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 일각에는 ‘대통령 노무현’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해서 노무현 정권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정권이며 가능하다면 당장 끝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누구나 정치적 의견을 가질 수 있고 이를 표현할 수 있다. 문제는 그들이 내세우는 노 대통령 불가론이 근본적으로 색깔논쟁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와 헌정질서 파괴에 부역하고 그것을 진두지휘해온 이들이 이제 반(反)독재와 민주주의, 헌정질서 수호를 외치면서 마치 항일독립운동 투사라도 되는 양, 민주화투쟁이라도 하는 양 출몰한다.
아무리 세상 돌아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아무리 대통령이 밉다고 해도 자신들의 심중을 표현하는 데는 최소한의 이성적 절제와 합리적 논거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이들은 이렇듯 막무가내, 마구잡이로 치닫는 것일까. 왜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이토록 후안무치하고 용감무쌍한 것일까.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 대목에서 모 언론매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레닌의 투쟁방법을 공부하기라도 한 것인지, 투쟁방향과 선전 슬로건은 물론이거니와 행동지침까지 제목으로 뽑아내 사실상 특정세력의 기관지나 선전매체, 브레인 구실까지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지경이다. 또 하나의 버팀목은 어느새 한국 극우의 중추세력이 돼버린 듯한 재향군인회와 성우회 등 예비역 단체들이다. 그들은 ‘명령만 내리십시오!’ 하는 자세로 행동대원 구실을 톡톡히 해내는 모양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야 무엇을 하건 그들의 자유다. 하지만 이들이 내심 후배인 현역 군인들도 필요할 때는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줄 것이라는 위험한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다. 이들은 대통령 노무현의 정치적 신념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말 한마디마다 공격하며 아예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자세로 일관한다. 대통령 탄핵심판 상황이 진행되어 합법적 퇴진의 길이 보였을 때 그들이 얼마나 환호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국민 다수는 그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필자는 각종 예비역 단체들이 과연 진정으로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누려온 기득권에 반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변화하는 것을 두고 마치 세상이 당장 끝장나기라도 할 것처럼 고함치는 모습은 윤리적으로나 심미적으로나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 어쩌면 이성의 공황상태에 빠진 듯한 그들에게 윤리나 심미라는 말을 갖다붙이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르겠다.
한 귀로 흘리고 싶지만…
더욱이 비합법적인 물리적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대통령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흥분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특히 군사반란을 통한 정권전복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말까지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한편에 있던 연민의 정도 싹 가시고 만다. 예컨대 시대착오적인 선동가의 길로 본격 나선 듯한 앞서의 언론매체 대표가 지난해 8월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친북비호 독재정권 타도는 합헌’이라는 글을 보자.
“정권이 나서서 반역과 독재에 대한 국민의 합법적 대응의 길을 막으면, 국가와 헌법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서 그런 정권을 반역 독재정권으로 규정하고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다. 국민 속에는 물론 군인도 포함된다. 이런 저항권은 4·19처럼 물리력을 동원하더라도 합헌….”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특유의 글 솜씨로 반란이나 내란교사죄의 핵심은 교묘히 피해가고 있다 해도, 이 글의 요지가 군사쿠데타를 노골적으로 주문하는 내용임을 눈치채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건전한 판단력과 상식을 갖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시민이라면, 이렇듯 비정상적인 궤변에는 코웃음을 치고 흘리거나, 혹은 헌정파괴 교사에 가까운 위험하고 부당한 발상이라 규탄하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가 말하는 ‘반역’과 ‘독재정권’ 같은 말에는 아마도 자기들만이 알 수 있는 어떤 다른 의미가 들어 있는 모양이다. 그 개념의 질곡에 지나치게 깊이 빠져 다른 사람들과 의미 있는 의사소통이 가능할지 의심스러운 이들에게 측은한 마음이 든다(필자가 북한 사람들을 동정하는 까닭과 이들을 동정하는 까닭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사실은 정말 아이러니다).
높은 시민의식 수준과 고도로 정보화된 열린 사회의 특징을 생각하면, 이러한 선동에 솔깃해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잘 안다. 다만 군 간부 출신 예비역 대다수가 그러한 비합리적인 선동을 맹신하며 극우세력의 사수대원을 자임하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다.
지난 3월30일에는 모 대학의 교수가 주로 예비역 고급 간부들이 모이는 해양연구소(이 연구소의 소장은 예비역 제독이다) 주최 조찬강연에서 “현 시국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국민들이 한시 바삐 이 현실이 혁명상황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하는 것”이라며 “정당한 절차를 밟아 성립한 좌익정권을 타도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복원하는 방법에는 군부 쿠데타말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 이해될 것”(4월1일자 연합뉴스 기사 인용)이라며 말꼬리를 살짝 흐리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상 군사반란을 종용하는 이런 선동에 대해 그 자리에 모인 예비역 간부들 가운데 “도대체 군을 무엇으로 보느냐”고 따끔하게 질책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고 하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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