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난 6월, 그야말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다. 이 자체가 세계적인 뉴스거리거니와 첫 만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합의를 도출해낸 성과도 돋보였던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의외였던 사건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남한 사회의 반응이다.
1970년대 초반 그의 존재가 전면에 부상한 이후 30년 동안 줄곧 반공 드라마 따위를 통해 ‘인격 파탄자’쯤으로 알려진 이외에 그에 관한 다른 정보를 전혀 접할 수 없는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거부감은커녕 오히려 호의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름하여 ‘김정일 신드롬’. 캐릭터 상품이 출현하고, 그가 입었던 재킷이 불티나게 팔리기도 했으며, 거침없는 말투나 단숨에 술잔을 비우는 광경이 화제로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그저 교묘한 이미지 포장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경계의 시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건 오히려 본의 아니게 비난이라기보다는 칭찬에 가까운 주장으로 여겨졌다. 그 모든 것이 연기에 불과하다면, 그건 그만큼 그가 대단히 세련된 정치적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니 어쨌든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의 ‘인격 파탄자’가 아님은 물론 뛰어난 정치 지도자라는 걸 인정하는 셈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여전히 현행법상으로는 ‘반국가단체의 수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남북정상회담 이후 야당 의원조차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를 제기했지만, 어찌 됐든 국가보안법 폐지까지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저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의 축제 분위기에 들떠 엄연히 존재하는 국가보안법을 순간적으로나마 잊었던 것인가. 대답은 잠시 보류해두자.
하루아침에 찾아온 해빙
그로부터 정확히 두 달 후, 이산가족 교환 방문과 상봉이 있었다. 거기에는 훨씬 더 구체화된 충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간의 대화가 전국으로 생방송되는 가운데, 50년 만에 만난 아들을 북에 남겨두고 돌아와야 하는 남쪽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열심히 살라는 의례적인 당부 끝에 “장군님한테도 충성하고…”라는 말을 덧붙인다.
아무리 방북 전 사전 교육을 통해 불필요하게 북쪽 사람들을 자극하는 일이 없도록 ‘그들의 체제를 인정하라’는 내용이 전달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까지는 시쳇말로 이만저만한 ‘오버’가 아닐 수 없었다. 북을 자극하지 않는 것까지는 좋다지만 오히려 남쪽에서 보수적인 북한관을 고수하는 이들을 자극할 우려가 있는 아찔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 충격적인 발언은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 달 남짓이 지났다. 영화 ‘JSA’. 현실이 아닌 허구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스크린 속 북한 병사에게서 가슴이 찡하도록 진한 인간적 정취를 경험한다. 그러나 이것은 허구이기 때문에라도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반공 영화’의 메시지에 충실했음에도 단지 북한군이 인간적으로 묘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수난을 당한 영화가 한두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극명한 예로 이만희 감독의 ‘7인의 여포로’는 끝내 개봉조차 할 수 없었으며, 이감독 자신도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겪어야 했다.
‘JSA’는 불과 1년 전 ‘쉬리’가 세웠던 흥행 기록을 경신하며 또 하나의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쉬리’의 기념비적인 기록은 한국 영화산업의 가능성을 보여준 동시에, 어느 평론가가 “(흥행 성공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환상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는 위험을 경고했을 만큼 일반화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JSA’가 그 기록들을 하나하나 깨고 있는 것이다.
추석 연휴를 끼고 개봉돼 첫 주말 최다 관객 동원(서울 9만명)의 기록을 세우며 돌풍을 예고한 ‘JSA’는 지난해 설 연휴 때 개봉한 ‘쉬리’의 기록(5일간 서울 22만명)을 두 배 가까이(서울 42만명) 앞지르며 불과 7일(‘쉬리’는 9일) 만에 전국에서 100만명의 관객을 끌어모았다. 서울 관객이 100만명을 넘어서는 데 걸린 기간은 불과 15일(‘쉬리’ 21일). 또 개봉 둘째 주말에는 첫 주말보다도 많은 관객(서울 21만3000명)이 드는 보기 드문 이변을 연출하며 외화 ‘미션 임파서블2’가 보유하고 있던 주말 관객 최다 동원 기록(서울 19만5000명)을 깨며 기염을 토했다. 그래서인지 ‘쉬리’가 세운 ‘전국 580만’의 대기록을 깰 수 있을 것인지가 벌써부터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영화 흥행에 뒤따르게 마련인 부수적인 효과도 만만치 않다. ‘쉬리’의 성공에 힘입어 ‘키싱구라미’라는 물고기 기르기가 유행된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또 제주도의 어느 호텔에서는 이 영화를 촬영한 방과 벤치를 관광상품으로 개발하기도 했다. ‘JSA’도 이에 뒤질세라 숱한 화제를 만들고 있다. 지포 라이터가 불티나게 팔리는가 하면, 초코파이의 판매량이 영화 개봉 전보다 하루 평균 2000상자(19만2000개)가 더 늘어나 제과회사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고, 영화 전편에 흐르는 ‘부치지 않은 편지’를 수록한 가수 고 김광석의 앨범도 평소에 비해 2배 가량 더 팔린다고 한다.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앨범은 영화 개봉 열흘 만에 3만장 이상 팔려나간 것으로 발표되었다.
한국 영화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쉬리’와 그 신화를 보란 듯이 재연하고 있는 ‘JSA’. 이 두 영화는 흥미롭게도 모두 남북의 적대적 대치상황을 주된 소재로 삼고 있다. 물론 남북의 대치상황이라는 소재만으로는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다. 정작 흥행 돌풍을 유도한 새로움은 이 닳고닳은 뻔한 소재에 접근하는 방식에 있다.
‘쉬리’는 북의 특수공작원과 남의 정보요원 사이의 비극적 사랑이 주는 감동을, 무력을 통해 남북 문제를 해결하려는 북한 특수부대의 비인간성과 극적으로 대비시킴으로써 화해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대북 인식 면에서는 획기적인 진전으로 평가할 만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총질을 해대는 테러 집단이, 북한 정권의 지시에 의해 움직인 것이 아니라 남한과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데 불만을 품은 이탈세력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묘사되었다는 사실에서 변화의 기미는 분명하게 감지된다. 그 전까지라면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설정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어쩌면 오히려 북한 정권을 정면으로 겨누지 않는다는 것 자체를 불온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쉬리’는 세련된 반공영화
‘쉬리’의 대북 인식은 그런 점에서 매우 양면적이다. 우선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국가보안법적 시각에서 보자면, 남북 정상이 동석한 가운데 진행되는 축구 경기나 그러한 화해분위기를 무장 테러를 통해 방해하려는 이탈세력이라는 설정은 매우 불온한 상상력이다. 지금까지의 반공교육에 따르자면 북한 체제는 ‘정치적 이견을 용납하지 않는’ 폐쇄 사회이며, 모든 일이 ‘수령님’의 한 마디에 좌지우지되며, 모든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전체주의 덩어리였다. 따라서 서울을 방문한 북한의 최고 지도자를 제거하려는 체제 불만세력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 불만의 이유라는 것도 북한 정권이 남한과 화해와 협력을 추구한다는 것인데, 이것도 ‘북한 정권은 전쟁 미치광이’라는 반공교육에 대한 심각한 배반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정반대의 평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비록 이탈세력으로 설정되었다고는 하지만, 박무영(최민식)이라는 캐릭터는 기존의 반공영화에서 보아오던 북한군의 모습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혹 그것은 대북 인식과는 무관하게 그저 할리우드 영화 따위에서 익히 보아오던 반사회적 테러리스트의 일반적인 성격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일개 테러리스트 이전에 ‘북한 사람’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평화를 파괴하려는 무장 테러리스트는 왜 꼭 북에서 와야만 하는가. 주로 할리우드 영화들이 보여준 테러 집단의 이미지 역시 그다지 믿을 만한 것은 못 된다. 똑같은 질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들은 왜 꼭 공산권이 아니면 아랍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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