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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안 드림을 넘어서

오스트레일리안 드림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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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4월

누구나 아침엔 막연하나마 기대감이 찾아들게 마련이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거나 햇살이 쨍하거나. 유난히 밝은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운 4월 어느 날, 아침신문을 훑어보던 나는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호주 사업이민 모집’.

“바로 이거구나!”

심호흡을 내뱉으며 나도 모르게 낸 소리다. 8년이나 기다려 형제초청 미국이민을 수속중이던 나는 그날로 미국을 포기하고 호주로 급선회했다.

74년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2등 기관사로 승선했다. 첫 기항지는 시드니에서 200km 떨어진 뉴캐슬이었다. 부두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석 달이나 그곳에 정박해 있는 동안, 나는 호주가 어떤 나라이고 호주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73년에 백호주의를 포기한 나라, 스위스와 국민소득 선두다툼을 벌이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회보장제도가 완벽하게 정비된 나라. 남한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인구가 그 80배가 넘는 땅덩이에서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동물과 자연을 인간처럼 사랑하며 살아가는 나라.

더구나 선진 민주주의 국가!

그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가슴 설레는 말이 또 있었을까. 유신헌법이 서슬도 퍼렇게 버티고 있고 육영수 여사가 저격되던 그 무렵의 우리 상황과 비교한다면 호주는 말 그대로 별천지였다.

툭 하면 시위대의 투석과 전경들의 최류탄으로 도심이 막혀버리는 길 한복판에 서서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못하는 내 비겁에 절망해야 했고 어느 특정학교 동창 모임을 방불케 하는 국무위원 명단이 발표될 때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백성일 뿐이라는 주제파악을 하느라 한동안 애를 먹어야 했다.

나는 8년간의 해상생활 끝에 강남에 아파트 한 채를 마련했다. 그것도 1년 만에 귀국하는 수출선에 고용돼 목숨을 내걸고 파도와 싸운 끝에. 내 집을 가졌다고 우쭐대다가 공무원으로 출발한 친구가 바로 앞 동에 더 큰 평수의 집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낀 것은 허탈감이 아니었다. 성실이나 노력은 결코 장래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한국적 씁쓸함이었다.

테트라 팩 엔지니어로 매주 이용하는 고속도로에선 교통경찰관이 길목을 지키면서 벌금을 받았다. 자식의 장래를 위해 허리가 휘어지는 고통도 마다않고 지불한 엄청난 과외비, 담임선생에게 꼬박꼬박 내민 봉투는 아내와 내가 모르고 살던 추한 점을 하나씩 들춰내는 꼴이었다.

언젠가 자식들이 ‘왜 남들처럼 큰 평수에 고급차도 굴리지 못하고 고액과외도 시켜주지 못하면서 절약만 가르치려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것을 아비의 무능력 탓이라고 일러주는 대신 한국의 사회구조적 모순 때문이라고 변명할까봐 두려웠다.

내가 태어난 땅, 온전한 인간으로 품어주기보다 부딪치며 타협하고 살아야 할 일상의 염증으로 원인 모를 아픔을 지불해야 하는 땅, 내일의 꿈과 희망을 붙잡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결실보다 불필요한 이자 상환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하는 땅, 그래서 나는 뿌리 박고 악착같이 살기보다 내 땅을 사랑할 수 없는 부유물일 뿐인지 몰랐다.

중학교 때부터 서부영화라면 빼놓지 않고 몰래 보았던 나는 그때부터 서구문명을 동경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거기에다 해양대학을 졸업한 후 70년대의 한국 상황은 선진국 항구를 드나들며 이민이라는 ‘상상임신’으로 헛배를 실컷 불려놓고 출산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나도 제대로 살아보고 자식에게도 나은 터전을 마련해주고픈 욕구가 절실했다.

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1년 반 만에 지루한 이민수속을 끝냈다. 불과 서너 달 후에 있을 부장 진급을 앞두고 8년을 근무한 회사를 그만두었다. 정든 아파트와 몇 년 뒤면 값이 뛸 것이 확실한 땅도 헐값에 처분했다.

해외 송금용 자금출처 확인 서류를 세무서에 제출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처리기한을 몇 차례 넘기고도 발급받을 수 없었다. 담당자는 요건을 설명하며 특별한 지적 없이 헛걸음만 시켰다.

“당신은 이민 잘 가는 거야. 그렇게 순진해서 어떻게 살겠어…. 서류철에 5만원만 끼워봐. 당장 나올 테니.”

나와 함께 이민을 신청했던 친구가 핀잔을 준 말이다. 인지대만 갖고 대한민국의 세무서원에게 자금출처를 확인받을 수 있다고 믿은 내 발상이 한심하다는 설명이었다. 친구 말은 사실이었다.

이마엔 땀이 흐르고 콧등이 시큰했다. 그래도 한번쯤 망설여보고 싶었는데…. 내 나라를 버리고 가는 내 모습을 조금은 부끄럽게 여기고 싶었는데…. 그러나 그 순간 나를 사로잡은 것은 고작 5만원에 나를 버리는 내 나라에 대한 감상이었다.

드디어 나는 간다. 나를 낳아준 땅을 버리고 내가 선택한 새로운 땅을 찾아. 그러나 전 재산을 송금하고 손바닥만한 영수증을 받아쥔 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토록 갈구하던 새로운 삶을 찾아간다지만 이제 막 사춘기로 접어든 아들이 걸렸다. 호주에 가서 무얼 해먹고 살 것인가? 나는 자식의 미래를 혼자서 결정할 전권이라도 부여받았단 말인가?

이 삶 저 삶 비교하다 망설이면 그냥 주저앉고 만다는 것이 내 지론이지만, 나는 밤새도록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두 삶을 저울질했다.



모든 것이 정반대인 나라

90년 1월 말 나는 가족과 함께 호주 시드니에 도착했다.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이민 왔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지만 한국과 정반대인 문화와 부딪치는 일상의 생소함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전기는 밑으로 내려야 켜졌고, 남향집 대신 북향집, 날씨가 더우면 창문을 여는 대신 더운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게 꼭꼭 닫아야 하는 기후, 예금을 권유하기보다 자기 은행돈을 대출해가라고 선전공세를 펴는 나라, 그리고 무엇보다 오른쪽 운전석에 앉아 차를 몰아야 하는 혼란이 나를 괴롭혔다.

학군에 최우선을 두고 북부 타라무라에 단독주택을 얻었다. 월세 1500달러. 금요일까지 근무하고 바로 이튿날 곧바로 이민길에 올랐던 나는 얼마간 한가하게 쉬겠다던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짐도 풀지 못한 채 개학에 맞춰 두 아이를 입학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아들은 중학교 1학년, 딸은 초등학교 5학년. 입학수속은 여권의 생년월일과 이름 확인만으로 간단히 끝났다. 영어라곤 한 마디도 모르는 그들의 수학능력이 염려되었지만, 딸은 일주일에 이틀씩 특별교육을 받았고, 아들은 비영어권 학생들이 거쳐가는 학교에서 기초를 쌓은 뒤 자기 학군에 배정될 예정이었다.

광대한 호주는 도시 자체가 자동차 문화가 전제돼 있는 나라다. 딸이 다니는 학교는 걸어다닐 거리였으나 아들은 차로 통학시켜야 했다.

나는 차에 많은 돈을 들일 생각이 없었다. 고급차라 해서 규정 속도를 넘어서까지 안전이 보장되고 스피드건이 눈감아 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결국 나는 망설임 없이 지난해 모델 도요타 캠리 중 기본 사양만 갖춘 것을 2만 달러에 샀다. 한국에서 200만 원짜리 중고차를 5년이나 몰고 다니던 내가 호주에 왔다고 새 차를 사느라 대단한 출혈을 한 셈이다.

호주는 대부분의 외국 운전면허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과 반대인 왼쪽 차선 운전은 자칫 혼동하기 쉬웠고, 불규칙적인 곡선 배열의 도로는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겁을 주었다. 또 다른 특징은 교차로에서 우선 차선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자기가 우선이면 교차로나 로터리라고 주위를 살피거나 속도를 낮추는 법이 없다. 이런 낯선 규칙에 익숙지 못한 나는 우선인 줄 알고 진행했다가 다른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고 타이어 타는 냄새가 진동할 때 온몸에서 식은땀이 솟곤 했다.

그토록 기대했던 이민이었지만 사글셋집은 불편했다. 복덕방 직원이 가끔 정원과 잔디를 점검하며 잔소리를 늘어놓을 때의 언짢은 기분은 내 인내심을 시험하곤 했다. 매달 지불하는 1500달러의 방세도 큰 부담이었다.

우선 집을 사야 했다. 한국인에게 집은 거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소유에 대한 집착 못지않게 부의 상징이고 재산 증식의 훌륭한 수단이다. 그러나 호주는 달랐다. 부의 상징일 수는 있어도 재산 증식과는 상관이 없었다. 물가 상승률을 밑도는 집값은 물론 등기세, 복덕방 비용 등이 엄청나 오히려 손해보기 십상이었다.

중개인은 먼저 구입한 사업 이민자들의 예를 들며 40만~50만 달러 가격대의 집을 권유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30만 달러 이내의 지출을 결정해놓았다. 우선 고려한 것은 좋은 학군과 점점 증가하는 도난 범죄에서 자유로운 지역이지 비싼 집은 아니었다.

경험 삼아 가격대가 맞는 경매에 참가했다. 시내 중심가 경매장엔 60석 좌석이 꽉 차 있었다. 불경기탓인지 첫째 둘째 매물은 유찰됐다. 셋째가 내가 사려는 매물이었다.

“25만 달러.”

경매인의 구성진 리듬 사이로 매수 희망자가 손을 들고 가격을 높였다. 27만5000달러에서 더 이상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경매인의 목소리가 애절해지기 시작했다.

“28만 달러.”

한번에 5000달러를 높여 내가 부른 가격이다. 계획했던 액수보다 낮아 망설이지 않고 불렀다. 경매인은 신이 나 내 호가를 되풀이하며 더 높은 매수자를 찾았다.

“28만 달러 한번이요.”

그 목소리가 그렇게 차분할 수 없었다.

“두 번이요.”

이제 한 번만 더 부르면 나는 경락자가 된다. 숨이 가빠질 만큼 긴장되었다.

‘28만 1000달러.”

뒤쪽에서 누군가가 호가를 높였다. 순간 나는 겨우 1000달러 때문에 마음에 드는 집을 살 것인지 포기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경매인이 호가를 구성지게 되풀이 부르면서 심장 박동마저 빠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흐름을 맞추느라 1000달러가 다시 올랐을 때 나는 망설임을 깨끗이 잊기로 했다. 오기나 분위기에 휩쓸려 한번 정한 가격을 올리는 것이 도무지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경매가는 30만 달러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여기저기서 1000달러씩 올리며 엎치락뒤치락할 때마다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얼른 돌렸다. ‘바람잡이 장난이구나.’ 나는 일어섰다. 밖으로 나오자 앞에서 매수자를 지적하던 중개인이 황급히 뛰어나와 나를 붙들었다.

“최종 경락자가 사정이 있어 포기한답니다. 당신이 경락자요. 호가했던 가격에 사십시요.”

“정말 유치한 장난이오. 난 가겠소.”

“그러면 오늘 나온 매물 3개가 모두 유찰이요. 복덕방 20년에 처음 겪는 불경기라서 사무실 유지도 힘든 형편이오. 이왕 결정했던 가격이니 제발….”

나는 키 큰 백인의 공손하기 이를 데 없는 사과를 받아들여 내 호가대로 샀다. 이민 온 지 두 달 만의 일이었다.

집을 마련한 다음 나는 사업보다 경력과 경험을 살려 구직에 매달렸다. 한국에서는 상선의 기관장이었고 테트라 팩에선 8년간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기계 전기 전자에는 이론과 현장 경험이 16년이나 돼 취직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예견했다.

한국에선 호주 테트라 팩에 추천서를 써주었지만 근무지가 변두리라서 좋은 학군을 포기하고 이사 가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구인광고를 보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정중한 거절 편지뿐이었다. 1차 산업과 3차 산업만 발달했을 뿐 2차 산업이 비어 있는 호주에서 나 같은 생산직 기술자가 설 자리는 좁았다.

호주는 고용과 채용에서 한국과는 구조적으로 판이하다. 일간지와 연방 고용성 그리고 수많은 소수 민족의 언론 매체에 구인광고가 넘쳐 흐른다. 하지만 실업률은 언제나 9%에 육박한다. 고용주는 사람이 없어서 쩔쩔매고 구직자는 실업수당에 의존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기계 부품처럼 맞으면 쉽게 직장을 얻지만 그렇지 않으면 길이 막혀버리는 아우성이라고나 할까.

나는 고급 기술직을 찾을 것이 아니라 생계비만 충당할 정도면 막일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샌드위치 바에서도 한 달 이상의 경험을 요구했고, 슈퍼마켓에 물건을 채우는 야간작업마저 거절당했다.

고용주는 법률이 정하는 급여를 지불하면서 미숙련자를 채용해 손해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또 그들은 항상 전 직장의 추천서를 요구했다. 신원보증이나 재정보증을 요구할 수 없는 사회이고 보면 이해할 수 있지만 갓 이민 온 나에게는 한국에서 가져온 추천서가 있을 뿐이었다.

경력 없이 채용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가령 심야 작업이나 공사장에서 무거운 걸 운반하는 일 등. 그러나 내 체력으론 사흘이 고작이었다.

신출내기라고 골프장 잔디 물 뿌리는 일조차 거절당한 날, 나는 호주에 대한 환상이 확 깨지는 듯했다. 16년이나 쌓아온 경력과 기술을 포기할 때는 애당초 꿈꾸었던 희망의 삶을 어떤 식으로든 붙들어보겠다는 의지에서였다. 그런데 이토록 하찮은 단순노동마저 거절당하다니. 내 생에 가장 쓰라린 좌절감이 엄습했다.

이러자고 이민 왔나. 이런 좌절까지 감수하며 견뎌내야 할 새 삶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뭐 그리 붙잡아야 할 희망이 있다고….

그러나 헤쳐 나가야 할 삶이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나는 판 위를 달리는 말이었다. 호주 사회가 거부하고 새로운 환경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처음 이민 수속을 시작할 때의 나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이런 좌절을 축복의 디딤돌로 디뎌야 했다.

나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속담을 되새겼다. 정부 직업 훈련원인 TAFE에 등록할 계획을 세우고 구직을 포기했다.



무슨 일을 해서라도 생활비를 벌어라

호주에선 기본 생활비가 꽤 든다. 교육비와 통학비 병원비는 무료지만 전기, 전화, 수도, 가스 등 일상에 필요한 기본비용이 많이 든다.

주택은 정기적인 수리가 필요하고, 보험료와 차량 유지비도 큰 부담이다. 결국 이런 공공료나 보험료는 어찌할 수 없고, 절약해도 큰 효과가 나지 않는 빵 한 덩이, 생선 한 마리를 사느냐 마느냐를 오랫동안 계산하는 형편이었다.

편리한 슈퍼마켓 대신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연결되는 플레밍톤 새벽시장에서 토요일마다 식료품을 사 날랐으나 한 달 생활비는 2500달러를 넘어섰다. 설상가상으로 15%에 이르던 예금 이자가 절반으로 떨어져 원금을 빼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다.

곶감 빼먹듯 줄어드는 원금은 사막에서 식수가 말라가듯 줄어들었다. 진달래가 만발한 남반구의 9월 어느 날, 일요일 마감시간을 앞두고 유효기간을 넘기기 직전 아주 싼값에 처분하는 채소와 고기를 사기 위해 슈퍼마켓 ‘울워스’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혹시 전북 이리에서 오신….”

트롤리(슈퍼마켓 운반수레)를 정리하던 젊은이가 모자를 벗고 인사했다.

그는 누군가를 통해 나를 알았다면서 반가워했다. 자기도 이리 출신이며 대학을 졸업하고 어학 연수를 와서 이렇게 일하면서 학비를 충당한다고 했다. 나는 기특하다며 몇 마디 고향 얘기를 하다가 헤어지려는데 그가 한번 찾아 뵙겠다고 했다.

석운이란 그 청년이 찾아온 것은 2주 후였다.

그는 트롤리 운반작업이 힘든 노동인 데 비해 수입이 시원치 않다며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만일 내가 자신에게 청소권을 하나 사준다면 자기가 모든 걸 책임지고 관리할 테니 3만5000달러만 투자하라고 했다. 그러면 매주 700달러씩 벌어주겠다고 말했다.

청소는 특별한 기술이나 큰 자본 또는 영어실력이 없어도 손쉽게 시작할 수 있는 사업이다. 따라서 이민자에겐 생계 수단으로, 유학생에게는 학비를 충당하는 수단으로 안성맞춤이다. 그런데도 내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은 청소라는 선입견보다 불확실한 계약으로 인한 매매 사기나 매니저의 횡포로 자칫 본전도 못 건지고 고생만 실컷 한다는 경험자들의 충고 때문이었다.

내가 이런 우려를 나타내자 석운은 자기가 벌써 2년이나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었고 그런 일은 물정 모르고 쉽게 덤빈 신출내기에게나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불상사라고 말했다. 그는 얼마나 많은 한인이 청소사업에 종사해서 기반을 잡고 성공했는가를 설명하며 안전성을 강조했다. 석운의 말대로라면 난 투자를 해도 떼일 염려가 없고 가끔 매니저를 만나 커피를 마시며 청소 상태를 확인 해주는 것만으로 주 700달러를 벌 수 있다는 얘기였다.

결국 나는 그의 제안을 수락하고 말았다. 40대 초반에 놀고 먹을 수 없다는 조바심, 이자와 원금을 털어서 생활비를 충당할 때의 허탈함을 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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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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