지 않고 다른 데에 신경 쓴다면, 예를 들어 이익이 아닌 기업의 규모 확장에만 신경 쓴다면, 그 기업의 생존은 물론 경제 전체에 부정적인 상황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을 당시 우리나라의 재벌 대기업들은 이윤 극대화가 아니라 매출 극대화를 최우선 경영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수익률에 신경을 쓰지 않고 계열사를 최대한 늘려나갔습니다. 자동차에서 아파트까지, 전자제품에서 레저까지, 건설에서 도시락까지, 재벌 회사의 브랜드가 커버하지 않는 일상생활이 없는 세상,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 때까지 재벌 대기업이 생산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하지 않고는 살기 어려운 세상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사업 분야에도 무차별적으로 진출하는 지네발식 경영을 했습니다.
그 결과 1990년대 들어 IMF체제 직전이던 1997년까지 한국 경제에서는 경제 전체적으로 보아 부실투자와 과잉투자가 진행됐습니다. 기업 부문의 광범위한 부실은 기업에 대출해준 은행의 부실로 이어졌고, 급기야 168조 원이라는 사상 초유의 공적 자금이 투입되는 금융위기가 발생했습니다. 그로 인한 경제적 사회적 후유증은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조직 다양성과 개방성에 주목하라
그러면 기업이 이윤을 많이 올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업들이 경쟁력을 키워 이윤을 많이 내려면 창의적인 인재들을 모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직의 다양성과 개방성에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삼성과 대우를 비교하면, 삼성은 인재제일을 앞세워 우수한 인재를 뽑되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다양한 경로와 방식을 통해 뽑아서 성공했는 데 반해 대우는 학벌 위주로 뽑아 실패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지적에 공감합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이 모여 서로 부딪치고 통섭하는 과정에서 간접경험을 많이 하면 다른 사고, 새로운 사고가 유발돼 창의적인 환경을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제가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재임하는 동안에 신입생 선발에서 지역균형선발제도를 도입하고, 교수 선발에서 여성 교수를 새로 많이 뽑았을 뿐 아니라, 3분의 1 법칙(신임 교수 3명 가운데 1명은 서울대 나오지 않은 사람을 선발)을 실시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기업이 이윤극대화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지난 1세기 동안 압도적으로 좋은 성적을 낸 영속기업들의 특징을 분석해보면 돈을 버는 것은 여러 가지 목표 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좋은 기업은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핵심 이념, 즉 돈 버는 것 이상의 핵심 가치와 목적의식에 의해 경영돼 왔습니다. 그 결과, 좋은 기업인 영속기업들은 오직 이익만을 추구한 일반 기업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특히 100년 이상 된 세계 유수의 영속기업이 압도적인 성적을 내게 한 힘은 기업의 ‘사명(Mission)’이었습니다. 이윤을 넘어선 사명과 비전이야말로 좋은 기업의 장기적 생존 및 성과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많은 실증적 연구가 입증합니다.
둘째, 좋은 기업의 또 다른 조건은 기업이 법과 회계 기준에 충실한 준법경영(Compliance Management)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기업들에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윤 극대화 이전에 충족돼야 할 전제조건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업의 자유를 외치는 자유시장주의자들과 자유방임주의자들도 이윤극대화의 전제조건으로 모든 기업은 반드시 법을 준수하는(Law-abiding) 기업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기업이 “이익만 극대화하면 되지 않느냐?”라고 말할 자격이 있으려면, 그 기업은 최소한 법률을 준수하는 기업이어야 합니다.
그동안 세계 각국은 탈세, 탈법, 위법, 불법 경영의 폐해를 막고, 기업 상호 간의 공정한 경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이해관계자의 합의를 바탕으로 노동법, 조세법, 공정거래법, 자본시장법, 환경법 등을 제정해왔습니다. 이처럼 법은 공정 사회를 위한 최소한의 합의의 산물이기 때문에 기업을 비롯한 모든 사회 구성원이 법을 준수하는 것이야말로 건강한 자본주의를 지키는 기본 토양입니다.
이윤 극대화의 전제조건
좋은 기업의 세 번째 조건은 자본주의 시장의 게임 규칙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게임의 규칙은 법률보다 광범위한 개념으로서, 자본주의 시장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단번에 공감할 수 있는 유형·무형의 규칙을 말합니다.기업 간의 경쟁에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생산성을 높여 생존하려 하지 않고, 게임의 규칙을 어김으로써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한다면 이는 공정한 경쟁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비록 법률에 저촉되지는 않더라도, 시장 참여자들의 지탄을 받을 만한 일은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대기업의 불공정한 하도급 거래와 담합, 기업형 슈퍼마켓(SSM)의 골목상권 점령, 사회 지도층 인사의 조세회피지역 페이퍼 컴퍼니 설립, 편법 상속과 증여 등 위법은 아닐지 몰라도 국민 정서상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 사회 공정 시스템을 무력화해 왔습니다.
이처럼 게임의 규칙을 무시한 채, 법의 테두리 내에서는 무엇을 해도 괜찮다는 편법과 탈윤리경영(Amoral Management)은 타락한 자본주의를 불러온 주범이 됐습니다. 막스 베버가 염려했던 ‘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는 천민자본주의’ 행태가 세계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 사회의 위기를 불러일으켜 왔습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 조건인 윤리경영(Moral Management)의 필요성이 전 세계적으로 대두됐습니다.
윤리경영이란 기업이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자세로 기업윤리의 준수를 행동 원칙으로 삼고, 기업의 이익추구 활동과 기업윤리 간에 갈등이 발생하면, 윤리 측면을 우선 고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업의 사회적 역할 기대 커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의 국제기구에서는 윤리경영의 규범화와 표준화를 추진하면서 ‘공정하고 투명한 경쟁규칙’을 국제 상거래에 적용하려는 윤리 라운드(Ethics Round) 노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각종 부패 추방을 위한 부패 라운드(Corruption Round) 협약을 체결해 시행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최근에는 기업 활동의 증대로 경제 분야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경제가 정치와 사회, 문화에 영향을 주는 사회로 전환됐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업은 국가를 공동으로 운영해가는 거버넌스(Governance)의 한 주체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또한 기업은 일반적으로 국가 재정을 담보하는 가장 중요한 조세원이 되고 있으며, 국가의 부와 경쟁력 창출의 주체만이 아니라 고용의 주체로서 국가와 사회 안정에도 기여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일반 가계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소득원이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기업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기대는 증대됐으나, 실제 현장에서는 그 기대를 충족시킬 만한 기업의 실천이 수반되지 못해 시민들의 피해의식도 증대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민사회가 기업의 영향력 확대에 따른 권력남용에 대한 비판 수위를 높이고, 이를 규제할 필요성에 따라 법과 제도를 통한 정부의 개입, 사회의 요구에 따른 윤리경영 실천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전략적 경영 차원에서라도 기업은 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기업의 투명성과 윤리성을 바탕으로 한 윤리경영, 정직과 신뢰로 얻은 기업명성(Corporate Reputation)은 현대사회에서 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과 번영을 위한 필수 요건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좋은 기업은 동반성장을 실천하는 기업입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은 다음과 같이 단계를 분류할 수 있습니다. 1단계: 경제적 책임은 양질의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판매해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책임입니다. 2단계: 법적 책임은 공정한 규칙 속에서 법을 준수하며 기업을 경영해야 하는 책임입니다. 3단계: 윤리적 책임은 기업 또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소비자와 종업원, 지역 주민, 정부 등 모든 이해관계자의 기대와 기준, 가치에 부합해야 하는 책임입니다. 4단계: 사회공헌의 책임은 기업이 창출한 가치를 사회와 함께 공유하는 책임입니다. 즉, 기업은 사회 속에서 건전한 기업시민(Good Corporate Citizen)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반성장 실천해야
사회적 공유가치창출(CSV) 전략을 고안한 마이클 포터 하버드대 교수. [동아DB]
저는 일찍부터 대기업이 법과 룰을 지키며 중소기업과 동반성장해야 한다고 주창해왔습니다. 그동안 대기업들은 관행적으로 중소협력업체에 납품단가 후려치기, 서면 주문이 아닌 구두 주문, 기술 빼돌리기, 사내 하도급, 장기간의 어음 결제 등의 위법·탈법 행위를 거리낌 없이 했습니다. 그로 인해 국민경제의 생태계가 파괴되고, 공동체의 존립 기반 자체가 위험해졌습니다. 제가 대·중소기업 간 동반성장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는 사회공동체가 흔들리면 기업의 생존도 위협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장이 무너지는 마당에 매출과 이익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속 가능한 경영의 목표는 건강하고 성공한 사회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야 기업도 생존과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 원리가 결국 기업뿐만 아니라 사회, 국가 운영의 화두가 돼 새로운 자본주의를 모색하는 흐름을 만들고 있습니다.
제가 제안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선순환 생태계를 위한 동반성장 3대 방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초과)이익공유제(협력이익배분제)입니다. 대기업이 거두는 (초과)이익의 일정 부분을 협력 중소기업의 성장 기반을 강화하는 데 활용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혜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보상 차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대기업 이익의 적지 않은 부분은 납품가 후려치기 등 불공정 거래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포스코가 오래전부터 실천해온 성과공유제도 하나의 방안입니다. 둘째,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입니다. 중소기업의 사업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 대기업들의 신규 참여 확대를 금지하는 업종을 선정함으로써 중소기업의 자생력과 경쟁력을 키워주자는 것입니다. 셋째, 정부 발주의 중소기업 중심화입니다. 정부 발주의 일정 비율 이상을 중소기업에 직접 발주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동반성장의 핵심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성장하는 선순환 생태계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대·중소기업의 동반성장은 경제 효과가 단기간에 나타날 뿐 아니라 지속 성장을 위해서도 반드시 선행돼야 할 조건입니다.
슈퍼리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
그런데 동반성장을 위해서 어떤 정책을 펼치고 돈을 얼마 쓰는 것도 좋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시적인 지원, 수치로 드러난 실적이 아니라 사물이나 사태를 대하는 본질적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경영자들의 식견과 안목, 그리고 비전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기업은 중소기업과 같은 배를 탔다고 생각하고 동반성장하라는 말입니다.워런 버핏, 빌 게이츠, 조지 소로스 같은 미국의 (억만장자) 슈퍼리치들이 미국 사회를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변모시킬 수 있는지를 가상적으로 그린 소설이 있습니다. 제목이(어찌 보면 참으로 무모하게도(?)) ‘슈퍼리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Only the Super-Rich Can Save Us)’입니다. 물론 이들 슈퍼리치가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를 풀 수는 없겠지만, 엄청난 부와 인맥과 지혜를 가진 그들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발상에 저는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12년간 뉴욕시장을 지낸 마이클 블룸버그 시장만 해도, 뉴욕을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기 위해 행정도 잘했지만, 그 과정에서 천문학적인 개인 재산을 뉴욕시를 위해 쓰고, 또 다른 기부도 많이 했습니다.
한국을 보자면 우리 사회를 위해 그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집단이 대기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기업이 어떻게 지금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습니까? 임직원들이 밤잠을 설치며 노력한 결과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국민이 애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들이 오늘의 일류 기업으로 성장한 데에는 대한민국의 중소기업, 대한민국 정부, 대한민국 국민과 함께였다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미래에도 우리 대기업이 세계시장 리더의 자리를 더욱 굳건하게 지켜나가는 것이 어떻게 그들 내부의 힘만으로 되겠습니까? 우리들은 한국인의 뛰어난 능력과 도전정신을 자부합니다. 그런 에너지가 모여서 대기업이 오늘날에 일류기업으로 성장했듯이 미래의 발전도 이런 사회적 역량에 기반할 때 공고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동반성장은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타자리 정신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의 필요성과 효과는 이미 국제적으로도 입증돼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롤스로이스, 화이자, 머크, 스타벅스, 네슬레 등 거대 기업들이 이미 이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국가경쟁력위원회(Council on Competitiveness)가 수년전 발간한 ‘국가혁신보고서(National Innovation Report)’를 보면 21세기 국가 혁신을 검토하기 위해 주목해야 할 7개 키워드 중 하나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 변화’를 지목했습니다. 유독 이 부분이 우리 국민에게 더 절박하게 와닿는 이유는 우리 기업의 99%가 중소기업이며, 고용의 88%를 중소기업에서 창출하는 데 있습니다.동반성장의 정신은 타인을 행복하게 만듦으로써 나 자신도 행복해지는, 이타자리(利他自利)와 맥을 같이합니다. 미래의 세계는 이타주의자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는 강조합니다. 이타주의적 인간은 더 진화된 인류의 꿈이자, 꼭 와야만 할 당위적 미래이기도 합니다. 자신뿐 아니라 동시대인과 그 후손의 운명에 대해 깊은 이해심을 갖고 고심하는 이타적인 시민을 트랜스 휴먼(Trans Human)이라고 아탈리는 말합니다.
이들은 시장에서 낙오한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민주 제도에서 차별받는 불우한 계층을 구제해주는 창조적 그룹이자, 인류 최선의 제도인 자본주의를 지키는 선도자로서 워런 버핏, 빌 게이츠, 경주 최부자집, 제주도의 김만덕 할머니와 같은 사람입니다. 빌 게이츠도 이타적인 트랜스 휴먼이야말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에 대한 인류의 믿음과 지지를 확보하고, 전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약속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자 자본주의가 존속할 수 있는 창조적 방안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를 직접 실천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가치경영
마찬가지로 기업의 이타자리(利他自利) 경영 역시 자신이 속한 생태계를 풍요롭게 가꿈으로써 스스로의 이익과 성장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생태계의 참여자들에게 혁신에 필요한 장소, 역량 등을 제공해 생태계 전반의 생산성과 안정성을 높이면 자신의 성장가능성도 훨씬 높아질 것입니다. 이러한 기업들이 자신이 속한 비즈니스 생태계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일치시킴으로써 전략적 파트너를 확보하고, 급변하는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경제적 문제점을 개선하면서 동시에 기업의 핵심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새로운 혁신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 마이클 포터의 사회적 공유가치창출(CSV)은 이타자리 경영 즉, 동반성장과 맥을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20세기 말 밀려온 신자유주의의 쓰나미는 시장의 조절 기능을 상실하게 만들고, 경제 위기와 사회의 양극화를 불러왔습니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가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넘어 세계에 전면화한 이유는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의 모순을 스스로 고쳐온 데 있습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29년 미국 월가의 공황에 이은 세계대공황을 국가 개입정책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현재의 신자유주의 체제의 허점과 경제주체의 탐욕 또한 국가가 적정한 유도를 통해 바른 방향으로 교정해야 합니다.
기업 역시 경쟁과 이윤 극대화만을 중시하는 ‘차가운 이윤경영’을 넘어 중소기업, 지역 등 사회와 동반성장하는 ‘따뜻한 가치경영’을 추구해야 합니다. 동반성장적인 경제 생태계가 구축돼 국민경제가 막힘없이 선순환할 때 우리 기업들 또한 급변하는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핵심 역량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가 없으면 기업이 존재할 수 없는 만큼 기업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기업’입니다.
기업 생존과 성장의 필요조건
특히 4차 산업혁명은 기업의 광범위한 협력적 경영과 사회적 가치 창출을 강력하게 추동할 것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4차 산업혁명이 기업의 경영 환경 전반을 뒤흔들어놓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술 발전으로 기업이 혁신해야 할 분야는 플랫폼 비즈니스, 인공지능, 증강현실 같은 미래 산업만이 아닙니다. 고도화된 SNS(Social Network Service)는 오프라인에 흩어져 있던 여론을 온라인에 결집시키고 기업은 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다수가 실체를 가진 강력한 힘이 돼 기업의 브랜드 가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입니다.기업이 사회와 관계 맺는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됐습니다. 기업의 사회적 가치 창출에 대한 시장의 요구는 더 거세질 것입니다. 공공 인프라 건설, 기술이전, 환경문제 해결, 일자리 창출 등 돈만 벌지 말고 제품을 생산, 구매해주는 소비자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업이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바야흐로 사회적 가치 창출이 기업의 생존과 성장을 위한 새로운 필요조건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타자리의 경영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되 적정이윤을 지향하고, 준법경영을 넘어 윤리경영을 정착시키고,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공유하는 기업 이것이 동반성장이 요구하는 기업의 모습입니다.
※ 이 원고는 지난 8월 포스코의 제1회 기업시민연구포럼에서 기조강연으로 발표된 내용입니다.
정운찬
● 1947년 충남 공주 생
●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프린스턴대 경제학 박사
● 컬럼비아대 교수,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서울대 총장, 한국경제학회장
● 제 40대 국무총리,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
● 現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 저서: ‘경제학 원론’ ‘화폐와 금융시장’ ‘가슴으로 생각하라’ ‘미래를 위한 선택 동반성장’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