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말
인간의 운명을 예측하는 상수역(象數易) 연구 분야에서 국내 최초로 박사가 탄생했다. 최근 동국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윤태현씨(尹太鉉·52·혜성역학원장)가 그 주인공. 17년간 서울시 공무원으로 재직하며 국내 최초의 역학소설 ‘팔자(八字)’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윤씨의 학위논문은 ‘경방(京房) 역(易)의 연구’. 경방(기원전 77∼37년)은 음양오행으로 인간의 운명 변화를 예측하는 방법을 집대성한 중국 한(漢)나라 초기의 상수 역학자다.
국내에서 주역을 의리역 입장에서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많지만 상수역으로 학위를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오행설 사주 관상 등 상수 역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분야를, 의리역 학자들이 술법 혹은 미신으로 치부해 배척해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윤씨는 상수역으로 학위를 받는 과정에 오해와 편견에 시달렸다고 고백한다. 윤씨가 상수역학이라는 생소한 분야에 도전해 논문을 낸 것은 지난해의 일. 그러나 논문통과가 좌절돼 대폭 수정을 해야 했다. 그러다가 올해 논문심사에서도 심사위원이 3명이나 교체되는 등 진통을 겪으면서 통과됐다.
윤씨는 “기존 학계에서는 주역을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의리학(義理學)만 중시하고 실생활에 더 필요한 운명과 사주팔자 등의 상수학을 천시하고 있는 데 따른 결과”라고 주장하면서 “상수역은 응용 역학으로 귀납적이나 통계학적으로 충분히 증명될 수 있으며, 학계에서 이를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나도 팔자대로 살아”
윤씨의 운명학에 대한 연구는 그 개인사적 뿌리가 깊다. 그가 사주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충남대 1년생이던 68년 친구들과 계룡산에 놀러갔다가 그곳의 사찰에서 한 스님을 만나 우연히 ‘명리’라는 책을 접하면서부터. 그는 사주팔자를 풀이한 이 책에 푹 빠져 들었다.
그는 대학 졸업 후에도 전국의 유명하다는 역학가를 찾아다니면서 ‘수련’에 들어갔다. 이름난 정치가나 군인들의 사주를 애써 입수했고 지나가던 거지에게 돈을 주고 사주를 사서는 분석하고 연구했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해 대학졸업 후 잠시 학원강사를 하다 서울시 7급 공무원으로 채용돼 서울시청에 몸담았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윤씨는 재미삼아 동료들의 사주를 봐주기 시작했다. 윤씨의 풀이가 신통하게 맞아떨어지자 갖가지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윤씨는 본업보다는 곧 ‘인생 상담자’로 유명해졌다.
그러다가 93년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공무원 생활을 청산, 본격적으로 운명학 연구의 길로 들어섰다. 이 행동을 두고 그 자신은 ‘팔자소관’ 이라고 말한다.
“내 사주에는 문성(文星)이 들어 있어서, 문서와 글을 다루는 교사·공무원·작가가 적합한데 이 모든 것을 다 거쳤으니 이것을 보더라도 사주가 맞는 것 아닙니까.”
사실 그가 본격적인 역학의 길로 들어선 데는 계기가 있었다. 사주와 주역을 공부하면서 그가 늘 궁금하게 여기던 것은 주역에는 상괘(上卦)가 8, 하괘(下卦)가 8, 변효(變爻)가 6 해서 총 384수(8×8×6=384)가 있는데 비해, 토정 이지함 선생이 썼다고 전해지는 ‘토정비결’에는 왜 144수(8×6×3=144)밖에 없느냐는 것이었다.
의문에 사로잡혀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충남보령에 있는 토정의 묘소에 참배하고 잠이 들었다. 이때 믿어지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토정이 꿈에 나타나 그에게 ‘대동야승’을 보라고 권유한 것이다. 잠에서 깬 그는 바로 그 책을 찾아 읽었다. 거기에는 토정에 관한 비화인 ‘청홍도 사건’이 언급돼 있었고, 그는 마침내 비밀을 풀어냈다.
“정초에 신수를 보는 ‘토정비결’은 사실 토정이 지은 책이 아닙니다. 토정 사후에 누군가가 지은, 주역을 해설한 것에 지나지 않는 책인데 천문과 지리와 복서에 뛰어났던 토정의 이름을 빌려 유포한 것입니다.
토정이 살던 시대의 생활풍습을 기록한 ‘동도잡기(東都雜記)’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그 시대에 정초가 되면 명리학(사주학)인 오행으로 점을 쳤다는 얘기는 있으나 ‘토정비결’로 1년 신수를 보았다는 기록은 없어요. 그러다가 토정 사후 200여년이 지나서야 정초가 되면 ‘토정비결’로 한해의 운수를 점쳤다는 기록이 나와요. 이를 보아도 ‘토정비결’이 토정의 저서가 아님은 분명하지요.”
토정을 스승으로 삼아
윤씨는 토정이 직접 저술한 책은 ‘토정가장결’과 ‘월영도’ 뿐이라고 말한다. 병란 등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두고보라고 지은 ‘토정가장결’은 윤씨가 이미 해석한 바 있다. 또 주역과 홍연진결을 종합한 ‘월영도’는 미래를 아는 책 중에서 최고수준이지만 푸는 방법이 어려워 보통사람은 접근조차 할 수 없다는 게 그의 평. 시중에 나도는 ‘토정비결’은 토정의 ‘월영도’를 모방한 주역서를 만들어 토정의 이름을 가탁했을 개연성이 크다는 게 결론이다.
아무튼 윤씨의 토정선생에 대한 애정은 신앙에 가깝다. 동국대에서 석사 과정을 밟을 때도 ‘토정의 사회개혁사상에 관한 연구’로 학위를 취득했을 정도다. 그리고 그의 사무실(02-707-3488) 역시 토정이 말년에 지냈다는 마포에 자리잡고 있다.
그는 역학을 단지 점치는 기술이라거나 비과학적인 술수로 비난하면 참지 못한다. 그러나 무속인들이 횡액을 막아준다며 부적을 쓰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눈살을 찌푸린다.
토정선생의 ‘적선사상’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그는 사주풀이를 즐긴다. 그간 윤씨의 고객은 줄잡아도 5만여명. 국회의원에서 시 고위간부까지 유명인도 수두룩하다.
그는 역학가로서, 사주를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지만 사주에만 기대는 것은 금물이라는 점도 빼놓지 않고 말한다.
“좋은 사주를 타고나도 배움이 없거나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윤씨는 각고의 노력 끝에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상수역학 연구에 대한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고 있다. 조만간 홍콩, 대만 등지에서 유행하는 ‘철판신수(鐵板身數)’가 어떤 역학체계인지 확인해보기 위해 홍콩으로 떠날 예정이다.
‘신동아’는 학문적 태도로 역학에 접근하고 있는 윤씨에게 사주 역학에 대한 올바른 정보와 접근 태도를 공개해달라고 부탁했다. 독자들이 일상사에서 궁금하게 여길 내용들을 모아 ‘문답 형식’으로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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