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호

영국 밀레이의 그림 ‘오필리어’, 대학생 사로잡다

[명작의 비밀] 연인에 의해 아버지 잃고 미쳐버린 비극의 주인공

  • 이광표 서원대 휴머니티교양학부 교수 kpleedonga@hanmail.net

    입력2024-09-10 09: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햄릿’ 속 가장 비극적 인물 오필리어

    • 원작에 없는 양귀비꽃 그려 넣은 밀레이

    • 실제 모델도 아편중독으로 사망

    • 그림 둘러싼 비극, 젊은 층 감성 건드려

    존 에버렛 밀레이의 1852년 작품 ‘오필리어’. [테이트브리튼미술관]

    존 에버렛 밀레이의 1852년 작품 ‘오필리어’. [테이트브리튼미술관]

    대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미술품은 무엇일까. 작품을 하나 고르기는 어렵지만 제작자를 생각하면 1위가 쉽게 좁혀진다. 아마도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고르는 학생이 가장 많을 것이다. 그만큼 고흐의 작품은 친숙하다. 관련 전시회가 열리면 매진 세례가 이어지는 것만 봐도 확인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대학생들에게 두 번째로 인기를 끄는 화가는 누구일까. 쉽지 않은 예측이다. 필자는 대학에서 매 학기 ‘예술과 명작의 탄생’이라는 교양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학생들은 시험도 보지만 과제도 제출해야 한다. 지난 학기엔 ‘나의 명작 감상기’를 과제로 내줬다. 자신에게 감동을 준 예술 작품 1~3점을 골라 감상문과 작품에 대한 배경 이야기를 조사·정리해 제출하는 것이다.

    가장 많은 학생이 예상대로 고흐의 그림을 골랐다. 그런데 다음 순위의 작품이 필자를 놀라게 했다. 19세기 영국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의 1852년작 ‘오필리어’였기 때문이다. ‘오필리어’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 등장하는 오필리어(햄릿의 약혼녀)의 최후를 묘사한 그림이다. 우리에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런던 테이트브리튼미술관의 간판 작품이다.

    학생들이 이 작품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대체 이 작품의 어떤 요소가 20대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일까. 학생들이 그림에 매료된 까닭은 무엇일까. 이렇게 흥미로운 궁금증을 갖고 여름방학을 보내던 중 셰익스피어 ‘햄릿’ 공연을 보게 됐다. 신시컴퍼니가 서울 대학로에서 9월 1일까지 무대에 올리는 작품이다. 세익스피어 원작에 충실한 정통 햄릿으로, 전무송·이호재·박정자·손숙·김성녀·길용우 등 베테랑 배우들과 젊은 배우들이 호흡을 맞췄다. 연극을 보러 가면서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은 밀레이의 오필리어였다. 젊은 대학생들을 사로잡은 바로 그 작품 말이다.

    세기를 뛰어넘어 사랑받는 작품 ‘햄릿’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비극이다. 많은 사람이 대강의 내용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비극의 등장인물 가운데 누가 가장 비극적일까.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며 고뇌한 햄릿일까. 아니면 햄릿의 손에 의해 억울하게(혹은 어이없게) 죽임을 당한 폴로니우스(오필리어의 아버지)일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햄릿도 아니고 폴로니우스도 아니라 햄릿의 약혼녀인 오필리어일 것 같다.

    햄릿은 실수로 자신의 약혼녀 오필리어의 아버지 폴로니우스를 죽인다. 갑작스레 아버지를 잃은 오필리어는 충격을 받고 정신이상에 빠진다. 충격과 절망 속에서 숲을 돌아다니며 방황하던 오필리어는 강가에서 꽃을 따러 버드나무에 오르다 떨어져 물에 빠져 죽는다. 오필리어의 죽음을 두고 사고사로, 혹은 자살로 보기도 한다. 사인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오필리어의 죽음은 더욱 비극적이다.

    신시컴퍼니의 햄릿에서 유일하게 노래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필리어가 아버지를 잃고 비통한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다. 꽃을 사랑했던 오필리어가 정신이상에 빠져 꽃에 입맞추며 부르는 노래. 이 연극에서 오필리어 역은 2009년 데뷔한 걸그룹 f(x) 출신의 배우 루나가 맡았다. 루나가 오필리어의 처연한 심경을 노래할 때, 객석에선 적잖은 이들이 눈물을 훔쳤다. 이 대목에서 학생들의 과제물이 다시 떠올랐다. 19세기 영국 화가 밀레이의 ‘오필리어’는 대체 어떤 매력이 있는 것일까.

    화려하고 환상적이어서 더 슬픈 오필리어의 죽음

    영국의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 [위키피디아]

    영국의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 [위키피디아]

    오필리어를 그린 작가 존 에버렛 밀레이는 우리에게 다소 낯선 이름이지만 영국의 대표 화가다. 어린 시절부터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면서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밀레이 하면 라파엘전파(前派)를 빼놓을 수 없다. 밀레이는 당대의 미술 문화에 반기를 들고 라파엘전파를 결성해 새로운 미술을 이끌었다.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이후 이어져 온 관습적이고 상투적인 미술에서 벗어나 라파엘로 이전 시대(르네상스 초기)의 순수하고 도덕적이며 성스러운 미술을 추구하자는 취지였다. 구체적으로는 자연을 충실하고 섬세하게 묘사하고 역사적 회화를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 방편의 하나로 라파엘전파는 영국의 전통과 문학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그렇다 보니 셰익스피어가 빠질 수 없었다. 밀레이와 라파엘전파는 특히 햄릿의 등장인물 오필리어를 즐겨 그렸다.

    밀레이는 1851년부터 1년간 오필리어를 그렸다. 오필리어가 맞는 죽음의 순간, 그 비극적이고 드라마틱한 과정을 그린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 4막 7장에는 오필리어가 맞는 죽음의 순간이 나온다. 햄릿의 어머니인 왕비 거트루드가 오필리어의 오빠인 레어티스에게 오필리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장면이다.

    거울 같은 물 위에 하얀 잎을 비추며
    냇가에 비스듬히 수양버들 자라는데
    그것으로 네 누이가 기막힌 화환을
    미나리아재비, 쐐기풀, 들국화 그리고
    입 건 목동들은 더 야하게 부르지만
    정숙한 처녀들은 ‘죽은 이 손가락’이라 하는 …
    야생 난과 엮어서 만들었지.
    휜 가지에 풀꽃 관을 걸려고 올라가다
    짓궂은 실가지가 부러져
    풀 화환과 네 누이는
    눈물처럼 흐르는 개울로 떨어졌어.
    입은 옷이 쫙 퍼져 그녀는 인어처럼 떠 있게 됐는데
    그동안에 찬가 몇 구절을 불렀단다.
    자신의 위기에는 무감하게 됐거나
    물에서 태어나고 거기에 적응된 생명체가 된 것처럼
    그러나 머지않아 그녀의 의복이 마신 물로 무거워져
    고운 노래 부르는 불쌍한 그 애를 끌고 갔어
    진흙 속 죽음으로.

    밀레이는 원작에 나오는 오필리어가 맞는 죽음의 장면을 매우 꼼꼼하고 세밀하게 그려냈다. 오필리어의 표정과 옷차림, 오필리어가 지닌 여러 꽃, 작은 강가와 주변 수풀의 풍경 등등. 전체적으로 원작의 텍스트를 충실하게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이는 영국의 역사문화와 셰익스피어에 대한 경외감의 표현이었다.

    그림 속에서 오필리어는 물에 떠서 서서히 죽어간다. 오필리어의 육체는 창백하다. 그 와중에도 입을 벌려 노래하고 있다. 주변은 나무와 풀로 온통 초록이다. 그 초록은 매우 강렬하고 오필리어의 하얀 얼굴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환상적이지만 동시에 분위기는 무겁고 답답하다. 무성하고 아름다운 초록이지만 빛은 들지 않고 막혀 있는 것 같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기 때문이리라. 밀레이가 그려낸 오필리어의 죽음은 이렇게 화려하고 환상적이며 그래서 더 슬프다. 무언가 신묘(神妙)함이 가득하다.

    밀레이는 원작에 등장하는 오필리어의 꽃들을 매우 세밀하게 그렸다. 저 꽃들은 모두 그나름의 상징성이 있지만 대부분 슬픔과 허무함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섬세하고 정교하며 그렇기에 아름답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 너머로 무언가 처연함과 서늘함이 다가온다.

    특히 양귀비꽃이 의미심장하다. 그림을 보면, 오필리어의 오른손에서 붉은 양귀비가 빠져나가고 있다. 양귀비는 햄릿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밀레이는 양귀비꽃을 일부러 그려 넣었다. 화려한 양귀비꽃은 단순한 죽음을 넘어 슬픔의 최대치, 즉 파국 같은 것을 상징한다. 인간 삶에서 화려함과 파국은 서로 맞닿아 있음을 말하려 한 것은 아닐까.



    오필리어 모델, 시달의 슬픈 사연

    밀레이는 오필리어를 그리기 위해 오랜 시간을 투자했다. 밀레이는 1851년 여름 넉 달 동안 런던 남서부 근교 서리 지역의 혹스밀강 근처에서 배경(강가 풍경과 나무와 꽃 등)을 먼저 그렸다. 이어 런던으로 돌아와 추운 겨울 동안 고워스트리트에 있는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인물을 그려 넣었다. 그때 엘리자베스 시달(1829~1862)이라는 스물두 살의 여성 모델이 있었다.

    밀레이도 열심히 그렸지만 시달의 협조가 없었으면 이 그림은 완성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모델인 시달은 몇 주 동안 램프 욕조(여러 개의 램프로 물을 미지근하게 데우는 욕조)에 누워 죽어가는 오필리어의 포즈를 취해야 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주에 걸쳐 진행됐으니 그 자체로 엄청난 노동이었다. 게다가 램프로 데운 욕조의 물이 그리 뜨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겨울철 모델 작업으로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어’의 모델 엘리자베스 시달. [위키피디아]

    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어’의 모델 엘리자베스 시달. [위키피디아]

    ‌여기서 모델인 엘리자베스 시달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시달은 라파엘전파 멤버들의 모델로 일했던 여성이다. 시달은 처음에는 라파엘전파 멤버들의 모델로 일하다가 멤버 중 한 명인 화가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와 사랑에 빠졌다. 1852년 밀레이 오필리어의 모델로 일한 뒤부터는 로세티의 연인이 됐다. 로세티의 모델로만 일했고 로제티와 약혼을 했다. 그러나 당시부터 시달은 건강이 좋지 않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요양 생활을 해야 했다.

    엘리자베스 시달의 연인이었던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 [위키피디아]

    엘리자베스 시달의 연인이었던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 [위키피디아]

    ‌그런데 로세티는 심한 바람둥이였다. 약혼자 시달이 요양 생활을 하는 사이 로세티는 여러 여성과 관계를 맺었다. 당시 빅토리아 시대엔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여성에 대해 도덕적 비난이 많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약혼만 하고 결혼하지 않은 시달은 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겪었다. 시달은 신경통과 우울증을 이겨내려 아편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1860년 시달의 건강 상태가 심각해지자 로세티는 그제야 시달과 정식으로 결혼했다. 하지만 결단이 너무 늦었다. 시달의 건강은 이미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달은 1861년 한 차례 유산을 했다. 고통스러운 나날이 길어지는 만큼 시달의 아편중독은 더욱 심해졌다. 급기야 1862년 임신 상황에서 아편중독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녀의 나이 서른세 살이었다.

    시달은 모델이기 이전에 시인이었고 화가였다. 시달은 자화상을 그리기도 했다. 라파엘전파 화가들은 모델인 시달을 이상화된 여성의 모습으로 그렸다. 그러나 시달의 그림은 달랐다. 시달은 자신의 모습을 매우 초췌하게 그렸다. 라파엘전파 로세티의 뮤즈였으나 버림받고 외면당하며 점점 피폐해지고 옹색해진 자신의 삶을 자화상에 담은 것일까.

    자신의 처지를 냉철하게 직시한 것일 수도 있고, 세상에 대한 원망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시달의 삶이 비극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 대목에 이르니 시달의 삶이 햄릿 속 오필리어의 삶과 자꾸만 오버랩된다. 밀레이의 오필리어에 아편의 원료인 양귀비가 등장한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젊은 감성 자극하는 슬픔의 카타르시스

    테이트브리튼미술관은 영국 화가의 미술품을 전시하기 위해 설립됐다. [위키피디아]

    테이트브리튼미술관은 영국 화가의 미술품을 전시하기 위해 설립됐다. [위키피디아]

    라파엘전파 화가들은 햄릿 속 오필리어를 자주 그렸다. 그중에서도 밀레이는 햄릿의 원작에 가장 충실하고 가장 꼼꼼하게 오필리어를 그렸다. 그 덕분에 밀레이의 작품은 오필리어 대표작으로 인정받게 됐고 나아가 영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영국 그림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밀레이의 오필리어는 런던의 테이트브리튼미술관에 소장 전시돼 있다. 테이트브리튼미술관은 테이트모던미술관과 함께 테이트 네트워크에 속해 있는 미술관이다. 테이트모던은 현대미술 공간이다. 테이트브리튼은 그 이름에서 보여주듯 영국의 미술품만을 소장·전시하는 공간으로 1897년 문을 열었다. 영국에는 브리티시 뮤지엄(대영박물관), 내셔널 갤러리 등 대형 미술관이 있다. 하지만 막상 영국의 미술품을 전시하는 공간이 없다는 자성에서 테이트브리튼미술관이 탄생했다. 테이트브리튼미술관 개관을 계기로 영국인들은 자국의 미술을 사랑하게 됐고, 동시에 영국 작가들을 격려하고 창작 의욕을 자극했다. 영국화파(British School)의 개념이 등장한 것도, 윌리엄 터너의 의미와 매력을 발견한 것도 모두 테이트브리튼미술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테이트브리튼미술관은 이렇게 가장 영국적 미술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의 간판 대표작이 밀레이의 오필리어다. 홈페이지에만 들어가 보아도 그 위상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19세기 영국 화가들에게 창작의 원천,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것이 오필리어의 죽음이었다. 그 죽음은 비극적이고 낭만적이다. 밀레이의 그림 ‘오필리어’ 또한 비극적이다. 그림의 모델인 엘리자베스 시달의 삶도 비극적이다. 참으로 묘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이 대목에서, 학생들이 왜 이 작품에 감동했는지 그 궁금증 하나가 살짝 풀리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이 완벽한 정답일 수는 없다. 좀 더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단서 하나는 찾게 된 것 같다.

    비극적 죽음은 사람을 슬프게 한다. 그런데 그 슬픔은 사람들을 맑고 투명하게 해준다. 슬픔의 힘, 눈물의 힘이다. 그 슬픔의 카타르시스가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감성을 건드린 것은 아닌지,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前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